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14장 금마비(金魔匕)의 출현(出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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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春). 봄은 누구에게나 포근한 느낌을 준다.
대지(大地)를 꽁꽁 얼어붙게 했던 겨울 동안의 혹한도 봄바람에
밀려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터운 속옷을 입
고 겨울 동안 제대로 몸을 펴보지 못하다가 비로소 대지를 녹이는
훈풍과 함께 속옷을 벗어 던지고 사지를 활짝 편 채 거리를 활보
하기 시작했다.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으로 뻗은 관도(官道)는 해동과 함께 얼어붙은 황토가
녹아 질척거렸다.
관도에 한 백의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긴 머리를 등 뒤로 묶어내
린 선풍옥골의 미청년이었다.
하후성은 반듯한 걸음걸이로 남창으로 향하고 있었다. 먼 거리를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조금도 흐트러진 데가 없으며
옷자락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문득 그의 귓전에 은은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두... 두... 두.
고개를 돌리자 멀리 바라보이는 관도 끝에서 수십 기의 인마(人
馬)가 나타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왔다. 하후성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많이 지나는 관도에서 한두 필도 아닌 말들을 저렇게 빨
리 몰다니.'
이십여 기의 말이 질풍같이 질주하며 그를 지나쳤다.
하후성은 길 옆으로 몸을 피하는 한편, 흙덩이가 무수히 튕겨오자
가볍게 운기(運氣)하여 호신강기로 옷이 더럽혀지는 것을 방비했
다.
그는 인마가 지나가자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걸었
다.
그런데 또다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번에는 세 필의 칠
흑같은 오추마(烏騶馬)가 달려왔다.
하후성은 마상 위의 인물을 얼핏 살펴보았다.
세 명의 중년인이 타고 있었는데 개중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은 가
운데 있는 자로 팔 척(八尺) 장신의 구레나룻 수염이 무성한 갈의
를 입은 거한이었다.
그는 체격이 우람했으며 두 눈은 호목(虎目)으로 번갯불같은 신광
을 발산하고 있었다. 또한 등 뒤에는 거대한 철궁과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유성추를 걸고 있었다.
갈의거한도 말이 스치는 찰나 힐끗 하후성을 응시했으나 눈 깜짝
할 사이에 관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또다시 십여 필 가량의 인마가 달려와
하후성을 스쳐가는 것이었다. 결국 짧은 시간에 세 번이나 인마들
이 그의 곁을 지나간 셈이었다.
하후성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일일까? 저들은 누구이며 대체 어디로 급
히 가는 길일까?'
그가 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다시 이번에는 두 필의 희귀
한 연지마( 脂馬)가 달려왔다.
연지마라면 하루에 천 리를 간다는 명마였다. 그런 명마가 한 필
도 아니고 두 필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었다. 실로 굉장한 속도
로 나타난 연지마는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곁을 스쳐 지나
갔다.
하후성은 예리한 안력으로 연지마에 일남일녀가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히히히힝---!
문득 그를 바람처럼 스쳐갔던 연지마가 힘찬 울음소리를 발하며
멈추더니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후형! 하후형이 아니십니까?"
두 필의 연지마는 한 번 껑충 뛰는가 싶자 이내 하후성이 있는 곳
으로 되돌아와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한 명의 준수한 청년이 마
상에서 뛰어내렸다.
가뿐한 남색의 경장을 입은 청년, 그는 바로 당금 사룡(四龍)의
한 명인 옥면가람(玉面伽藍) 남궁수(南宮秀)였다. 뒤이어 뛰어내
린 여인 역시 사봉(四鳳) 중의 하나인 빙심한매(氷心寒梅) 남궁설
지(南宮雪芝)였다.
만리추풍수사(萬里追風秀士) 모용랑(慕容浪).
비응공자(飛鷹公子) 표화운(飄火雲).
옥면가람(玉面伽藍) 남궁수(南宮秀).
적인금붕(赤印金鵬) 황보무룡(皇甫武龍).
이들 네 명의 청년고수들을 일컬어 중원사룡이라 부른다.
만리추풍수사는 개방( 幇)의 차기 방주( 主)로 내정된 신진고수
요, 옥면가람은 남궁세가의 소가주(少家主), 또 적인금붕은 태양
장의 소장주로서 실로 쟁쟁한 명문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비응공자 표화운 만은 출신 내력이 알려져 있지 않은 채
항상 어깨에 비응을 얹고 다니며 병기로는 검(劍)을 썼다.
