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天國
한 점 소리도 없고...
한 점 햇빛도 스며들지 않으며...
어느 누구의 발길도 닿은 적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적막의 궁전(宮殿)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저벅...저벅...
금치괴왕,
그는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이토록 크고 무섭게 들리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바로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금치괴왕은 웬지 알 수 없는 초긴장 상태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이 궁전(宮殿)...
그래...
죽어있는 궁전이야....
그것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내장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금치괴왕은 심한 구토감을 느꼈다.
필설로는 형용못할 기이한 공포가 그의 숨통을 질식시킬 듯 죄어들었다.
젠장...유령(幽靈)조차도 살지 않겠군...
* * *
<마마금부(魔魔禁府).>
온통 싯누런 황금(黃金)으로 된 거대한 편액,
금치괴왕이 이 편액이 걸린 웅장한 석문(石門) 앞에 당도한건
거의 탈진상태에 이르렀을 때였다.
'틀림없다! 바로 이곳이 묵천오색궁의 무학(武學)과 비전(秘傳)이 소장된 장소다!'
금치괴왕은 땀으로 흥건히 젖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대한 석문의 표면에는 소름끼치는 악마상(惡魔像)이 양각되어 있었는데..
그 두 눈위에는 시뻘건 광채를 뿌리는 적광주(赤光珠)가 박혀 있었다.
악마(惡魔)의 눈(眼).
금치괴왕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이 석문을 여는 열쇠임을 느꼈다.
그는 흥분을 억누르며 악마 두상의 눈을 지그시 눌렀다.
순간이다.
쿠쿠쿠쿵..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석문이 쫙 열렸다.
금치괴왕은 눈을 부릅 뜬 채 안을 응시하였다.
허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暗). 열려진 석문안으로 보이는건
그야말로 먹물을 깔아놓은 듯한 암흑 뿐이었다.
금치괴왕은 만면에 당혹의 빛을 띄웠다.
그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윽고 결심을 굳힌 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헌데...
이 무슨 괴변(怪變)인가?
그 순간 어둠 저편에서 석문(石門)에 새겨졌던 악마(惡魔)의 얼굴이
전율스런 웃음과 함께 나타났다.
아니 나타남과 동시에 금치괴왕을 향해 무섭게 쏘아져 왔는데..
"헉!"
금치괴왕은 생전 이토록 놀라본 적이 없었다.
그가 본능적으로 신형을 회전시키며 피하는 찰나,
번쩍!
빛!
뭔가 찬란한 섬광(閃光)이 그의 눈앞에서 작렬했다.
도저히 눈을 뜨고는 바라볼 수 없는 찬연한 빛(光)!
금치괴왕은 일순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뭐, 뭐냐?'
감겼던 그의 눈이 다시 떠진건 눈깜짝할 새였고,
그 순간 그는 시뻘건 핏물이 어둠속에서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금치괴왕이 하체에 엄청난 고통을 느낀건 그 직후였다.
"허억... 다, 다리가..."
그는 세상이 빙글 도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양손을 허우적 거렸다.
물컹...
일순 그 두 손에 뭔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금치괴왕의 얼굴이 끔찍하도록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내... 다리?"
그렇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의 다리였다.
"으아아악!"
어둠이 찢어발기는 처절한 울부짖음,
금치괴왕은 그대로 혼절하며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쿵...
금치괴왕은 이마에 뭔가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깨어났다.
악몽같은 순간이 맨 처음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희미한 시야로 소리금의 얼굴이 보였다.
소리금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예요..."
금치괴왕은 얼굴근육을 실룩거리더니 억지로 웃어보였다.
"나...나쁜 꿈을 꾸었다. 내 다리가...잘려나가는 꿈이었지.."
"금치치..."
"왜 우는거냐? 설마.. 내 다리가 정말 없어진건 아니겠지?"
"금치치...난 언제나 당신곁에 있을 거예요."
금치괴왕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지그시 두 눈을 내리감더니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허허..그게 그럼 꿈이 아니었나 보군.
까짓...내 추악한 얼굴에 다리가 없는 것도 별 무ㄴ는 아니야.."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소리금은 터지려는 울음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금치괴왕은 일순 두 눈을 번쩍 떴다.
"사사초인단의 무공(武功)! 그것만 있으면 된다.
내 아이들이 내 꿈을 이루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순간, 소리금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금치괴왕은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꼈다.
"소리, 왜 그러느냐? 혹시..뭐가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금치치.."
