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12-24절)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 Ⅲ.계획을 변경하게 된 이유(하-1) 사도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그것을 이렇게 분명한 합니다. 1:21-22절)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공동체)안에 있는 성령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우선 *기름 부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름 붓는 것'은 구별(區別)됨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과는 끝난 상태요, 이제부터는 완전한 하나님의 소유(所有)가 된 것입니다.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인(印)을 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분명히 그들은 *성령의 기름 붓는 체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확신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靈)이 계시며, 성령께서 그들을 견고하게 하시므로 자신에게 큰 유익은 될 수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똑같은 사람이 가서 똑 같은 설교를 하는데, 어느 곳에는 불같은 역사가 일어나고, 어느 곳에는 맨송맨송하게 끝나고 말 때가 있습니다. 결국 성령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자기가 한 번 가느냐? 두 번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 자신들 안에 있는 성령께 얼마나 *복종하고, 순종하느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Ⅲ.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하-2)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처리(處理)를 해야 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 윤리적(倫理的)이나, 교리적(敎理的)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한 처리(處理)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자신이 직접 하기보다는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사도(使徒)이기는 하지만, 개교회의 일은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피차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1:23-24절)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능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를 자신이 개입하게 되면, 그들이 무능하게 될까봐 피차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이 동의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만나봐야 피차 마음만 상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상대방에게 믿음이 있는가 보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되면, 맡기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믿음이 섰음이라'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신앙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길로 가면, 결과가 어떻다는 것은 말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 위에 서 있으면, 언젠가는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즉 엄청난 고생 끝에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 고집이 센 사람은 고생을 엄청 많이 하다가 결국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생각되면, 한순간이라도 빨리 돌아서는 것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갈 데까지 가본 후, 돌아오는데, 이런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안에서 얼마든지 변덕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결정한 후,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의 군대(軍隊)사령관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권위(權威)를 지키기 위해 밀어붙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차선(次善)의 계획이 유익하지 않겠다 싶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일단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아니라'고 판단될 때,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또 *자신의 입장이 변했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소통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기계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싫으면,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수밖에 없고, 고린도 교회를 다치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적인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체면(體面)과 권위(權威)를 포기하고, 일정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각 셀(cell)공동체 리더도 교인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고집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아-멘 찬송가 269장 *그 참혹한 십자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