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이은상
- 내 마음 가 있는 그 벗에게
<해설> 1932년 노산 이은상의 첫시조집인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에 실린 시조이다. 1933년 작곡가 김동진(金東振)이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학생시절에 가곡으로작곡하였다.
작가의 실제 고향인 경남 마산 앞바다를 생각하며 지은 노래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이 시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시의 화자는 정말 고향에 가고 싶어하고, 고향 친구들을 보고 싶어하고, 고향을 떠나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고향에서의 근심 없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에서는 특히 파란 바다와 물새로 대표되는 고향의 이미지가 끼끗하고 선명한 느낌이라서, 그만큼 화자나 우리의 현재 삶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그리고 각 연마다 고향에 대한 화자의 소망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러한 표현 역시 화자의 감정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느낌에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시의 아름다움이자 힘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시 해설,인터넷)
* 가고파 꼬부랑길
마산의 대표적인 산동네 추산동과 성호동 골목길의 가고파 꼬부랑길. 꼬부랑길 벽화사업은 마산 돝섬 해안도로에서 문신미술관, 부림시장 구간에 벽화를 그리는 도심재생 사업으로, 마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예술의 옷을 입었다. 그런 가고파 꼬부랑길에는 가고파가 없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이슬 신으셨네…’ 봄처녀를 노래하고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마산 바다를 마음껏 노래한 시인 이은상의 가고파는 어디에도 없다.
마산 상남동에서 태어난 노산 이은상 시인은 ‘가고파’와 더불어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한데…’의 ‘옛 동산에 올라’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라는 ‘동무생각’ 역시 노비산을 노래한 것이다. ‘봄의 교향악’에 나오는 푸른 비단을 깔아 놓은 언덕이란 뜻의 청라언덕이 바로 노비산 기슭이다.
현대인들은 긴장과 욕구 해소를 관광을 통해 얻으려 한다. 가고파는 가고파 꼬부랑길과 더불어 문화의 아이콘이 될 수 있다. 가고파는 가고파 꼬부랑길과 청라언덕을 가고 싶고 오고 싶은 명소로 만들 수 있다. 문화적 가치가 관광객을 통해 이익 창출을 만들어내고 마산지역 경제를 견인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가고파의 애틋한 노랫말은 첫 구절만 불러도 마산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며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그렇게 발이 머무는 곳 가고파이길 빌어본다. (옥영숙/시조시인, 경남일보)
* ‘가고파’는 시인 이은상이 고향인 경남 마산 앞바다를 그리며 지은 시에 1933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이던 김동진이 곡을 붙인 가곡이다.
일제 치하의 세월을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 곡은 단순히 고향을 그리는 향수 이상으로 다가왔고, 많은 이들이 애창하고 찾아 듣는 곡이 됐다. 덕분에 김동진은 일생일대 위기 앞에서 ‘가고파’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평양교향악단의 전신인 중앙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창단하며 지휘자로 활동하던 김동진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12월 임진강을 건너 월남했다. 공산 치하에 염증을 느껴왔고 더 이상은 그 체제하에서 살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월남 중 문제가 생겼다. 검문에 걸린 것이다. 아무런 신분증이 없었던 그는 ‘간첩’으로 의심하는 헌병의 눈초리 앞에서 갑자기 노래를 시작했다. “내 고향 남쪽 바다…”로 시작하는 ‘가고파’였다. 이 곡의 작곡가라고 당당하게 밝히자 헌병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동진은 무사히 풀려났다. (최영옥/음악평론가, 매일경제 '최영옥의 백 투 더 클래식')
<이은상(李殷相): 1903 - 1982 >
* 1903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 호는 노산(鷺山), 필명은 남천(南川).
* 1918년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를 졸업하고,
* 1921년 [아성(我聲)]에 〈혈조(血潮)〉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고,
*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업하다가,
* 1924년 [조선문단]의 창간 무렵에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 1925년 -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부에서 청강하였다.
* 1929 - 1930년 시가 분야에서 민요조의 리듬을 살린 〈새타령>, <매화동(賣花童)>, <조선의 꽃>, <말몰이>, <님 향한 생각이야>, <남산에 올라>, <말노래> 등을 발표하였다.
평론분야에서도 같은 시기에 <청상(靑孀)민요 소고>, <이언(俚諺)의 의의 및 그 형식에 관하여>, <특수 이언과 공통 이언>, <풍수(風水)를 믿던 이들>, <문학상으로 본 조선의 어희(語戱)>, <황진이의 일생과 예술> 등을 발표하였다.
* 1931년 -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新家庭)] 편집인, 조선일보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 1932년 그의 첫 시조집인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을 출간하였다. 이 중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은 시조의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시조집 [노산시조선집](1958), [푸른 하늘의 뜻은](1970)과 마지막 작품집인 [기원(祈願)]으로 발간되었다.
*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 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 경찰서에 유치 중에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에 문학보다는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하였다.
* 1982년 사망하였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노래비’가 세워졌다.
