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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계급에 대한 본인의 고찰
(나의 꿈 자유지상주의를 위하여 이글을 쓴다.)
이재원(2022.7.9. 매우 맑고 덥다.
심심풀이로 쓴 글이니 재미로 읽어 주면 좋겠다.)
(2022년 7월 8일,금요일 오전 11시 30분에 일본의 전 수상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참의원 선거로 나라(奈良)현 나라시 야마토사이다이지 역 앞 로터리 버스정류장 앞 건너편에서 가드레일 안의 가두 길거리 30cm 높이 연단 유세 시작 11시 28분, 2분 후 그 지역에 홀로 거주하는 41세 평범한 청년 야마가미 데쓰야의 7~8m 거리로 연단 후방에서 날아 온, 산탄총 하나 통에 여섯 발들이 두 발 중 첫 발 3초 뒤 마지막으로 이어 발사한 한 방에, 뒤를 돌아 보다가 왼쪽 흉부와 목 등에 집중 산발 저격을 당해 그 자리에서 쓰러진 후 후송된 나라현립 의대병원에서 심폐소생술 등의 치료를 받았으나 심폐정지로, 사망 7분 전에 도착한 부인 아베 아키에 여사가 보는 가운데 피격 당일 오후 5시 3분에 눈을 감고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아베는 나보다 5개월 차이로 한 살 많다. 비교가능 동년배이다. 내가 만약 일본인으로 태어났다면 자위대 간부를 거쳐 우익의 정치인사가 되고 싶다. 당연히 아베처럼 용감하게 신사참배는 간다.
그래도 모든 인간은 생로병사가 있고, 매일 각자의 저녁이 있기 때문에 몸과 달리 정신과 마음이 머뭇거릴 수 있다. 무릇 진정한 정치인은 도덕까지도 생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에 있어서 도덕은 결국 자기 가슴 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일본정치우익인사라면 몸으로라도 일부러 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일본우익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익에도 사랑과 존경이 도덕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껴야 한다. 일본은 우익이 선명히 앞서 존재하는 나라이다. 일본은 자유보다도 우익을 더 사랑하는 나라이다. 일본은 이를 자기네들의 집단 의무로 보고 있다. 일본우익정치인이라면 그 역할을 앞서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해가 다소 난해할지 모르지만 일본국은 우익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우익이 아니면 일본은 북태평양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일본은 우익에서 출발하여 우익으로 결론에 다다러야 한다. 우익이야 말로 일본을 일본답게 꾸민다. 일본의 정치인이 우익이 아니라면 그는 주류의 자리를 우익에게 양보해야 한다. 찬란한 태양의 욱일기인 우익이 일본을 무의식에서 정신적으로 이미 지배한다.
국제 근대화 시기에서 일본이 우익이 되는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라의 위치도 극동변방의 섬나라로, 사무라이 배경의 상층지배 특권층의 필요에 의하여서도 천황을 빌미로 우익이 필요하다. 더 결정적인 것인 것은 일본인들은 타국에 비하여 체격이 왜소하고 체력들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정신적인 면에서도 우익적 무장이 필요하다. 대내정치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우익적 무장자세는 이네들의 전체 생존과 직결된다. 이네들이 북부 태평양을 놓치지 않으려면, 태평양 지배자인 미국과 우방을 맺으며 탈아(脫亞)의 우익으로 모든 것을 무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내외적으로 자기 존재감을 떨칠 수 있다. 천황을 국체의 신(神)적인 빌미로 앞세운 이상 우익은 더더욱 더 필요하다. 그런데 일본군의 태평양 전략사를 보면 이네들의 전투방식은 매우 특이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알아서 도망쳐 주는 중국이나 토탈물량작전개념의 미군과 달리, 본진마저도 당하면서 육박 전진하는 특이한 전술을 매번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집중하여 하긴 하는데 이유와 원인, 목적이 불명하다. 자살적 자살(刺殺的 自殺)로 그냥 하니까 하는 것이다. 그기다 단체로 키가 매우 작고, 왜소하고, 이질 등 풍토병 전염병에 매우 약한 흠이 있다. 믿을 것을 욱일기로 포장한, 신(神,God) 앞에 서면 자랑도 할 수 없는 실체 불명의 우익의 정신뿐이었다. 막대(莫大)해 보여도 한 줌의 재도 없는 꿈 속의 구름이다. 그러하든말든 일본주류정치인이라면 우익의 정신으로 새벽마을청소하는 기분으로 여명(黎明)의 설산 늑대의 혼대(魂帶)로 중무장(重武裝)을 해야 한다. 우익은 그냥 우익이면 된다. 이유와 원인, 목적 등 이런 거는 모조리 다 필요 없다. 우익의 길이 바로 그들의 생계유지용 생업(生業)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어야만 그들이 산다.
