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깊이 톺아보기
민플러스 / 조 헌 정 (전 향린교회 목사) 2024. 06. 25
1. 들어가면서
올해 우리는 6.25전쟁 발발 74년, 그리고 휴전 71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는 인류 역사상 동족 간 가장 긴 전쟁일지도 모른다.... (중략) 동족을 향한 극도의 적대감은 생명경시 현상을 낳고 이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5백만 명의 사상자와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낳은 3년간의 치열한 전쟁이 없었더라면- 설사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지배정책(Divide and Conquer)에 의해 분단이 지속되었다 할지라도, 남북간에 오늘날 같은 뿌리 깊은 반목 질시가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냉정하게 말해 남북통일은 요원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화조차도 끊어진 상황에서 평화통일은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한 얘기이고, 무력통일 또한 핵무기를 비롯한 가공할만한 수많은 신무기가 쌍방에 존재하는 이상, 민족 전체의 죽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마음속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일 외에는 없고, 이 마음속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일은 6.25전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개인의 상처는 시간이 가면서 점차 잊혀가겠지만, 역사 인식이 잘못됨으로 인한 미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집단기억을 통해 더 증폭되어가기 때문이다. ....
6.25전쟁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첫째, CNN, BBC 등등의 방송에서 코리아 관련 뉴스를 보도할 때, 6.25전쟁이 남북분단으로 인해 생겨난 전쟁이 아닌, 6.25전쟁으로 인해 남북분단이 생겨났다고 하는 전제를 갖고 논평을 할 때가 많다.
둘째,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과 함께 일어난 남북분단을 미소 냉전의 결과라고 교과서에는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해 미국이 제안한 것을 소련이 받아들인 것이다. 소련은 본래 일본을 분할 점령하기를 원했다.
셋째, 남한사람들의 친미/종미적인 경향은 6.25전쟁시에 목숨을 걸고 남한을 지켜주었다고 하는 고마운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는 '병 주고 약 주기식'의 제국의 교활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몰역사성에 있다.
미국이 남한사람을 좋아해서 지켜준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 공산주의 진영과의 대결 과정에서 코리아반도에서의 패배는 미국의 세계 패권전략에 결정적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코리아반도가 소련 영향권에 들어간다면 일본이 이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요 그리 되면 미국은 태평양 인도양의 통제권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코리아반도는 세계패권유지에 있어 결정적 요충지가 되는 것이다.
넷째,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김일성정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남한사람 절대 다수의 생각이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625전쟁이라 부른다. 6월 25일 새벽 남침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지만, 3일 전( 6월 22일) 서부전선에서 국군의 해주 침공이 있었고, 멀리는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 남과 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1950년 6월 25일까지 1년 반이라는 기간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 간에 400번 이상의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기간 남한에서만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분단으로 인해 희생 되었다. 38선은 물론 제주와 여수, 순천, 대구 등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수많은 분쟁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생명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6.25전쟁의 시작을 단순히 1950년 6월 25일로 보는 견해는 너무나도 안이한 역사 인식이다. ......
다섯째, 북조선에서는 6.25전쟁을 ‘조선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북에서는 국가의 출발을 1932년 김일성의 게릴라 항일투쟁에 두고 있다. 따라서 북에서는 일본을 대신한 미국이라는 외세를 코리아의 영토에서 몰아내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항일투쟁이 항미투쟁으로 그 이름만 바뀐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남한과 달리 북조선에서는 종전선언에 그렇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6.25전쟁에 대한 이러한 입장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남북대화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필자는...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해 힘써 온 목사로서 6.25전쟁에 관해 그간 잘 알려지지 않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 다음 책들이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1.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The Korean War: A History, 현실문화, 2010. 이하 ‘Cummings’)
2. A.B. Abrams의 『끝나지 않은 전쟁: 북-미 대결 70년사 I, II』 (Immovable Object: North Korea’s 70 Years at War With American Power, 민플러스. 2022. 이하 ‘Abrams’)
3. 오로지의 『두 얼굴의 미국과 한국전쟁』 (휴엔스토리, 2021. 이하 ‘오로지’)
위 저자 오로지는 ... 필자와 같은 시각에서 6.25전쟁에 관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이중 그가 자주 인용한 John Merill 교수는 미 국무성에서 30년 일한 사람으로 제주4.3항쟁을 주제로 석사논문, 6.25전쟁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학자이다. 7년 전 워싱톤에서 NCCK 대표 20여 명의 목사들과 대담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그는 ‘미국 의회에 와서 증언하는 탈북자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 증언을 확인해 보면, 맞는 게 하나도 없다.’고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1949년 말 남한의 해군이 해주 인근의 북조선 해안중대를 기습하여 초토화시킨 사실을, 은퇴한 남한 해군장성을 캘리포니아의 집까지 직접 찾아가서 확인한 바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 바 있다.
