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복음 5,21-43 |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예수님이 ‘배를 타시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셨다는 표현은 앞뒤 문맥과 연결하기 위한 표현이다. 이 구절의 내용은 앞의 17 절에 돼지 사건 후 게라사인들이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게라사인들의 지역에서 활동을 못하고 다시 되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건너편’은 마태오복음 9 장 1 절에 의하면 카파르나움이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호숫가는 많은 군중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편한 지역이었으므로 이곳을 자주 당신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셨다.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그때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기 위해 찾아온다. ‘회당장’은 유대교 회당의 예배를 주도하고 회당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회당장 다음으로 회당에서 서열 2 위로 회의의 인도자 역할을 하며, 회당장의 비서로서 제반 직무를 수행하고 정리하며, 기도를 암송하는 일과 성경을 낭독하는 일을 맡았다),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조직의 수장이 ‘회당장’이었다. 회당장은 제사장 계급의 위상이 하락한 후 백성들 중에서 귀감이 되는 사람에게 직무가 주어졌다. 어떤 회당에서는 회당장이 여러 명인 경우도 있었다. 회당장은 유대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사람으로 회당에 있는 원로들 가운데 투표로 뽑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이로’는 ‘깨달은 사람’,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일’의 그리스식 발음으로 이해된다. 그는 카파르나움에서 명망 있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낮추어서 마치 왕 앞에 신하가 엎드리듯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다.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위를 가졌기에 예수님을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겸손한 모습을 야이로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예수님은 보통의 랍비 정도로 평가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 기적이 그 지방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발 앞에 엎드린 것은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준비된 믿음과 확실한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타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호숫가에 많은 군중이 있는 곳으로 예수님을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야이로는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처럼 자신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거듭 반복해서 예수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은 야이로가 예수님께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어린 딸’은 조그만 여자아이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 말을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었다’라는 표현은 지금 죽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다. 루카 복음에서는 어린 딸의 나이가 12 살임을 밝히고 있다(루카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한다(루카 8,41). 그러나 마태오복음에서는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즉 마르코와 루까 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오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오가 마르코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 절)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 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야이로는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즉 ‘안수’를 해 달라고 청하고 있다. 당시에 ‘안수’는 축복하는 동작이기도 했고(10,13), 병을 고치는 동작이기도 했다(6,5). 야이로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치료법으로도 효과를 보지 못했고,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었다는 소문을 들었거나, 아니면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예수님이 마지막 희망이다. 그는 예수님께 딸에게 안수를 해서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고 있다. |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출발하신다. 즉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그의 간청에 응답하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이동하시자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은 새로운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예수님을 따라간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으며, 예수님께 접근하기 위해 계속 몸을 부딪히는 혼잡함을 보여 주고 있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야이로 회당장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12 년 동안 하혈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여기서 ‘하혈’ 은 병의 증세를 말하는 것이지 병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다. 이 여인이 겪는 하혈은 레위기 15 장 25 절에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다. 이 여인이 열두 해 동안이나 병을 앓았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중병이었다는 뜻이다. 뒤의 42 절에 야이로의 딸의 나이가 열두 살로 되어 있는 것과 여인이 병을 앓은 기간이 열두 해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둘 다 상징적인 숫자로서 병의 심각성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완전수 또는 하느님의 계획과 성취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여인이 병으로 받은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은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위한 노력을 한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하였어도 몸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이 여인의 가정은 어느 정도 부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는 부자가 아니면 의사를 찾아갈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여인이 원래 부자였다고 하더라도 의사들의 진찰과 진료를 받느라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이 천년 전의 상황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시 의사들은 비싼 약 값과 진료비를 받으면서도 병을 제대로 고치지도 못했다. 그리고 상태만 더 나빠졌다는 표현은 25절에서 12년 동안 병을 앓아왔다는 표현과 함께, 1) 병의 불치성과 2)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것 3) 그 여인이 받고 있는 고통의 정도와 절박함을 암시하고 있다. 