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창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고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시월 유신하 세 번째 고문을 당하면서-
1979녀 8월 6일, 오원춘 납치사건으로 한국의 천주교가 발칵 뒤집혀졌다. 그날 안동교구청이 있는 성당에서 오원춘사건 진상보고대회가 있었다. 나는 당시 국제 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의 인원탄압에 대해서 보고를 해 달라는 주최 측의 부탁을 받고 안동에 내려갔다. 기도회는 3부까지 진행되었는데 2부에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이 있고 3부에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박정권의 반민주적 인권탄압 사례들을 보고하고 즉각 하야할 것을 촉구하였다. 비극적인 종말이 오기 전에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이 민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2년 이내에 박정권은 무너질 것 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날 박정권을 강하게 몰아붙인 것은 73년 이후 두 차례나 박정권에 의해서 투옥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카농(카톨릭농민회)회원, 신부, 수녀, 신자들이 안동시청 앞까지 야간 횃불시위를 벌였다. 나는 다음날 아침 김승훈 신부와 같이 그의 차로 서울로 올라왔다.
1979년 8월 8일 엠네스티 사무실에 출근하여 책상 위를 정리하고 안동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평(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이태호 간사에게 일부 주고 일부는 보관철에 꽂고 있다가 서부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들이닥쳐 강제로 연행되었다.
서부경찰서에서는 정보부에서 지시가 왔으니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안동강연 녹음테이프가 여기 있으니 이 내용을 가지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내 연설 중 어느 대목이 긴급조치 9호 위반 내용이냐고 심하게 따지자, 좌우간 우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니까 우리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꾸며서 구속하였다.
그것이 박정권 하에서 내가 세 번째 투옥되는 사건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세 번째 들어가서 1사 상 21방에서 재판날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날(1979년 추석 전날로 기억된다), 다음날이면 긴급조치재판이 시작되는데, 저녁 무렵 출정이라면서 교도관이 감방문을 열었다.
불길한 예감이 퍼뜩 들었다. 출정 전날 불려나가는 예가 없기 때문이다. 보완과장실에 가니 낯선 젊은이가 두 명 와 있었다. 몇 마디 신병을 확인하고 수갑을 채워 끌려간 곳이 남영동 대공분실 이었다.
내가 남영동 대공분실을 첫 번째 출입하게 된 것은 감방에서였다. 그러나, 대공분실에서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73년,77년, 두 번이나 나를 투옥시킨 이근안팀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두 번이나 살인적으로 고문을 당한바 있었기 때문에 우선 겁부터 났다. 내가 여기서 살아나 간다면 그것은 기적이다, 죽어나간다, 죽어나간다, 하는 공포감이 순간 전신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서 죽느니, 죽어서 사는 사람이 되자, 그 순간부터 나는 고문을 온몸으로 받아내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역시 신이 아니고 인간이었다. 죽기를 각오할수록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고문은 시작되었다.
남영도 대공분실, 세칭 악마들의 고향의 5층 조사실-조사실 이라기보다 고문실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 물을 마음대로 먹일 수 있는 목욕탕(욕조실), 대소변을 처리하는 변기, 책상 하나, 의자 둘, 단색의 벽과 천장, 전기고문을 할 수 있는 침대, 아무리 소리쳐도 밖에 새나가지 않는 방음벽, 높은 자들이 감시 할 수 있는 TV장치…
나는 무엇 때문에 끌려왔는지도 모르는 채 우선 30분가량 5~6명의 건장한 사내들로부터 무차별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얼굴이 붓고, 코피가 쏟아지고, 눈에 멍이 들고, 다리, 무릎, 팔, 가슴 할 것 없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그리고 나서 너 남민전에 가입했지?”
“남민전 이라니요.”
다시 고문, “너 이재문이 알지?”
“모릅니다.”