2. 왜 6월 25일인가?
필자는 철책선에서 졸병으로 군생활을 했는데, 하루는 군사학 장교가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이 625전쟁에서 패배한 이유 중 하나는 그 시기를 잘못 정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6월 말은 아직 들판에 곡식이나 열매가 무르익지 않았을 때이기에 식량조달에 어려움이 있고 보병전 위주의 재래식 전투에서 6월 말은 더위는 물론 장마가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건 일반인이 생각해도 전쟁을 시작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 굳이 해야 한다면 가을철이 적기이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6월 25일이 선택된 이유로 군인들 외출이 많은 ‘일요일’이었음을 강조하는데, 일요일은 1년에 50번이 넘는다.
당시 남과 북은 상대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많은 첩보원들을 보냈는데, 1950년 5월이 되면 북조선은 군대를 전방으로 이동한 상태였기에 남한 군부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북조선 또한 침략을 위한 그 시기를 고려하고 있었다. 이미 4월에는 구체적인 날짜와 함께 남침에 대한 미 정보부의 경고도 한 차례 있었다. 6월 25일 당시 북조선 후방에 있던 전 인민군의 3분지 1의 군인들은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는 6월 25일은 예정된 날이 아니라 급작스럽게 잡힌 날이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급한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필자 또한 자라면서 여러 경로로 6월 25일 며칠 전에 서부전선에서 국군이 '38선을 넘어 해주를 공격했다'는 이야기는 몇 차례 들은 바가 있었지만, 워낙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을 굳건히 믿고 있었기에 이런 이야기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10여 년전 김종필 전총리(당시 육군본부 정보장교,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초대 정보부장 역임)가 신동아에서 같은 주장을 한 것을 직접 읽어본 적이 있다. 당시는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었다. 그래서 정확한 날짜를 확인코자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런 인터뷰가 아예 없었다는 주장부터 이 주장을 ‘치매’로 돌리는 등 가짜뉴스로 도배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필자 또한 당시는 커밍스의 책을 읽기 전이었기에, 이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이분이 치매가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커밍스 또한 이런 전투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고(39-40쪽), Abrams는 보다 정확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는데, 6월 25일 북조선방송에서 남한군이 해주를 침략했음을 보도했고, 같은 날 남한방송 또한 같은 내용을 방송했다(98쪽 이하). 물론 지금 남한 당국이나 언론은 이런 사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당시 38분단선은 도로에는 금이 그어져 있고 양쪽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어 그 경계가 분명했지만, 그 외 들판과 산, 강, 바다는 그 경계가 분명치 않았고, 설사 도로라 해도 부분 전투를 통해 금을 새로 그으면 그게 바로 새로운 38분단선이 되었다. 그리고 서로 싸워서 분단이 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되었기에 양 정부는 모두 통일을 국시(國是)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각각 미국 소련의 지원 속에서 서로 다른 정치사회경제 체제를 갖고 있었기에 무력으로 상대를 점령하는 길 외에 통일의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원론적으로 말하면, 무력에 의한 통일 시도는 김일성정권 보다는 이승만정권이 훨씬 더 절실했다.