비파은연(琵琶銀燕) 설미홍(雪美紅).
빙심한매(氷心寒梅) 남궁설지(南宮雪芝).
설금옥향(雪琴玉香) 황보문연(皇甫文娟).
홍의은편날수(紅依銀鞭 手) 팽소령(彭素鈴).
이 네 명의 소녀들이 이른바 중원 사봉이었다.
무공은 물론 미색의 절륜함은 가히 달이 얼굴을 가리고 꽃이 부끄
러워할 정도였으며 하나같이 정파무림의 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 역시 모두 명문의 후예들로써 각기 화산파, 남궁세가, 태양
장, 하북팽가 등의 출신이었다.
하후성은 이전에 이들을 본 적이 있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남궁형이었군요."
남궁수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이런 곳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다
니."
남궁수는 하후성에게 다가와 손을 덥석 잡았다. 그는 진정으로 기
뻐하는 모습이었다. 하후성은 내심 그의 우의에 감동하며 빙그레
웃었다.
"반갑소이다, 남궁형."
남궁수는 약간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천풍보에서 그냥 헤어져 무척 섭섭했소이다."
"소제 역시 마찬가지지요."
하후성이 담담히 말하자 남궁수는 옆에 서 있는 빙심한매 남궁설
지를 향해 말했다.
"설지야, 무엇하느냐? 하후형에게 인사드리지 않고?"
남궁설지의 여전히 싸늘하고 차가운 모습을 본 하후성은 먼저 인
사를 건넸다.
"남궁소저, 반갑소이다."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남궁설지의 차갑기만 하던 두 눈에는 미묘
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약간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
이며 고개를 숙였다.
"소매도 하후소협을 뵈서 반가와요."
남궁수가 하후성에게 물었다.
"참, 하후형께선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시오?"
"남창(南昌)에 가는 길이오."
남궁수는 준미한 눈썹을 치켜올렸다.
"남창? 그렇다면 하후형도 그 일 때문에 가시는 길이십니까?"
"그 일이라니?"
"아니, 그럼 하후형은 아직도 그 사건을 모르시오?"
하후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제는 남궁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아니, 정말 그럼 호(胡) 노선배의 죽음 때문에 조문가는 길이 아
니었단 말이시오?"
"호 노선배?"
"만경루(萬京樓)의 주인인 만사귀재(萬事鬼才) 호불귀(胡不鬼) 선
배님 말이오."
하후성은 흠칫 놀랐다.
"아니, 그럼 만사귀재 그 분이 돌아가셨단 말이오?"
남궁수는 도리어 어이없다는 듯 신음을 발하며 말했다.
"으음, 하후형은 요즘 강호에서 연속되는 살인사건을 아직도 모르
시나 보구려."
하후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가 모두 말씀드리겠소. 요즘 석 달 사이에 강호에서는 일곱
명의 무림고인이 피살을 당했소이다."
"아!"
남궁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림에 혈풍(血風)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석 달 전 수라궁
(修羅宮)이 천하 각 문파와 고수들에게 마존첩(魔尊帖)을 전달함
으로써 혈겁의 회오리가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갑자기 마종지문(魔宗之門)임을 내세워 개파대전(開派大典)을 기
해 무림제패를 선언하려는 수라궁의 야심에 대해 전 무림은 이제
껏 계속된 백 년의 평화가 더이상 지켜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정사를 막론하고 안하무인으로 전 무림을 향해 도전한 마종문의
수라궁.
마존첩이 나돈 후 알게 모르게 전 무림은 각 지역마다 정사군웅들
의 회합이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개인적인 이기심을 버리고 수라궁
에 대해 대책을 상의했다.
바로 이같은 시기에 강호에 의문의 연속 살인사건이 터졌고 그것
은 피를 부르는 시작의 예고였다.
죽림거사(竹林居士).
그는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현자(賢者)로 무림사상 제 일의
현인이라는 귀곡자(鬼谷子)의 두 제자 중 하나였다.
그의 심기(心機)는 추측할 도리가 없이 깊었고 각종 기관지학(機
關之學)에 능통한 지모(智謀)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머무는 대파산(大巴山) 영인곡(靈人谷)의 죽
림헌(竹林軒)에서 그는 피살되었으며 그의 가슴에는 금빛의 비수
(匕首)가 꽂혀 있었다.
