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히 11:13~16
제목: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나니(히11:16)
●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나은 본향인 천국을 사모하는 신앙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 살지만 천국의 본향을 사모하는 것이 곧 참된 믿음입니다.
히11: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사람은 모두 다 자신들이 나온 바 본향(히11:15)을 사모합니다. 본향(本鄕)은 본디의 고향이며 시조(始祖)가 난 곳입니다(Daum 국어사전). 요즘 말로 쉽게 말하면 본적(本籍) 쯤 되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나온 바 본향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모임을 갖는 것을 좋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예: 고향사람들). 그런 모임의 일원이 되기 위한 자격조건은 자신의 열망이나 바람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알면 조금 희미하게나마 성경의 예정(선택)론을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같은 본향에서 나온 자들이 모이는 모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 일원이 되기 위한 자격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나와 조상이 그 본향에서 태어나 살았어야 함. 저의 경우 직장 입사교육 중 고생을 하는 와중에, 나와 같은 고향 사람들, 나와 본적 도(道)가 같은 사람들이 동기생들 중에 혹시 있지 않을까? 찾고 싶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제가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 그랬기도 했겠지만, 어릴 때 아무 근심 없이 철없는 어린 아이로 살던 고향에서의 추억이 제게 힘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이 흔히 갖는 본향을 찾는 본능 같은 것으로 같은 도(道)의 본적지 사람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암암리 수소문 끝에 같은 도(道) 출신의 사람들을 새벽에 만났습니다. 같은 도(道) 출신들이 모처럼 모여서 잠시 고초와 시름을 잊고 비슷한 사투리를 쓰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처음 모였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나머지 사람들과 다른 사투리, 다른 분위기를 보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사람은 주변의 눈치를 느끼며 무안함을 느끼고 우리 모임에서 스스로 빠져나갔습니다. 왜냐하면 말도 다르고 본향이 다르니까요. 그 위장(僞裝)자가 결정적으로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는 자신이 본향을 선택하고 그 지역을 알고 그 말투를 흉내 내면 그 고향 사람이 된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냥 본향에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태어나고 보니 그곳이 우리의 본향이었던 것이죠. 이렇게 모인 같은 도(道)의 본적지 사람들은 모임이 되었습니다. 그 모임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저는 고향에서 7년만 살고 초등학교 이후를 서울에서 살았지만 고향 사람들의 모임에 들어가니 사투리가 바로 재생되었습니다. 언어습득장치는 12살 이전 정도까지 최대한 가동되기 때문인데요. 저는 가진 게 별로 없지만 시골에 본적지가 있는 것이 저에겐 작은 재산이었습니다. 우리의 심리저변에는 본향을 사모함이 있습니다.
● 그런데 위에 적은 세상에서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누구나 돌아갈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가 많고 돌아가기가 쉽습니다(히11:15).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성도들이 찾고 사모하는 '더 나은 본향'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의 천국에 있습니다(히11:16).
히11: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더 나은 본향’인 하늘의 천국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 것은 ‘믿음의 장(chapter)'으로 알려진 히브리서 11장이 말씀하는 진실한 믿음이고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들의 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이러한 진실한 성도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히11:16).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매우 완곡한 어법이고, 이것을 쉽게 돌직구로 표현하면 기특하게 여기시고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것이라고, 묵상자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히11: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에녹은 이 세상에 자신의 주거지와 본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녹의 세상 본향은 되지만 더 나은 본향(히11:16)인 하늘 천국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가진 에녹은 육체가 죽기도 전에 하늘 천국의 본향으로 옮겨졌습니다. 신자들이 누구나 에녹처럼 될 수는 없지만 진정한 성도로서 더 나은 본향(히11:16)인 하늘 천국을 사모하면 언젠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따라 참 본향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진실한 성도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고 했는데요(히11:16). 이러한 참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한 성(城)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의 거주지라 하겠습니다.
히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하늘 천국에 있는 본향은 넓은 영역일 것인데요. 그 영역 중 ‘한 성을 예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와 성도로 선택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며 유리∙방랑하며 고난 받는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보장되어 있음을 알려 줍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성도는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고, 그 주시는 보상이 히11:16에 나오는 천국 본향 안에 그들을 위해 예비된 ‘한 성’입니다. 그 ‘한 성’은 도시 정도의 규모로 번역되기도 합니다(히11:16).
공동번역) … 그들을 위해서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새번역) …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
영어 성경들도 도시(city)로 번역했습니다.
NIV) he has prepared a city for them. KJV) he hath prepared for them a city. NASB) He has prepared a city for them. |
한 성 또는 한 도시가 참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성도들이 가진 참 믿음의 우월감이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더 나은 본향(히11:16)인 하늘 천국을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이 세상은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공간에 불과합니다.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
베드로 사도도 참 성도들은 이 땅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라고 표현했습니다.
