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八 章 승자(勝者)는 누구인가?
청청은 정신이 조금 들자 갑자기 원승지가 옥진자의 칼에 찔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성이 나서 외쳤다.
『네 놈이 우리 오빠를 찔러?』
그리고 동시에 가슴 속에서 철관을 꺼내 마개를 뽑고는 힘껏 옥진자를 향하여 던졌다. 작은 금사(金蛇)가 튀어나와 입을 벌려 옥진자를 물으러 갔다.
옥진자가 급히 고개를 숙이고 피하였으나 이 작은 금사는 괴이한 속도를 구사했다. 공중에서 밑으로 떨어지자마자 다시 옥진자의 머리를 향해 물으러 날아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작은 금사의 공격에 틀림없이 피할 수가 없어 물렸겠지만 그 자에게는 불진이 있었다. 불진이 한 번 날자 금사를 휘감았다.
위기를 모면한 옥진자는 '내공을 써서 금사를 멀리 던지는 순간 저놈이 틀림없이 그 틈을 이용하여 공격해 들어올 테지?' 하는 생각으로 금사와 함께 불진을 땅에 던져 버리고 몇 걸음 물러났다.
원승지는 너무 오래 싸울 수 없어서 무슨 검법을 써야 상대를 이길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나타난 금사를 보자 뱀을 잡던 거지의 일이 생각났다.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눈밭에서 큰 뱀과 작은 뱀의 싸움이 있었다. 그 작은 뱀은 기가 막히게 영리하고 민첩한 공격법을 구사했었고 금사랑군이 전수한 검법과 유사한 것이 많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 이상 주저할 것도 없다고 판단하여 검을 따라서 천천히 공격해 나갔다.
옥진자가 수비의 태세를 취하려 하는데 그의 검법이 갑자기 괴상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철검문의 신행백변도 아니었다. 엉겁결이었지만 힘껏 저항했다. 그의 검법과 몸놀림은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괴상한 공격법은 흡사 누에가 실을 뽑듯 끊임없이 이어졌다.
옥진자는 경악 속에서 계속 후퇴만 할 따름이었다.
원승지의 금사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공격해 나갔다. 그는 옥진자의 걸음걸이가 약간 혼란해짐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치며 몇 번의 공격을 맹렬하게 퍼부었다.
그는 금사검을 이용하여 금사만도(金蛇萬道) 공격식을 썼는데 비록 한 번이지만 그 한 번 속에는 수백 개의 공격술이 동시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
옥진자는 상대방의 공격이 어느 길로 오는지 분명치가 않아서 황급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옥진자는 크게 놀라서 급히 머리를 숙여가며 계속 피하고 있었는데 쩍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카락이 이미 잘려져 나갔다. 원승지의 왼손바닥이 따라 나가서 힘 있게 그의 가슴을 찍어 내렸다.
이 장풍은 화산파 본문에서 비전(秘傳)되어 온 혼원장(混元掌) 공격식이었다.
옥진자는 입에서 선혈을 토하면서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몸을 추스리려는 순간 갑자기 머리에 아픔을 느꼈다. 바로 조금 전에 불진과 함께 땅에 던졌던 작은 금사가 그를 꽉 물고는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깊은 내공은 원승지의 혼원공의 공격을 막아내 중상을 입었을 뿐 목숨에까지 지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금사의 독은 순식간에 그의 혈맥을 타고 내려갔다. 더구나 머리 뒤편의 천주혈(天柱穴)을 물렸으니 온몸이 숯처럼 까맣게 굳어져 갔다.
그만 죽은 것이었다.
접전의 격투는 그렇듯 치열하고 오랜 시간이었지만 죽음은 허무할 만큼 순간적이었다. 그렇게 간단히 죽어버리다니……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제자들은 맥이 풀렸고 원승지의 검술에 탄복할 뿐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깨고 풍난적이 원승지에게 달려와 절을 했다.
