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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지 뵤도인(평등원)
평등원은 후지와라 미치나가
(藤原道長)가 원래 자신의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었으나 그의 아들 후지와라
요리미치(藤原賴通)가 1053년 불교
사원으로 헌납하였다.
봉황당을 중심으로 몇 동의 건물이
흩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는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다.
우지(宇治)는 쿄오토오(京都)의 동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며 우리 나라에도
엽차 애호가들 사이에는 우지차(宇治茶)로
인하여 널리 알려진 곳이다.
후지와라시대 불교의 특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로
불교의 귀족화·세속화 현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귀족 집권층은
자신들이 사후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나 지상에서 누리던 부귀와
아름다운 생활을 영위하게 될 것을
확신하였다. 이 평등원 봉황당 건물
자체가 바로 그와 같은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건물 전면의 폭은 약 48.7m나 되며,
익루의 모서리에는 각각 작은 누각이
세워져 있는데 이와 같은 건축 양식은
중국 당대(唐代) 돈황(敦煌) 벽화에
보이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 장면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일본의 절들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단청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이 건물은
목조 부분을 밝은 주홍빛으로 칠하여
그 화려함을 더해 준다.
▼도톤보리
▷오사카 남쪽에 흐르는 도톤보리 강
주변에 형성된 유흥가다.
꼭 이탈리아 베니치아를 연상케 하는
도톤보리 강을 따라 에비스바시부터
센니치마에 도리까지 500m 가량
이어져 있다.
오사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거리로
하루 종일 맛있는 냄새가 가득한
먹자골목이자, 오락실과 극장이 가득한
환락가다.
저렴한 술집과 포장마차가 즐비하며,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타코야키가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최신 유행 패션이 주를
이루는 거리지만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하여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다양하고 특이한
간판과 네온사인 등이 앞다투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사카 城
오사카에 있는 성.
히메지 성, 구마모토 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名城)' 중 하나이나,
현존하는 오사카 성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복원한 것으로 겉으로만
옛 모습 그대로고 내부는 전기와
수도가 설치된 현대식 건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주했던
城이자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까지는
사실상 일본의 수도 역할을 한 성이기에
일본의 성 중에서도 가장 큰 편이며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만 해도
지칠 수 있다.
오사카 성의 전시 자료에 따르면
현재의 오사카 성이 에도 막부에 의해
축소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오사카 성 부지에는 원래
정토진종(淨土真宗)의 본산지인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가 있었다.
혼간지 세력은 천험의 요새를 구축하고
다이묘(중세 일본의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에 맞먹을 정도로 힘을 키웠으며
잇코잇키를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
10년 동안 이어진 이시야마 전투 끝에
이곳을 내주고 옮겨가는 조건으로
종전에 동의했다. 이 시점에 이시야마
혼간지는 불타 사라진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정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3년 수도 교토의 외항이자 상업
도시인 오사카의 중심부에 거대한 성을
건설하여 자신의 거점이자 히데요시
정권의 수도로 삼았다.
오사카 성 부지는 혼간지가 노부나가에게
10년간 대항할 정도로 지리적으로
유리한 입지였다. 히데요시가 건설한
오사카 성은 지금 남아있는 오사카 성과는
다른 것으로, 훨씬 규모가 큰 성이었다.
대규모의 이중 해자가 성을 보호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매우 뛰어난 위치에 있었는데
북측으로는 요도가와 강, 동쪽으로는
히라노 강, 서쪽에는 해안가와 강 등이
있었기에 요새가 되기 위한 조건은
충분했다. 대군이 올 만한 경로는 평지가
많은 남쪽이었으며 이중으로 만든 해자
때문에 성에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한마디로 정석대로 공략하자니 남쪽 경로
하나 뿐인데 이마저도 해자 때문에
큰 희생을 강요하고 포위하지 않으면
나머지 세 방위에서 지원하기 딱 좋은
지형이다. 그렇다고 포위를 시켜 말려
죽이자니 서쪽은 수군으로 봉쇄해야하고
북쪽과 동쪽에 일부 병력을 할애한 뒤
남쪽으로 총 전력을 투입해야한다.
그렇게 되면 줄어든 병력으로 공세를
가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된다.
더욱이 성을 다스리는 세력은
도요토미 가문이었다.
히데요시는 천하를 얻은 뒤 모은
재산으로 2년은 버틸만한 식량과
병기를 모아 놓았다. 괜히 당대 최고의
요새이자 성이라 불리던 게 아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오사카 성은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요토미가에
충성하는 세력의 본거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가
격돌한 1615년의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오사카 성의 건물들은 도쿠가와 측의
화포 공격 등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성의 바깥 해자는 완전히 매립되었다.
일본 전역에 토목 공사가 성행했던
에도 시대 초기, 에도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오사카 성은 1620년부터 1629년에
걸쳐 재건되었다.