중국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층노동자계급의 집단으로 배가 고프고, 누추해도 만사 정신승리의 달인처럼 보인다. 그래도 지대물반(地大物半), 만절필동(萬折必東), 자칭중화(自稱中華)의 정신대국이기 때문에 망하든말든 사상을 선점(先占)하면 매우 유리하다. 내가 만약 중국인이라면 플라톤 철학적 이데아 사회주의를 심화하여 중화의 정치철학으로 고양시켜 놓았으면 한다. 공산사상에 물든 대량의 무지한 중국인민을 위한 첩경이다. 북경대학이나 적어도 중경이나 남경대학의 정치철학교수는 되어야 한다. 오성홍기가 나부끼는 중국은 이게 가능하다. 중국은 선진(先秦)이래 역사는 넘치지만 모조리 소설 삼국지 수준으로 천박하고 또 사회적 공기가 대대로 매우 안 좋아 그만한 인재가 자라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급살(急煞)하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일반철학으로 귀족 보수주의를 지향한 칸트나 목적론적 자유주의를 지향한 헤겔이나, 대하드라마의 도전과 응전의 토인비적인 그런 기념비적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선진서구에 비하여 철학에서 원초적으로 밀리니 사상에서도 지고 과학에서도 마저도 미인계 등을 이용하여 설계도를 훔쳐 오는 등 온갖 작통뿐이다. 중국은 한국과는 인류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가깝지만 먼 국가로 요주의 대상국이지만 그래도 동아시아의 자존심인 것 분명하다.
모두 다한 중국 16억 인구가 보기엔 멀쩡해도 미처 자라지 못한 뇌과학 정신적 소인(小人)으로 사실상의 맹점 돌대가리인 것이다. 크고 작은 전함이 수천척이 있어도 모조리 동지나해에서만 미국전함의 노골적 감시 하에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심지어 같이 열을 지어 잠시 함께 다니기도 한다. 아시아의 창피이다. 태평양은 공해로 미국은 주로 하와이 동쪽에서만 활약해야 정상이다. 여기에 삼면의 근해에서만 움직이는 한국해군과 서북부 태평양을 일정부분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딜레마가 있다. 그래서 태평양 북부는 한국과 일본, 미국이 자유를 기치로 함께 합동으로 연합하여 지켜야 한다. 역사가 요동을 쳐도 한국은 한국이고, 미국은 미국이고, 일본은 일본이고, 중국은 중국인 것이다. 마치 백날 천날 하루 종일 대를 이어 기도해 봤자, 생리와 유전처럼 남녀를 바꿀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한국은 아차 하는 순간, 사상에서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다소 있다. 한국은 구성원들이 투쟁하여 스스로 자유 독립한 것이 아니고 운 좋게 자유 미국의 도움으로 1945년 해방 후 서구에서 이미 완성된 자유를 공짜로 거저 받아 1948년 건국 후 줄곧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영위하고 있지만, 자유의 태생적인 바탕인 철학적 개인주의가 원래부터 척박하고, 더욱이 자유(自由)에 대한 소인(素因)이 결핍하여 서민과 지식인을 막론하고 스스로 자생적 친북간첩도 수두룩하다. 한때 86그룹 종북주사파들은 교도소에서조차도 공동 식사 전에 김일성을 향하여 북쪽으로 묵념기도까지 했다고 한다. 86그룹 종북주사파들은 상대가 고졸이면 인간 이하로 본다. 절대 같이 차(茶, tea)를 마시거나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다. 같은 4년제 대학도 전국 6위 정도는 되어야 그들의 대화상대자가 된다.
심지어 제19대 대통령이었던 문재인마저도 휴전선 북쪽 함경도에 고향을 둔 월남자 가족답게 헌법에 주어진 자유도 없애려고 그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버젓이 있으면서도, 동료 전우까지 미제 간첩으로 몰아 고문 후 대량으로 죽인 북괴 공산집단 수뇌 김일성 추종자 신영복을 정신적 사부로 존경한다면서 좌익 정해구 등을 시켜 헌법에서 자유를 지우려고 개헌 초안을 짜게 하는 등 스스로 공산 앞잡이 노릇을 하며 크게 발버둥을 친 적이 있다. 좌익들이 정치 수뇌부 권력을 지니 대한민국이 통째로 아슬아슬했다. 마치 한국이 폭발직전의 거대한 원폭 앞에 홀로 세워 진 유치원급 어린 아이 같은 기분이었다. 시민적 자유나 개인적 자유가 민중의 어떤 소망과 의지를 타고 민초들의 고통을 감수하고 백성이란 의미를 넘어 전체 자유의 시민적 단계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무릎쓰고 왔는지 대충이라도 뭔지 정확히 본능적이라도 아는 보통의 시민이라면 이건 그 누구라도 인간이 할 정상적인 짓이 아니다.