독심귀수(毒心鬼手).
그는 독(毒)의 명인(名人)이었으나 실상은 독보다 오히려 귀계와
모계(謀計)로써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데 그도 죽었다. 사지
가 무참히 절단된 채.
역시 그의 가슴에도 금빛 비수가 꽂혀 있었고 그가 죽은 곳은 자
신의 집 서재에서였다.
죽림거사와 독심귀수의 죽음이 시작이었다.
그 뒤를 이어 개방( 幇) 제 일의 모사인 칠절심개(七絶心 )가
죽었고, 또 귀곡자의 둘째 제자인 신타옹(神陀翁)도 연달아 피살
되었다.
복건성(福健省)의 명문 석가(石家)의 가주인 석대선생(石大先生)
의 목 없는 시체.
그리고 황하칠십이채(黃河七十二寨)를 쥐고 흔드는 사해신군(四海
神君) 구양경(歐陽卿)의 수족이자 가장 신임하는 모사, 신안수사
(神眼秀士) 제갈전(諸葛全)도 역시 황하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들의 가슴에도 역시 금빛 비수가 꽂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육 인(六人)의 죽음보다 더 큰 경악을 일으킨 한 사
람의 죽음이 또 발생했으니 바로 오 일 전, 강호 제일의 지자이며
모사의 달인인 만경루의 주인 만사귀재 호불귀가 피살을 당한 것
이었다.
연이은 칠인(七人)의 죽음, 이 의문의 괴사는 강호에 엄청난 충격
과 불안감을 주었다.
금마비(金魔匕).
죽음을 부르는 악마의 비수, 그 금빛 비수를 무림인들은 공포의
금마비라고 불렀고 무림은 극도로 혼란해졌다.
흉수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살인을 하는가? 또한 왜 살인 현장
에 금마비를 남겨두는가?
온갖 의문이 잇달았으나 아무도 해답을 줄 수 있는 자는 없었고
여기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의문이 있었다.
칠절심개나 석대선생은 무림의 절정고수들인 반면 죽림거사나 신
안수사, 만사귀재 호불귀 등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칠명(七名)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 모두가 무림에 알려진 유명한 모사(謀師)들이요, 지계(智計)
의 달인들이라는 점이었다.
무공은 그만두고 그들이 무림에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엄청난 것
이었다.
대체 흉수가 그들을 죽인 것은 무슨 저의가 깔려 있는 것일까?
전 무림인들은 칠인의 공통점을 생각하고 흉수가 노린 것을 짐작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하후성은 모든 얘기를 듣고 아연해졌다.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남궁수는 탄식하며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실로 무섭기 짝이 없는 음모요. 강호 제일의 지자들을 몰
살시키다니, 이것은 가공할 흉계요!"
"이미 이곳 강서성의 군웅들은 호불귀 노선배의 영전 앞에서 다짐
했소.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말이오."
하후성은 침중하게 말했다.
"으음, 그러나 금마비를 남긴 흉수가 누군지 모르지 않소?"
남궁수는 비분강개했다.
"수라궁! 그 신비한 마의 집단인 수라궁을 제외하고 그 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소?"
"......."
"이미 강호의 영웅들은 모두 끓는 피를 참지 못하고 무공산(武功
山) 천마봉(天魔峯)의 수라궁(修羅宮)으로 몰려가고 있소이다."
하후성은 비로소 조금 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음. 이제 보니 아까 그 인마들은 모두 수라궁으로 가는 인물들이
었구나.'
남궁수는 호기롭게 말했다.
"저희들도 이미 아버님을 비롯하여 본가의 숙부님들과 중도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수라궁으로 가는 길이오."
남궁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하후형께서는 수라궁으로 가지 않으시렵니까?"
하후성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며 말했다.
"소제 역시 무림인의 한 사람으로써 어찌 좌시하고만 있을 수 있
겠소이까? 먼저 남창에 다녀온 즉시 가겠소이다."
남궁수는 흔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포권했다.
"하후형, 그럼 저희는 걸음이 바빠 먼저 떠나겠소이다. 다음에 수
라궁에서 뵙겠소이다."
하후성은 마주 포권했다.
"소제도 곧 따르겠소이다."
남궁설지는 지그시 하후성을 응시하다가 남궁수의 뒤를 이어 연지
마 위에 올랐다.
"끼럇!"
두두두두......!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두 필의 연지마는 힘차게 대지를 박차며
관도 저 편으로 사라져 갔다.
