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2월 16일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중 막내로 출생.
1965. 부친이 서해안 간척사업에 실패, 유랑하다가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 정착 '85년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인 "안개"는 이 마을이 배경이 된다.
1967. 시흥국민학교에 입학.
1969.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눕다. 가계가 힘들어짐.
1975. 당시 고등하교 2학년이던 셋째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 이 사건이 깊은 상흔을 남기다.
1979. 신림중학교을 거쳐 중앙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연세대학교 정법대 정법계열 입학,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수업 시작.
1980. 대학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당선없는 가작으로 입선('영하의 바람').
1981. 방위병으로 입대, 복무중 안양의 문학동인인 '수리'에 참여. 동인지에 '사강리'등 발표, 시작에 몰두.
1982. 6월 전역후 다수의 작품을 쓰며,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당선('식목제').
1984. 10월 중앙일보사에 입사.
198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안개')되어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 2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신문사 수습을 거쳐 정치부에 배속.
1986.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김.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 주목을 받음.
1988.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김. 여행 등을 하며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
1989. 가을에 시집출간을 위해 준비하다 3월 7일 새벽,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독신.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을 가지고 있었음.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발간됨.
1989년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90년 3월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살림출판사)
1994년 2월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출판사)
1999년 3월 전집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
예술가에게 뛰어넘기 힘든 신화(神話) 혹은 콤플렉스라면 아마 이런 종류의 것들이리라. "바람처럼 빨리 살고, 아직 젊을 때 죽어서,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자신의 죽음으로 불멸의 금자탑을 완성하고 싶다는 유혹은 예술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어봄직한 희망이다. 그러나 세상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시대는 모든 시인이 릴케처럼 장미 가시에 찔려 백혈병으로 숨지도록 하지도 않을 뿐더러 혁명의 시기에 소총을 들고 전장을 누비다 장렬하게 전사할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침상에 누운 채 병들어 잔뜩 주름진 얼굴에 경우에 따라서는 추한 오명(汚名)을 남긴다. 우리나라에서 시(poem)는 낭만주의(romanticism)의 영향과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적 전통 속에 풍류의 한 가지 혹은 젊음의 광기를 담은 그 무엇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시인이란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 청춘의 상징 혹은 시대와 불화하는 그 무엇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죽은 시인에 열광하는 까닭이 혹시 그가 더 이상 우리를 배신할 가망이 없기 때문이라는 안도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기형도, 1980년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가장 빛나는 크리스마스 전구
1980년대도 저물어가던 어느 해 세밑 몇몇 친구들은 공장으로, 대학으로 떠나고 홀로 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그 무엇으로도 삭이지 못했다. 그때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란 시집이 우연하게 손에 들어왔다. 아픈 마음을 다스리는 약으로 시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1960년 2월 16일 생의 시인, 기형도. 그는 나보다 꼭 10년이 위이다. 생년의 끝이 영(0)년으로 끝나는 사람들에게 숙명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번외자(番外子)의 설움 같은 것이다.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가도가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중학교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기형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기형도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친구 한 명이 있다. 그 녀석은 뒤에서 두 번째였지만 그의 모친에게 그는 항상 막내보다 더한 막내였다. 기형도의 경우도 이와 같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에게 선천적으로 여릴 수밖에 없는 가정적 환경은 이미 갖추어져 있었던 셈이라고 추측된다. 중학교 때부터 시에 관심이 있었던(1975년 그의 바로 손 위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부터 그는 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공부도 잘했던지 197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서 잠시 방위로 군복무를 한 뒤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 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일보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9년 시집을 준비하던 중 뇌졸중으로 죽었다. 이상이 그의 짧막한 생애에 대한 정리이다. 1960년에 태어나서 1989년 3월 7일에 죽었으니 그가 세상에 나서 공기를 호흡한 시간은 다 합쳐 봐야 만 29년에서 엿새가 빠지는 기간이었다. 요절(夭折)이란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죽음이었다.