재산을 치료비로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병든 몸 하나이고 그나마 병은 더욱 악화되고 병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부정함 때문에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인의 모습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고 절망스러운 상황에 여인이 처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삶과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상실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은 4 장의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과 2-5 절의 귀신들린 사람들과 2,23 절의 죽음 직전에 이른 야이로의 딸과 함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인간적인 노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구세주 예수님을 찾게 된 것이다. 이 여인은 야이로처럼 예수님만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질병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 고립으로 절망의 벽을 마주한 이 여인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6 장 56 절 참조. 예수님을 만지게 해 달라거나 옷이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는 간청은 예수님께 치유의 능력이 충만하다는 확신에 찬 믿음의 결과이다. 이 여인은 직접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소문을 통하여 믿게 되었다. 그녀는 ‘뒤로 가서’ 예수님을 만지게 되는데, 예수님 몰래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려고 했음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그녀는 사회 통념상 여자로서뿐만 아니라 부정한 자로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이었으나 그러한 사회,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님께 다가갔던 것이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6 장 56 절에 나오는 병자들처럼 이 여인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구원자 이심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구원받겠지’라는 말은 ‘병이 낫겠지’라는 뜻이다. 이 여인에게는 병이 낫는 것이 곧 구원이었다. |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의 믿음은 즉시 응답을 받았다. 여인은 출혈이 멈추고 병이 갑자기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낀다. 이 여인의 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치료가 된 것이다. 이로써 그녀는 12 년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해결된 것이다. 이러한 치료는 예수님과 전인격적 교제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과 동시에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었다.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라는 말은 병이 나았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그녀는 하혈의 근원이 근절되자 자신이 치유되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 자각은 곧 그 치유가 몸으로 직접 느낄 정도로 완전하고도 신속하게 치유되었음을 말한다. 이렇게 즉각적이고 근원적인 치유 기적이 발생한 놀라움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27 절에서 묘사된 여인의 행동이다. 그녀는 환자라는 병약한 몸과 여자라는 장애를 갖고 그 많은 군중 속에서 겨우 예수님의 뒤쪽에서 손을 대었다. 간청을 한 적도 없고 믿음을 예수님께 밝힌 적도 없다. 그런데도 이 여인에게 기적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실은 여인이 갖고 있는 믿음이 공개된 사실은 없지만 드러내지 않은 믿음도 기적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암시한다(히브 11,6). 예수님은 인간의 내면을 살피시는 분이시기에 그 여인의 소원의 깊이를 조용히 알아보고 계셨던 것이다. |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사실과 누가 당신의 옷에 손을 댄 사실을 아셨다. 그 여자는 모든 것을 은밀하고 조용하게 예수님마저 모르게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녀의 입장에서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겸손하고 조용한 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님은 혼잡한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신적인 능력으로 그 여자의 간절한 소망을 이미 알고 계셨고 또 그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신 것도 알고 계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친히 그녀의 소망을 들어 주셔서 그녀의 치유를 허락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몰라서 한 질문이 아니라 여인과 군중을 가르치기 위한 질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인의 치유가 예수님의 능력을 몰래 훔쳤기 때문도 아니고, 또 무슨 마술 같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임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이다. 만일에 여인이 병이 나은 후에 남몰래 자취를 감추었다면 자칫 미신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빠져나간 기적의 힘은 마치 예수님도 모르는 사이에 자동으로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신적인 권능을 행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셔서 치료해 주신 다음에’라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여인이 스스로 나서게 하기 위해서 모른 척하고 물으신 것이 된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치료받은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 것 같다. 병의 치료는 단순히 물리적인 치료만이 완전한 치유가 아니다. 병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신체적 고통 못지않게 큰 것이므로 인격적 만남 속에 병이 치유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병을 치유받은 것이 미신적 신앙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손으로 당신의 옷자락을 잡기보다 그 영혼으로 당신의 거룩한 신성을 만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고 싶어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군중이 예수님을 밀쳐대고 있다. 그러니 특별히 누구를 지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손을 댄 어떤 한 사람을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뜻으로 반문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여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옷을 만지려고 했거나 만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인만 치유를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34 절에 보면 예수님의 옷을 만진다고 자동적으로, 또는 마술적으로 자동적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 하고, 또 병자 자신에게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몸을 돌리고 직접 찾으신다. ‘사방을 살피셨다’ 는 표현은 당신이 적극적으로 찾으시려고 했다는 의미보다 그 여인의 전후 사정을 다 알고 계셨기에 여인이 스스로 나타날 기회를 주기 위해서 기다리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치유받은 사람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녀가 올바른 신앙을 갖게끔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관심과 뜨거운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치유받은 여자의 행위도 중요하다. 