『사숙님! 이 제자가 저지른 무례함을 부디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원승지는 싸움에 지쳐 있었고 그의 몸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제자들이 황급히 그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이 풍난적의 머리로 흘러 내렸다. 손중군은 큰 돌을 몇 개 들어다가 옥진자의 시체 위에 눌러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저의 분을 풀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사숙님.』
목상도인은 계속 탄식을 하더니 벙어리를 시켜서 옥진자의 시체를 안장시켜 주도록 했다. 그리고 작은 철검을 어루만지며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원래 옥진자와는 옛날에 같은 문하에서 무예를 배우고 있었다. 나중에 나는 길을 달리했지만…… 그들은 이 파를 철검문(鐵劍門)이라 불렀었고 그들의 조사가 사용했던 철검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것을 '장문의 보물(長門之寶)' 이라고 불렀다. 어느 해 그들의 사부가 서장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 철검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옥진자는 처음에는 무예를 배우는데 매우 열심이었고 모든 일에 정도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사부가 죽자 아무도 그를 지도해 주지 않고 잡아주지 않게 되어 결국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는 아주 어려서 집을 떠났지만 여색을 가까이 해 본 적이 없었으며 자신의 중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떠돌기를 오래 하더니, 간음을 일삼는 등 온갖 비행을 다 저지르고 다닌다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지난 일을 돌이켜 이야기해 주는 목상도인은 고적한 모습이었다. 옥진자의 무예는 아주 높은 편이어서 그 누구도 당해 낼 재주가 없었다고 했다.
목상이 결국 그와 한바탕 다투고는 두 번을 결투한 끝에 끝내 둘은 절교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옥진자는 싸움에서 사형을 이길 수가 없게 되자 멀리 서장으로 가서 한편으로는 무공을 단련하면서 암암리에 잃어버린 철검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 철검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들의 규칙에 의하면 철검을 보게 되면 그 누구라도 사조를 보는 듯이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철검을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본문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었고 본문의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그의 명령과 처분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목상이 남경에서 원승지와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옥진자가 철검을 찾아냈다는 소식을 들었었고, 그 일이 나중에 재앙의 불씨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방법을 궁리하던 끝에 빠른 시일 내에 그 철검을 몰래 빼앗아 올 것을 마음먹었다.
그가 서쪽으로 떠난 지 오래지 않아 황산(黃山)에서 바둑의 명수를 하나 만났다. 그는 지면 질수록 승부욕이 솟구쳐 바둑을 두느라고 몇 달을 그곳에서 보내고 말았다. 그 바둑의 고수는 목상의 끈기가 가상하여 두 판을 거짓으로 져 주었다. 그제 서야 목상은 그곳을 떠났지만 계획했던 일은 형편없이 차질을 빚고 말았다는 것이다.
목인청이 그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한숨을 쉬면서 홍낭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들이 아까 왜 너를 추적해 왔느냐?』
홍낭자는 땅에 엎드려 절을 하더니 울면서 말했다.
『어르신께서 제발 제 남편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원승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는 급히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다.
『형수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형님께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홍낭자는 흐느끼듯 하소연했다.
『오삼계가 만청 달자와 결탁을 한 뒤 산해관을 공격해 들어왔지요. 틈왕은 접전에 불리하자 군대를 이끌고 북경을 떠나 버렸고 지금은 서안(西安)에 가 있습니다. 승상 우금성과 군대장, 유종민 등이 틈왕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지요. 그이가 틈왕을 시기하여 모반을 일으켰다고 모함했습니다. 틈왕은 곧 그이를 체포해서 죄를 묻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도망쳐 나와서 그이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유종민이 부하를 풀어 제가 도망쳐 나오는 동안 계속하여 저를 추격해 온 것입니다.』
일행들은 청나라 군대가 이미 국경을 넘어 와서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리에 모두 갑자기 청천하늘에 벼락이 치는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원승지는 몹시 다급해져서 외쳤다.