소리금은 입술을 악물더니 애써 평소의 억양으로 대답했다.
"이곳은...악마들이 살던 곳이었어요.
결코 당신처럼..어리숙한 악인이 올데가 못되었던 거예요.
우리는..지옥(地獄)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왔어요."
"대체 무슨 말이야!"
금치괴왕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일으서려고 했다.
허나 그는 곧 자신이 일어설수조차 없는 몸임을 깨달았다.
엄청난 고통이 하체부위에서 전신으로 퍼졌다.
"우욱.."
"금치치!"
"비켜라!"
금치괴왕은 그녀를 거칠게 밀어내고 사위를 살폈다.
어찌된 판인지 주위는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어둡지 않았다.
맨 먼저 그의 잘려나간 다리가 보이고,
뒤이어 수만권의 책자(冊子)가 정열된 서고(書庫)가 나타났다.
"오오...바, 바로 저것이다. 사사초인단의 초마공(超魔功)을 수록한 무공비급들..."
허나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장내의 중앙에 유령처럼 앉아있는 한 구의 백골(白骨)을 본 때문인데...
괴이하게도 이 백골(白骨)은 푸르스름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뿐인가?
살아있는 듯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앉아있는 그 백골(白骨)은
마치 금치괴왕을 비웃는 듯 입을 사악하게 벌리고 있었다.
"저...저게 누구냐?"
"바로..깁이수마초인의 우두머리였던..광염학이예요."
"어떻게..알았느냐?"
금치괴왕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다그치듯 물었다.
소리금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더니 힘없이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서고의 맞은편 석벽이었다.
거기에는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새긴 글이 있었다.
그 글을 읽어 내리는 순간 금치괴왕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철검백..네 놈 때문에 이 광염학의 꿈이 무산될 줄이야..
너를 과소평가한 것이 내 생애 최대의 실수였다.
그래...
지금 본좌의 육신은 네 뜻대로 썩어가고 있다.
썩어가는 육신으로 나는 이곳에 네놈을 위한 함정을 만들었다.
네놈이 천하(天下)를 제패하려는 야망이 있다면 반드시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기에...
흐흐...
너를 죽이기 위한 함정이 아니라.
너를 영원히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다.
네놈은 두 다리를 잃고...
본좌가 느꼈던 처참한 고통을 느끼며 이 죽음의 땅에서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철검백..네놈이 사사초인단(四四超人團)을 재 창조할 야망이 있었다면 그것마저 포기해라.
이 마마금부(魔魔禁府)에 소장된 일만이천권(一萬二千卷)의 무락비급에
본좌는 산화시골독(散化屍骨毒)을 뿌려놓았다.
흐흐...
네 눈에 보이는건 단지 먼지더미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 네놈이 선택할 수 있는건 죽는 시기 뿐이다.>
구절구절 원한과 저주가 서린 내용인데..
금치괴왕은 내용을 다 읽어내린 순간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머...먼지더미...라고?"
"금치치..."
"믿을 수 없다.. 절대 믿을 수 없어!"
금치괴왕은 서고에 진열된 무공비급들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두 팔로 바닥을 기며 엉금엉금 다가섰다.
이윽고 서고에 접근한 그가 간신히 손을 뻗어 한권의 무공비급을 뽑아든 순간,
우수수...
무공비급은 흔적도 없이 그의 손에서 먼지로 화해 떨어졌다.
금치괴왕의 얼굴이 쳐다보기가 끔찍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래...이게 모두 먼지란 말이냐.내 꿈이 한낱 먼지에 불과했단 말이냐.
내 인생(人生)이 결국 이 한 줌의 먼지를 위해 점철되었단 말이냐..."
"금치치...제말 그만..."
소리금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외면했다.
금치괴왕은 그녀를 향해 홱 얼굴을 돌리더니
무섭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하게 말했다.
"소리, 모든 것은 끝났다. 가서 아이들을 데려오너라. 모두 내손으로 죽이겠다.
이런 곳에서 자라게 되면 한낱 야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될 뿐이다
.소리, 너는 내 시신을 묻고 이곳에서 떠나라.
너에게는 그래도 미래의 희망이 있을테니까."
그러자 소리금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두손을 가지런히 가슴에 모았다.
그녀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금치괴왕이 난생 처음보는 차분하고 공손한 자세로
조용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금치치, 당신 말은 또 틀렸어요. 내게 꿈과 미래가 남아있는건 사실이예요
. 허나 그 꿈은 바로 당신과 아이들을 향한 거예요."