이런 짓은 구한말 나라가 극빈하고 백성들이 더럽고 피폐하다고 임금인 고종이 그 자신이 타의든 자의든 매우 운 좋게 역사적 황제에 등극하여 세계만방에 고(告)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왕(王)인 자신부터 일제보장의 후손 대대로의 일본귀족 조선왕이 되어 국가양도문서에 먼저 국장을 찍은 후 주변 측근 대신들도 평생 식량과 세습 작위를 준다면서 같이 연서를 하게 하여, 무지한 백성출신의 동학잔당 일진회 등과 함께 단체로 일제(日帝)에 매국노가 된 작자들의 혈통 후손답다. 표면적으론 매우 설치고, 제법 용감해 보이는데, 저장한 전투 자원의 비상 여분이 단기전에 그치고, 나중에 보면 약골들만 전선에 배치되어 있다. 해외에 일단 나가면 애국을 노래부르지만 유사시엔 안 들어 온다. 하는 수 없이 군필을 하며, 영재들은 어찌하든 군면제를 노리고, 성공하면 평생 자랑으로 여긴다. 군면제를 받아 너무 기뻤다는 소리를 막 해도 어떠한 불이익도 없다. 대통령을 하는데도 전혀 지장(支障)이 없다. 사방이 전운(戰雲)으로 불안해도 태평성대의 나라다. 일면 의식에서 진화가 덜 된 징표가 물씬 드러나는 풍경이다. 이는 동아시안의 현재의 의식 수준으론 지적 능력에 맹점의 하자가 있어 어떠한 교육으로도 개선이 어렵다. 하늘의 운에 맡겨야 할 심정이다. 바로 창조주 유일신과 동등한 자아개념이 과학이나 사상을 넘어 철학적으로 없다는 것이다. 철학이 빈곤하니까 그 작은 예로 자기가 똑똑해서 군면제를 받았다고 자랑삼아 부끄럼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능력과 형편이 충분하면서도, 장애 등의 불가피한 면제가 아닌 경우의 의무비이행자는 공직진출을 막아야 한다. 적격자의 '의무비이행'는 그 자체가 불법으로 자신을 속이는 사기이기 때문이다. 의무와 책임을 알아서 다하는 지고지순한 개인주의가 아예 인성으로 존재하지 않는 무리들이다.
그래도 아시아 대륙 전체 최고의 자유시민의 국가의 일인으로 이제 작금에 내가 겨우 안심하고 나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사변의 정치철학과 정치신학의 개인적 사상 첨병이 최적이다. 눈에 잡히는 현실 계급의 본래적 이면을 직시할 수 있는 나름의 깊은 정치적 안목과 실제 전통의 본래 철학에 대한 사상적 바른 침윤과 역사에 대한 깊은 고뇌의 인류적 고찰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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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인간 삶의 모든 형태는 문·사·철과 연관되어 있다.
바로 과학(문학)과 사상(역사)과 정신(철학)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 삶의 태생적 계급이 고착한다. 계급 간 이동은 가능해도 극복은 불가능하다. 한번 정한 계급은 종명토록 간다. 추상적 획일성으로, 자연 상태에서의 종(種)처럼 인간도 자신이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계급이 정해진다. 다시 거듭하여 중언(重言)하면 이는 추상적 획일성이기 때문에 혁명으로도 바꿀 수 없다. 정신은 안일하게 보이는 보수(保守)로 상층계급의 전유물이고, 사상은 격동의 자유(自由)로 중간층의 산물이고, 과학은 부단한 노동(勞動)으로 하층계급의 기반이다.
바로 그 유명한 상층과 중간층, 하층이다. 이때 중간층은 다시 상과 하로 나누어야만 이해하기 쉽다. 중간층의 상과 하는 상보적으로 무게 중심에 따라 세대 간에 수시로 이동을 한다. 상층은 자가 발전력이 심대하게 있다. 하층은 자가 발전력이 자신의 노동이외는 거의 없다. 이때 중간층은 상과 하로 나누어 자가 발전력이 나름 충분히 만족하게 평생 있으면 중간 상층이 되고, 그렇지 못하여 부족하거나 없으면 중간 하층이 된다.
바로 평생개인자유가 종명토록 보장된 고급전문직종이 중간상층이라면, 위계조직에서 다가오는 정년과 매일의 정신 노동이 필수인 봉급생활자가 중간 하층이다. 정신노동자로 절대다수의 서민계층이 중간하층이다. 이네들은 상층이 마련한 거탑의 절대공간에서 개미들처럼 저축을 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벌처럼 조화의 직분을 이루며 사내경쟁을 하면서 살아간다. 목적대학 등에서 대량직업교육을 잘 받아 문·사·철의 모든 계통에서 하급관리자로 자신의 노력과 개성, 능력에 따라 대우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중간 하층인 이네들의 극한 최대치는 공교육현장에서의 교사와 중앙부처의 관리관 지위의 1급 공직자 정도이다. 보다 더 높은 정치적 계급에 나아갈 수 있는 계층이 아니다. 그래서 매우 자유로워 보이는 교사마저도 실제적으로는 정신적 자유가 없다. 정신적 자유는 오로지 특이하게도 중간상층계급에서만 보고 느끼고 생산할 수 있다. 생산한 그 가치가 큰 효력을 발휘하려고 움틀 그때 그저 안일하게만 보이는 보수의 상층계급이 그 정신을 바로 앗아간다. 바로 그 지식의 가치와 활용도를 누적경험으로 바로 알고, 자신들의 계급적 신분보장에 지침으로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필요한 만큼 그때그때 적시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는 종류와 질을 별로 가리지 않고 필요하면 다 가져간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무지한 계층인 선수 자기네들만 노는 스포츠도 프로로 꾸며, 돈벌이만 되면 부와 권세의 중요한 수단이 되어 구단주로 이네들이 화려하게 귀족의 옷을 입고 귀부인들과 함께 가시적 연단(可視的 演壇)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중세 로마 공화정의 황제가 따로 없다.