『우리 빨리 가서 이장군을 구합시다! 한 발이라도 늦으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잖아요?』
말을 하고 달리 생각해보니 이번에 사부가 화산모임을 연 것은 분명히 긴요한 일을 상의할 계획이었다는 듯해서 선 뜻 북경으로 달려갈 수도 없었다.
목인청이 말했다.
『모두 다 도착했으나 빨리 가서 먼저 일을 처리하도록 하자.』
그러면서 그는 풍사조 이용을 불러 향촉에 불을 켜게 했다.
제자들이 하나 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하척수는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원승지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목인청이 살며시 웃으며 하척수에게 말했다.
『네가 우리 파에 속하려면 무공으로 한 번 겨뤄야 하는데 너는 이미 강호를 종횡무진하게 풍미하였다. 아까 숲 뒤에서 네가 옥진자와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만일 네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그에게 죽거나 다치고 말았을 것이다. 너는 나를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지 않아. 내가 한 번 밀면 네 발짝쯤 흔들거리다가 바로 설 수 있을 게다. 우리 파에서 내가 가르친 세 명의 제자를 제외하고 아직 네 번째는 없는데…… 좋다, 좋아! 너도 나의 문하가 되고 싶거든 무릎을 꿇어라.』
하척수가 크게 기뻐했다. 그녀는 원승지 뒤에서 풍사조 이용을 향하여 연상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사부님은 말씀이 부드럽고 참으로 인자하시군.)
간단한 예식이 끝난 후 목인청은 중앙에 서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나이 이미 늙어서 이제 더 이상 문파의 일을 맡아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오늘부터 화산파의 모든 일을 황진에게 맡기겠다. 앞으로는 그를 따르도록 하라. 그리고 계속해서 화산파의 무공을 이어 나가도록 하라!』
이 같은 중대사를 갑자기 듣고 있던 황진은 깜짝 놀라면서 급히 말했다.
『제자의 무공은 둘째와 셋째 아우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인청이 가로막으며 말했다.
『문파를 관리하는 일은 여러 제자들을 잘 다스리며 무협사로의 의리를 행하면 되는 것이니 여러말 말고 행하도록 하라.』
황진은 두 번 다시 사양할 수 없었다. 그는 사부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문파의 상징인 도장을 인수 받았다.
원승지는 오늘 모임의 중대사가 이미 치루어진 것을 보고 의형이 걱정되어 청청을 향해 말했다.
『청청은 여기에서 휴양을 취하시오. 나는 의형을 구출한 다음 다시 이곳으로 오겠소.』
청청은 원승지의 이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아구만을 쳐다보며 분한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렸다.
아구가 청청의 마음이라도 꿰뚫은 듯이 그녀에게로 걸어오면서 나지막히 말하였다.
『청청, 이제는 나를 미워하지 말아줘…….』
그러면서 자기의 손으로 가죽모자를 잡아당기니 그녀의 머리가 빡빡 깎여 있는 게 아닌가.
아구는 아버지를 잃고 나라도 망해 갈 곳이 없는 신세라고 생각했었다. 거기다가 하척수로부터 원승지가 청청에게 마음이 있다는 귀띔을 듣고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해 도중에서 몰래 삭발을 하고 출가하기로 결심하였었다.
일행은 그녀의 갑작스런 삭발 모습을 보고 모두 의아해 했다. 그중에서도 청청은 창피한 마음까지 들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원승지도 너무도 깜짝 놀라 어찌해야 좋은지 몰라 했다. 뭐라고 몇 마디 위로를 해주고 싶었으나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만 좋을지 몰라 했다.
목상이 갑자기 말했다.
『이 늙은이는 우리 파에 그 동안 사고도 많았고 마음에 꺼리는 바도 적지 않아 지금까지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었소. 이제 우리 파내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고 아구가 때마침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으니 괜찮다면 그대를 내 제자로 삼아 몇 가지 무예를 전수시키고 싶은데 그대의 의향은 어떻소?』
아구는 얼굴에 흡족한 웃음을 띠며 목인청을 향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훗날 그녀는 목상의 무예를 다 배워 청초(淸初)의 유명한 여협객이 된다. 강희 초년의 기인 위소보(韋小寶)보다 유명한 감봉지, 백태관, 여사랑 등이 모두 그녀의 문하에서 배출된 협객들이다.
