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양 신부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세상 만물은 관심 갖는 대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 국수가 먹고 싶으면 그 날은 국수집만 눈에 띕니다.
또 귀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하면 이비인후과 병원만 눈에 들어오지요.
어쩌다 남편 옷을 사야할 일이 생기면 남자 옷가게만 보이는 이런 일들을
여러분들도 경험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관심 갖는 것이 보이게 되어 있고, 관심이 없으면 아무리 많이 있고 또 여러 번 보아도
놓쳐 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늘 나라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여러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으셨으며 빵의 기적을 보이시며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을 전하고
말씀 안에 살 것을 가르치셨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빵에만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좀 더 놀라운 것을 보여 줄 것을 졸라댔습니다.
빵을 더 많게 해 주든지, 놀라운 기적으로 마귀를 쫓아내든지,
점령군 로마를 물리쳐주든지 하는 식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더 신기한 기적을 청하며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요구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군중이 계속 몰려들자 예수님께서 탄식하시지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11,29)
니네베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들에게는
사람의 아들이 분명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완전히 삶을 바꾸었지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 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요나3,8)
그런데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요나보다 훨씬 능력 있고 권위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 오셨는데도
회개하기는커녕 또 다른 기적만을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나도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그것을 직접 지적하여 말씀하시지요.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11,32)
니네베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솔로몬왕 때 세바의 여왕은 하느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고자 멀고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모든 지혜를 지켜보고 그가 지은 집을 보았다.”(1열왕10,4)
그런데 여기에 솔로몬왕 보다도 요나 예언자보다도 더 큰 사람,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는데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거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진리를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군중들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을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지만
사목자인 저 또한 사목을 하면서 똑같은 안타까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수없이 가르쳐주어도 세상의 일에만 관심이 있는 신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행하려고 하지 않지요. 그러니 하느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을 큰 축복으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지요.
재물이 쌓이고, 지위가 높아지며 자녀 교육 등이 뜻대로 잘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영적인 인간의 행복은 그렇게 육적인 것에서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갈증만을 느낄 뿐이지요.
끝없는 욕심은 집착을 부르고, 집착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만듭니다.
세상 것의 추구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목자는 세상만을 바라보는 신자들에게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볼 것을
거듭 요청하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물이나 높은 직위, 성공한 자녀 교육도 물론 축복이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그 이상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세상 것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재물에 관심을 가지면 재물의 노예가 되어 돈벌이에만 끌려 다니게 되고,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 점점 더 매달리게 되어 더 높은 점수,
더 좋은 학교에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건강이나 미모, 체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착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결국 삶 자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관심을 두면 다른 세상을 만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누리게 되지요.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
하느님 안에서 진리를 알게 되면 우리는 참 자유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거나
세상에 없는 권위를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놀라움을 표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능력을 보이고 가르치심으로써 하느님 안에 살 때 얼마나 자유롭고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고 괴로워하시는 이유는 아무리 가르치고 설명해도
사람들이 엉뚱한 곳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관심과 너무나 다른 곳에 있었지요.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가리켰건만 달은 보지 않고 내 손가락만 보는구나.”
하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고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시며 하느님을 알려 주시고자
애쓰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의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의 갈증만을 풀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천 년 전 유다인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성당에 와서 간구 하는 여러분의 기도 내용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과연 내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헤아려본다면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나와 상관없는
먼 과거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가정, 내 자식, 내 건강에만 관심이 있기에 예수님이 옆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유롭지 못한 것이지요.
사람은 좋은 것에 집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집착이 나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집착할 것에 집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안에 마음의 중심을 두고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사순절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것을 거듭 요청하십니다.
회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정화의 기간이요 회개의 시기인 이 사순절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이 세상의 것에서 하느님에로 승화되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이기락 신부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표징도 주어지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시지만(8,11-12 참조),
오늘 봉독한 루카 복음에서는 그래도 요나 예언자의 표징만은 주어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표징 요구를 거절하시는 것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려고
다른 어떤 놀라운 이적을 보여 주기를 거부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요술이라도 보여 주어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만들어야 할까요?
믿음은 그런 것들에 기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에게 다만 한 가지를 보여 주신다면
그것은 요나의 표징, 곧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서
니네베로 가게 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놀라운 일이 아닌 그분의 죽음과 부활만이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보듯이, “이 세대”는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솔로몬이나 요나에게 귀를 기울였던 과거의 이방인들처럼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이 세대”는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에 살던 세대만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며,
자칭 신자들인 우리도 해당됩니다.
실제로는 우리 신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파스카의 신비를 믿지 못한다면,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더 거창한 기적을 베푸시거나 더 쉬운 지름길을
알려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끌어 주셔야만 부활 신앙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신앙에 이를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서울대교구 이기락 신부
*********
박상대 신부
예수님의 진단과 처방전
오늘 복음의 이해를 도우려면 앞서간 대목을 함께 읽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루카복음에서도 어제 마태오복음(6,7-15)에서와 같이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셨고, 아버지께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청원하라고 이르셨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 마귀가 들린 언어장애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보이셨다.(11,1-14)
예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예수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만큼 의구심도 컸다.
사람들은 예수의 능력을 의심하여 더러는 '예수가 마귀의 두목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들을 쫓아낸다'(11,15)고 하였고, 더러는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보여달라'(11,16)고
요구하였다.
어떤 여인은 예수를 포유(哺乳)한 어머니를 찬양하기도 했다.(11,27)
이 사람들의 의도는 무엇이며, 도대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여기에 기적 이상의 볼거리를 즐기는 유다인들이 가세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인정이 될만한 표징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업적들을
마귀짓거리로 몰아붙여 폄하(貶下)하려는 그들이다.
참으로 고약하고 야박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이 말씀은 고약하고 야박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이다.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이는 악한 세대로 진단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전이다.
예수께서는 좀처럼 믿지 못하고 하늘의 기적까지 요구하는 사람들이 악한
'불신(不信)의 병'에 걸린 것으로 진단하셨고,
이 병에 대한 약전(藥箋)으로 '요나의 기적'을 처방하신 셈이다.
사실 요나의 기적은 기적이 아닌 기적이다.(요나 2,1-11; 3,1-10)
이 처방전을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니느웨 도시의 사람들이 어떤 기적을 보고 회개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일어났던 일은 하느님께서 요나를 그들에게 파견하였던 일과 파견된 요나의
'회개하라'는 외침이었다.
이 외침 하나로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이 기적과도 같은 것이 된 셈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써주신 처방전의 참뜻은 요나의 니느웨 방문이 곧 하느님의 현존이요,
그의 외침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나아가 예수님의 현존이요 말씀이라는 것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요나의 사건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기적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 또한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기적의 표징이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표징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현존보다 예수님의 현존은
더 실재적이며, 그들의 외침과 지혜보다 예수님의 말씀은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말씀은 이미 예수 안에 선재(先在)하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사람들의 눈에는 가려져 있을 것이지만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의 세대가 비록 불신하는 악한 세대로 진단을 받았지만 처방전에 따라
약을 잘 복용하여야 한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요나와 솔로몬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으로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께 대한 선택이다.
사순시기는 표징을 요구하는 시기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표징을 잘 읽어야 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의 과제 또한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선택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