아시겠어요?
아이들은 결코 당신 짐작처럼 야수같이 자라지는 않아요.
그리고,
당신은 절대 죽을 수 없어요.
왜냐면,
당신은 내 남편이고,
아이들은 나 소리금과 당신의 자식들이니까요
후훗..
당신에겐 모든게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나에겐 아무 것도 달라진게 없어요.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인걸요.
그래요.
이 지옥(地獄)은 나 소리금에 의해 천국(天國)이 될 거예요.
후훗...
* * *
흐르는 세월(歲月)을 가리켜 유수(流水)와 같다고 했던가?
몇 개의 성상(星霜)이 지나고 뒤바뀌고 하더니..
금치괴왕 일행이 묵천오색궁에 들어온지도 어언 십오년(十五年)이 흘렀다.
세월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드는 법이다.
소리금은 어느새 삼십대의 중년(中年)으로 접어 들었다.
금치괴왕은 얼굴에 가득 주름살이 생긴 만큼이나 성품이 변해 버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하(天下)에서 가장 착하고 온화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소리금의 눈물 겹도록 지극한 사랑이 빚어낸 결과였다.
아이들은 어느새 강인한 소년(少年)들로 성장해 있었다.
허나 불행하게도 많은 생명(生命)들이 맹수와 독충(毒蟲), 질병으로 죽어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시(原始)의 밀림(密林)에는 항시 숱한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흔 넷의 아이들 가운데 불과 열여섯 명 만이 살아 남았다.
그리고...
이 십육인(十六人)의 소년(少年)들은
이제껏 맹수들에게 화를 당한 친구들의 복수라도 하듯
반대로 맹수들을 잡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달빛이 교교하게 원시림(原始林) 위에 쏟아져 내린다.
우우우-우-
오오오...
어디선가 굶주린 이리 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곳은 천리미로(千里迷路)의 입구,
문득 한 그림자가 달빛을 어깨에 받으며 조용히 나타났다.
아..
대략 십오 세 가량 되었을까?
눈이 부시도록 준수하게 생긴 미소년(美少年)이었다.
길게 자란 검은 머릿결은 허리밑까지 치렁치렁 흘러 내렸는데...
구릿빛 피부의 딱 균형잡힌 상체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남방(南方)의 유목민들처럼 허리 아래 부분은 짐승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후후...아직 오지 않았군."
소년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한 바위 위에 올라 서더니 가볍게 미소했다.
더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야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미소,
소년은 정말 신비로운 기운을 소유하고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바위 위에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는 순간이었다.
소년의 등이 달빛 아래 드러나며 기이한 문양이 나타났다.
<왕(王)>
오오..
그렇다.
이 소년이 바로 십오년 전 화호신(火虎神)의 밑에서 태어났던
오송학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이때였다.
슈우욱!
숲속에서 한 그림자가 번개같이 쏘아져 오더니 오송학 앞에 내려섰다.
실로 야수의 동작이 무색하리만큼 영활한 몸놀림인데...
대략 십육 세 가량쯤 되었으리라.
몸에는 검은 흑표범 가죽을 걸쳤고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는 모습,
매우 수려한 용모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냉악한 기운을 강하게 풍기는 소년이었다.
그것은 달리보면 소년답지 않은 패도적인 기질이기도 했는데...
그는 나타나자마자 오송학을 힐끗 무표정하게 응시하더니 바위(岩)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오송학의 입가에 일순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무강, 초조한 것 아니야? 이 내기에선 절대 무승부가 있을 수 없다."
"헛소리 말고 입닥치고 있어.
내 아이들의 사냥 솜씨는 네 녀석이 거느리고 있는 그 바보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무강이라 불리운 소년은 차갑게 대꾸했다.
냉무강(冷武强).
그렇다.
이 소년이야말로 십오년 전 금치괴왕이
오송학과 똑같이 최고의 자질로 평가했던 냉무강이었다.
지금,
오송학과 냉무강은 한 가지 중대한 내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묵천오색궁(墨天五色宮)의 열 여섯 소년(少年)들의 우두머리를 뽑는 내기였다.
이 승부는 이미 지난 십년(十年) 동안 지겹게도 이어진 것이기도 했다.
본래 그들은 철이 들면서부터 전생(前生)에 무슨 철천지 원수라도 진것처럼
만나기만 하면 싸워댔다.