원승지가 사부와 사형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이암을 구하러 떠나려 하자 목인청이 말했다.
『이장군은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서 피해를 입고 틈왕의 의심까지 사고 있다. 만일 이 일이 잘못되면 틈왕에게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년간 쌓아온 의리도 상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틈군 내에 불화를 일으켜 대업을 그르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삼계가 만청을 이끌고 입관했으므로 틈왕은 역경에 처해 있다. 너와 이장군의 사이가 비록 각별하다고는 하나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점 명심토록 하라.』
그때 황진이 말했다.
『아우는 항상 몸조심하시오. 우리가 장사를 하면…….』
그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미 자신이 화산파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예전처럼 농담을 지껄일 수가 없다는 것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원승지는 몸을 굽혀 인사를 하고 홍낭자, 하척수, 벙어리, 홍승해 등을 데리고 출발을 서둘렀다.
청청이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며칠만 지나면 상처는 완전히 낫는다고 장담하면서 같이 갈 것을 고집하여 그는 승낙하고 말았다.
하척수가 아직 독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자기가 치료해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최추산, 최희민, 안대낭, 안소혜도 같이 가기를 청했으므로 동행하게 되었다.
원승지는 아구 앞으로 다가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구 동생, 앞으로 몸조심해요. 앞으로…….』
아구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않더니 한참 후에야 볼멘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저, 저는…… 이미 출가한 몸이에요…… 법명은 구난(九難)이라고 해요.』
그녀는 잠시 후 표정이 밝아지면서 또렷이 말했다.
『당신도 몸조심하세요.』
원승지 일행 열 사람은 화산을 떠나 서안으로 질주하였다. 모두들 이암을 구출하기 위하여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말굽에 박차를 가하였다.
첫날, 그들은 황혼녘에야 위남에 당도했다. 어수선하면서도 침울한 분위기가 마을 어귀에 맴돌았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살펴보니 천여 명의 틈군들이 한 무리의 민간인 부역자들을 재촉하며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부역자들은 모두 하나씩 무거운 짐들을 지고 힘없이 따라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주검과 같이 느껴졌다. 힘에 겨워 헉헉대는 소리는 저승의 바람소리 같았고 등에 진 짐뭉치는 영원히 떨쳐 버릴 수 없는 속세의 업보 그것 같았다.
틈군들은 손에 채찍을 하나씩 들고서 동물들을 다루듯 마구 휘둘러 부역자들을 재촉해 댔다.
어떤 늙은 부역자가 걸음을 휘청거리면서 쓰러지는 바람에 지고 있던 바구니가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 속에 들어있던 많은 금은과 패물, 장신구 등이 굴러 흩어졌다.
그러자 젊은 병사가 화를 내면서 미친 듯이 욕을 퍼붓더니 달려들어 그 노인을 갈겨댔다. 선혈이 낭자하도록 발로 차대는 것이 아닌가!
청청은 그것을 보고 분에 못 이겨 말했다.
『저렇게 백성을 못살게 구는 것도 의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하척수가 말했다.
『저 금은보화도 사실 백성들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겠지요?』
분노한 청청의 목소리는 컸다. 그래서 몇 사람의 틈군이 그 소릴 듣고 말았다. 병사 몇 명이 돌아서며 흉칙한 욕을 해댔다.
그러자 그 중의 한 병사의 얼굴이 역하게 실룩거리며 외쳤다.
『저런 년들은 모두 갈보들이야. 데려 가도록 하자.』
그러자 나머지 십여 명의 병사들은 좋다고 환호성을 치면서 청청, 하척수, 안대낭, 안소혜, 홍낭자 등 다섯 명의 여자들을 끌어 당겼다.