서울의 우울, 시대의 우울
기형도가 1980년대를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은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그는 우리 시대의 주변에서 너무 가까이 태어났다가 죽은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많은 이야기들은 아직 풍문이다. 그가 문학적으로 정리되기까지는 좀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자 동료 시인이었던 원재길의 회상을 보면 기형도가 1980년대라는 엄혹한 터널을 지나면서도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해 크게 공감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그는 철야 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했다가 형사가 찾아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듬해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생전의 그는 성실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어서 실수로라도 누구를 괴롭히는 일이 드물었으며, 늦도록 술을 마셔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얼굴이 심하게 붓는 걸 꺼려서 술을 많이 들진 않았지만 술자리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특히 문학이 화제라면 매우 즐거워했다.
휴일엔 밖에 나다니는 일이 없었는데, 아마도 어머니의 일을 도왔던 걸로 여겨진다. 집에서 기르던 새끼 돼지들한테 예방 주사를 놓았다면서, 주사기 바늘이 뼈에 닿는 순간 손목으로 전해지던 느낌을 들려주며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집안일 돌볼 거 다 돌보고, 친구들과 놀 거 다 놀면서도 학교땐 과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시간과 생활을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얘기가 되겠다.
사실 그가 복학한 1981년은 전두환 정권의 차가운 칼바람에 모두가 숨죽이지 않을 수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1985년부터의 대학 생활이란 것이 경험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집회가 있는 날 강의실에 앉아 있거나 도서관만 지키고 있기에는 다소 민망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그역시 시대의 우울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집회마다 나가면서도 시험 성적 좋은 것이 기이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의 전 학년 성적표를 보면, 체육과 교련에서 B학점을 몇 번 받은 걸 빼곤 모조리 A다. 시험 기간을 앞뒤로 해선 도무지 얼굴을 대하기 힘들었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은, 절반은 부러워하면서 또 나머지 절반은 '비겁한 놈, 혼자만 공부 잘하다니' 하고 이상한 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비단 공부뿐만이 아니었다. 스케치 솜씨가 대단했으며, 당장 가수로 나가도 밥 먹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노래를 잘했다. 직접 작곡한 노래를 선보일 때도 있었다. 레퍼토리가 차고 넘쳐서, 어느 해 여름에 대천 바닷가에 놀러갔을 땐 민박집 평상에서 혼자 서너 시간 쉬지 않고 노래했다.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참여한 까닭에, 그렇지 못하고 그 주변을 배회한 사람은 배회한 까닭에, 그들을 무시한 사람들은 무시한 까닭에, 억압하려 들었던 사람들 역시 어김없이 억압하려 한 까닭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런데 기형도가 죽었다는 소식에는 모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실 기형도의 등장과 퇴장은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가 처음 문단 데뷔를 하고, 첫시집을 내고 그리고 종로3가(사실 종로 3가는 기형도 이전에도 많은 시인들이 거쳐갔던 곳이기도 하다. 김수영과 신동엽도 이곳의 구석진 술집에서 자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어딘지는 나도 모른다.)의 허름한 극장에서 죽었을 때, 우리들은 몇 가지 풍문을 들었다. 하나는 그 극장이 동성애자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란 것과 그가 어째서 심야의 그 극장에서 고개를 뒤로 꺽고 숨져야 했는가?하는 사실이 기묘한 씨줄날줄이 되어 풍문을 증폭시켰고, 그의 연애에 얽힌 이야기들이 또한 그의 전설에 먼지를 더했다. 소설가 강**씨와의 연애설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이었다.
