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에 걸린 겨울바람 / 이소애(전북문협)

[이해숙]

대추나무에 걸린 겨울바람    /   이소애
 
  아파트에 들어서면 맨 먼저 반겨주는 나무가 있다. 화려한 열매와 잎사귀를 훌렁 벗고 꼿꼿이 버티고 서 있는 나무를 보면서 계절을 터득한다. 깡마른 몸을 드러낸 채 바람의 살결을 찌를 것 같은 대추나무에서 축적된 나의 젊음을 찾는다.
  입춘이 지나면 곧 백목련꽃이 핀다. 희디흰 목련꽃이 피고 서너 달이 지나서야 대추나무는 연둣빛으로 생존의 기지개를 켠다. 올겨울 내내 아파트를 드나들면서 침묵의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때로는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울음소리 같은 눈보라가 콘크리트 유리창을 흔들어 댈 때면 연약한 가지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차라리 천둥 번개가 치는 여름엔 <벼락 맞은 대추나무>란 상처로 몸값을 올릴 수 있어 내심 반길 때도 있다.
  왜냐면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인감도장이나 은행 통장 도장을 품고 다니면 부자가 된다는 어른들의 말을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들의 백일잔치나 돌잔치 후 통장을 개설할 때 대추나무 도장을 사용했다. 벼락 맞은 나무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귀신이 범접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어서다. 그래서 병마가 감히 근접하지 못하도록 대추나무 도장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라고 했다.
  초등학교 등교할 때였다. 우리 집골목을 막 벗어나는 어귀에 대추나무가 있었다. 어느 날 대추나무 가지에 얹힌 가지 사이에 무거운 돌멩이를 보고 나무가 얼마나 아파할까 생각하면 내 어깨에 통증이 오는 것 같았다. 그 고통이 나에게로 전이되는 듯했다. 온 힘을 다해 큰 돌을 들어서 내려놓으려는데 동네 호랑이 할아버지의 큰소리에 주눅이 든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침을 두어 번 하시더니 돌에 눌린 나뭇가지 부분은 나뭇가지 조직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고 하신다. 나뭇가지의 쪼개짐을 예방하므로 태풍이나 강풍에 잘 견디는 거라며 내 등을 다독여 주셨다. 그 기억으로 대추나무 특유의 가지 생존 방식을 알았다. 그러나 나와 눈인사를 하는 아파트 대추나무는 돌멩이를 가지 사이에 올려놓는 일은 없었다.
  대추나무를 자세히 보노라면 잔가지에 가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만든 나무가 대추나무라고 한다. 꽃말은 ‘처음 만남’이다. 꽃의 크기가 콩알만 한데다 색깔도 연둣빛이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아 꽃을 놓치고 만다.
  가을에 잔가지가 처지도록 주렁주렁 매달린 대추를 보노라면 매급시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대추나무 열매는 배고픈 사랑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부러움의 열매이기도 하다.
  몸보신할 음식을 만들 때나 한약을 끓일 때는 꼭 대추를 넣는다. 그뿐이랴. 폐백 시 시어른들께서 “자식 많이 낳아 잘 살아라”하시면서 치맛자락에 던져주시는 복의 전달자가 바로 대추이다.
  겨울을 견디어 내는 대추나무의 생존을 지켜보노라면 삶의 방식을 터득한다. 나무는 바람의 소식을 귀담아듣는다. 아무리 칼날 같은 찬바람일지라도 봄소식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겨울바람은 마음대로 방향을 잡는다. 어쩌다 화가 나면 천변의 버드나무도 넘어뜨리고 억새도 쓰러뜨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부동산 광고 현수막이 걸려 있으면 찢어버리기도 하는 손가위를 품고 있는 무서운 바람이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휘몰아치는 바람은 더 매섭다. 작은 바람이라도 악다구를 쓰며 통과할 때면 대추나무 가지를 부러뜨릴 것 같다. 요즈음엔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서 잔가지를 만져보면 가시에 찔린다. 가시에 찔릴 때면 가시를 품고 사는 사연을 묻는다. 나무는 “생존의 무기”라고 말한다. 욕심의 방어라고도 한다.
  겨울바람은 자비의 눈으로 품으려고 해도 나이 들수록 무섭다. 유리 창문을 덜컹거리면 마치 마귀의 음성이 들리는 같아 꼭꼭 잠근다. 동생들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숨어버리던 동생들의 맑은 눈망울이 보고 싶다.
  방문이 열릴까 봐 문고리에 놋수저를 끼우고 숨소리도 두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장독 뒤에서는 대나무 숲이 엉키는 아픔의 소리가 간장 단지 뚜껑을 여는 소리처럼 들렸다. 바싹 마른 대숲 바람은 가끔 꿈속에서도 날 놀라게 한다.
  요즈음 코로나19로 경직되어서인지 마음이 너그럽고 풍요롭기가 어렵다. 자칫 겨울바람처럼 정신적인 충격을 주는 소리에 몸이 젖어 있다. ‘말’의 소리이다. 함부로 내뱉는 말의 격랑은 파도처럼 가슴을 후빈다. 그냥 일상적인 말이라 하여도 듣는 사람의 나이와 지위 그리고 건강에 따라 달리 들릴 수 있다.
  우울하고 점점 침체해 가는 요즈음 봄소식처럼 연초록 새싹을 틔울 일을 찾았다. 자가용을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사고 경력이 없는 나이기에 앞으로 어림잡아 10년은 더 운전할 자신이 있었다. 무슨 차를 선택할까? 차 가격은 얼마일까? 밤새도록 인터넷을 뒤지다가 자식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렸을 적 아빠가 자가용을 샀을 때 손뼉을 치며 폴딱폴딱 뛰던 생각이 떠올라서 기쁜 마음을 가득 담아 말을 꺼냈다.
  “쨍그랑”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아니다. 마치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낭비하는 거라는 눈치였다.
  대추나무에 걸린 겨울바람처럼, 매서운 바람을 이겨내고 생존하기 위해 잔가지의 가시처럼 나도 점점 변모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소애] 시인 《한맥문학》등단. 전주문인협회장 역임
전북문협, 전주문협, 전주시협
* 시집 《시간에 물들다》 《쪽빛 징검다리》 《색의 파장》
* 산문집 《보랏빛 연가》
한국미래문학상, 전북여류문학상, 허난설헌문화예술상 외 다수
 
  시인님의 아파트 마당에 대추나무가 있나봅니다. 어린 시절 저희 집에도 대문 앞 수돗가에 키 큰 대추나무가 있었는데요, 단단한 가시가 참 위협적이었어요. 무수히 피던 연둣빛 여린 꽃 생각이 납니다. 조롱조롱 풍성한 꽃마다 대추가 열렸으니 풍요와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는 나무였음을 알 수 있죠. 꽃 피는 봄부터 빈 가지에 걸린 겨울바람까지 나무가 들려주는 얘기에 귀 기울여 의미를 짚어봅니다.

[이정석]

가시면류관이 대추나무였군요
대추나무는 더디게 자라서 어려운 나무 같습니다
열매가 주렁 주렁 열리게 하기는 무척 힘들고요

감사합니다!

[이해숙]

개량종 대추나무는 대추가
살구만큼 크던데요. 더디 자라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