홍낭자는 얼굴을 붉히며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을 빼 그 중 두 명의 병사를 향해 휘둘렀다.
그때 원승지가 말 위에서 저지시켰다.
『빨리 떠나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틈군들을 적당히 따돌려 일행들을 데리고 떠났다.
틈군들은 금은을 버리고 쫓기가 싫었으므로 뒤에서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면서 욕을 퍼부어 댔다.
홍낭자가 치를 떨면서 탄식했다.
『우리의 군대가 북경에 들어오면서 군기가 문란해지고, 그저 재물이나 약탈하고 부녀자들이나 강간하고 있으니 명조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고?』
최추산도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틈왕이 왜 병사들을 풀어 놓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자 홍낭자가 또 냉소하며 말했다.
『틈왕 자신도 오삼계의 애첩 진원원을 빼앗아 갔어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도 있듯이 그래가지고서야 어찌 부하를 다스릴 수 있겠어요? 오삼계도 이미 투항을 하려고 결정을 했었는데 틈왕이 애첩을 빼앗아 가자 앙심을 품고 달자병으로 들어갔답니다. 달자병과 오삼계의 연합군이 쳐들어오니 틈왕은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섰고 양쪽은 크게 한바탕 붙어서 싸웠대요. 우리 군사는 적병에 비해 몇 배나 숫자가 많았지만 약탈해 온 금은보화와 여자들 생각에 죽지 않으려고 눈치만 살폈다고 해요. 이번 싸움에 틈군이 이긴다면 그것은 정말 하늘이 무심한 탓이지요.』
얼마 안가서 길가에 어떤 노부인이 시체 옆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시체는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두 명의 어린애까지 모두 네 식구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몸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 전에 피살된 것이었다.
그 노부인이 통곡하였다.
『이공자! 이 거짓말쟁이! 네가 뭐라고 말했느냐? 뭐라고? 빨리 빨리 문을 열고 틈왕에게 절을 하라고? 그러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환영을 할 것이라고? 그래 우리 집 사람들은 모두 문을 열고 틈왕에게 절을 했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틈왕의 부하 도적들은 강도질을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며느리를 망쳐 놓고, 아들과 손자들을 죽여 놓다니! 우리 집 식구가 모두 여기에 널려 있다. 이공자! 네가 한 번 보거라. 이것이 바로 환영을 한다는 것이냐? 난 60년간을 보살에게 불공을 드렸다. 관세음보살, 당신이 이 늙은이를 잘도 보살펴 주시는구려! 관세음보살, 당신은 사람에게 등 돌리고 틈왕의 도적들과 한패가 되었구려!』
원승지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큰길로 가자면 더 심한 참사가 많을 것이 뻔하여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더 지나가니 위남에서 그리 멀러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말 울부짖는 소리가 나고 어떤 사람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일행들이 말을 몰아 달려가 보니 20여 명의 틈군들이 세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세 사람들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나머지는 이리저리 잘려 나가고 있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틈군들이 소리쳤다.
『이놈들을 죽여라! 금은보화를 잔뜩 가지고 있구나. 누구든지 먼저 빼앗으면 그 사람이 임자다!』
최희민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뭐라고? 가진 사람이 임자라고? 이것들이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앞으로 뛰어나가 칼을 뽑아 들고 틈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를 이어 벙어리, 홍승해, 최추산 세 사람이 따라서 칼을 뽑아 들자 20여명의 틈군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세 사람은 모두 부상을 당했는데 그중 무공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칼을 땅에 떨어뜨리며 허리를 굽히고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최추산을 바라보고는 반색하며 물었다.
『혹시 성이 최씨가 아닌지요?』
최추산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처럼 훌륭하신 분께서 어떻게 저를 알아보시는지 모르겠군요?』
그 사람이 말했다.