열 살이 되기 전까지는 그저 시도때도 없이 싸움질이더니...
열 살이 되자,
그들은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까지 때려 눕히면서
이곳 묵천오색궁이라는 세계에서 대장으로 군림하려 했다.
하나 정작 그들 두 사람은 계속된 싸움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그들은 서로를 꺾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더 격렬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묵천오색궁의 아이들도 그들을 중심으로 두 패로 나뉘어
하루가 멀다하고 패싸움을 해대며 세력다툼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소년은 그야말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승부를 가리려 했다.
-양편의 대장끼리 일대일(一對一)로 맞붙어 승부를 내자!
허나 지난 십 년 동안 그러했듯이 그 방법으로는 승부를 내지 못했다.
상대의 주먹을 피하는 사람은 무조건 지는 것으로 하자!
하지만 그 방법도 허사였다.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하자!
그 방법까지 동원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종(毒種)!
두 사람은 진정 독종중의 독종이었다.
팔 다리가 부러져도 이빨을 악물고 한 올의 신음조차 내지 않았던 것이니..
허나 드디어 오늘에 이르러 그들은 결코 무승부가 될 수 없는 내기로
십년(十年)의 승부를 가리게 되었다.
그것은 오송학과 냉무강을 따르는 두 패의 소년들이 사냥을 하는 방법이었다.
짐승을 잡아온 수량보다는 얼마나 잡기 어려운 야수(野獸)를
어느 패가 잡아오는 가에 승부를 걸었다.
이순간 오송학과 냉무강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듯 밤하늘의 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긴장의 빛이 스쳤다.
달이 중천(中天)에 걸리는 약속기한이 거의 다된 것이다.
그때다.
부스럭...
밀림 속을 헤치고 한 그림자가 느릿하게 나타났다.
'누구냐!'
'어느 쪽이냐?'
오송학과 냉무강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나타난 소년(少年)은 창백한 얼굴에 시체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음울해 보이는 그의 두 눈동자가 조용히 오송학에게 향했다.
오송학이 반색했다.
"사광명(史光命), 너였구나. 헌데..."
"미안하다, 대장. 나는 밤에 피를 보는건 싫어해. 빈손으로 왔다."
소년 사광명은 힘없는 어조로 대꾸했다.
순간 냉무강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냉소가 어렸다.
"ㅋㅋ.. 저 활시(活屍 : 살아있는 시체)놈이 언제 밤낮 가리고 피를 싫어했나?"
그는 다시 벌러덩 자리에 드러누웠다.
"하나같이 바보같은 놈들이라니까. 나 무강의 수하엔 저런 놈은 없어."
그때였다.
밀림 오른쪽에서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소녀(少女)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사광명을 비웃느냐?"
냉무강의 얼굴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이번엔 그 귀신같은 계집이군!'
부스럭...
오른 쪽에서 표범가죽을 몸에 두른 한 소녀(少女)가 막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
끔찍한 모습,
소녀의 얼굴은 마치 무엇에 짓뭉개진 듯 눈, 코, 하나 성한 게 없었다.
마치,
지옥(地獄)의 나찰녀(羅刹女)를 방불케 하는 추악한 용모인데...
놀랍게도 이순간 이 추면소녀는 등에 자신의 체구 두배만한 산돼지를 메고 있었다.
오송학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시란주(侍蘭珠), 큰 놈을 잡아왔구나. 어떻게 잡았지?"
"돌로 쳐서 잡았어."
추면소녀 시란주는 무뚝뚝하게 대꾸하더니 산돼지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쿵...
이어 사란주는 힘없이 서 있는 사광명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어떤 놈이든 너를 업신여기면 내가 용서 안한다.
나 시란주는 너 하나 정도는 보호해 줄 수 있어."
사광명은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는 항상 이랬다.
철이 들면서부터 시란주는 항시 사광명을 위해 사냥을 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사광명은 벌써 굶어 죽었을 판이었다.
냉무강은 눈썹을 가볍게 찡그렸다.
'젠장.. 저게 계집이야? 헌데 이 녀석들은 왜 하나도 안오지?'
그때다.
"멍청한 녀석아! 이 따위 것을 대장에게 보이면 넌 미친 놈이 되는 거야!"
"그러는 네놈은 뭐냐? 너야말로 미친 놈이다."
떠들썩한 다툼소리와 함께 숲 속의 나무 사이를 원숭이처럼 타고오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슉!