하후성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침묵했으나 왠지 마음이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남궁수로부터 들은 의
문의 연속 살인사건이 떠올랐으며 그것은 심상치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후성의 초인적인 지혜와 통찰력은 이미 그 사건에서 가공할 마
영(魔影)을 발견해 내고 있었다.
'그렇다. 예로부터 병법에서 적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장수를 베
라 했다. 정사를 막론한 모든 모사와 지자를 제거한 것은 바로 군
웅들의 가장 중요한 머리를 떼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팔다리
가 남아 있다고는 하나 머리를 잃는다면 그는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후성은 이같이 생각하면서 점차 안색이 무겁게 변해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대흉마의 존재에 대해 그는 한 가닥 막연한 두려움까
지 느끼게 되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암중에 숨어 이같은 계획을 꾸민 자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무서운 자다. 그 자의 지모와 독계야말로 어쩌면 이미
죽은 지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욱 뛰어날지 모른다.'
하후성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다시 무수한 인마가
그의 곁을 스쳐 남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하후성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수라궁. 과연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무튼 백 년 이
래 최대의 가공할 혈풍이 일어날 것만은 틀림없다.'
하후성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선 남창 만경루로 가보자.'
남창(南昌).
강서성(江西省)에 위치한 천하의 명호(名湖) 파양호( 陽湖)를 끼
고 수륙으로 크게 발달한 대도(大都).
남창 사람들은 강남인 특유의 낙천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풍
류를 좋아하고 술을 즐긴다.
만경루(萬京樓).
남창 사람들로써 이 객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남창에 즐비한 주루객점 중에서도 단연 손을 꼽는 만경루를 모른
다면 이미 그 사람은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으로 무시당했다.
그 이유는 만경루가 곧 남창에서 규모가 가장 큰 주루이자 오직
천하에서 만경루에서만 맛볼 수 있는 천일로(千日露)라는 명주(名
酒)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경루는 남창성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면에 삼층의 방대한 주루를 위시하여 후면에 약 일만 평에 달하
는 대지에 건립된 즐비한 고루거각과 객사들. 만경루는 과연 남창
제일의 객점이었다.
만사귀재 호불귀, 이 사람이 바로 만경루의 주인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무공을 전혀 모르면서도 강호
무림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귀신도 놀랄 그의 지모와
계책, 그리고 만사무불통지(萬事無不通智)의 해박한 지식 때문이
었다.
- 만사귀재의 지모를 따라갈 자는 아무도 없다. 귀곡(鬼谷), 만사
(萬事) 중 하나만 있어도 능히 천하를 얻을 수 있으리라.
무림에 떠도는 말, 이것은 귀곡자(鬼谷子)와 만사귀재(萬事鬼才)
가 천하제일뇌(天下第一腦)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만사귀
재 호불귀가 바로 남창제일의 주루인 만경루를 경영한다는 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데 만경루주인 호불귀(胡不鬼), 그가 죽었다.
가슴에 금마비가 꽂힌 채.
만경루 안.
한 명의 백의청년이 앉아 술을 들고 있다.
그가 앉은 삼층의 창가에서는 남창성 내가 환히 보였다. 그는 바
로 하후성으로 만사귀재 호불귀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이다.
호불귀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만경루에는 손님이 꽉 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숙연했으며 조용히 술을 들 뿐이었다.
이 날 만은 모두 공짜로 술을 마시게 허락되었으나 그들은 머리에
모두 조의(弔意)를 표하는 백건(白巾)을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만사귀재 호불귀를 문상 온 조문객들이었다.
하후성은 만면에 침통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계속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천기사숙께서는 나보고 만사귀재 호 노선배를 만나 그에게서 가
르침을 받으라고 했건만.'
그는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만경루는 그대로 있는데 만사귀재는 간 곳이 없구나.'
하후성은 빈 술잔에 술을 조용히 따랐다.
이때 한 명의 청년이 계단을 통해 들어서고 있었다. 하후성의 시
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 쪽으로 향했다. 그의 두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지금 막 삼층으로 올라온 청년의 모습은 눈길을 끌 만 했던 것이
다.
그는 황의를 입은 유생(儒生) 차림이었다. 나이는 이십삼사 세 가
량 되어 보였는데 관옥같은 얼굴에 붓으로 그은 듯한 검미(劍眉)
가 유난히 돋보였다. 또한 얼굴 전체에서 풍기는 기운은 단아하고
점잖아 보였다.