그녀는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 그 이유는 1) 자신의 병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이고 따라서 죄인 취급을 받는 병이었기 군중들 틈에 끼여있다는 것을 공개하기에 두려웠을 것이다. 2) 그런 부정한 몸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사실이 특히 여자의 신분으로서 경건하지 못한 행위를 했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3) 그녀는 자신이 지금 받은 은총을 예수님으로부터 훔쳐 낸 것 같은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즉 그녀는 예수님의 허락 없이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이용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4) 예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신적인 권위와 초월적인 능력을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경외감이 두려움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한편 그녀는 예수님의 요구로 자신의 병과 그 기적적 치유에 대한 모든 사연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예수님께 받은 큰 은총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예수님께 무한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으며, 또 그녀가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기도 했다. |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은 그 여인을 ‘딸아’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여인을 찾으신 것은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도 나타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은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여인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에 응답한 예수님의 자비와 신적인 능력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단순히 몸의 건강만 되찾은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 구원은 육체적 구원과 영적 구원이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이 치유 체험은 질병으로 인한 모든 육체적 고통과 자신이 부정한 죄인이라는 정신적, 영적 굴레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이와 같은 구원 선언을 예수님께서는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이 여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님은 이 여인을 소외 당했던 사회로 다시 복귀시키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려고 그 여인을 찾으셨던 것이다. 이제 이 여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부정한 여인도 아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죄의식으로부터 풀려나는 것뿐만 아니라 건강과 평화로운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원 선언을 하신 다음 ‘평안히 가거라’라고 말씀하신다. 원래 이 말은 유대인들의 인사말인 ‘샬롬’인데, 여기서는 병의 치유가 완전한 것임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사하신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이 평화는 내적인 고뇌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의 완전함을 의미한다고 했다. 모든 인류가 이와 같이 평화로운 은총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치유 기적은 내면적인 구원 문제와 연결된다. 그래서 치유의 목적이 단순히 병의 치유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구원과 관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여인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수건으로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준 ‘베로니카’라고 한다. |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치유 기적으로 지체된 시간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는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이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예수님을 더 이상 수고스럽게 하지 말자고 말한 것이다. 본문의 ‘수고롭게 하다’라는 뜻의 원어 ‘스퀼로’는 원래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던 말로서 가혹하리 만치 혹독한 고통이나 쓰라림을 뜻한다.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예수님을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음은 믿었지만, 예수님에게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권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요한복음 11 장을 보면 친구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시간을 끌다가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게 가셨다.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하시기 위해서였다.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어떠면 야이로의 딸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지체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예수님께서 소녀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굳이 야이로의 집을 가실 것까지도 없었다. 예수님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 한 마디로 병을 고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태오복음 8 장 5-13 절의 백인대장의 종을 고치는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집에 가지도 않으시고 그 하인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왜 야이로의 딸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직접 집으로 가시려고 하셨을까? 또 비록 하혈증 앓는 여인 때문이긴 했지만, 왜 서둘러 가시지 않고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신 것일까? 이런 것들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이야기 중간에 하혈증 앓는 여인의 이야기가 삽입된 이유로 본다. |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회당장에게만 전했는데, 예수님도 곁에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셨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 완전히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고, 더불어 딸의 죽음 소식에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를 격려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 가지의 명령을 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믿어라’라는 명령들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절망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해서 지니라는 말씀이다(로마 4,20-21). 예수님은 당신의 신적 본성에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믿으라는 명령은 절망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절망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러 오신 분이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다. 