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대첩비를 읽고(1791년, 30세)
시냇가 나무 밑에 말 멈추고
걸어 올라 황산비 읽어 보노라
힘찬 자획은 사나운 범을 잡아 등이며
번쩍이는 글 발에는 온갖 마귀 도망한다
혁혁한 위풍이 천추에 보는 듯 하거니
하물며 그 당시 몸소 부닥친 자들이야
아기발도(阿只拔都)는 또한 당돌한 사나이라
말똥구리가 수레 바퀴를 받으련가?
그의 나이 바야흐로 열 다섯이였나니
대말 타고 입엔 젖내 가시지 않았으련만
감히 신성한 강토를 한바탕 짓밟으려고
멀리 바다 건너 비린 칼날을 휘둘렀다
님의 세찬 화살이 그놈의 투구를 떨어 뜨리고
나무를 방패 삼아 섬멸전을 행하였다
적장은 거꾸러지고 더러운 무리 쓰러졌다
이리떼의 붉은 피 너래바위를 적시였네
정공(鄭公)은 무모하고 화상(和尙)은 황당하다
천의 인심이 마땅히 누구에게 돌아갈가?
나라의 운수 이 싸움에 이미 결정되였나니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을 기다릴 것도 없어라
원주)
황산 - 1380년 고려 왕우 6년에 리 성계는 왜장 아기발도가 영솔한 왜구의 대부대를 전라도 운봉 황산에서 섬멸하였는데 후일 조선에서 승리를 기술한 비를 그곳에 세웠다
정공- 정몽주가 고려 왕조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한 일을 가리켜 이 시는 무모한 일이라고 하였다.
화상- 중 무학(無學)이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고 그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는 것을 가리켜 황망하다 하였다.
음미하기)
앞 시에서 남원에 들렀다가 다시 운봉에 이르러 지은 시이다. 원주)에서 보듯이 고려 우왕 6년(1380)에 왜장 아기발도가 이끈 부대를 이성계가 전라도 운봉 황산에서 섬멸하였다. 1577년(선조 10)에 전라감사 박계현이 ‘황산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 1957년에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그대로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정약용은 황산대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 싸움으로 적장 아기발도와 그의 병력을 전멸시키다시피 하였기에 마지막 두 줄에서 보듯이 이 싸움으로 하늘의 뜻과 인심이 이성계에게 돌아갔으니 위화도 회군을 기다릴 것도 없을만큼 중요한 업적임을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정몽주가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이성계를 죽이려고 한 일은 무모하기 짝이 없고, 무학이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꿈을 해몽하였다는 일은 오히려 이성계의 업적을 깔보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최익한의 번역은 대체로 간결하고 때로는 비유, 은유를 사용하여 매우 맛깔스럽게 이어나갔다. 첫째 줄은 직역하자면 “팥배나무(杜棠) 가지에 말을 매두고, 지팡이짚고 올라가 황산비를 읽었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을 멈추고 걸어올라 간 것으로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둘째 연에서는 힘찬 자획과 번적이는 글발, 사나운 범과 온갖 마귀를 대비시켰다. 셋째 줄에서는 어제처럼(如昨)을 ‘천추에 보는 듯’이라고 일견 매우 상반된 듯하면서도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넷째 줄에서는 최익한의 의역이 가장 잘 드러나는데, 적장 아기발도를 사마귀(당랑), 개구리에 비교한 것을, 대신 말똥구리가 수레바퀴를 받으려는 것으로 비교하였으며, 매끄럽게 표현하기 위해 뒤에 나오는 아지발도를 앞으로 끌어내었다. 다섯째 줄에서 원문에는 파 피리 불어대고 죽마 타는 상황을 ‘대말(죽마)’ 타는 것만 취하고 입엔 젖내 가시지 않았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후반부에 들어가면서는 정약용이 이성계를 찬양한 일에 더하여 특히 본격적으로 전투양상을 다루는 부분부터는 침략자를 물리치는 전투현장을 내려다 보듯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여섯째줄은 원문 용의 수염(虯髥)이나 돌궐의 권력자(頡利)는 번역해서는 알아듣기 어려우므로 ‘신성한 강토를 짓밟으러 오는 존재’로서 규정하고 대장기를 들고 온 자들을 칼날을 휘두른 것으로 표현하였다. 일곱째줄에서도 ‘붉은 화살(彤弓)’ ‘임의 세찬 화살’ ‘안위를 다투었음’을 ‘섬멸전’ 으로, 여덟째 줄에서 妖星, 뭇혜성(衆彗)을 적장, 더러운 무리 등으로 표현한 것도 침략을 물리치는 싸움임을 강조하고, 이 책을 읽는 북한의 독자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방편으로 보인다.
작은 문제지만 8째줄 너래바위는 너럭바위의 방언이며, 9째줄 천의(天意)는 하늘의 뜻이 될텐데, 한자를 달아주거나 하늘뜻 정도로 번역을 했으면 어떨까 한다.
<讀荒山大捷碑>
溪邊繫馬杜棠枝 杖策上讀荒山碑
鐵畫巉巖伏虎豹 璘霦煜霅遁魈魑
赫赫神威凜如昨 何況當年身値之
螳螂可敬蛙可式 阿只拔都奇男兒
人年十五眇小耳 蔥笛堪吹竹堪騎.
敢與虯髥作頡利 越海萬里專旌麾
彤弓百步落甖苴 負樹發箭爭安危
妖星旣隕衆彗倒 澗石千年殷血滋
鄭公無謀和尙媟 天意人心當屬誰
此擧夜壑舟已徙 不待威化回軍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