“이승만은 협상 가능성을 ‘양보’라거나 ‘재앙으로 가는 길’이라며 일축하고 무력통일을 강하게 주장했다. 1950년 6월 7일 김일성은 8월에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하자며 이를 논의하기 위해 6월 15일~17일까지 해주에서 회의를 개최하자고 요구했다. 이 요구는 이승만과 미국이 모두 강경하게 반대하여 거부되었다. 그러자 4일 후 북조선정부는 통일에 관한 회의를 시작하자는 평화 의식으로 대표 3인을 남측에 파견했지만, 이 또한 이승만에 의해 즉각 거부되었다. 당시 이승만정부는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군사력 증가를 우선시했고, 1949년 여름에는 군병력 규모를 10만 명으로 증강하여 북조선에 대해 수적 우세를 확보했다. 이대통령과 ROK의 군부지도자들은 노스코리아를 상대로 분쟁을 개시하려는 의도를 갖고 38선을 넘어 빈번히 도발을 감행한 사실이 서방 및 국제 관측자들의 보고서에서 확인되고 있다.” (Abrams, 62쪽)
당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버츠장군은 말했다. “거의 모든 접전은 38선 북쪽으로 돌출한 지점에 주둔한 남한 소부대가 야기한 것이었다. 남한부대들은 북쪽으로 자주 침공했다.”(63쪽) 일본군 포병장교 출신인 김석원준장이 이끄는 서부전선의 남한군 수천 명이 수시로 38선을 넘어 공격을 개시했다. 북의 군사력이 점차 증강하자, 남쪽의 일부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선수를 쳐서 평양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심을 점점 잃어가던 이승만정권은 전쟁만이 자신을 구원할 도구였다.
1948년 5월 UN의 감독하에 치러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해 입법부가 구성되었는데, 당시 투표권은 도시의 지주와 납세자에 한정되었고, 농촌에서는 원로들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투표했고, 무장경찰과 우익청년단체들이 투표소 주변을 장악했다(커밍스, 172쪽). 당시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후원하는 과격한 청년단체 특히 서북청년단의 암살과 협박 거기에 일제의 부역자들이 그대로 경찰이나 군인으로 복무하는 상황에서 민중이 갖는 실망과 반감은 엄청 컸다.
이로 인한 군인들의 반란은 여순항쟁에서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다. 1949년에는 남한군 2개 대대 전 병력과 전함 1척이 월북한 사건도 있었다(Abrams, 103쪽). 미군정이 후원한 이승만정권이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는 총선 결과가 말해주는데, 불과 전쟁 한 달 전인 1950년 5월 실시된 2대 총선에서 이승만의 집권당인 자유당이 얻은 결과는 210석 중 22석에 불과했다. 이 또한 불법적으로 관권이 수없이 개입한 결과였다.
이는 미 군정청이 친일부역자들 곧, (일본왕을 위해 죽겠다고 혈서로 맹세한 조선출신) 일본군 장교들과, (독립군을 처형한) 순사들을 중용함으로 인해 국민들 반감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 미군정의 손과 발이 되어 멀쩡한 사람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워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그리고 당시는 미국 또한 맥카시즘이라는 반공 빨갱이 선풍이 몰아치고 있던 시기였다.
반면 북조선이라는 국가의 두드러진 특성은 모스크바의 인위적 창조물이 아닌, 코리아 민족주의운동의 계승이었다(아브람스, 42쪽). 이는 동유럽에서의 통치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남한학자 김남식은 “북한의 인민정권은 해방 이후 자발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들을 기반으로 삼았다. 인민위원회는 중앙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조직이 되었다.”(42쪽) 오히려 소련 군정 아래에서 평양정권은 소련 친화적인 인사들을 숙청하였다. 본래 소련은 조만식장로를 정부수반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김일성장군에 대한 평양 인민의 열화같은 지지와 친탁통치에 대한 조만식장로의 완강한 태도를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이승만정권의 경제정책은 실패했고 부패가 극심했다. 당시 국가예산의 3분지 1이 미국의 보조금이었는데, 대부분의 돈이 개인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리고 북조선의 소작인 농부들은 토지개혁 후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수확의 25%를 세금으로 내는 것으로 그쳤지만, 남한은 여전히 거의 대부분이 소작농이었고 수확의 70%를 지주가 가져갔다. 게다가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을 장려하여 외화 수입의 25%가 여기서 나왔다. 그로 인해 두 국가간 경제격차는 점점 벌어졌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남쪽의 민심은 점점 북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여론조사에 의하면, 남한사람들의 70% 이상이 북쪽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있었다. 게다가 남쪽에서는 민중폭동도 자주 일어났다. 제주4.3항쟁, 대구항쟁, 여순항쟁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러자 미국은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합하게 되면 원조를 철회하겠다고 협박하고, 1950년 2월 의회를 통해 대한원조법안을 통과시켰다(아브람스. 61쪽).