따라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이야말로 생명의 열쇠인 것이다. |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증인으로 선택된 제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 제자를 부르신 것은 이제부터 중요한 일을 하시겠다는 뜻이다. 이 세제자는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타보르산에서도 언급되었고(9,2), 게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 세 제자의 이름이 거론된다(14,33; 마태 26,37). 군중은 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실망해서 흩어졌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단순히 문상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그런 군중은 물리치고 증인으로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당시 그곳에는 초상이 나면 최소한 피리 부는 사람 두 명, 곡하는 부인 한 명을 구해야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래서 지금 회당장의 집에도 문상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외에도 곡하는 여자들과 피리 부는 사람들이 와 있었다(마태 9,23).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정숙한 분위기보다는 피리를 불고 통곡하며 소란하다. ‘소란한 광경’은 당시 유대인들의 초상집 광경이 그런 이유로 해서 소란스러웠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은 가족들과 친지들이 슬퍼서 우는 모습 외에도 직업적으로 곡하는 여자들이 우는 것도 가리키는 말이다. |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바꾸신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란스럽게 우는 행위를 금지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을 때 하는 것처럼 피리를 불면서 소란을 피우거나 울지 말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죽음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계신 분이다. 그래서 딸의 죽음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는 죽음이란 짧은 잠과도 같은 것이다.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는 죽음이란 곧 휴식과 같은 것이다. 신앙을 가진 우리도 가족, 친척, 친구의 죽음을 겪을 때 슬픔에 젖게 된다. 그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우리의 슬픔은 이별에 대한 슬픔이고, 우리가 우는 것은 그 잠시의 이별 때문에 우는 것이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고 슬퍼해서 우는 것이 아니다. 이별이 슬프기는 하지만 그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에 부활의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욥 19,25-27).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비웃는다. 그들이 비웃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믿음 없는 자들은 기적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려고 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신앙인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은 다 내보내시고,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방에 들어가신다. 이 다섯 명만으로도 기적을 증명할 증인으로 충분했다. |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호숫가에 찾아와 예수님께 간청할 때 아이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으심으로써 우리를 보호하고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권능의 손을 뻗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지하고 애정 어린 모습으로 소녀의 손을 잡으셨을 것이다.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한다(탈출 3,20; 7,5; 시 37,24;루카 1,66; 사도 11,21). 주님은 절망 속에 헤매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 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내자요 진실한 보호자가 되신다(시 23,2;4). ‘탈리타 쿰’은 아람어인데, 마르코는 아람어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그리스어로 번역해 놓았다. 이 말은 ‘탈리다’/ ‘소녀야’ 란 뜻과 ‘쿰’/ ‘일어나라’ 는 뜻의 합성어이다. 본문에서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라는 말을 첨가시켰다. 이 말은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이 말은 하느님의 장엄한 능력의 말씀이 되었고,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이 되었다. 예수님은 어머니가 아침에 사랑스런 어조로 아이를 깨울 때 쓰던 말을 사용하심으로써 생명과 부활의 새 지평을 마련하시면서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도록 손을 내미신다. |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의 명령과 그 결과인 기적이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님의 말씀대로 소녀가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소녀가 죽음에서 되살아났다는 것과 침대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걸어 다녔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소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고 적은 것은 실제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아이가 일어난 현장에는 아이의 부모와 세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아이가 그저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 확실히 죽었다는 것,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은 아이가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바로 곁에서 직접 보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기뻐하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권능에 완전히 압도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몹시 놀라서 넋을 잃을 정도가 된다. |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19 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 절)과 대조적이다. 예수님의 이 같은 행위는 당신이 메시아 이심을 밝히실 때까지 당신의 놀라운 기적과 이적에 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기적만을 바라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고 받아들여지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예수님은 이어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는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 회복이요,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하혈증 환자는 근본적 치료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문제에서 해방되었으며, 야이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소녀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알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 것까지 제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