그뿐인가? 키는 후리후리할 뿐더러 중인을 압도하는 분위기는 그
야말로 인중용봉(人中龍鳳)이요, 군계일학(群鷄一鶴) 격이었다.
게다가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의 오른쪽 눈썹 속에 있는 콩알 만
한 붉은 점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그의 풍모를 한층 더 뛰
어나게 해주고 있었다.
청년은 삼층에 올라오자마자 좌석을 찾는 듯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하후성에게 멎더니 두 눈에 기이한 미소
가 일어났다.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하후성에게 다가왔다. 그
는 하후성에게 가볍게 일례를 취하며 말했다.
"형장. 초면에 실례지만 합석을 해도 되겠는지요?"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소생도 때마침 심심하던 차였습니다."
황의서생의 입가에 또 한 번 기이한 미소가 스쳤다.
"감사합니다. 형장."
그는 자리에 앉았다.
"소생은 광동성 출신으로 금악비(金岳飛)라 합니다."
"아, 금형이셨군요. 소생은 하진성(夏鎭星)이라 합니다."
하후성은 왠지 진짜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아 슬쩍 한 자를 바꾸
어 버렸다. 금악비의 눈에 순간적으로 의혹의 빛이 스쳤으나 그것
은 금방 사라졌다.
"하형께서도 만사귀재 호 노선배의 문상을 오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무림말학이지만 무림인의 한 명으로써 어찌 호
노선배같은 기인의 타계를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악비의 눈 깊숙이 의미심장한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형, 소제 역시 호 노선배의 조문을 위해 왔으니 마침 잘 되었
습니다. 소제와 함께 고인의 영전에 예를 표하는 것이 어떻습니
까?"
하후성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현기서린 두 눈에 담담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만경루의 후원.
이곳은 만경루에서도 가장 훌륭한 곳이었다. 커다란 가산과 호수,
그리고 화려한 누각, 정자 등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만경루의 후원은 수많은 기화요초의 향기로 이곳
을 찾는 손님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름답던 후원이 만사귀재 호불귀의 죽음을 애
도하는 문상객들의 침통한 표정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만사각(萬事閣).
이곳은 만경루의 후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과거 만사귀재 호불귀가 그의 절친한 벗과 함께 천일로를 마시며
천하정세를 논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이제 고인의 빈소로
화하고 말았다.
하후성과 금악비는 만사각으로 들어섰다.
만사각에는 독립된 문이 있었고 문 앞에는 구순(九旬) 가량의 청
의노인이 탁자에 방명록을 놓고는 붓을 들고 앉아 있었다.
청의노인은 두 눈이 깊고 지혜로와 보이는 청수한 용모였으나 하
후성과 금악비가 다가가자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두 분 소협의 이름은 어찌 되시는지? 방명록에 적어주시기 바라
오."
하후성이 먼저 붓을 받았다.
- 하진성(夏鎭星).
방명록에 적힌 웅후수려한 필체에 노인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
다. 또한 금악비가 자신의 이름을 썼을 때에도 역시 청의노인의
눈빛은 기이하게 빛났다.
두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 노인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자명(子明)."
"네!"
한 중년인이 나타났다.
"조금 전에 들어간 두 명의 청년을 주의해라."
"옛?"
"그들은 모두 대단한 고수들이다. 그런데 노부 천안통수(天眼通
)는 현 무림고수 일만 명 가운데 그들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
다."
중년인의 안색이 변했고 청의노인 천안통수는 다시 당부했다.
"그리고 불범(不凡)에게도 알려라. 태행삼호(太行三虎)를 조심하
라고. 그들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네. 숙부님."
중년인은 급히 허리를 숙인 후 안으로 사라졌다.
천안통수의 두 눈에서 현기가 일어나더니 문득 붓을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호형님. 지하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으십시오. 소제가 필히 원수
를 갚겠습니다."
천안통수의 두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번쩍였다.
천안통수(天眼通 ) 마운로(摩雲老). 그는 극히 괴이한 기인으로
타고난 천안과 무서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평생에 단 한 번 스
쳐본 사람일지라도 얼굴을 기억했다.
그는 강호인들 수만 명의 명호와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며
만사귀재 호불귀와는 의형제(義兄弟) 지간이었다.
빈청(殯廳).
