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강론 : 최귀동 할아버지의 삶을 본받자>(12.11.일)
1.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은총입니다.” 이것은, 꽃동네 창설자 오웅진 신부님이 1976년 최귀동 할아버지를 만나고 했던 말입니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분의 본래 이름은 ‘경락’이었지만 ‘귀동이’라고 불렸습니다. ‘귀한 집 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당시 할아버지 집안은 읍내에서 잘 사는 편에 들었는데, 할아버지는 일찍부터 예쁜 아내와 결혼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 말, 전쟁준비에 미쳐있던 일본군에게 강제징용을 당한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했고, 북해도까지 끌려가 탄광에서 강제노동했습니다. 의식주가 부족한 강제노동의 고통을 못 견디고 도망쳤지만 철통같은 감시를 피하지 못하고 잡혀서 양말이 다 타도록 전기고문을 당했고, 몽둥이로 수없이 매를 맞아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쓸모없게 되자, 일본군은 주소가 적힌 꼬리표를 할아버지의 등에 달아, 평안북도 신의주로 가는 배로 보냈습니다. 신의주에 버려진 할아버지가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집은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아들의 강제징용에 충격받아 아편중독자가 되어, 집이 망하자 어디로 떠났고, 아내도 망한 집을 유지할 수 없어 떠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무극교 밑으로 갔는데, 그곳은 오래전부터 오갈 데 없는 거지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른 거지들과 함께 살며, 힘없고 병들어 죽어가는 거지들을 위해 밥 동냥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돈, 옷 안 가리는 거지들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남은 밥만 얻으러 다녔습니다. 또 애들이 노는 장소에 버려진 깨진 유리조각을 주워 딴 곳에 버렸습니다. 때때로 동네애들이 할아버지를 넘어뜨리며 놀려도 화내지 않았습니다. 밥 동냥 다닐 때 누가 돈을 주면 받지 않았고, 과일을 주면 애들에게 주라면서 받지 않았습니다. 문 열린 집이 있으면 문을 닫아주고, 떨어진 빨래는 다시 널어줬습니다. 길에서 죽어가는 거지를 보면 업어서, 다리 밑의 움막에 데려가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거지라 부르지 않고 천사라 불렀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살려낸 사람들이 수백 명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1976년 8월 무극성당에 오웅진 신부님이 부임하셨습니다. 부임 한 달 무렵 어느 날, 하루일과를 마친 신부님은 저녁노을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성당 앞에 서 있었는데, 꾸부정한 모습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깡통을 들고 성당을 지나가는 할아버지를 봤습니다. 그 모습에 홀려 꼼짝않고 서 있던 신부님은 할아버지를 따라갔는데, 할아버지가 도착한 곳은 거지들 움막이었고, 신부님도 그 안에 들어가서 정말 기막힌 광경을 봤습니다. 뼈만 앙상한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영양실조로 못 서는 아이가 기어 다녔고, 웬 남자가 퀭한 눈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녀는 폐결핵 환자였고 남자는 남편이었는데, 알콜 중독에 의처증까지 있어 동냥도 못하는 거지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할아버지는 밥을 얻어 먹였습니다. 오 신부님은 옆 움막에서 장님, 절름발이, 정신질환자, 중풍걸린 노인 등 18명이나 되는 거지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무극교 밑에서 살다가 마을사람들한테 쫓겨나 거기 살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신부님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고 계속 되뇌었습니다.
동상으로 얼어터진 발을 회포대 종이와 새끼줄로 칭칭 감고 있던 최귀동 할아버지는 그 몸으로 다른 거지들을 위해 30여 년이나 동냥 다녔는데, 오 신부님도 6.25때 지독한 가난을 겪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내가 그분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가? 건강도 좋고, 신부라는 직책도 있는데!’
다음날, 신부님은 거지들 집을 지으려고 1,300원으로 시멘트를 사고, 다리 밑의 모래를 파서 블록을 찍고, 여러 곳으로 도움을 청하러 다니며, 강론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왕읍이 보잘것없는 마을인 줄 알았는데 최귀동 할아버지가 계신 것을 보니 아주 거룩한 곳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예수님 같아요. 할아버지의 삶에 우리가 기쁨으로 함께 한다면 머지않아 우리나라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귀동이 할아버지를 본받으러 여기로 올 겁니다. 그러니 다 함께 집을 지읍시다.”
집을 짓다가 힘들고 곤란한 상황들이 있었지만, 방 5칸, 부엌 5칸을 완성했고, 1976년 11월 15일, 거지 18명이 그 집에 입주하면서 지금의 꽃동네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입주 걸인 중에 대장이 성당을 들락거리며 신부님을 끈질기게 괴롭혔는데, 거지들을 뺏아간 대가로 돈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이 강연하러 갈 때 그가 나타나,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와 죽겠다고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살려고 한다면 주겠지만 죽으려면 못 주겠다고 하자, 그는 편지봉투 하나를 놓고 가버렸는데, 펴보니 유서였습니다. ‘친애하는 오웅진 신부님. 난 신부님한테 졌습니다. 신부님을 죽이려고 4년간 칼을 품고 다녔는데, 남들이 다 위인이라 해서 못 죽입니다. 사랑의 집 형제들을 잘 돌봐주십시오.’
신부님은 그 글을 읽자마자 그를 쫓아가 “강연 갔다 올 때까지 죽지 말고 기다리고, 살 궁리를 해라.”고 했지만, 강연을 다녀와 보니 이미 약을 먹고 죽어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살릴 수 있던 생명을 떠나보낸 안타까움에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랑의 집이 생기자, 병들고 버림받아 길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던 거지들이 자꾸 찾아와 60명이 되었습니다. 걱정이 없어지자 어떤 거지들은 돈을 달래기도 하고, 술 취해 싸우거나 행패를 부리며 신부님을 괴롭혔지만, 신부님은 무한한 사랑만이 그 문제를 올바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랫동안 거지들과 살다 보니, 신부님은 거지습성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거지는 달랄 줄만 알지, 줄줄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신부님이 청주에 갈 일이 있었는데, 차는 신부님도 모르는 사이에 정반대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노인이 혼수상태로 쓰러져 있길래 그 노인을 급히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옷에 대소변이 다 묻어있었고, 만취되어 차에 구토 냄새가 가득했지만, 참고 기도하며 달리던 중에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늘처럼 즐겁고 기쁜 날이 어디 있느냐! 내 사랑하는 아들을 오신부가 살려주니 참 고맙고 감사하다. 오늘 새로운 계약을 맺겠노라! 앞으로 이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내 이름으로 맞아들여라! 나머지 일은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 그때부터 신부님은 얻어먹을 수 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홍보했고, 전국 각지에서 거지들이 모여들어 요양시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교구장 주교님과 김수환 추기경님에게 도움을 청했고, 드디어 꽃동네가 탄생했습니다. 헌신적인 사랑 때문에 ‘작은 예수’라 불리던 최귀동 할아버지는 1986년 2월 15일 한국 가톨릭 대상을 받았고, 1990년 1월 3일 선종했습니다. 꽃동네 영성은 현대영성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영성입니다. 인류역사상 거지가 거지를 먹여 살린 것은 꽃동네 최귀동 할아버지뿐이었습니다.
2. 오늘 자선주일을 맞이하여 최귀동 할아버지처럼 늘 이웃에게 나누고 베풀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우리 곁에 있는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한 그들을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 보살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