『소인은 양붕거이고 저 분은 장조당, 장공자입니다. 10년 전에 우리 세 사람은 광동 성봉장에서 원독사의 제사를 지낼 때에 최협객께서 몸을 날려 도적들을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그 후로 몇 년이 흘렀지만 당신의 권법과 장법을 본 이후로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추산이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산종(山宗)의 친구분이시로군요. 빨리 원공자에게 인사를 드리도록 하세요.』
장조당과 양붕거는 앞으로 나아가 원승지를 만났다. 그들은 원독사의 부하가 아니고 그저 손중수와 응송 등을 따라 성봉장에 올라왔을 뿐이었다.
원승지가 말했다.
『아, 그렇군요. 그날 장공자께서 저의 선친에게 제문을 바치셨지요. 나라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무사께서는 억울함을 당하신 격입니다. 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제갈량이 그랬듯이 '황룡미조(黃龍未鳥), 무목몽보(武穆蒙寶), 한작대후(漢?待後), 제갈성운(諸葛星殞))' 라고 쓰신 글은 구천에 계신 선친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장조당은 그날 자신이 급히 쓴 그 열여섯 글자를 원승지가 아직도 마음속에 기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므로 내심 너무 기뻤다.
원승지는 그 사람들에게 틈군의 공격을 받게 된 이유를 물었다.
장조당이 말했다.
『소인은 멀리 바다 건너 발니국에 있었습니다. 한 달 전쯤 바다를 건너 온 사람의 말을 듣자하니 틈왕 이자성이 의군을 이끌고 크게 일어나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드디어 북경에까지 진격해 들어가서 태평천하를 이루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인은 마음이 들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부친의 승낙을 얻어 이분 양형을 따라 하인 한 명과 고국에 다시 돌아와서 태평성대를 보려고 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말입니까? 북쪽 경계선에 도착하여 들어보니 틈왕이 북경에 진입한 후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다시 만청의 병사들이 쳐들어와 서안으로 도망을 치고 만청의 병사는 계속 쫓아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 세 사람은 할 수 없이 서쪽으로 피난을 왔지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틈군을 만나니 우리를 도적이라 하여 온몸을 수색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상상이나 한 노릇입니까? 우리가 조사하는 이유를 묻자 그들은 우리들이 가진 노자를 모두 뺏으며 혈안이 되어 칼을 휘두르더군요. 말일 여러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벌써 그놈들 칼에 구천의 객이 되었을 것입니다.』
장조당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휴! 태평성대라니…… 태평성대라니…….』
원승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 길로 가면 아마 편안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서안으로 가서 거기에서 다시 행선지를 정하면 어떻겠습니까?』
장조당과 양붕거는 동시에 감사해하며 좋아하였다. 그때 그 어린아이 장강은 이미 성인이 된 것이다. 그가 짐을 짊어지며 말하였다.
『십여 년전에 우리가 처음으로 중원으로 돌아왔을 때 관병이 우리를 보고 강도라고 하면서 가진 것을 약탈하고 죽이려고 하더군요. 이번에 다시 와 보니 이제는 의병들이 우리를 보고 도적이라며 가진 것을 빼앗으며 죽이려고 덤비는군요. 어르신, 우리 다시는 중원에 오지 말도록 해요!』
그러자 장조당이 말했다.
『중원엔 아직도 좋은 사람이 많아. 우리도 지금 전화위복이 되지 않았느냐?』
다음날 일행이 말을 달려 서안 동쪽의 패교에 도착하니 틈군의 한 부대가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맞은편에도 틈군이 배치되어 쌍방이 활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완전한 전투 태세였다.
원승지는 몹시 놀라며 생각했다.
(아니, 어째서 같은 편끼리 싸우려는 것일까!)
병사 중 우두머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황제께서 말씀하시길 오직 반역자 이암 한 사람만 잡으면 다른 사람은 무관하다고 하셨다. 모두 빨리 해산하라. 만일 명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을 때는 살상을 불사하겠다.』
원승지는 의형이 아직 살아 계시니 우리가 지금 늦은 것은 아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손을 급히 흔들어 일행들에게 양쪽 군대가 모두 이암의 무대로 갈 것을 권했다.