슈욱!
두 그림자는 허공에서 휙휙 몸을 회전하더니 오송학 앞에 내려섰다.
그들은 날렵한 체구에 외눈박이 소년과
난장이처럼 작은 체구에 공처럼 둥근 얼굴의 소년(少年)이었다.
오송학은 두 소년을 반갑게 맞이했으나 곧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너희들은 평소에는 뭐든지 잘 잡아 오는 놈들이 왜 빈손이냐?"
"대, 대장..."
외눈 소년이 입가에 괴소를 지으며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빈손이 아니야. 여기 이렇게 잡아왔어."
슥!
외눈 소년이 말과 함께 들어보이는 것은 족제비였다.
오송학은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족제비?"
"대장이 잡기 어려운 걸 잡으라고 해서...
이 놈이 얼마나 재빠르고 영악한 놈인지는 대장도 잘 알잖아?"
"그래서...너는 심심찮게 잡아오던 표범도 놔두고 그걸 잡아왔단 말이냐?"
"그래. 대장 나 잘했지?"
외눈 소년은 씨익 웃었다.
오송학은 갑자기 몹시 피곤한 표정이 되었다.
'철비독(鐵飛獨), 이 녀석은 정말 바보인지 천재인지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젠장!'
오송학은 내심 생각하며 이번엔 난장이 소년을 응시했다.
"잔소(殘素), 너도 족제비를 잡아왔느냐?"
"그런 건 미친 놈이나 잡아오는 거야. 나는 이걸 잡았지."
잔소라 불리운 난장이 소년은 오른손을 쓱 내밀었다.
그의 손에 있는 건 제비였다.
제비는 아직도 살아있는 채 날개를 푸드덕 거렸다.
오송학은 멍한 눈빛이 되고 말았다.
"그건 제비 아니냐?"
"그래 흐흐...하늘을 나는 제비지. 이건 대장도 못잡을 걸?"
"잔소...너는 정말 어려운 걸 잡았구나."
오송학은 힘없이 대꾸했다.
냉무강이 옆에서 킬킬거리며 웃었다.
오송학은 천비독과 잔소를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이어 그는 느닷없이 두 소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딱! 따악!
"내가 전번에 해준 말을 항상 기억해라."
"억..."
"뭐, 뭘?"
천비독과 잔소는 고통스런 표정 속에서도 얼떨결에 물었다.
오송학은 몸을 홱 돌리더니 덤덤하게 대꾸했다.
"네 녀석들은 매일 서로 누가 더 미친 놈인가 경쟁하고 있다고 말이다."
두 소년은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꿈벅거렸다.
한편 냉무강은 비웃는 듯한 냉소를 지으면서도 내심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송학의 이 바보같은 놈들은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이 놈들은 왜 안오는 거지?'
그때다.
쿵... 쿵... 쿵...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숲에서 거대한 괴물같은 것이 나타났다.
잔소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곰이 나타났다!"
"다리가 여덟 개나 달렸다!"
철비독도 따라 부르짖었다.
허나 그들은 이내 똑같이 당혹스런 표정이 된 채 중얼거렸다.
"다리가 여덟 개?"
"뭐?"
추면소녀 서란주가 앞으로 나서며 차가운 음성을 툭 터뜨렸다.
"돌대가리들. 잘 봐, 저건 등천부(騰天夫)가 곰을 업고 오는거야."
그렇다.
놀랍게도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기의 체구에 족히 열 배는 됨직한 황색 곰을 한 소년이 등에 지고 나타난 것이다.
소년의 체구 또한 믿을 수 없으리만큼 장대했다.
게다가 얼굴과 팔 다리는 온통 털로 뒤덮여 있어 하나의 작은 곰을 연상케 했다.
오송학은 크게 반색하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등천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쿠웅...
장대한 소년 등천부는 곰을 바닥에 내려 놓으며 껄껄 웃었다.
"으하하핫...송학, 네가 이 등천부를 믿고 내기를 했는데 내 어찌 너를 실망시킬 수 있겠...우욱..."
말하다 말고 등천부는 수염이 가득한 얼굴을 가볍게 찡그렸다.
오송학은 흠칫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그제야 등천부의 어깻죽지가 온통 핏물로 뒤덮여 있음을 발견했다.
뼈가 보일 정도로 심한 중상이었다.
"등천부, 너..."
"괜찮아. 이 정도 상처 쯤이야... 어디 한 두 번 있는 일이었나?"