그곳은 온통 엄숙하고 비통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넓은 대청은 사방 벽이 모두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중앙에는
백포(白布)로 감싸여진 관이 놓여 있었다.
빈상 위에는 커다란 향로와 촛불이 켜져 있었으며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빈상에 분향하는 조객들은 줄지어 빈청 밖에 서 있다가
차례로 다가와 절을 하곤 했다.
흰 관 옆에는 한 명의 상복을 입은 이십 세 가량의 청년이 무릎
꿇은 채 비통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안색이 백납같이 창백했으나 용모가 여인을 방불케 할 정도
로 준수하여 만일 여장을 하고 머리를 풀어 헤친다면 영락없는 미
녀로 보일 정도였다.
하후성은 금악비와 나란히 선 채 조객들이 차례로 조상하는 모습
을 지켜보았다. 조객들은 대부분 침통하고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하후성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음. 호 노선배는 비록 무림인이 아니지만 수많은 무림인과 교분
을 맺고 있으며 정사를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준 호인
(好人)이라더니 이 조객들을 보니 정말 그렇구나.'
그러나 금새 하후성은 움찔했다. 조객들 중에 정반대로 좋지 않은
표정과 살기 띈 눈빛을 한 인물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침 조상할 차례가 된 세 명의 장한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공손히 향에 불을 붙이고 절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과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우리 태행삼호(太行三虎)는 비록 호 노선배님을 생전에 뵙지는
못했지만 항상 존경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돌
아가시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그럴 듯한 말을 했고 조객들은 그 말에 모두 비
통과 공감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태행삼호는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갑자기 벼락같이 관을
향해 동시에 장력(掌力)을 뻗는 것이 아닌가?
"앗! 무슨 짓이냐!"
조객들은 이 뜻밖의 상황에 대경실색했다.
우지끈--- 펑!
그러나 관은 이미 그들 삼인이 작렬한 장력에 박살이 나고 말았
다. 더욱 놀라운 일은 바로 그 순간에 벌어졌다.
관이 박살나면서 그 속에서 한 줄기 혈영(血影)이 섬전처럼 솟구
쳐 나온 것이었다. 혈영의 몸에서 붉은 검광(劍光)이 뻗었다.
"으악! 컥!"
태행삼호 중 두 명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거꾸러졌다. 한 명은 머
리가 달아나고 한 명은 허리가 두 동강이기 난 비참한 죽음이었다.
비로소 멈추어 선 혈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한 명의 피처럼
붉은 혈의를 입은 괴노인으로 나이는 대략 칠순(七旬)으로 보였다.
그는 얼굴이 온통 검상(劍傷) 투성이로 징그러울 정도였으며 그의
수중에는 다섯 자 길이의 긴 혈검이 뱀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조객들 중 누군가 놀라 외쳤다.
"아! 혈의마검(血依魔劍) 공손패(公孫貝)다!"
"삼십 년 전 사라졌던 저 자가 다시 나타나다니!"
혈의마검 공손패는 사파의 절정고수로 나이는 이미 백 세에 가까
왔다.
당금 사도무림에는 가장 큰 세력인 남맹북단(南盟北檀)을 제외하
고 백 년 간 유지되어 온 집단, 즉 이곡(二谷), 일교(一敎), 일회
(一會)가 있었으며 그 중 이곡이란 백독곡(百毒谷)과 혈영곡(血影
谷)이었다.
혈의마검 공손패는 바로 혈영곡의 삼대곡주(三代谷主)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삼십 년 전 활동을 중지했었다.
혈의마검 공손패는 음침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괴검을 뻗었다.
슉---!
축 늘어져 있던 검끝은 창끝처럼 빳빳해지며 살아남은 한 명의 태
행삼호의 목구멍을 찔렀다.
"큭!"
삼호의 우두머리인 대호(大虎)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으나 피만
나왔을 뿐 구멍이 뚫린 것은 아니었다. 공손패가 적당한 깊이에서
손을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공손패는 벌벌 떠는 대호를 제압한 후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한 명도 움직이지 마시오."
조객들은 그 말에 모두 안색이 변했다. 흑도 거마인 혈의마검 공
손패의 행동에 대해 그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이때 이제껏 조용히 관 옆에 앉아 흐느끼고 있던 상복청년이 일어
나더니 조객들에게 청량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조부님을 시해한 흉수를 찾
기 위한 것이니 다소 억울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조객들은 웅성거렸고 누군가 외쳤다.