이암의 부대에 이르자 앞에서 호각을 불던 병사가 이장군의 부인을 보고 서둘러 일행들을 막사로 안내했다.
천막 앞에 이르니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나와 일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홍낭자와 원승지는 같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에는 큰 자리가 놓여져 있었고 수백 명의 장교들이 앉아 있었다. 이암만이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암은 아내와 원승지를 뜻 밖에 상봉하게 되자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그는 달려 나오며 왼손으로는 아내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원승지의 손을 끌어 잡았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참으로 잘 왔소. 하늘이 나를 버리지는 않았구료.』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을 양 옆으로 앉히고 부하를 시켜 다른 자리를 하나 만들어서 최추산, 안대낭, 청청, 하척수 등을 앉게 하였다.
원승지는 이암의 태도가 단정한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안도가 되고 며칠 동안 쌓였던 불안이 일시에 사라짐을 느꼈다. 그는 부인을 향하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참으로 놀라게 했구료!』
이암이 일어서더니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은 모두 나의 형제이며 동시에 나의 좋은 친구입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우리는 생사와 고락을 같이 하면서 꼭 대업이 이루어지고 천하가 태평해지기만을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황제께서 간신의 모함에 귀가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십팔해아주신기' 라는 허무맹랑한 말, 즉 내가 황제가 되려한다는 이상한 말을 믿고 계십니다. 방금 황제께서 나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으니 이 일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병사 중 한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였다.
『이것은 간신이 황제의 명령을 속여 전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는 이제껏 장군을 신뢰해 오셨으니 장군은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서안으로 가서 황제를 만나 뵙고 시비를 가릴 것입니다.』
병사들은 모두 비분하여 논란이 분분하였다.
장군은 큰 공을 세웠고 황제에 대한 충성이 그렇게도 지극한데 어떻게 반역 음모를 꾸밀 수가 있느냐는 등, 자대 규율이 엄하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니 인근 군대가 시기하여 그러는 것이라는 등 저마다 원성을 털어 놓았다.
심지어 어떤 병사는 만일 황제께서 시비를 가리려 하지 않는다면 모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한바탕 겨루자고 했다.
어쨌든 지금 틈군은 약탈과 횡포를 일삼아 인심을 잃었으니 화에도 뭐 그리 좋은 결과는 없을 것이라고까지 극언하였다.
이암은 황색종이 한 장을 꺼내면서 냉소를 머금고 말하였다.
『이것은 황제의 친필이오. '제장군 이암은 반역을 도모하여 황제가 되려 했으니 대역 죄인이다. 법에 따라 빨리 처단하도록 하라' 라고 쓰여 있구료. 옆 사람이 거짓 전하는 것이 아니고 황제께서 직접 쓰신 것 같소.』
병사들이 소리를 높여 외쳤다.
『우리는 장군을 따라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그 중 한 병사가 외쳤다.
『황제께서는 이미 좌영, 우영, 전영에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삼면으로 포위하였습니다. 그것은 장군 한 사람만 죽이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죽이려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머지 병사들도 일제히 소리쳤다.
『우리를 반역자로 몰아세운다면 정말로 반역을 합시다!』
이암이 말했다.
『여러분, 앉으십시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황제께서는 내게 잘 대해 주셨으니 '반역' 이란 두 글자는 말하지 말도록 합시다. 자! 술을 듭시다!』
병사들은 그가 지혜롭고 계략에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듯 침착한 것을 보고 필시 무엇인가 기가 막힌 대책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면서 하나씩 자리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낮은 소리로 의논하였다.
이암은 술을 한잔 들고서는 웃으면서 탄식했다.
『인생의 수십 년, 그게 일장춘몽인 것을…….』
그러더니 술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리고선 왼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리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문을 열어 틈왕께 절하였다.