어떻게 보더라도 미국의 한국 점령은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은 30여 년간의 잔인한 식민통치로부터 막 벗어난 코리아반도에서 비극적인 분단을 고착화시켰으며, 인민위원회 등을 통해 나타난 주민의 자유로운 정치참여를 막았으며, 경찰과 관료들을 장악하고 있던 우익세력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또한 미국의 정책은 좌우익 간의 대립을 심화시켜 결국 5년 후 6.25전쟁으로 치닫게 했다.(오로지, 225쪽 재인용 존 메릴, 『한국전쟁의 기원과 진실』)
3. 군사1급기밀에 해당하는 에치슨선언은 왜 했던 것일까?
지금까지의 얘기는 6.25전쟁을 남북간 내전으로 보았을 때이다. 이제는 국제전의 입장에서 그 원인을 살펴본다. 우선 6.25전쟁과 관련한 직접적인 원인은 소위 말하는 '에치슨선언'이다.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에치슨은 워싱톤 프레스센터에서 ‘코리아반도가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에서 제외되었다’는 공개선언을 한다.
북조선이 남침을 준비하는 그 시기에 이 발언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인가? 당시 미국은 미군을 남한 땅에서 철수시키고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겨놓은 상태였으며, 이승만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거부한 상태였다. 북조선의 입장에서 무력통일을 시도할 때, 관건은 미국이 참전할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제를 굴복시킨 가공할만한 원자폭탄을 500기나 갖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참전이 전제된 상황에서 북조선은 결코 전쟁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국이 애치슨선언을 통해 코리아반도의 내전에 참전하지 않겠다고 하는 선언이 나온 이후, 스탈린이나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전쟁물자 지원을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 또한 내전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았기에 전쟁을 반대할 명목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미국은 에치슨선언과는 달리, 유엔을 통해 3일만에 전쟁 참여를 한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전쟁 얘기를 듣자 “코리전쟁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말했다(70쪽), 필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장 시절 미 국무성의 소위 북한인권대사라고 불리는 로버트 킹(Amb. Robert King)을 3번 만난 적이 있다.
한번은 김영주목사(NCCK총무), 노정선목사(연세대명예교수) 그리고 Jim Winkler목사(미 연합감리교 사회부 총무, 이후 미국교회협의회 회장 역임)과 함께 면담을 한 적이 있다. 이때 킹대사가 6.25전쟁에 대한 북조선의 책임을 묻는 얘기를 꺼내자, 필자는 에치슨선언 얘기를 하면서 이건 미국의 계략이 아니었던가? 하고 반문을 하였다. 그러자 곧 바로 킹대사는 “It was a mistake.”라는 발언을 연이어 3번이나 한 적이 있다.(지금도 노련한 정치인이 왜 이렇게 솔직한 답변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도 몰몬교 신자로서 목사 4명 앞에서 거짓을 말하기에는 양심에 가책이 크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1950년 6월 18일 남한 언론에는 공화당 국무부장관 후보인 덜레스가 38분단선을 방문하고 망원경으로 북쪽을 바라다보는 사진을 대서특필한다. 북쪽의 입장에서는 남쪽으로부터의 공격이 곧 있을 것 같은 징후를 느낀다. 그리고 6월 22일 서부전선에서는 국군이 해주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게다가 그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인데, 24일과 25일에 걸쳐 남한군 절반의 군인을 대거 휴가와 외출로 내보낸다. 북조선의 침략이 예상되는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이었고, 당시는 군 비상경계령이 내려져 있던 상황에서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여기에 더하여 24일 저녁에는 공개적으로 미군과 고위 한국군장교들을 위한 거대한 파티를 열어 위장했다. 당시 남한군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철저하게 미 군사고문단의 지휘 아래에 있었던 시절이었다.
4. 왜 스탈린과 모택동은 돕지 않았는가?
6.25전쟁은 이승만정권의 생존보장에 중요하게 작용하면서 동시에 이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 국회연설에서 지적한 바, 당시 미국의 산업은 2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군수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결국 6.25전쟁은 미국에 경제적으로 크게 기여를 한다.
