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7년(2013년) 9월 12일 후기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13)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9월 12일 후기.hwp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533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533
의 후속타입니다.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를 열세 번째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 모임은, 책쫌읽자 법우, 보리연꽃 법우, 환희장엄 법우, 그리고 저 관문, 이렇게 4명이 참석했습니다.
다음 주 19일은 추석 휴가로 휴강하고 그 다음 주 26일에는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끝내려고 합니다. 우리가 다음번에 읽을 책은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틱낫한 스님 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중 ‘Chapter VII. 'Meditation' or Mental Culture: Bhāvanā’ 와 ‘Chapter VIII. What the Buddha Taught and the World Today' 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72페이지 밑에서 7째 줄부터 80페이지 19째 줄까지입니다.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를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이승훈 옮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경서원>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Chapter VII. Meditation or Mental Culture: Bhāvanā
This mindfulness or awareness with regard to our activities, taught by the Buddha, is to live in the present moment, to live in the present action. (This is also the Zen way which is based primarily on this teaching.) Here in this form of meditation, you haven't got to perform any particular action in order to develop mindfulness, but you have only to be mindful and aware of whatever you may do. You haven't got to spend one second of your precious time on this particular 'meditation': you have only to cultivate mindfulness and awareness always, day and night, with regard to all activities in your usual daily life. These two forms of 'meditation' discussed above are connected with our body.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부처가 가르친, 이런 우리 활동에 관련된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수행 또는 일깨우기는 현재의 순간 속에서 살고, 지금 하는 행위 속에서 사는 것이다.(이는 또한 근본적으로 이 가르침에 기초를 두는 [동아시아의]선禪(Zen)의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 이런 형태의 명상에서는 "마음이 깨어있기"를 개발시키려고 어떤 별난 행위를 치러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염두에 두고 정신을 차려야 되는 것이다. 당신은 별난 명상'을 하는데 귀중한 시간을 일초라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당신의 평범한 일상생활의 모든 활동에 대해 낮이나 밤이나 항상 마음이 깨어서 일깨우는 수행을 해야 한다. 위에서 논한 이들 두 형태의 '명상'은 우리의 몸에 관계된 것이다.
Then there is a way of practicing mental development ('meditation') with regard to all our sensations or feeling, whether happy unhappy or neutral. Let us take only one example. You experience an unhappy, sorrowful sensation. In this state your mind is cloudy, hazy, not clear, it is depressed. In some cases, you do not even see clearly why you have that unhappy feeling. First of all, you should learn not to be unhappy about your unhappy feeling, not to be worried about your memories. But try to see clearly why there is a sensation or a feeling of unhappiness, or worry, or sorrow. Try to examine how it arises, its cause, how it disappears, and its cessation. Try to examine it as if you are observing it from outside, without any subjective reaction, as a scientist observes some object. Here, too, you should not look at it as 'my feeling' or 'my sensation' subjectively, but only look at it as 'a feeling' or 'a sensation' objectively. You should forget again the false idea of 'I'. When you see its nature, how it arises and disappears, your mind grows dispassionate towards that sensation, and becomes detached and free. It is the same with regard to all sensations or feelings.
다음은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거나 간에 우리의 모든 감각이나 느낌들과 연관된 정신개발('명상')의 수행법이 있다. 그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당신은 불행하고 슬픈 느낌을 체험한다. 이 상태에서 당신의 마음은 어둡고, 흐릿하며, 명확치 않다. 그것은 풀죽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왜 불행한 느낌이 드는지 명확히 알지 못 할 때도 있다. 무엇보다 먼저, 당신은 불행한 느낌으로 인하여 불행해지지 말아야 함을, 걱정으로 인해 걱정하지 말아야 함을 알아두어야 한다. 단지 왜, 불행하거나 걱정되거나 슬픈 감각이나 느낌이 있는지 명확히 알도록 노력하라.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즉 어떻게 그 원인이 되는가, 그것이 어떻게 사라지는가, 즉 어떻게 그치는가를 밝히도록 노력하라. 마치 과학자가 어느 대상을 관찰하듯, 어떤 주관적 작용도 배제시키고 바깥에서 그것을 관찰하는 것처럼 밝혀내려고 노력하라. 여기서 다시, '내 느낌'이나 '내 감각'으로 주관적으로 그것을 바라보지 말아야 하며, 오직 '하나의 느낌'이나 '하나의 감각'으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역시 '나'라는 거짓된 관념을 잊어야만 한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그 성질을 볼 때 당신의 마음은 그 감각에 대하여 점점 초연해지고 집착을 여의고 자유롭게 된다. 그것은 모든 감각이나 느낌에 대해 똑같이 그러하다.
Now let us discuss the form of 'meditation' with regard to our minds. You should be fully aware of the fact whenever your mind is passionate or detached, whenever it is overpowered by hatred, ill-will, jealousy, or is full of love, compassion, whenever it is deluded or has a clear and right understanding, and so on and so forth. We must admit that very often we are afraid or ashamed to look at one's own mind as one looks at one's face in a mirror.