다시 고문. 그렇게 시작된 고문은 5층에서 3층 소위 사장실이라는 넓은 방으로 옮겨 넓은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들 고문자들은 내가 아는 얼굴들이었고 고문팀의 책임자는 나를 두 번이나 투옥시킨 장본인이었다. 넓은 목욕탕에 들어갔다. 희미한 전깃불이 들어왔다. 문이라고는 출입구밖에 없고 출입구는 2중문으로 사장(?)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알몸이 되었다. 죽음의 공포에 내 생식기는 대추씨 만해졌다. 두 발목을 밧줄로 묶고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역시 밧줄로 묶어서 무릎을 두 팔 사이로 넣고 굽힌 무릎 사이로 침대봉을 넣어 거꾸로 매달았다. 얼굴에 젖은 수건을 덮었다.
이제부터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이 시작되는구나. 나는 이미 겪은 경험에 따라 살아나가길 체념하고 빨리 내 의식이 사라져 주기를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게 기원했다.
“나를 빨리 거두어 주소서.”
수건으로 덮은 얼굴 위로 고춧가루를 탄 주전자 물을 붓기 시작했다.눈, 코, 입으로 들어가는 맵고 따갑고 화끈거리는 고통에 혼신의 힘으로 버둥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침대봉이 부러지고 다시 막대기가 끼워졌다.
그들은 숙련공처럼 침착했고 나는 짐승처럼 버둥거리다 지쳐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다시 5층 조사실(?)로 올라왔다.
“남민전 가입했지?”
“나는 남민전이라는 단체는 알지도 못합니다.”
“너 이재문이 알지?”
내가 지하운동을 하면서 만난 선배는 ‘김’입니다. 시월유신하 최대의 지하조직으로 알려진 남민전의 책임자 이재문씨는 김사장으로 불렀기 때문에 그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대표로 있던 지하조직은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약칭 “민투”였고 나의 조직명은 한국주였다. 민투의 조직원은 대부분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들이었다.
남민전 사건이 터지면서 그들 모두가 나와 함께 처절한 고문을 당하고 구속되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식이 돌아오면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고문이 시작되면 무조건
“예”,
“예”하고…… 그것은 짐승과 같았다.
10일간의 지옥에서 서대문구치소 1사 상 21방으로 돌아오니 천국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천국이 있다면 아마 이런 곳이 아닐까? 감옥의 감방은 비어 있는 10일간 쥐들의 자유 광장이었다.
나는 창틀사이로 보이는 하늘 한 조각을 보고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그 후 나는 15년을 구형받고 5년을 선고받아 복역중 83년 8월 15일 특사에 의한 형 집행정지로 출옥했다.
나는 나를 짐승으로 만든 고문자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인간성을 야수로 만든 분단 40년, 그 분단의 냉전논리를 정권유지의 도구로 이용한 군사독재정권을 용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이재오의 자서전 격인 글로서 이재오 본인의 입장에서 기술 된 글입니다.
이상과 같이 동일한 사건도 평가자의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이적활동을 한 단체로 처벌되었습니다.
남민전의 총책인 [이재문]은 이재오와 친척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지병인 위암으로 옥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재오는 1998년에 월북한 사월혁명회 감사 윤성식과 선후배 관계이며 친척간이라 들었습니다. 이 내용은 내일 다시 확인 후 확인 글 올리겠습니다.
윤성식에 관해서는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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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결국 이재오는 한나라당에 들어온 스파이군.
조금 시원하신지요.이재오는 비겁자에 기회주의자입니다.
드런놈이었군..나이만먹고할일없이..
좌쪽을 좋아하는 부류군요.나뿐놈!
친일파 자식놈인가?
결국 이재오는 자신의 색깔을 속이고 있었던 인물이거나 이중간첩이거나 둘중 하나이군요.
그 자의 노선에 대한 정확한 배경을 확인시켜주신 얄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읍니다. 감사드립니다. 혹시 그놈으로 인하여 피해를 본 주변 사람들의 소문은 없읍니까? 주변에서 나도는 주민 피해소문 말입니다. 시간이 나시면 그런 것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