에도 막부 시절 쇼군은 에도에
머물렀으므로 정치 무대에서 오사카가
부각되는 일은 없었다. 19세기에
막부 대신 천황을 받드는 존왕양이파가
서 일본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으면서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조슈 정벌 도중
오사카 성에 머무르다가 사망했으며,
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오사카 성에 잠시 들어온 적도 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재건한 후에도
오사카 성은 여러 번 화재를 겪어
수리해야 했다. 결국 1665년 낙뢰로
인해 천수각이 소실되었다.
그 뒤로는 오랫동안 성이 재건되지
못하다가 근대에 와서 성터에 일본
육군 오사카 조병창과 제4사단의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1931년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철골 콘크리트로 지은 것은 당시의
건축법상 방화, 내진 등을 이유로
목조 건축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수각 부분은 현대 건축에
속한다. 1~4층은 에도 막부 시절의
양식을 따라 벽에 회칠을 했지만
5층은 도요토미 시절의 양식을 따라
검은색과 금색을 둘렀다. 꼭대기 층만
뭔가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1945년 3월 9일에 일어난 도쿄
대공습이 일어난 지 4일 뒤에
오사카에 미 공군이 네이팜탄을
쏟아부어 성도 오사카와 함께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종전 이후에 다시
재건되었다.
지금의 오사카 성 천수각은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실체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엘리베이터까지 들어가 있다.
외관은 화려하지만 실은 4층까지는
도쿠가와 시대, 5층은 도요토미 시대의
천수각으로 혼합하여 복원해
고증오류가 심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외관만 성이고 내부는 현대라고
말한다.
여기는 日本 오사카城
약간 흐린날씨
비가 오는것도 아니고
아니 내리는 것도 아닌
간헐적으로 한방울씩
살며시 옷깃에 저미는
것으로 보아
옛 선조님들이
우리들이 방문하는 모습을 보고
든든한 후손들~~
자랑스러운 나머지
울수도 없고
웃을수도 없고
회환의 눈물방울 흘리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오사카성~~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승전의 요람
오사카 성을 쌓았다면
우리는 그 오사카성을 정복했노라~~
왜놈들 듣거라~~~
오사카성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 목청높여 소리친다~~
대~ 한민국~~~^
대~~한민국~~~~
2023. 11. 13. (월) 오전
日 오사카 성에서
최폴리.....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6~1598)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그의 사후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관백과 천하인의 지위에
올랐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그는 조선을
침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정권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것도 연이어 실패해 자신의
사후에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단초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센코쿠 시대에 가장 출세한 인물로
유명하다. 미천한 출신으로 태어나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관백까지
오른 인물이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어구가 바로
"戦国一の出世頭(전국 최고의 출세
가도를 달린 인물)"일 정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입신출세의
아이콘과도 같은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칭한 태합(타이코)
또한 최하층에서 시작하여 크게
출세한 인물의 대명사 중 하나가
되어 이토 히로부미, 다나카
가쿠에이 등을 '금태합(今太閤,
이마타이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역을 불바다로 만든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따라서 전통적으로 당연히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히데요시에 대해 평가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당장 NHK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 에서 처음으로 임진왜란을
대충으로나마 다루기 시작한 이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일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역으로 한국인들 중에서도
일본사를 접하게 되면서,
임진왜란 전의 히데요시의
입지전적인 활약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등, 그의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 양측에서
조금씩 입체적으로 변하는
중이다.
3박4일
일본여행 마치고
오사카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가는 버스안...
점심식사 하고
면세품 쇼핑한 탓일까??
아님
즐거운 여행 한 탓일까??
활짝 핀 웃음꽃들이
참 예쁘다~~
중국.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일본 음식은 우리 입맛과 비슷하나
한국인 특유의 情 넘치는
풍부함과 넉넉함과 달리
쪼잔한??
일본 문화가 좀 어색하긴 하다
점심 식사중 콩나물 무침 한접시
달라 했더니 3천원 추가다
머 여기서 살것도 아니고
문화가 그렇다는 얘기다
차창 밖 뻥 뚫린 시야
깨끗한 하늘 찬란함은 없지만
고즈넉한 분위기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참 좋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이기에 오늘이 즐겁고
힐링여행 행복한 여행
실감합니다~~
이번
일본여행은 우리 일행 9명 포함
총36명으로 이중 눈에 띄는
가족이 있다
어른은 부모님 같은데
아부지는 휠체어를 타야하고
젊은부부는 아들인지 사위인지
여행때마다 휠체어를 끌고
다닌다
첫날 조금은 궁금했다
아들일까??
사위일까??
우리 일행중
아들일 것이다~~
사위일 것이다~~
하는 의견이 분분
나는 사위라 단정했다~~
왜??
뒤에서 유심히 지켜보니
여자분 2명이 꼭 모녀처럼
다정하고 허물없이 대화하고
꼭 붙어 다니는 것으로 보아
모녀로 단정했다~~~
사위가 장인어른 휠체어를
끌고 가는 것이다
생각했다
여행지가 언덕길이 많아
옆에서 보기만 해도
사위 참 고생이 많구나~~~
생각했다
여행 이틀째...