반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는 엄청난 난관을 초래했다. 채 1년이 되지 않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은 6.25전쟁으로 인해 국민당이 장악한 대만을 탈환해 내전을 끝낼 기회의 창이 닫히는 것을 뼈아프게 지켜봐야 했다.”(아브람스, 77쪽) 만약 이때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점령하였다면, 모택동정부는 장개석정부에 이어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바로 꿰찰 수 있었으며, 소련 또한 미국이 오키나와를 이용했던 것처럼 대만을 이용할 수 있었다. 소련 또한 6.25전쟁으로 인해 중국보다 더 큰 손해를 보았다. 당시 미국은 경제불황에 들어갔지만, 오히려 소련의 사회주의 국가경제는 더 나아지고 있었기에 세계 경제에 더 큰 영향력을 주고 있었고, 세계 평화유지를 원했다. 그러기에 김일성의 끈질긴 군사지원 요구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전혀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5. 왜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전쟁을 멈추었을까?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당시 북조선 헌법에 따르면 서울이 수도)을 점령한 후, 최소 3~7일간을 서울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탱크가 한강을 건넌 날짜는 7월 5일이었다. 서울에서 진격을 멈춘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는, 김일성은 이승만에게 통일에 관한 대화를 제안하고 기다렸다는 주장과, 강원도 쪽에서 내려오는 인민군이 국군의 저항에 부딪혀 늦게 합류했기 때문이라는 주장, 그리고 한강철교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한강에 부교를 띄우는데, 한 주간 이상이나 걸린다고 하는 것 또한 비상식적이고, 대전이나 부산을 가기 위해 꼭 한강을 건너야만 갈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우회하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간 중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추측컨대 김일성은 박헌영의 주장대로 서울만 점령하면 민중혁명이 일어나 저절로 통일이 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무력통일보다는 남쪽인민혁명에 의한 자주적 통일이 더 떳떳한 통일 방식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참전은 그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이때 인민군이 서울에서 멈추지 않았더라면 전쟁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28일 서울 점령 당시 미국은 유엔을 통해 참전을 결정한다.
6. 또 하나의 가정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서자 소련군은 퇴각하면서 여러 무기들을 남겨두고 갔다. 인민군은 이를 기반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그런데 전쟁 중에 무기 제공이 있었는가? 지금까지의 결론은 인민군이 소지한 무기는 2차대전 중에 사용되던 무기들이었으며 ,그 이후에 소련에서 개발한 신식 무기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애초부터 미국의 참전을 염려하여 전쟁을 반대했다가, 애치슨선언과 1950년 4월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비록 소수에 불과했지만 원자폭탄을 소유하면서 비록 미국이 참전하더라도 원자폭탄 사용을 자제하리라고 여겨, 김일성의 남침 요구에 마지 못해 동의를 하면서도 전쟁 중에는 어떤 물자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면서 모택동의 지원을 받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택동 또한 대만 점령에 목표를 갖고 있었기에 애초부터 전쟁에 대해 반대를 했으며, 미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오자 방어 차원에서 전쟁에 참여를 한 것이지, 처음부터 전쟁 참여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낙동강전선에서 인민군이 멈춘 이유는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때문이 아니라, 병참 조달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두 나라 중 한 나라만이라도 처음부터 인민군의 전력에 도움을 주었더라면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맥아더 또한 만약 중국이 1.4후퇴 시기가 아니라 그 이전에 보다 적극적으로 북을 지원했더라면, 전쟁은 미군 개입 이전에 끝났을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7. 정전협정에 2년이나 걸린 이유?