* 저서로는 시문집으로 [노산문선(鷺山文選)], [노산시문선], 수필집으로 [무상(無常)], 사화집으로 [조선사화집(朝鮮史話集)] 과 기행문집 등이 있고, 전기로는 [탐라기행한라산(耽羅紀行漢拏山)], [피어린 육백리], [이충무공일대기(李忠武公一代記)]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 가고파/(테너) 강무림
<경남 마산시 마산역 앞 시문이 훼손된 이은상 시비,시제는 '가고파' >
* 이은상 가고파노래비 VS 마산수호비
경남 창원시 마산역 광장에 설치된 노산(鷺山) 이은상(1903~1982)의 가고파 시비(노래비)와 관련해 철거와 존치를 두고 시민사회단체간 갈등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이은상은 마산 출생의 문학가로 '가고파'와 '옛 동산에 올라' 등으로 잘 알려졌으나 친독재 행적을 두고 논란을 빚고 있다.
지난해 허인수 당시 마산역장의 제안으로 남마산로타리클럽등 국제로타리클럽 산하 마산지역 회원들이 시비 건립을 주관하면서 촉발된 갈등은 노래비 철거를 촉구하던 단체가 노래비 바로 옆에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를 설치하면서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열린사회희망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3·15정신계승 시민단체연대회의와 전국철도노조 부산본부, 민주노총 경남본부 등은 14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마산역 광장에 '한국 민주주의의 요람,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를 설치했다.
이은상 시비 철거 대책위는 "친독재 행각을 통해 평생을 곡학아세로 일관했던 이은상의 실체를 알리고 마산에 민주항쟁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선포하고자 '3·15정신 계승비'를 세웠다"며 "시민들의 성금으로 계승비의 제작이 완료됐다"고 밝혔다.
조각가 이성헌씨가 만든 계승비는 높이 350㎝, 지름 60㎝의 원통형으로 붉게 녹이 슨 강관 끝에는 3·15의거 당시 저항하는 마산시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기둥 한가운데는 민주주의의 싹을 뜻하는 새순과 기둥 아래는 '마산사태' '불합리' '불합법' '불상사' 등의 단어가 조각돼 있다.
이 단어들은 3·15의거를 폄훼한 생전 이은상의 발언이라고 대책위 측은 설명했다.
또 강관 옆의 표지판에는 친독재성 발언이 담긴 생전 이은상의 인터뷰와 기사 등이 적혀있다.
앞서 지난 2월부터 이은상 시비를 두고 건립을 추진한 단체와 철거를 촉구하던 단체들은 대립해왔다. 시비 건립 당시 국제로타리클럽 산하 마산지역 회원들은 "문학적 업적과 친독재 논란은 별개의 문제로 접근할 사안"이라며 "시비 철거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또 "가고파 노래의 외침은 우리 민족정기의 노래"라며 "이은상 선생의 일부분을 가지고 그가 이룩한 문학적 업적 전체를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반면 시비 철거를 촉구하는 단체들은 "이은상이 문학계에 남긴 업적이 적지 않음에도 마산시민이 그를 거부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며 "그는 마산시민의 긍지와 자부심을 짓밟는 행동을 많이 저질렀다"고 반박했다.
이어 "그는 3·15의거를 두고 '무모한 흥분'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 등으로 모독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며 "역사의 고비마다 곳곳에 남긴 그의 매문행위는 후안무치의 표본이자 양심을 판 지성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이후 철거 대책위는 이은상 시비 철거를 요구하며 크레인 등 물리적 방법까지 동원했으나 번번이 가로막혀 무산됐다.
김유정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국장은 "마산역 광장의 이은상 미화석은 겉으로는 가고파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미화로 이어지는 감성적 차원의 또 다른 역사왜곡 시도의 첫걸음"이라며 "특히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엉터리 교과서를 만들고 있는 현재 이은상 미화석 철거 명분은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보루"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이은상 시비 철거 대책위 측은 시비를 마산역 광장에서 철거하면 마산 수호비도 철거하겠다는 뜻을 밝혀 시비를 둘러싼 갈등은 계속될 전망이다. (강성우/기자, 뉴시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마산문학관>
* 이은상문학관 시비
‘내 고향 남쪽 바다/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꿈엔들 잊으리요/그 잔잔한 고향 바다/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가고파라 가고파’. 작곡가 김동진이 곡을 붙여 일제 치하부터 70년이 넘도록 널리 애창되고 있는 이은상의 시조 ‘가고파’의 첫 수다. 이은상이 이 시조를 지은 것은 아직 20대 후반이었던 1930년대 초였다. 그 무렵 그는 동아일보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33년 신문사 주최의 백두산 탐사여행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자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친구 양주동에게 연락해 백두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 들러 해후하기로 약속한다. 이를 계기로 양주동은 특강을 열어 학생들에게 이은상의 시조 ‘가고파’를 가르친다. 그때 그 학교 음악과에 재학 중이던 김동진은 호기심에 그 강의를 듣고 ‘가고파’를 옮겨 적어와 밤새워 곡을 붙인 것이 가곡 ‘가고파’다.