어쨌든 기형도의 시는 80년대의 많은 상처입은 청춘들에게 알수없는 위안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풋풋한 자기 성찰들로 가득했고, 따뜻했고, 외로와서 상처입었고, 그리고 사랑해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모성 본능을 자극했다. 기형도는 대학 시절 따르던 형의 자살을 두고서 그의 죽음을 "형의 죽음이 나의 생활에 단순히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간직되어질 수 있는, 혹은 예술적 체험 세계의 확장으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형도 전집』 「참회록」 중에서>라고 쓸 만큼 섬세하고 타산적이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의 친우이자 문학적 동료였던 원재길은 기형도가 스스로의 스승을 보들레르(Baudelaire)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를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한국의 보들레르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이 꼭 어울리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형도는 시적으로는 분명히 보들레르의 자식이라는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기는 하나 일반 독자들에게 그는 한국의 보들레르라기 보다는 '1980년대의 윤동주'였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학대의 현장을 보여준다고는 하더라도 그의 시는 보들레르와 같이 가학적인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자학적인 이미지들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우울을 노래했지만 기형도는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고, 그것이 단순히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것도 아니요, 보들레르의 그것과는 다른 내면의 우울이었다. 기형도의 우울은 시대의 우울이자, 상처받은 양심과 청춘의 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형도의 시는 오히려 윤동주의 시와 닮아 있다. 오히려 기형도에게는 그런 점에서 '80년대의 윤동주'로 비견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술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맞춰줄 줄 알고, 노래도 기똥차게 잘했고, 공부도 잘했고, 작곡까지 할 정도의 이 재기 넘치는 젊은 시인은 '보들레르의 자식'이었지만 그보다 대학에서조차 교련을 배워야 했던 '시대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런 시대의 우울을 몸소 견뎌야 했던 시인이다. 백혈병 초기 증세를 앓았고, 한 쪽 귀는 거의 청력을 잃을 지경이었고, 고혈압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는 기자였다. 그의 온몸은 시대의 우울을 감지하는 촉수였고, 레이더였고, 그런 우울은 그의 정신과 육신을 상하게 했다.
포도밭 묘지에 걸린 기이한 시체. 기형도 그리고 보들레르
그의 시 <그 집 앞>을 읽으면 어쩐지 윤동주의 자화상이란 시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집 앞'에서 한참 동안을 서성이던 내 젊은 날의 사랑이 떠오른다. 기형도의 데뷔 작품인 <안개>를 보자. 마치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영향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 시의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1982년 9월 25일 밤 1시. 기형도는 의문에 빠진다.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자답하기를 "그것은 우문(愚問)이다. 구원할 수 '있다' 혹은 '없다'의 구분은 이미 시에 기능이나 효용의 틀을 뒤집어 씌운다. 따라서 어떠한 예술 장르가 최초에 성립되었을 때 본연적으로 갖는 기능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있다'에 귀착한다."라고 한다.
앞서 기형도를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보들레르"로 표현한 원재길의 표현을 맞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 점은 그대로 두고서라도 기형도가 보들레르를 자신의 시적 스승으로 생각했다는 점은 의미를 둘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그의 시가 보들레르와 비교할 만한 성질의 시가 아니라는 뜻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어떤 인물인가?
- 혁명붕괴의 해인 1848년 이후의 유럽 예술에서 우리는 환멸과 같은 어떤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시민계급의 빛나는 예술적 시기는 끝났다. 예술가와 예술은 인간의 총체적인 소외, 모든 인간적 관계의 외화(外化) 및 물화(物化), 분업, 분해, 엄격한 전문화, 사회적인 연결의 불투명화, 개인의 증대되는 소외와 반항 등의 모순들과 더불어 완전히 발전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세계로 진입하였다.
진지한 휴머니스트 예술가는 그러한 세계를 더 이상 긍정할 수 없었다. 그는 시민 계급의 승리가 휴머니즘의 개선을 의미한다고 더 이상 분명하게 믿을 수 없었다.
- 예술을 위한 예술 (기본적으로 리얼리스틱하고 위대한 시인이었던 보들레르가 취했던 태도) 역시 통속적인 공리주의, 부르주아지의 무미건조한 일상업무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세계에서 상품을 생산할 수 없다는 예술가의 결의에서 생겨났다.