"호소협! 염려마시고 흉수를 찾기 바라오."
상복청년은 아름다운 얼굴에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
호불범(胡不凡). 그는 바로 만사귀재 호불귀의 손자로 이미 수년
전부터 강서성(江西省) 일대에서는 꽤 명성을 쌓고 있었다.
무공을 익혔는지 안 익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는 무림인들 속
에서 조부에 못지 않은 지략(智略)과 지식으로 점차 큰 위치를 차
지하기 시작한 유능한 청년이었다.
특히 그는 여인보다 더 고운 피부와 아름다운 용모로 남창 일대에
서 무수한 낭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하후성은 흠칫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금악비가 입가에 한
가닥 조소를 짓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호불범이 예의 청량한 음성으로 중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말고 계셔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방 벽에 쳐진 흰 천 뒤에는 혈의삼십육궁(血依三
十六弓)이 혈천궁(血天弓)을 겨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객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혈영전(血影箭)이 발사될 것입니다."
"아!"
조객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변했다.
혈의삼십육궁(血依三十六弓), 그들은 누구인가?
삼십 년 전 혈의마검 공손패가 거느리던 혈영곡의 무서운 고수들
가운데 삼십육 명의 궁노수(弓弩手)가 있었다. 모두 태어나서부터
오직 궁법(弓法) 만을 익힌 궁술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혈천궁으로 발사하는 혈영전은 실로 가공무비한 위력을 지
니고 있었다. 전혀 소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강기(內家剛氣)
를 전적으로 파괴하며 설사 강철이라도 소리없이 관통하는 것이었
다.
조객들은 모두 두려움이 어린 시선으로 빈청의 사방벽에 늘여져
있는 흰 천을 둘러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전혀 사람이 숨어
있는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호불범이 맑은 음성으로 밖을 향해 말했다.
"마숙부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빈청 위로 청의노인이 올라섰다. 그는 바로 문 밖에서 방
명록을 관리하던 천안통수 마운로였는데 그는 손에 방명록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방명록을 펼치며 창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노부가 부르는 사람은 밖으로 나가도 좋소."
그는 줄줄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빈청 안의 조객은 모두 줄잡아 백여 명은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잔뜩 마음을 조이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기를 빌었다.
마침내 약 일 각의 시간이 지나자 빈청에 남게 된 인물은 불과 십
오 명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 속에는 하후성과 금악비도 포함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운로는 바야흐로 방명록을 덮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혈의
마검 공손패가 나서며 음침하게 말했다.
"흐흐흐... 노부는 평생 아무에게도 은혜를 받은 적이 없었다. 단
지 돌아가신 호대형 만이 유일한 은인이다. 그런 그를 죽이다
니... 내 복수를 다짐하며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혈영곡에서 나
왔다!"
그는 빈청에 남아 있는 십오 명의 인물들을 노려보며 살광을 폭사
하다가 수중의 혈검을 밀었다.
"으윽!"
태행삼호 중 대호가 진저리를 치며 피를 흘렸다.
"자! 죽기 싫으면 말해라. 분명히 이곳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너
와 같은 무리들이다. 저들 중 우두머리가 누구냐?"
"으으."
대호는 목에서 나온 피로 전신이 물든 채 신음을 토했다.
"빨리 말해라!"
스슷!
혈검이 그의 목에 더 큰 상처를 냈다.
"으윽!"
대호는 비명을 질렀고 피가 무섭게 치솟았으나 공포에 질리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모, 못한다."
"흐흐흐... 네 놈은 아직도 두려움을 모르는군!"
쉭!
"아악!"
혈광이 번뜩인 순간 대호의 팔이 어깨로부터 베어져 떨어졌다.
"크흐흐... 다음은 검이 너의 목을 가르고 심장을 토막낼 것이다.
자, 그 전에 어서 말해라."
혈의마검 공손패는 실로 잔인한 인물로 한 번 한다면 하늘이 무너
져도 해낼 위인이었다.
마침내 대호는 더 이상 육체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감당할 수 없
었던지 남은 한 쪽 손을 쳐들었다.
"마, 말하겠소. 그는 바로... 으악!"
놀랍게도 말이 끝나기도 전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가 십오 명의 조객들 중 누군가를 가리킨 순간 금빛이 번쩍 하
더니 그의 이마에 한 자루의 금빛 비수가 깊이 박힌 것이었다.
공손패는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금마비!"