귀천을 안 가리고 모두 환영하여 줄 것이니
귀천을 안 가리고 모두 모두……
그것은 바로 그가 의병시절 만든 노래로 이 노래를 세상에 퍼뜨려 이자성이 민심을 얻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모두' 라는 가사를 반복하더니 몸을 천천히 탁자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홍낭자와 원승지는 깜짝 놀라 급히 부축했으나 이암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왼손에 비수를 몰래 숨기고서 자기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홍낭자는 웃으면서 연신 중얼거렸다.
『암, 그러시겠지요. 그러시겠지요…….』
그러더니 허리에서 칼을 꺼내 자결하였다.
원승지는 손도 쓰지 못한 채 순식간에 벌어진 두 사람의 죽음에 멍해져 버렸다. 비통함에 사로잡혀 그도 자결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의 귓가에는 예전 북경성에서 이암과 함께 그 늙은 맹인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오늘의 한 가닥 영웅의 영혼은 어제의 만리장성…….』
병사들은 장군 내외의 죽음을 보더니 일대 혼란이 일었다. 목숨을 걸고 충성을 맹세하던 병사들이 슬글슬금 하나씩 흩어져 버렸다.
원승지는 난감해지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높고 험준한 산이 그를 가로막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장조당은 원승지를 위로하느라 발니국민의 소박하고 순수한 풍속에 대해 얘기를 해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중원이 이처럼 소란하여 원공의 마음이 심란하실 텐데 발니국에 귀화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자연과 더불어 살면 좋지 않겠어요?』
원승지는 장조당의 청을 듣고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달라졌는가! 부친의 원수? 핍박받는 백성? 그러나 무엇이 달라졌는가! 비록 부친의 원수 숭정황제는 패망과 함께 자결했지만 틈왕의 등극은 백성들을 오히려 괴롭히고 있으니…… 차라리 모든 인연을 끊고 조용히 살았으면……)
그에게 칩거(蟄居)의 유혹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그는 옛날 서양군이 주었던 섬의 지도가 생각나서 꺼내 보았다. 그는 장조당에게 그곳이 어디쯤에 있느냐고 슬며시 물어 보았다.
장조당은 지도를 보고 반색하며 대답했다.
『이곳은 바로 발니국 근처의 큰 섬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곳이지요. 요즘은 붉은 눈썹 나라의 해적들이 그곳을 괴롭히고 있답니다.』
원승지는 그들이 괴롭힌다는 말을 듣자 또 다시 의협심이 솟구쳤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당장 사부와 사형에게 작별을 고하고 동행의 뜻을 지닌 자들과 그 섬으로 떠나야겠다. 가서 붉은 눈썹의 도적들을 몰아내고 신천지를 이룩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 같은 깊은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원승지는 장조당 등이 이미 잠자리에 든 것도 모른 채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날은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원승지는 중원에 밝아오는 새벽의 찬 기운을 마시며 금빛 찬란한 일출을 바라보았다.
그는 새로운 전개에서 어떤 전란과 고초에도 굴하지 않을 단단한 각오를 되뇌이고 있었다.
(의형의 죽임을 외면하고 나만 떠날 수 있겠는가! 중원의 백성들이 그렇게 갈구하던 태평성대였는데…… 먼저 비뚤어져 가고 있는 틈왕과 만나 담판을 짓자.)
원승지는 결심이 이렇게 서자 틈왕을 향해 말고삐를 재촉하였다.
최희민, 손중수가 '산종' 의 옛사람들과 맹백비 부자, 나입여 등을 이끌고 그를 뒤따랐다. 그 외에 초원아, 정청죽, 사천광, 호계남, 철나한 등의 당대의 영웅호걸들도 원승지를 따라 중원 평야를 질주하였다.
그들은 오직 의(義)와 정(正)을 위하여 중원 천하를 끝없이 끝없이 달렸다.
미래의 태평성대의 기치(旗幟)를 높이 치켜들고서……
< 大 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