<에른스트 피셔(Ernst Fischer), 『예술이란 무엇인가』중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보들레르에 대한 독창적인 해설 속에서 그를 '부르주아지가 예술가로부터 그의 위임장을 철회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 - 이러한 인식은 무한한 중요성을 가졌다 - 한 최초의 인물' 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보들레르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부르주아라는 눈에 보이는 자본주의 세상을 향해 자신의 시(詩)를 토해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시장(가령, 그것은 대중mass일 수도 있고, 역사적 평가일 수도 있다.)을 겨냥한 것이었다.(1848년은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난 해이며 보들레르는 의붓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2년만에 탕진해버리고 혁명에 가담했었다.) 기형도가 그런 보들레르를 자신의 시적인 스승으로 생각했으며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학평론가 김현이 <중앙일보> 문학월평을 통해 기형도의 시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라는 칭호를 붙여준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안개>로 돌아가서 '읍'으로 상징되는 기형도가 머무르는 시적인 공간은 아이들이 느릿느릿 새어나오고, 여직공은 겁탈당하고, 취객이 얼어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닌 것이다. 안개의 고장을 욕하며 떠난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들의 기억조차 희미해진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입속의 검은 잎』/ 기형도 지음/ 문학과 지성사 - 기형도의 유고 시집이다. 지금까지도 계속 재판을 찍어내고 있는 이 시집은 한 젊은 시인이 섭취하고 호흡한 우리 시대의 우울에 대해 너무나 가슴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기형도 산문집 -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 지음/ 살림 - 시인 기형도의 사후 살림 출판사에서 발빠르게 움직여 펴낸 요절한 시인의 산문집이다. 시집 못지 않게 죽은 시인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책이다.
『기형도 전집』/ 기형도 전집 편집위원회/ 문학과 지성사 - 기형도의 사망 10주기를 기념하여 지난 1999년에 펴낸 그의 전집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에른스트 피셔 지음/ 한철희 옮김/ 돌베게 - 예술이론서의 가장 기초적인 입문서이지만 그냥 기초적인 입문서 그치지 않는 훌륭한 책이다. 예술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만한 필독서이다. 강력추천.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 서금옥님이 꾸민 자료실 성격의 기형도 사이트이다. 바람구두의 기형도 페이지에 등장하는 유중하 교수 등의 글에 대한 언급은 이곳의 글을 텍스트로 삼고 있다.
기형도, 엄마걱정 - elfwin님이 정성들여 만든 기형도 사이트이다. 여러 자료들이 충실한 사이트이며 바람구두 페이지의 사진 자료 상당수를 도움 받았다.
그에게 '1980년의 봄'은 어떤 의미였을까? 박정희 유신 체제의 붕괴를 목격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입학한 대학 신입생으로서 경험한 1980년의 봄, 민주화 운동의 봄이자 미처 꽃 피워 보지 못한 민주주의 혁명의 좌절을 경험한 그에게서 1848년 프랑스 대혁명의 좌절을 경험한 보들레르의 영토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시(詩)의 길을 열고, 생(生)의 문(門)을 닫다
요절한 시인들에게 안도하는 이유는 그가 나이가 들며 보수화 되거나 오명을 남기게 될까 두려운 까닭에서이기는 하나 요절한 시인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유는 시인의 성숙해 가는 변모의 과정을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형도는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시를 탐구했고, 시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모색했던 것 같다. 그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도피의 기록으로 남겨놓은 「짧은 여행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광주 망월동 묘역에 이르러 이한열의 어머니와 조카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기록이던가. 기형도가 광주 5.18 묘역을 찾고서 남긴 글에는 "그러나 아니다. 나는 광주에서 그 이상한 청년을 만난 것이다. 어쩌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사를 만나고, 그 역사의 허망함에 눈뜨고, 지상을 떠난 청년들이 묘역에서 잠들어 있다. 나는 무엇인가. 가증스러운 냉담자인가, 나에게 있어 국토란 무엇인가. 내가 탐닉해온 것은 육체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었다. 지금 이곳의 나는 무엇인가. 너 형이상학자, 흙 위에 떠서 걸어다니는 성자여. 어두워진다. 나의 희망은 좀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 이 게으른 손들" 이라고 적고 있다.