심지어 더우기 계급의 역사가 더 분명하고 선명한 서구에서는 더 첨단적으로 더 놀랄 일로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시대별 주체로 예술철학의 창인 '에피스테메로'를 시대의 예능장인들이 만드자마자 상층계급이 바로 앗아가 중간상인층을 동원하여 진귀한 학술급 예술작품으로 둔갑시켜 고급문화살롱에서 진귀하게 분위기를 만들어 거래하게 하는 것이다. 예술원은 물론 학술원까지 만들어 매월 지원금을 주어 후원하면서 지식과 함께 예술도 정치지배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문화적 논증을 계보로 잇는 서구(西歐)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으나 글로벌하게 한국 등 모든 나라의 상층계급이 이미 이를 따라하고 있다. 다른 계층에서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가 없고, 회원권이 없어 고급살롱에는 입장도 불가하다. 군대계급처럼 의식도 계층에 따라 다르게 작동케 하고 있다.
상층(소수특권층) : 영구적이고 영속적인 초(超)거부로 정신적 상층계급이다. 한국엔 아예 없다. 상층으로 보이는 재벌도 영속적인 거부는 아니다. 그래서 갑자기 망하기도 한다. 수많은 재벌의 가족이 다음 세대에선 사라졌다. 한국에서 정신적 재벌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와 6.25사변을 통하여 절멸되었다. 이네들은 격변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도망을 갔기 때문이다. 홀로 살기 위해 스스로 우두머리의 자리를 박찬 것이다. 본인이 살기 위해 잘한 선택이다. 가족과 후손을 위해 결코 비겁하지 않다. 출중한 실력이 지식으로 충분할 만큼 '자본'으로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가진 모든 것을 버려도 장소를 옮겨 새로 출발을 하면 바로 되기 때문이다. 상층계급은 망해도 다시 상층이 쉽게 될 수가 있다. 불가시적인 자본이 유대인거부처럼 여러모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보수적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끼리끼리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상층계급이 비상층계층과 혼인을 맺는 것은 스스로 보기 좋게, 먼저 공개적으로 망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과 진배가 없다. 자녀교육도 영미권의 귀족학교를 선향한다. 서구에 가서도 사람을 가려 사귄다. 동급이 아니면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멀리 한다. 영미권이라도 대학원 진학은 필요성을 못 느낀다. 이네들에게는 대학교수 등 학문(學問)도 일종의 피곤한 기술(技術)로 2류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 상층(중산자유층) : 학식과 기술을 고급학벌로 구비하여 자가 발전력이, 생산이 자유스럽게 충분히 있는 계층이다. 중간계층의 최대 희망으로, 학령기 전 기간 본인이 엄청나게 집중 체계적으로 노력하여, 평생 돈이 되는 국가공인 최고등급의 자격증을 차지한 대가(代價)이다. 의사나 변호사, 4년제 대학 부교수급 이상으로 이네들의 극한치는 정치인이다. 잘해야 전문경영인이고 상층의 경제인은 꿈도 못 꾼다. 그래도 여기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연이어 나온다. 이런 대통령마저도 출신이 중간계급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지막엔 연금으로만 먹고 살아야 한다. 더 이상의 진출이 허락되지 않는다. 더 이상의 진출에는 자기 목숨과 가족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 기다렸듯이 수많은 민중이 저격수가 되어 수많은 유탄을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날리기 때문이다. 이때 지지자와 측근들의 배신도 한 몫 한다. 다른 것은 참아도 자기와 정치 계급이 같다고 믿었던 동료의 신분적 탈피는 도저히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간 상층에 알맞게 필요한 개인주의의 철학적 자유 전통이 박약한 아시아의 한국에서는 더 하다. 이때 빈천한 서민출신의 퇴임 대통령이라면 그 농도는 더할 나위 없이 강하다. 기계적 자연법칙에 의하여 인기와 지지도에 무조건 비례한다. 파리 떼들의 먹이가 고급영양으로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신분적 출신이 박약한 대통령은 판단을 잘못하여 퇴직 후라도 자기 몸 보전을 위하여 도박을 하는 수가 있다. 본질적인 철학은 미천한 신분은 좀처럼 가질 수 없다. 