혈의마검 공손패의 경악성에 중인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특히 호불범의 신비한 눈에서는 살기가 번쩍 빛났으며 천안통수의
두 눈은 무섭게 부릅떠졌다.
공손패는 이미 벌렁 쓰러져 죽은 대호의 이마에서 금빛 비수를 쑥
뽑았다.
"금마비, 과연 나타났구나!"
그의 음성에는 무서운 살기와 분노가 깃들어 있었고 천안통수 마
운로가 갑자기 음산하게 외쳤다.
"독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라고 했다. 공손형, 이곳에 있는 자들
은 모두 틀림없는 수라궁의 마도들이오. 혈영전을 발사하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공손패의 흉측한 검상투성이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좋다. 혈의삼십육궁, 혈영전을 발사해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
라!"
빈청 안의 십여 명 인물들은 안색이 홱 변해 모두 무기를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무기가 완전히 뽑히기도 전, 그들을 향해 사
방에서 붉은 빛이 섬전처럼 쏟아졌다.
"으--- 악!"
처절한 비명이 연달아 일어났고 우박처럼 쏟아진 혈광은 그들의
급소를 정확히 관통시켜 버렸다. 어떤 자들은 용케 한두 개의 핏
빛 화살을 움켜쥐었으나 역시 목이 관통되고 심장에 구멍이 뚫리
며 전신이 구멍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변이었으나 하후성은 금마비가 대호의
이마에 꽂혔을 때 이미 금마비를 전개한 흉수(凶手)가 누구인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이 자가?'
하후성은 금악비의 소매 속에서 소리도 형체도 없이 금마비가 날
아간 것을 보았고 그것은 오직 그만이 발견할 수 있었다.
크게 배신을 당한 기분과 함께 분노심이 가슴을 진동시켰으나 천
하에서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정력(定力)이 굳은 그는 이를 내색치
않고 있었다.
하후성은 다만 묵묵히 손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파팟!
두 자루의 혈영전이 손에 잡히자 그는 손바닥에 찌르는 듯한 통증
을 느끼고 놀랐다.
'대단한 내공이다! 한낱 화살에 이토록 무서운 힘이 깃들어 있다
니.'
이제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고 빈청에는 오직 그와 금악비
만이 남아 있었다. 금악비 역시 자신에게 날아오는 혈영전을 가볍
게 잡아채고 있었으며 지극히 여유롭고 태연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혈영전의 공세가 그치고 공손패는 두 사람을 노려보며 음
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네 놈들 중 한 놈이 조금 전에 금마비를 전개한 것이
틀림없겠지?"
금악비는 미소를 지으며 경멸하듯이 물었다.
"공손패, 그대가 그것을 물어볼 자격이 있을까?"
공손패의 안색이 흉칙하게 일그러졌다.
"흐흐흐... 이 건방진 애송이 놈!"
그는 외치자마자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듯 수중의 혈검을 뻗었다.
쉬익!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혈광이 번개처럼 금악비의 목을 찔러갔으
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더니 오른손을 들어
슬쩍 한 바퀴 돌렸다.
위잉!
무서운 소용돌이가 일며 무형의 장력이 공손패의 공격을 차단시키
며 날아갔다.
쾅!
"으윽!"
공손패는 가슴에 거센 충격을 느끼며 뒤로 이 보(二步)나 밀려갔
다. 그의 안색은 대변했으며 온통 경악에 일그러진 얼굴로 금악비
를 노려보았다.
"이, 이럴 수가? 네, 네놈이 쓴 무공은 바로 와선장(渦旋掌)이 아
니냐?"
그 말에 중인들 역시 안색이 대변했고 천안통수 마운로가 대경하
여 부르짖었다.
"와선장! 부, 불사지존(不死之尊)의 와선장 말이오?"
공손패는 여전히 경악성으로 말했다.
"그렇소. 이 자의 무공은 틀림없이 불사지존이 지난 날 사용했던
와선장이오!"
불사지존(不死之尊)이라면 이백 년 전(二百年前) 천하를 휩쓸던 천
마교주(天魔敎主) 벽안마희의 남편이요, 천 년 무림사상 최강이라는
육대천마의 일인이 아닌가?
그런데 금악비의 손에서 그의 가공한 마공이 시전되다니 실로 놀
라운 일이었다.
하후성도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으음. 이 자가 불사지존의 무공을 익혔다니...... 그럼 그 노마
의 제자라도 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