유럽의 지식인들에겐 허용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에겐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망명이었다면, 보들레르에겐 용납되었으나 기형도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 그것은 타락이었다. 그가 내딛는 땅 어디에서도 그는 '육체없는 유령의 자유스러움'을 만끽할 수 없었다. 도처에서 그는 안개에 둘러싸인 소읍을 발견했고, 그곳에 풍겨 나오는 피냄새와 폐수 냄새, 오염된 사람들의 썩어가는 냄새가 그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유중하(연세대 중문과 교수)는 "이러한 반성은 기형도로서는 미증유의 것이었다" 고 말하지만 아니 그렇지 않았다.
기형도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반성하게 했고, 그는 마치 고독한 수도승처럼 시를 통해 낯선 기쁨과 전율에 젖고자 했다. 다만 그가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으려 한 것은 권태와 무기력이었다. 광주를 방문하기 전의 그는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고 말했던 조로(早老)의 젊은 시인이었으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나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상들을 향해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물 밑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다시 너절하게 떠오르리라. 그렇다면 너 지친 탐미주의자여, 희망이 보이던가. 귀로에서 희망을 품고 걷는자 있었던가? 그것은 관념이다. 따라서 미묘한 흐름이다. 변화다. 스스로 변화하기.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그러나 통속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 구원이란 없다. 나는 신(神)이 아니다. 차창 밖 국도에서 붉은 꼬리등을 켠 화물 트럭들이 달린다.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하나마다 일생(一生)의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흘러가버린 나날들에게 전하리라. 내 뿌리없는 믿음들이 지금 어느 곳에서 떠다니고 있는 가" 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생의 주도권은 다시 그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가식과 허위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길 소망했던 시인 기형도의 희망은 동성애자들이 상대를 물색하는 장소로 사용한다는 서울의 한 허름한 극장에서 멈춘다. 기형도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짧은 여행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 기형도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것은 시작 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이었다. 기형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인은 뇌졸중이었고, 보들레르는 뇌경색이었다. 세상의 아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촉수인 병약한 시인들에게 '시대의 우울'은 감내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안개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노을
詩기형도
하
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
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西行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燒却場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午後 6時의 참혹한 刑量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時間
바
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象徵을 몰아내고 있다.
都市는 곧 活字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速度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冊이 되리라.
勝
負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午
後 6時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
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日常의 恐怖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
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엄마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수록
5.시평(엄마 걱정)
책을 읽으면서 그는 그의 어머니가 바란대로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운”다. 그 울음의 흔적 중의 하나가 (엄마 걱정)이다 무우를 팔러간 어머니를 배고픈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데도 그 어조는 서정적이다 그 공간이 옛날 이야기의 공간과 닮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하여튼 그 시는 아름답다. 아름다운것은 물론 위태로운 어미니를 따뜻하게 회상하는 시인의 눈길이다.그의 가난의 공간은 그러니까 가난한 아버지 그의 치유될 길 없는 병 위태로운 어머니 그녀의 삶을 위한 발버둥 그리고 부모들과 서로들에게서 소외된 “찬밥처럼 방에 담겨”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배고픔(그의 시에 자주 나오는 음식의 이미지들!)으로 채워져 있으며 당시의 그는 그것을 무서움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나 커서는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 그 공간을 무서움으로가 아니라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그 공간은 부정적 성격을 잃고 있지만 그 부정성의 흔적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빈방 혼자있음 외로움등은 여전히 그의 내부 깊숙한 곳에 뿌리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