등천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빙그레 웃더니 한 옆으로 가 앉았다.
냉무강은 내심 초조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젠장, 이놈들은 대체 다 어떻게 된거지?'
그는 야공의 가운데 걸린 달을 냉막한 얼굴로 응시했다.
약속 시한은 이제 채 일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송학이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나의 승리같군."
"뭔가 잘못 되었다. 이놈들은 평소 나를 이렇게 실망시킨 적이 없어."
"어쨋든.. 이젠 심판관 공주께서 나타날 시간이 되었어."
오송학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헌데 심판관 공주라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호...십년에 걸친 승부가 결국 송학의 승리로 끝나는군."
천리미로 안쪽에서 고소 소리와 함께 한 섬세한 그림자가 나타난 것은.
오오..
천상(天上)에서 방금 선녀(仙女)가 하강했는가?
눈이 시리도록 흰 백미호(白尾狐) 털로 전신을 감싼 소녀,
마치 구름속에 가려졌던 태양이 나타난 듯 사위가 일시에 환해졌다.
백옥(白玉)처럼 투명한 피부에 보는 이의 혼(魂)을 앗아갈 듯 신비롭게 반짝이는 눈동자..
주사빛 붉은 입술에 머금어진 황홀한 미소..
실로 조물주가 천 년을 두고 탄생시킨 조각인 듯 소녀는 눈이 부셨다.
이름은 화라향(花羅香),
그녀는 도저히 이 원시의 오지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였다.
그녀는 기실 사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누구든지 아름다운 미소만 지어주면 그녀를 위해 짐승을 잡아다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화라향(花羅香),
그녀는 묵천오색궁의 소년들에겐 여왕같은 존재였다.
화라향 만큼은 오송학의 편도 냉부강의 쪽도 아니었다.
이때 냉무강의 수려한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젠장.. 일이 이처럼 우습게 되다니..."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장내 소년 소녀들의 안색이 일제히 흠칫 굳어졌다.
냉무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건 거의 동시였다.
'사고다!'
슈욱!
그는 쏜살같이 몸을 날려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오송학이 모두에게 급히 외쳤다.
"어서 따라라!"
* * *
"부마연!"
냉무강는 숲속을 미친 듯이 뒤지다가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의 피부는 온통 시퍼런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부마연은 좀체로 말을 하지 않아 모두가 침묵의 사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대...대장..."
부마연은 냉무강을 보자 검게 물든 얼굴에 공포의 빛을 띄운 채 신음했다.
냉무강은 그를 안아들고 부르짖었다.
"어떻게 된거야? 독사에 물렸나?"
"나..나는..독사 따위엔.. 물리지 않..독룡협(毒龍峽)에 갔다가..
"독룡협!"
냉무강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독룡협-
그곳은 금치괴왕과 소리금이 절대로 가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금지(禁地)였다.
독룡협은 본래 무서운 소용돌이가 있는 암청색 호수(湖水)였다.
거기엔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독각신룡(獨角神龍)이 살고 있었다.
그 거대한 괴물은 가공할 독기(毒氣)를 소유하고 있어
입갑만으로도 십 장 이내의 모든 생명을 몰살시키곤 했다.
당연히 냉무강은 부마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멍청이, 거기엔 왜 갔어!"
"요. 용류작(龍流雀)이.. 독각신룡의 새끼를..잡자고 해서..
어미가 잠든 줄 알고 다가서다가.."
부마연의 말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숨을 거둔 것이었다.
냉무강의 얼굴이 처참하게일그러졌다.
그때다.
그의 등뒤에서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무강, 문제가 심상치 않다
. 이건 천모(天母)께서 지니고 다니시던 은령(銀鈴)이야."
냉무강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오송학이 손에 은방울을 들고 굳어진 얼굴로 서 있었다.
냉무강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천모? 그렇다면 아까 그 비명소리는?"
천모(天母),
그것은 바로 소년들이 소리금을 부르는 존칭이었다.
오송학과 냉무강의 안색이 약속이나 한 듯 창백하게 변했다.
그렇다.
소리금은 부마연을 발견하고 나머지 소년들을 구하러 독룡협으로 간 게 확실했다.
안돼!
모두 죽어도 천모(天母)만은 절대 죽게할 수 없어!
오송학과 냉무강은 퉁기듯 동시에 독룡협으로 몸을 날렸다.
슈욱!
슉!
첫댓글 감사합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