어릴 적 훈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자기 출세를 도와 준 민중들의 희망 동료 계급의 사상을 버리고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작금에 유행하는 사상적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SNS 등으로 기회를 엿 보거나, 그것이 어려우면 바로 절대적 적과 상통하는 여적의 간첩죄가 여기에 걸린다. 중간 상층 보다 더 아래의 자녀가 운좋게 대통령이 된 경우는 다 일시적 시국(時局) 대통령이다. 이런 자는 퇴임 후 자기 분수에 맞게 조용히 국내외 여행이나 하면서 사는 것이 본전이다. 저술을 하더라도 조소(嘲笑)의 대상이 된다. 저술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에 대한 인정(認定)이 있어야 한다. 타인들이 바로 역겨움을 느끼고, 대통령이나 장군 등 출세를 하더라도 '넌 지식을 자랑할 수 있는 계급이 아니다'라고 본다. 알퍅한 상식책 몇권으로 먹고산 주제에 저술은 무슨 저술이다. 이리하여 여력이 있는 중간 상층의 경우 신분유지를 위해 자녀들의 대입에 SKY급 국내 일류대학을 노리고, 그마저도 안 되면 대개 호주나 뉴질랜드, 독일과 프랑스를 유학으로 다녀온다. 하나 그 졸업장이 국내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 유학 중 건강 훼손이나 병이라도 안 걸리면 천만 다행이다. 여성들의 경우 만혼(晩婚)으로 자녀도 없다. 학술이나 예술에 큰 공을 몇 번 세워 상류부유층계급이 후원하는 학술원이나 예술원에 매월 지원금을 받는 회원이라도 되면 마치 자신이 남작급의 귀족이나 된양 감격에 겨워, 가문의 무한한 영광으로 여긴다. 중간 상층도 같은 층의 중간 하층으로의 전락(轉落)이 두려워 기회만 되면 귀족의 본을 따 자기들만의 커뮤니티 카르텔을 형성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대학교수들도 동료(同僚)의 후임자리를 정할 때 자기가 키운 중간 하층의 제자들은 그 수가 박사급으로 아무리 많아도 모조리 취업이나 창업을 권장하면서, 동료 후임으로의 추천엔 안중(眼中)에 전혀 없고, 동급의 이상의 신분으로 자기 대학 모교의 후배 가운데 한 명을 선정하려고 암중(暗中)에 커뮤니티 카르텔을 작동한다. 그것은 정년 후 자기가 갈 곳으로 자신의 지분(持分)을 확보하려고 하는 짓이다. 자신의 옛 처지(處地)보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한 것이다.
중간 하층(중간서민층) : 보통 대졸의 학력이 기반 된 봉급생활자로 절대 다수의 중간서민계층이다. 이네들의 희망은 공교육 현장에서의 교사나 중앙부처의 1급 관리관이 최고치이다. 몸은 무진장 자유로워 보여도 이미 정신이 고착되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알게 모르게 부자유스럽다. 아는 것이 지엽적이라 대화의 수준이 낮고 평생 경제적 속박에 갇혀 살아 자기 신분 더 이상은 아무 것도 못한다. 수뇌부의 중앙 테이블엔 갈 수도 없고, 가더라도 일하는 일꾼으로 자기 발언만 하고 조상님 보기 비참하게 청부(請負)한 수뇌부가 먹이를 놓아주는 모양새의 아래 칭찬과 그들의 조소(嘲笑)를 단체로 받으며 바로 홀로 외롭게 그 테이블의 장에서 나와야 한다. 맡은 직분의 현장 공부를 경험적으로 많이 해 조선시대 아전(衙前)들처럼 그 분야를 해박하게 깊게 알아도 그런 지식이 그에겐 큰 무기가 되질 못한다. 손오공 마냥 여의주를 들고 휘돌릴 힘이 있더라도 삼장법사가 필요한 명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해야 봐야 마치 히틀러를 보고 겁이 나 도망 친 아인슈타인 같다. 이네들이 믿고 의지할 곳은 자유민주주의하에서 행하는 합법적인 국민투표 밖엔 없다. 자녀들의 신분상승을 위하여 교육에 고군분투하지만 일반 4년제에 끝나고 만다. 대학원을 나와도 별무 소용이다. 그래도 실력이 밑천이라 노력한 댓가로 대기업 등 마음에 드는 곳에 나름 취업을 하긴 하지만 봉급생활과 올챙이들끼리 승진을 위한 암투(暗鬪) 만이 그들을 기다린다. 중간 하층인 경우 성인이 되어 대학원을 나오고 독서를 아무리 많이 해도 태생적 집안이 별로라 유년기나 아동기에 부모로부터 얻는 뇌리 결정적 자연인지 학습의 수준이 낮아 지적발아가 소멸되어 있고, 또 본인의 견문도 매우 좁아 이해력이 치졸하여 죽을 때까지 자기 앞에 도래한 지식의 원리를 전혀 알지 못한다. 아무리 경험해도 결정기의 지적 발아가 소멸된 이상 더 이상은 익혀도 무슨 소리인지 알지도 못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주변에서 수 없이 볼 수가 있다. 부모가 부실하면 가정교육에 무조건 원초적 문제가 있다. 하지만 본인들은 이런 문제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부모의 계급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중간 하층의 경우에서 보듯이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고착된 계급의 세습화가 그대로 이어지는 이유이다.