1.4후퇴 이후 전선은 이전의 38분단선에서 정체가 되었다. 그리고 정전협정이 시작되었다. 3주 안에 끝날 것으로 여겨졌던 협정은 2년이나 질질 끌게 되는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이 기간동안 미군 폭격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북조선의 모든 도시와 마을들을 공격하여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당시 투하한 폭탄의 양은 63만 톤으로, 이는 5년간에 걸친 태평양전쟁에 투하한 50만 톤보다 많았으며, 이로 인해 북조선은 '달의 표면'처럼 변하였다. 22개 주요 도시 중 18개 도시는 최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모든 도시와 마을은 40∼90%가 파괴되었다. 당시 미 국방부 검열관들이 폭격의 끔찍한 현실을 미국 국민이 모르도록 감추었으며, 이 폭격으로 인해 북조선은 일종의 '유격대 국가'로 변해갔다.(커밍스)
필자가 본 6.25전쟁 기록영화에도 평양시를 내려다본 미군 폭격기 조종사가 관제탑에 이렇게 말한다. “There is no more target, Roger.” 평양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어 있었기에 가지고 간 폭탄을 어디에 투하해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한 미군 장성은 말하기를, 북조선은 구석기 시대로 돌아갔으며 복구에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6.25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북녘 인민들이었다."고 말한 바 있으며, 피카소는 '조선에서의 학살 (The Massacre in Korea)' 이란 제목의 '게르니카' 벽화를 통해 미군들이 황해남도 신천 군민 4분의 1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죽인 사실을 고발하였다. ....(중략)
8. 결국 전쟁의 혜택은 누가 입었나?
Martin Walker라는 영국 기자는 한국전쟁을 가리켜 “유럽에서 백인들 간의 싸움으로 시작된 냉전의 대가를 갈색, 검은색, 노란색 피부를 가진 제3세계 사람들이 치른” 것이라고 했다.(오로지 148쪽)
1952년 밴 플리트장군은 6.25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코리아전쟁은 미국 입장에서는 축복이다. 코리아가 아니라면 또 다른 지역에서 코리아전쟁과 같은 전쟁이 있어야 했다.”(오로지 225쪽) 당시 미국은 2차대전 직후 군수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어 실업률이 높아져 경제불황에 빠져 있었는데, 이를 다시 활성화시킴으로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군사비 지출은 전년도에 비해 4배가 넘었고, 징병제를 실시함으로써, 이는 결국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유럽에 나토 군사동맹이 결성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미국의 산업은 최소 3분지 1 이상이 군수산업이다. 곧 전쟁으로 먹고사는 괴물국가이다. 오죽했으면 카터 전대통령 또한 미국 역사 242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는 기간은 불과 16년에 불과하다고 자탄을 했을까.
결론으로 6.25전쟁은 미국 경제살리기가 주요 목적이었다. ...(중략) 물론 미국만 6.25전쟁으로 덕을 본 것은 아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국가들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6.25전쟁시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
현재 미국 군사무기 수출의 절반을 남한과 일본, 대만 이 세 나라가 차지하고 있다. 코리아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돌면 이 세 나라의 무기 수입은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금도 북 악마화로 인해 미국은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으며 그 희생은 결국 남한사람들이다. 국방비 예산의 절반만이라도 민간복지로 돌릴 수 있다면 국민기본소득의 확대는 물론 전국민교육무상화 정책까지 실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9. 나가면서
지금 세계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가운데 여기 저항하는 중국, 러시아, 중동의 이슬람국가, 쿠바, 베네주엘라, 북조선 등등의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남미는 거의 모든 나라에 사회주의 정책을 실현하려는 좌파 정권들이 실권을 잡았다. 북유럽나라들의 경우는 복지형 사회주의 국가들로 미국식 자본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미국식 시장금융 자본주의는 개인 자유를 극도로 허용하여 부의 불평등이 너무 높아, 자칫하면 민중폭동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는 매년 수천 건의 총기난사는 이러한 불만들이 분출되는 사회적 현상이다.
여기에는 인종차별까지 연계되어 있다. 흑인들이 백인들에 비해 4배 이상 살해당할 위험이 높다. ...이것이 과연 언론자유의 국가인가? ....
남과 북은 5천년의 역사를 공유한 하나의 민족공동체로서, 작금의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를 하나로 엮어낼 때 그 시너지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고, 바로 이러한 새 역사를 바라보면서 함석헌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 그 마지막 문장에서 한/조선의 미래를 이렇게 노래했다.
“거기서 이 수난의 비렁뱅이는 영원의 문전에서 나사로같이 과거의 모든 고통과 업신여김에서 벗어나 위로와 존경을 받을 것이다. 거기서 지난날 큰 길가에 앉아 있던 갈보는 그 받은 고난으로 정화되어 여왕이 될 것이다.”
출처; http://www.min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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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참고로 6.25관련 조 목사님의 글을 올립니다.
내용이 좀 길어서 단락마다 일부 생략했으니, 원문 참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