본래 이 작품은 10수였으나 가곡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길어 처음에는 앞의 4수만으로 노래를 완성했다. 73년은 1903년생의 이은상이 고희를, 1913년생의 김동진이 회갑을 맞는 해였다. 그 기념으로 김동진은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가고파’의 5수부터 10수까지를 새로 작곡해 숙명여대 강당에서 발표회를 열었다. 그때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들어 가곡 ‘가고파’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얼마나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실감케 했다.
이은상은 500~600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문학적 업적은 ‘전래의 시조 형식을 현대적 운율로 소화해 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가고파’를 비롯해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생각’ ‘사우’ 등 그의 수많은 작품이 가곡으로 만들어진 것도 그 까닭이다. 아무튼 우리 민족문학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시조가 오늘날까지 연면히 맥을 이어오는 데 있어 그가 이바지한 공로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은상의 그 같은 문학적 공로는 늘 그를 뒤따르는 이런저런 정치적 구설 때문에 힘을 잃곤 했다. 이를테면 일제 때는 친일행위를 했고, 자유당 시절에는 ‘문인 유세단’을 조직해 전국 유세에 나서 부정선거에 동조했으며, 5·16 후에는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기초하는가 하면, 유신정권하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내세워 독재 논리를 정당화했고, 전두환 정권 때는 국정자문위원을 지냈다…는 등 정치적 성향이 짙은 그의 행보에는 항상 눈총이 따랐고 뒷말이 무성했다.
물론 이은상 편의 입장에서는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가령 일제 말기인 43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함흥 감옥에서 복역한 전력이 있으며, 유신 정권 치하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문공부 장관직을 제의했으나 고사했다는 항간의 소문 따위가 그것이다. 전두환 정권 때 국정자문위원이 된 것도 그들의 일방적인 지명에 따른 것인데 왜 지탄받아야 하느냐는 논리다. 특히 그런 식으로 미세한 부분까지 들춰내자면 조그마한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는 것이 이은상 옹호론자들의 반박이었다.
이런 시비가 그의 생전에는 뒷공론으로 뭇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더니 82년 9월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툭하면 이슈화되곤 했다. 사후 30년이 가까워오는 요즘 그의 출생지인 마산의 문화계가 다시금 이은상 문제로 시끄럽다고 한다. ‘미래문화신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노비산 그린공원에 세워진 ‘마산문학관’의 명칭을 둘러싸고 마산 사회가 양쪽으로 갈려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마산문학관’은 99년 건립 계획 수립 당시에는 이 지역 출신인 이은상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딴 ‘노산(鷺山)문학관’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2005년 건물이 완공되면서 이은상의 정치적인 행적을 문제 삼은 시민사회단체의 반대 여론이 들끓게 되자 마산시는 본래 목적과는 달리 마산 출신 등 작고 문인 22명의 문학 유품을 합동 전시하는 ‘마산문학관’으로 개관하게 된 것이다.
최근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마산문인협회가 ‘마산문학관’을 본래의 목적과 취지에 따라 ‘노산문학관’으로 되돌려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라고 한다. 여기에 마산시의회까지 동조하고 나섰지만 시민사회단체도 만만치 않게 ‘불가 운동’을 펼쳐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가고파 문학관’은 어떠냐는 중도 입장의 의견도 귀 기울여 볼 만하다. (정규웅/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경남 마산시 자산동 통일공원 이은상 시비, 시제는 '가고파'>
<1932년 1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가고파'의 원문이다>
* <가고파>의 원문이 '가곺아'인 것을 감안하면 '가고파'의 원문이 현대문법에 맞게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고파' 에서 몇가지 변형된 시구를 살펴본다.
(1) 시제인 '가곺아'는 '가고파'로,
(2) 4연의 '살고지라'는 가곡의 가사인 '살고지고'로 바꾸어 부른다.
(3) 5연의 '이제는 못그런다니'는 '세상일 모르던 날이'로,
(4) 6연의 '내몫엣'는 '내 몫엔'으로 바뀌었으나 '내 몫의" 또는 '내 몫에'가 더 적절한 것 같다. 또한 '되안기자 되안겨'는 '가 안기자 가안겨'로 변형되었다.
(5) 8연의 '죄없은우에'는 '죄없는 몸이'로,
(6) 9연의 '노젓는'은 되례 틀린 문법으로 바뀌어 '노 젖는'이 되었다.
'그물을'은 '그물'로 '을'을 삭제하였다.
작가가 수정을 하였던지, 또는 옮긴이가 실수를 했던 원형의 의도와 감정을 살리면서 가장 적절한 시구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가곡 '가고파'의 가사도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 낙동강/이은상
보아라 가야 신라 빛나는 역사
흐른 듯 잠겨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 줄을
오! 낙동강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