하층(막노동하층) : 오로지 노동과 자영사업으로 먹고 사는 계층이다. 이 계층의 극한치는 성공한 자영사업이나 계속 돈 버는 무자격 장인(匠人) 가내기술자이다. 문화주택에서 직계가족과 건강하고 평안하게만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 본인들이 이미 더 잘 알듯이 더 이상의 희망이 전혀 없다. 심지어 자녀교육에서도 진천이 없다. 운 좋게 본인이나 자녀가 일류 대학을 나와도 자세히 보면 대대로 하층계급이다. 이네들은 대기업에 출근을 해도 자기 자리가 없다. 출근표기이후엔 펜도 필요가 없다. 그가 일하며, 있어야 하는 곳은 오로지 소리 나는 작업장이며 그 외엔 서비스로서의 공간이 있더라도 탈의실이나 휴게실, 출근 대기실 정도이다. 마치 군영(軍營)의 하급병사 대우를 받고 산다. 무리지어 교대로 출근을 하고 무리지어 교대로 퇴근을 한다. 심지어 식사도 식판에 일식삼찬으로 무리 지어 시간 내에 급하게 다 비워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신분계층의 조리사에게도 심하게 꾸중을 듣는다. 이네들을 심신으로 위로하는 것은 고급주택과 고급승용차와 고급으로 착각하는 동아리 취미와 마지막 단계의 마스터 급의 장인억대노동연봉이다. 그러면 본인 스스로를 중간상층으로 착각하여 나름 행복하게 산다. 비록 지식명령사회에선 아무런 발언권도 없지만,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홀로 저녁식탁에 조용히 앉아 자신은 연주는 물론 작곡도 어떻게 하는 지 전혀 알 수 없는 클래식 음악을 틀며, 고급 와인을 천천히 자가 음미하면서 마음껏 무식하게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사회가 혁명을 하더라도 다치기만 할 뿐 이들이 갈 곳은 여전히 노동현장 뿐이다. 부모가 여유가 있어도 자녀교육에 성공하지 못한다. 잘 해야 전문대나 특성화 학교를 나와 만년 기술자의 길을 걷는다. 자녀교육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다 계급이 이미 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나라나 마찬 가지이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사회가 혁명에 혁명을 거듭하더라도 이미 고착된 계급으로 계층 간의 질이 그대로인 교육의 세습화가 계급에 따라 정확하게 그대로 작동한다. 운이 좋아 누가 잠시 일시적으로 반짝거릴 순 있어도 손자대에 가면 계급 원위치가 그대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신(神,God)이 보면 같은 인간이지만 계급이란 고착세습으로 자연상태의 동물 종(種)의 차(差)의 세계와 같다. 강아지가 종개량을 아무리 해도 호랑이를 이길 순 없다. 강아지는 영원히 강아지인 것이다. 천지개벽을 해도 의식주만 달라지지 다른 것은 여전히 원래 그대로 같은 동일한 수준이다. 계급에서의 변증법도 동일계층내부에서의 자기반성만 초래할 뿐 조선시대의 성리학(性理學)의 사·농·공·상(士農工商)처럼 정해진 본연(本然)의 정신에 의하여 계층 간에는 추상적 획일성만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이다. 자연계의 생명체들이 진화에 진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종족 보존에서 보면 그 모습 그대로 그 위치에서만 항상 대를 이어 불변의 모습으로 그대로 똑 같이 있는 것이 바로 '추상석 획일성'이다. 인간 사회에서의 계급 간 계층도 추상적 획일성 안에 있다. 그래도 말 많고 탈 많은 인간들이기 때문에 잠시 이동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극복으로의 이동은 불가능으로 아예 원초적 불능에 가깝다. 단지 동일한 계급 안에서의 자기 부(富,Wealth)의 증식만은 왔다갔다 하면서 저축과 노력 등으로 계급내 변신만 가능하다. 계급간의 추상적 획일성 A,B,C,D로 C나 D에서 A나 B를 기대하지 마라는 것이다. 백년을 넘어 천년을 기다려도 안 나온다. 이는 문명들의 변천소이(所以)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유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처럼 C나 D를 위하여 '자유'를 인륜적 방향으로 설정할 수는 있지만, 그 자유의 출발점 소이는 A나 B에서만 나온다. C나 D는 추진동력의 바탕일 뿐이다. C,D에게 A,B를 기대하는 것은 금물(禁物)이다. 혹시라도 안 된다. 아예 기대를 버리야 한다. 작품이 아예 안 나온다. 백년이 아니라 천년, 만년을 기다라도 C나 D는 영속적으로 C,D만 산출할 것이다. 재언(再言)하지만 이는 문명들의 변천소이(所以)만 봐도 확연히 알 수 있다. 한국,중국,일본이 천년만년 동아시아에서 살고 또 살아도 서구의 문명 침탈이 없었다면, 아직도 그대로의 한국,중국,일본이고 '자유'란 간단한 말조차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매일 밤 보는 달(月)이 왜 공중에 계속 그대로 무엇으로 떠 있는지도 보고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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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敷衍): 사회 계급이란 인간 정치 산물로 변증법적 모순을 뛴다고 역사철학으로 교사가 교단에서 책으로 격려는 해 줄 수 있지만 결코 변하지 못하는 추상적 획일성에 가까운 불변의 철칙이다. 헤겔의 의하면 절대정신에 의하여 자기 반성 후 새로운 운동이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모순을 잉태하고 또 밤의 미네르바처럼 영속의 영원으로 자유의 돛대를 걸고 위치만 달리하여 다시 그대로 또 피를 마신 드라큐라처럼 역사의 관에서 뚜껑을 열고 일어 나는 것이다. 지혜의 여신이 정신의 역사에서 자유의 깃발로 인도(引導)를 하긴 하지만 그도 신(神,God)이 아닌 그냥 교단 교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로지 태양이 다시 뜨기만을 기도하는 후원자일 뿐이다. 칸트도 포기하고 플라톤도 도피를 했다. 오로지 '파르메니데스'만이 운동을 부정하는 존재론으로 정확히 이를 직시하고 수용했다. 만물유전이란 우리의 환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하버드의 자유가 넘치는 주디스 슈클라를 꿈꾸며, 모든 이의 넘치는 물적 자유를 위하여, 자유지상주의를 큰 폭의 강이 흐르는 문명의 도시 한 아파트 창가를 통하여 아침 안개 속에서 빵과 우유, 커피를 마시면서 조용히 상상으로 홀로 바라보고 있다.