울 일행 사모들이 단독직입적으로
이들 가족에게 물어보자
아니다 다를까
젊은 부부가 친정부모. 장인장모님
모시고 여행하는 것 이였다
우리네 나이드신 어르신님들~~~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아직도 가부장적 思考에
매몰된 남정네 어르신들이
참 많습니다
시대 변화~~
거부하는 것 보다
스스로 적응
적절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동참하고 시대에 부응하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집밖에 나가면
무조건 고생입니다
고생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떠납니다~~
여행지에서 고생하면서도
모두가 하하호호~~~
즐거워 합니다~~
따스한 情 나눔과 정다움
사랑과 행복
행복은??
노력하는 자만이 쟁취하는
소중한 열매가 아닐까??
나름 생각해 봅니다
사실 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즐기는 것 일본보다
대한민국이 월등 하지만요~~
일본여행 함께한
좋은 사람들
내년 4월
장가계 여행에서 다시금
힐링여행 멋진 여정
만들어 봅시다~~
끊임없이 노력과 열정을
다 하는 것
그것이
人生이 아닐까???
오늘도 멋지게~~
아름답게~~~~
2023. 11. 13. (월) 오후
일본 오사카에서
최폴리~~~
▶epilogue
오늘아침 붉게 떠오른 태양
찬란한 동녘 하늘이
참 아름답습니다~~~
내 나라 나의 조국 땅에서
맞이하는 아침 해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말인가???
어제 저녁 18시 일본 간사이
공항 이륙 20시 인천공항에 도착후
귀가 하면서 도심지를 유심히
살펴 봤습니다~~~
일본의 어두운 밤에 비해
대한민국 밤은 밝고 힘이 넘쳐
났습니다~~~
중학교 땐가??
일본책 빙점??(맛나?)이란
소설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소설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책속
상상 속에 그려지는 북해도의
엄청난 추위와 설경을 맛보기
위해 북해도여행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책속에 지독할 정도로
근검 절약 정신이 묻어있어
그렇구나~~~~
일본이 선진국으로 발전한 배경에는
일본인 특유의 근검절약 정신이
있었구나~~~
이 책속 근검절약 정신이 항상
뇌리에 감돌고 있어
지난날 나의 삶은
이를 실천한 삶이였지 않았나???
가끔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책속 시대 상황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직후
우리나라 보릿고개보다
더 처참하고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이였기에 정신만은
본 받을만한 정신무장 이였지만
경제대국 지위에 오른
지금은 결코 옳은 것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경제대국 일본
모든 것이 어둡고
도로 차량 호텔방 음식점 등등
주변의 모든 것이 작습니다~~
특히,
세련되고 시설 웅장하고 속도감이
번개같은 인천국제공항에 비해
일본 간사이 공항은 거북이 같은
전산망 밀려드는 승객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협소한 시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 할까??
어쩌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아님 그동안 대한민국이 엄청
발전한 탓일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변화를 실감합니다~~~
►화곡역에서 내려 귀가중 늦은시간
콩나물 국밥으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김치가 얼마나 맛 있던가~~~ㅎㅎ
내나라 나의 땅이 이렇게 좋은데......
유대인들이 2천년동안 나라없이
세계 각지에 떠돌면서
(특히 소련에서) 엄청난 핍박을
받아왔고 나치 히틀러는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지금의 유대인들 단결력은
목숨과 같다고 봅니다
우리들 선조님들도
나라 잃은 슬픔에 얼마나
많은 살육과 핍박을 받았고
독립투쟁을 해오지 않았던가??
비록,
美國에 의해 나라를 되찿고
美國에 의해 공산화를 막아냈지만
나라가 없으면 내가 없다고 봅니다~~~
나라를 잃으면
찬란하게 떠오른 태양도
지옥으로 안내하는 저승사자 처럼
보일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理念 성향을 떠나
나라를 위하고
나라를 수호할려는 愛國心은
목숨보다 상위 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은 많은 경험을 쌓고
좋은 점 어렵고 힘들었던 점 불문
삶의 여정에
상당한 에너지를 불어넣고
부정보다 긍정적인 측면이 강해
삶의 질 향상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그것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금상첨화 이겠지요???
오늘 해맑은 아침 햇살처럼
항상 평화롭고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 기원하면서
늘 건강 하소서~~~
2023. 11. 14. (화) 아침
최폴리......
▶대한민국과 일본 비교
(2023년 IMF 발표)
►인구
▷대한민국 5,130만명
▷일본 1억 2,300만명
(일본이 2,39배 많음)
►GDP
▷대한민국 1억 7,000억 달러
▷일본 4조 2,000억 달러
(일본이 2,47배 많음)
►1인당 GDP
▷대한민국 33,100 달러
▷일본 33,900 달러
(1인당 GDP는 비슷함)
►대한민국은 지속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반면 日本은
잃어버린 30년 감안하면
일본이 기술력. 잠재력에서
월등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대한민국은 국방. 안보. 외교.
경제 등 國力이 눈부시게 발전
임진왜란 등 과거처럼 침략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도록
피땀 흘려 노력한 60~80세대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아울러
인구. 국토 면적. 잠재(기술력)
등등에서 월등한 일본과의
지속적 선린 우호 협력관계는
국가안보 및 경제발전 차원에서
필연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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