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당선작(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선혜경) 감상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선혜경 그런 걸 뭐하러 세어두고 있겠어, 당신은 꿈에서도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을 모르나봐요, 창틀을 베고 누운 당신도 닫힌 서랍보다 늦게 눅눅해지는데 궁금해 그런 날의 당신은 그림자 대신 검은 석유를 품고 다녔는지 그런 날의 빗방울에게서 풍경의 심장이 뚝뚝 떨어져 나갈 때 벌려둔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는지 새벽의 혀를 길게 베어 문 촛불처럼 가장 빨리 죽는 건 악몽이라 믿으며 밤새 얼얼하게 녹아내리는 것들은 모두 내일의 미아가 되어 버리기를 품, 이라 발음하면 옅어진 등불에 팔다리가 생겼는지 촛농이 굳어버린 하늘을 정면으로 마주치며 빛에 익사하길 바랐다 상처투성이의 손금을 털어내려고 손바닥을 자꾸만 흔들어도 온통 웅덩이였다 모르는 사람의 초상을 여기저기 그리고 다녔다 시 감상(초보 시인을 위한 현대 詩 창작 이론과 실제 조극래) 내 마음을 조금도 몰라주는 당신이 있다. 우리가 만난 지 며칠째라는 말에 "그런 걸 뭐 하러 세어두고 있겠어"라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탁 뱉어 버리는 말이 내 심장에 폭우처럼 쏟아진다.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다 보니 새벽이다. 빗방울은 거세진다. 아마도 "당신은 꿈에서도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빗물처럼 창틀에 당신의 얼굴이 흘러내리고, 당신이 내게 건넨 서랍 속의 물건들이 시들어 가는 사랑처럼 눅눅해진다. 내 심장에 폭우를 쏟아부으면서도 아무런 표정이 없던 당신은 그림자 대신 검은 구름 뭉치를 품고 다닌 건 아니었는지. 빗방울이 쏟아져 내려 풍경 들이, 꽃잎들이 떨어져 내리는데도 마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지. “새벽의 혀를 길게 베어 문 촛불처럼" 단지 악몽을 꾸었을 거야, 라고 애써 다독인다. 밤새 뒤척거린 상념들은 모두 내일에는 나에게 밀어닥친 아픔 이 아니기를 빌어본다. 그래도 당신은 내 품이라고 생각하면, 멀어지려는 사랑에 팔다리가 생겨나서 나를 감싸 안아줄까. 창문으로 흘러내리는 빗물 같은 아픔이 빨리,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에 녹아내리기를 빌었지만, 희망은 옅어지는 것 같다. 아무리 당신을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고 머리를 흔들어도 온통 웅덩이뿐이다. 당신은 마치 모르는 사람 같다. 창밖에도 내 마음에도 폭우가 쏟아진다. 이 시는 상당히 연과 연 사이 보폭이 크다. 시에 접근하는데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당신이라는 무관심한 타자에게, 그 말 한마디에 상처가 깊숙이 베인 시적 화자가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룬다. 뒤척거린다. 좀 다정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그가 남긴 발자국은 웅덩이투성이이다. 미래가 암울하다. 당신은 마치 검은 구름덩이를 품고 다니는 것 같다. 화자의 마음만 아프다. 도대체 저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걸까?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 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