사회계급의 변동이란 오로지 네 계급의 마음 속에서 각자가 느끼는 물적자유에 대한 넘치는 행복감일 뿐이다. 이때 나는 그가 되어 그의 모습으로 도덕과 지성의 감정으로 호신총을 가슴에 품은 주디스 슈클라를 통하여 새로운 예술철학의 창(窓)인 '에피스테메로'를 나의 무기에 창(槍)의 하나로 장착하고 있다. 그래도 그는 무명교사 '굳바이, 칩스 선생'처럼 하나의 여유를 찾고자 홀로 말한다. '우리 대영제국의 만인의 도덕철학 스승 A. Smith도 부유한귀족특권층이 '귀하께서 나의 자녀를 위해 수고했다'고 주는 평생연금으로 노후 생활을 했다. 그도 부유한귀족특권층이 아니기 때문에 도덕철학자로 무장하여 살아 갔다. 밀림과 정글, 초원에서 사자의 무리가 아니면, 1:1이면 사자(獅子)을 바로 제압할 수 있는 호랑이라도 언제나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는 무리 밖 단독자로서 도덕철학이 바로 그의 '자본'인 것이다. 그는 추상적 자유를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추상적 단계까지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Jesus처럼 어떤 무리에도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만인구제(萬人救濟)의 혁명의 단독자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동아시아 한국의 어느 한적해 보이는 세계적 무역도시 부산 북단의 도·농(都·農)의 시골도덕교사는 그 자신도 찬란한 백만장자를 꿈꾸며 상층의 지식 교양인 공감과 분별, 자제를 미셸 보바(Michele Borba)의 도덕지능으로 꾸며 하급 노동자의 자식들에게 학습주제로 소개하곤 했다. 우리가 갈 길은 뻔하지만 그래도 고급 아파트 단지에서 충분한 동별 엘리베이터로, 회원등록 커뮤니티에서 실내 골프 정도는 하면서 살자. 비록 문화경매살롱엔 회원권을 못 구해 못 가지만 말이다. 백만장지만 되면 찬란한 모든 것을 염원할 수 있다. 우리는 노동으로 바쁜 도·농(都·農)의 자식으로서 못하는 게 없다. 도·농(都·農)의 상품 80%가 수출품이 되어 전 세계로 나가기 때문에 그 교사는 구(舊) 독일 동프러시아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의 철인(哲人) 칸트처럼 사상의 최첨병(最尖兵) 자유지상주의를 꿈 꿀 수 있었다. 이제 그도 만년(晩年)의 '굳바이, 칩스'처럼 홀로 안늑한 방의 탁자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창가를 통하여 바쁜 도시의 정경을 런던항을 바라보는 스코틀랜드의 A. Smith처럼 '스페인식 황금'이 아닌 '개별 국부'를 사색하며 보고 있다. 이제 그의 나라도 세계10대무역강국을 거쳐 자화자찬(自畵自讚)의 셀프 5대 강국을 넘어 자칭 4대 강국으로 꿈 속에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회계급은 4가지 모형으로 그대로 끈질지게 존속한다. 잠시의 주관적 이동은 있어 보여도 객관적 극복은 없다. 개별 국부가 동시에 한 나라에서 모든 개인에게 넘쳐도 계급 별순(別巡)에 따라 따로 넘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정치 수도(首都) 와싱턴과 경제 대도(大都) 뉴욕을 보면 충분히 글자 그대로 선명한 칼라 그림처럼 정확하고, 세세히,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 인류사가 누누이 여실히 증명했듯이 물질은 정신을 능가할 수 없다. 철학에서 밀리면 사상에서도 밀리고, 사상에 이어 과학에서도 밀린다. 그래서 철학이 깊게 앞선 서구(西歐)가 미국을 등에 업고 세계를 계속 황금과 함께 리드(lead)할 것이다.