벧전1:1.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나그네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고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성도이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일지라도, 내가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벧전1:1).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하여 주신 것 때문에 이 땅에서 나그네이지만 더 나은 본향(히11:16)인 하늘 천국을 사모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묵상을 읽으신 분들은 더 나은 본향(히11:16)인 하늘 천국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계십니까? 그 사모함이 없거나 약한 것을 회개하는 것도 또한 겸손하고 현실적인 믿음입니다. 그 사모함이 뜨거워지고 진실하게 되는 회개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IVP 성경주석: 서신서>, 히 11:1-12:13 믿음과 인내
6:4-8의 경고 구절 뒤에 저자는 독자들에게 오래 참으라고 격려하면서(6:9-12), 그들에게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으라'는 격려의 말로 끝맺는다. 10장 마지막도 똑같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의 결과에 관한 경고 다음에 '약속을 받기' 위하여(10:26-39) 믿음으로 '담대함’과 ‘인내'를 가질 것을 격려하고 있다. 그 다음에 11장에서는 구약으로부터 믿음의 여러 모범을 제시한다. 이 영예로운 믿음의 명부의 절정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12:2-3) 인 예수님의 모습이다. 신자들은 이'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을 바라보되 특히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이는 온갖 대적과 고난을 견딜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12:1-13).
11:1-40 이 명확하고 면밀하게 구성된 단위지만, 12:1-13은 이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1장에서 믿음과 인내의 관계는 12:1-13 에서 인내하라는 요구의 근거가 된다. 이미 살펴본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것이 믿음의 최고의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전체 단락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기다리는 구약 시대의 신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이 비슷함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얻으리라는 더 큰 확신을 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장코뱅 주석 내용애 공감합니다.
구약교회와 신약교회 모두 메시아(=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노베 네, 좋은 포인트를 잡으셨네요. 오실 메시아를 믿었던 구약교회, 이미 오신 그리스도(=메시아)를 믿는 신약교회로 구분되지요.
@장코뱅 네, 잘 알겠습니다.
<IVP 성경주석: 서신서>, 히11:11-16절
11-16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둘째 약속은 그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셔서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이었다(창 12:2; 참고, 13:16; 15:5), 아브라함은'나이가 많아 죽은 자와 같고 '사라도 단산'하였으나, 믿음으로 '그는 아버지'가 될 수있었다(NIV 참고-역주). 그의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는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에 '신실하신'(새번역 개역개정판에는 '미쁘신'으로 번역되어 있다-역주) 것을 믿었다(참고, 10:23). 그러므로 이삭의 출생은 자손에 관한 약속의 성취의 시작이었다(참고, 6:15).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세상에 속한 기업으로서 가나안 땅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을 뿐이다(13절). 그들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을'때(참고, 창 23:4; 47:4, 9), 그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냈다. 만일 그들이 본향 메소포타미아를 사모하였다면, 거기로 돌아가서그 곳을 그들의 본향으로 삼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10절에서처럼, 저자는 이스라엘 조상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긴밀한 관계를 그린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기업을 얻기 바라고 믿음의 여행을 하는 순례자들이다. 그들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면서 족장들은 세상에 속한 기업 이상의 보상을 기대하였다. 그들은 하늘의 본향에 대한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분명한 약속은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12:22-24에 언급된 하늘의 예루살렘).
@장코뱅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는 말도 있군요. 주석을 보면 더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장코뱅 잘 읽고 공부합니다.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 히11:13-16
11:13~16 선조들의 믿음이 고정되었던 유업은 두 가지 이유로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며, 또한 미래에 속한 것이고,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1:13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아브라함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실 날을 멀리서 보고 기뻐했다(요 8:56).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우리가 유업으로 받기 위해 기다리는 본향에서,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까지, 현재 우리는 추방당한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에 (벧전 1:1, 4, 5, 17, 2:11), 구원을 약속받은 모든 상속자는 이 땅에서는 마치 집 없는 난민들과 같다 (38절).
11:16 더 나은 본향: 구약 시대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믿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소망과 약속이 단지 물리적인 것일 뿐 아니라,궁극적으로는 하늘에 속한 실체들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이 모든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질것이다.
성도들이 추방당한 상태에 있다는 표현이 의미심장 하고요. 명목상의 많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 더욱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연약함 때문이지만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노베 네, 좋은 분별이십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하늘나라, 예수님의 품이 진정한 우리의 본향이라는 것을 되새겨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거나 죽을 때가 다가 오면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어 하더군요. 육체도 이런 본성의 강한 끌림이 있을진대, 영혼의 끌림은 더 강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이 땅에서의 삶이 더 즐겁고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진정한 본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못하거나 소홀한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향으로 돌아갈 준비는 녹록치가 않습니다. 예수께서 부끄러운 십자가를 개의치 않으시고 오래도록 참으시고 수난을 감내하신 것과 같이, 히 11장의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고난을 감내하는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하니까요.
하늘나라의 영광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쟁취하는 것이라는 걸 일깨워주는 은혜로운 묵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
특히 이단, 사이비 및 신비주의자들일수록 현세의 축복과 형통에 먀달리고 내세에 대한 소망은 없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현실은 가난하고 불행하게 사는 기복신앙 신비주의자들이 많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222
공감합니다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