박팽년과 순천박씨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본관은 순천이며 형조판서 박중림(朴中林)의 아들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질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 가마귀 눈비 마자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 박팽년의 이 시는 단종에 대한 그리움의 시조다.
단종 양위 때 순천박씨 후손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사람은 박팽년이다.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박중림은 박팽년, 박대년(朴大年.박팽년의 동생)등 다섯 아들 그리고 세 손자와 함께 처형된다. 박팽년은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박팽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함께 처형되면서 후손이 끊어질 뻔했다. 당시 둘째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으나 나라에서는 사내를 낳으면 죽이라고 했다. 며느리 이씨가 아들을 낳게 되자 여종의 딸과 바꾸어 자손을 보존한다. 아들의 이름도 종이라는 뜻을 가진 박비(朴婢)였다. 성종 즉위 후 박비는 상경하여 자신의 신분을 고하였다. 성종은 특사령을 내리고 이름을 박일산(朴一珊)으로 고쳐준다. 박팽년은 숙종 때 복권되고 영조 때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岡)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좇을손가.”
이 시조는 그의 절개를 나타내는 글이다.
박팽년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글씨에 < 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 >이 있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리는 "묘골마을" 로 흔히 불리며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박씨들의 집성촌이다.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가 낳은 박비(朴婢) 소년의 일화는 유명하며, 간신히 이어진 그 일족이 오늘날의 '묫골박씨'이다.
묘골마을에는 박팽년의 유복손(遺腹孫) 박일산(박비)이 세운 아흔아홉칸 종택이 있다.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하는 태고정(太古亭)은 그에 딸린 정자건물로 1479년에 처음 세워졌다.
구한말까지는 300여호의 집이 꽉 들어차 있었으며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100여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30여호만 남아 있다. 이 마을에는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육신사(六臣祠)가 있다.
도곡재(陶谷齋)는 1778년(정조2) 대사성 박문현이 제택으로 건립한 건물이다. 그 뒤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 도곡재라 했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 손인 가선대부 이조참판 박성수가 1769년(영조45)에 건립한 건물이다. 그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했다. 그 서편에 정각을 세우고 주변에 국화와 연꽃을 심어 정자 이름을 하염정이라 불렀다. 이곳은 한때 드라마 "토지"의 촬영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뒷산 중턱에 낙빈서원이 있다.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 2동 197번지 박팽년선생유허(朴彭年先生遺墟)는 1989년 대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박팽년이 태어난 가양동 더퍼리는 그의 종조와 박씨 집안이 살던 곳이다. 유림들이 박팽년의 유허가 없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1668년(현종 8)에 주춧돌을 모아 비를 세웠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그 후 1672년(현종 12)에 비각을 지어 장절정(壯節亭)이라 하였다. 비각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으나 16대손 박상동(朴尙東)이 중건하였다. 1975년 대전광역시에서 가양동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비각을 중수하여 가양공원으로 정화하였다.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에는 박팽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박팽년사우(朴彭年祠宇)가 있다. 1978년에 충북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된 이곳은 1775년(영조 51)에 창건되고 1968년에 중수하였다. 사당 앞쪽에는 박팽년, 박일산(朴一珊), 박순(朴珣)의 충신 정려문인 솟을삼문의 충신문(忠臣門)이 있다.
순천박씨의 시조 박영규(朴英規)는 고려 개국공신이다. 그의 후손 박란봉이 순천부원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순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는 원래 순천 사람으로 견훤의 사위다. 그는 견훤이 아들 신검과의 불화로 고려 왕건에게 도피하자 고려에 귀순하여 공을 세운다. 그 뒤 박영규는 왕건과 사돈을 맺는다. 큰 딸은 태조의 동산원부인이 되었고 나머지 두 딸은 정종의 문공왕후, 문성왕후가 된다.
1세이며 중시조인 박숙정(朴淑貞)은 고려 때 보문각대제학의 벼슬에 오른다. 충숙왕 13년(1326년)에 국자제주(國子祭酒)로서 관동존무사가 되었다. 고성의 사선정, 강릉의 경호정, 울진의 취운루를 모두 그가 창건했다.
순천박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35명, 상신 1명을 배출했다.
2000년 현재 87,631명이다. 주요파는 ▲원파 ▲문숙공파 ▲군수공파 ▲부정공파 ▲의주목사공파 ▲진사공파 ▲승지공파 ▲경력공파 ▲생원공파 ▲제주목사공파 ▲판관공파 ▲감사공파 ▲충정공파 ▲교리공파 ▲수찬공파 ▲박사공파 ▲검열공파 ▲전직공파 ▲인의공파 ▲부위공파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