개인의 부(富)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부(富)도 정신이 앞서야 물질로 따라 온다. 부(富)를 챙길 수 없는 정신은 모조리 힘이 될 수 없는 사기나 기만 등으로 헛 것이다. 국제정치에서도 그 나라의 실제 경제력에 따라 계급이 형성된다. 사시사철 풍성한 사계절의 미국과 중국이, 물이 넘치는 온대의 서구와 극동이, 물이 부족한 초원의 동구와 사막의 중동이, 태양이 작열하는 열대의 동남아와 아프리카가 짝을 이루어 북반구 동토 툰트라 러시아를 시베리아 백색 타타르 취급하면서 4개의 계급군단을 이루어 태양을 따라 선회하면서 태평양과 호주와 뉴질랜드, 남미를 서구인의 자연 속 휴가처로 삼아 항속(航續)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 1급 사상의 첨병이라면 사상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므로 '연구하는 실증 과학과 사변하는 정신 철학'과 같은 엄밀한 의미의 학문이 될 수 없음을 꼭 알아야 한다. 쉽게 그 이유를 설명하면 우리 누구나가 본인들이 스스로 알듯이 프랑스의 계몽철학자 루소를 다 몰라도 훌륭한 자연철학교사는 얼마든지 있고, 홉스와 로크를 이름만 알고 1:1의 양도계약론의 내용을 전혀 몰라도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수학문제만 잘 푸는 수학교사가 동네와 학교마다 넘쳐나고 있다. 하버드의 경영대학교수가 중국의 공자를 몰라도 그의 수업엔 어떠한 손실도 없다. 그건 몰라도 되는 거다. 학생이 질문을 해도 '모른다'하면 그만이다. 그냥 자기 동네의 서양필독 고전사상 몇 개만 알아도, 그는 세계적 첨단 명문대학의 최고급 대학교수로, 충분한 것이다. 이게 바로 사상이 학문이라곤 하기엔 곤란한 요인이다. 사상은 어차피 망각의 과정적 대상으로,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와 이성이 필요 없다. 오로지 당시대의 사상전에서 우승열패로 이기기만 하면 된다. 그가 사상으로 가문을 이루려면 세상 모두를 자기의 하수로 보고 신과는 1:1로 대적해야 한다. 신을 흠모하더라도 존경은 하지 않는다. 사상가는 철학자나 과학자완 달리 바로 태생적 유아독존이 되어야만 그의 사무를 달성할 수가 있다. 멸망전 대회전을 앞두고 수 많은 사상가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자기 생존의 혈투부터 양대 진영 앞에서 홀로 거쳐야 한다. 그는 스승 등 대부(代父) 이상의 사상적 아버지로서 그 혈투에서 이겨야만 역사에서 그토록 염원한 그의 이름을 조그만하게나마 무사히 돌에 새길 수 있다. 그는 구체적 사상(事象)을 넘어 드디어 그가 바라던 추상적 존재로서의, 철인(哲人) 다음의 지존(至尊)의 사상가(思想家)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사엔 허구에 대한 개인적 실존의 문제와 동시에 공허한 실체에 대한 고집도 무리지어 있다. 실존의 정치철학으로 위와 같이 살아 생전에 계급을 열심히 나누더라도, 우린 이를 염두에 두자. 일본의 전 수상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기존 우익 이상으로 과하게 행동하고 집착한 것은 그는 일본의 극우계 정치인으로서는 결정적인 하자가 하나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는 순수한 지고(至高) 극우계 최첨병 인사가 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는 혈통 이상으로 극미한 문제가 아니다. 어머니 쪽 외가의 지원 등으로 그 아무리 노력해도 주변과 일반 백성들이 100%로 인정을 안 해 주는 것이다. 바로 출생의 신분적 하자(瑕疵)로, 그는 친할머니를 모르고 컸다. 그의 친할머니는 그의 부친을 탄생시키고는 가문에서 바로 축출되었다. 그는 마치 칭키즈칸의 부인의 장자 주치처럼 출생에 문제가 있었다. 주치는 이를 상쇄시키려고 전투에 항상 앞장을 서고 적군에 지나치게 포악했다. 심지어 주치의 아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장에서 필요 이상으로 포악함이 심대했다. 아베 신조의 죽음은 엉뚱하게 개죽음이 되었다. 줄이은 조문으로 성대해 보이지만 잠깐 동안의 가족장 행사로 끝난 것이다. 초라하고 부질 없는 죽음이었다. 아베 신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아베처럼 과하게 행동해야만 하는 삶의 고뇌가 있는 것이다. 피안의 세계 입구에서 그는 아버지와 함께 서 있는 친 할머니를 만날 것이다. 손자에겐 친 할머니만큼 고귀한 분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곳은 모순이 없는 그냥 그대로의 존재만의 세계이다. 존재에서의 시간 따위는 오로지 현세의 인간들에게만 자유의지와 함께 모순(矛盾)을 의식(意識)으로 만들며, 대상(對象)으로 경험하면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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