이제 우리 마음에 대한 '명상'의 형태를 논하기로 하자. 당신의 마음이 열렬한지 초연한지, 증오나 악의, 시기심에 정복당해 있는지, 아니면 사랑, 자비로 가득 차 있는지, 환상에 빠져있는지, 아니면 명확하고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지, 그런 기타 등등의 사실에 철저히 주의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이 아주 많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린 그것을 회피하려 한다.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듯 자신의 마음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Here is no attitude of criticizing or judging, or discriminating between right and wrong, or good and bad. It is simply observing, watching, examining. You are not a judge, but a scientist. When you observe your mind, and see its true nature clearly, you become dispassionate with regard to its emotions, sentiments and states. Thus you become detached and free, so that you may see things as they are.
여기서는 비판하거나 심판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옳고, 그른 것이나 좋고 나쁜 것을 식별해내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관찰하고, 지켜보고, 조사하는 것이다. 당신은 재판관이 아니고 과학자여야 한다. 당신이 마음을 관찰해서 그 진정한 성질을 명확히 알게 될 때 그런 감정과 정서와 상태들에 대해서 초연하게 된다. 당신은 그렇게 해서 집착을 버리고 자유롭게 되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Let us take one example. Say you are really angry, overpowered by anger, ill-will, and hatred. It is curious, and paradoxical, that the man who is in anger is not really aware, not mindful that he is angry. The moment he becomes aware and mindful of that state of his mind, the moment he sees his anger, it becomes, as if it were, shy and ashamed, and begins to subside. You should examine its nature, how it arises, how it disappears. Here again it should be remembered that you should not think 'I am angry', or of 'my anger'. You should only be aware and mindful of the state of an angry mind. You are only observing and examining an angry mind objectively. This should be the attitude with regard to all sentiments, emotions, and states of mind.
한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정말로 화가 났으며, 노여움과 악의와 증오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해보자. 화난 사람이 자기가 화났다는 것을 진정으로 염두에 두어 깨닫지 못함은 엉뚱하고 역설적인 일이다. 자기 마음의 상태를 깨닫고 염두에 두게 되는 순간, 즉 자기가 화난 것을 보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끄러워져서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당신은 그 성질, 즉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다시 '나는 화나 있다'라든지 '나의 분노'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되새겨야겠다. 당신은 화난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염두에 두기만 하면 된다. 당신은 화난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조사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모든 정서, 감정, 그리고 마음의 상태에 대해 취할 태도이다.
Then there is a form of 'meditation' on ethical, spiritual and intellectual subjects. All our studies, reading discussions, conversation and deliberations on such subjects are included in this 'meditation'. To read this book, and to think deeply about the subjects discussed in it, is a form of meditation. We have seen earlier[7] that the conversation between Khemaka and the group of monks was a form of meditation which led to the realization of Nirvāna.
다음으로 윤리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주제에 대한 '명상'의 형태가 있다. 우리의 모든 공부와 독서, 토론, 대화와 그런 주제들을 심사숙고하는 것이 이 '명상'에 속한다. 이 책을 읽고 이 책에서 논한 주제들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명상'의 한 형태이다. 우리는 앞에서 케마까와 승려 동아리 간의 대화가 열반의 실현에 이끄는 '명상'의 한 형태임을 보았다.
So, according to this form of meditation, you may study, think, and deliberate on the Five Hindrances, (Nivarana), namely:
1. lustful desires (kāmacchanda)
2. ill-will, hatred or anger (vyāpāda)
3. torpor and languor (thina-middha)
4. restlessness and worry (uddhacca-kukkucca),
5. sceptical doubts (vicikicchā)
그래서 이런 형태의 '명상'으로 "다섯 장애"(Nirvana;五蓋(오개))를 연구하고 생각하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즉,
1. 육체적 욕망[貪慾(탐욕)]
2. 악의나 증오, 노여움[瞋恚(진에)]
3. 권태와 게으름[昏沈睡眠(혼침수면)]
4. 불안과 걱정[掉擧惡作(도거악작)]
5. 회의적인 의심[懷疑(회의)]
These five are considered as hindrances to any kind of clear understanding, as a matter of fact, to any kind of progress. When one is over-powered by them and when one does not know how to get rid of them, then one cannot understand right and wrong, or good and bad.
사실상, 어떤 명확한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도, 어떤 발전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들 다섯 가지는 장애로 여겨진다. 그것들에 굴복 당하면, 그리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옳고 그른 것, 또는 좋고 나쁜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One may also 'meditate' on the Seven Factors of Enlightenment (Bojjhanga). They are:
1. Mindfulness (sati), i.e., to be aware and mindful in all activities and movements both physical and mental, as we discussed above
2. Investigation and research into the various problems of doctrine (dhamma-vicaya). Included here are all our religious, ethical and philosophical studies, reading, researches, discussions, conversation, even attending lectures relating to such doctrinal subjects
3. Energy (viriya), to work with determination till the end
4. Joy (piti), the quality quite contrary to the pessimistic, gloomy or melancholic attitude of mind
5. Relaxation (passaddhi) of both body and mind. One should not be stiff physically or mentally
6. Concentration (samādhi), as discussed above
7. Equanimity (upekkhā), i.e., to be able to face life in all its vicissitudes with calm of mind, tranquillity, without disturbance.
또한 "깨달음의 일곱 요소"[七覺分(칠각분),七覺支(칠각지)]로써 '명상'을 할 수도 있다. 그것들은
1. 마음이 깨어있기[念(염)]: 즉, 우리가 위에서 논했듯이 육체와 정신 모두에 대해서 그 모든 활동과 움 직임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것.
2. 교리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조사, 연구하는 것[擇法(택법)]: 여기에는 종교, 윤리, 철학에 대한 공부와 독서, 연구, 토론, 대화, 그리고 그런 교리적 주제와 관련된 강의를 듣는 것까지 모두 포함된다.
3. 추진력[精進(정진)]: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마음 굳게 일하는 것.
4. 기쁨[喜(희)]: 염세적이나 어둡고 우울한 마음자세와는 정반대의 성질.
5.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기[輕安(경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뻣뻣하게 긴장해서는 안 된다.
6. 정신집중[定(정)]: 위에서 논한 바와 같다.
7. 평온함[捨(사)]: 즉,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어서 삶의 모든 흥망성쇠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기.
To cultivate these qualities the most essential thing is a genuine wish, will, or inclination. Many other material and spiritual conditions conductive to the development of each quality are described in the texts.
이런 성품들을 배양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은 순수한 바람, 의지 또는 의도이다. 똑같이, 성품들 각각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다른 여러 물질적, 정신적 조건들이 경에 기술되어있다.
One may also 'meditate' on such subjects as the Five Aggregates investigating the question 'What is a being?' or 'What is it that is called I?' or on the Four Noble Truths, as we discussed above. Study and investigation of those subjects constitute this fourth form of meditation, which leads to the realization of Ultimate Truth.
또한 우리가 앞에서 논한 대로 '존재란 무엇인가?' 또는 '나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의문을 연구하는 "다섯 가지 모임"[五蘊(오온)] 같은 주제나,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사성제)]에 대해서 '명상'할 수도 있다. 그런 주제들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이 네 번째 형태의 명상이다. 그것은 궁극적 진리의 깨달음에 이끈다.
Apart from those we have discussed here, there are many other subjects of meditation, traditionally forty in number, among which mention should be made particularly of the four Sublime States:(Brahma-vihāra): (1) extending unlimited, universal love and good-will (mettā) to all living beings without any kind of discrimination, 'just as a mother loves her only child'; (2) compassion (karunā) for all living beings who are suffering, in trouble and affliction; (3) sympathetic joy(muditā) in other' success, welfare and happiness; and (4) equanimity (upekkhā) in all vicissitudes of life.
우리가 여기서 논해온 것과는 별도로 '명상'에 대한 다른 많은 주제들이 있다. 전통적으로 40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특별히 네 가지 "숭고한 경지"[梵住(범주)]를 언급해야겠다.
⑴ '마치 아기 엄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듯' 한정 없는 보편적 사랑과 좋은 의도를 어떤 차별도 두지 말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확대시키는 것[慈(자)]
⑵ 고통과 걱정과 시달림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悲(비)]
⑶ 남이 성공하고 잘되고 행복함에 마음을 함께 하는 즐거움[喜(희)]
⑷ 삶의 어떤 흥망성쇠에도 평온한 것[捨(사)]
Chapter VIII. What the Buddha Taught and the World Today
There are some who believe that Buddhism is so lofty and sublime a system that it cannot be practised by ordinary man and woman in this workaday world of ours, and that one has to retire from it to a monastery, or to some quiet place, if one desires to be a true Buddhist.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불교는 우리 각박한 세상의 선남선녀가 실천할 수 없는 아주 지고하고 숭고한 체계라서, 진정한 불제자가 되고 싶다면 절간이나 좀 한적한 곳에 은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This is a sad misconception, due evidently to a lack of understanding of the teaching of the Buddha. People run to such hasty and wrong conclusions as a result of their hearing, or reading casually, something about Buddhism written by someone, who, as he has not understood the subject in all its aspects, gives only a partial and lopsided view of it. The Buddha's teaching is meant not only for monks in monasteries, but also for ordinary men and women living at home with their families. The Noble Eightfold Path, which is the Buddhist way of life, is meant of all, without distinction of any kind.
이는 슬픈 오해이며, 분명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데 기인한 것이다. 사람들은 소문을 듣거나 어쩌다가 읽어본 것을 가지고 그런 경솔하고 그릇된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불교라는 주제를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단지 부분적이고 편향된 시각만을 제공하는 사람이 쓴 것을 읽어 본데 따른 결과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절간의 승려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가족들과 생활하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거룩한 여덟 길"[八正道(팔정도)]은 불제자가 사는 방법이며,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The vast majority of people in the world cannot turn monk, or retire into caves or forests. However, noble and pure Buddhism may be, it would be useless to the masses of mankind if they could not follow it in their daily life in the world of today. But if you understand the spirit of Buddhism correctly (and not only its letter), you can surely follow and practice it while living the life of an ordinary man.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승려가 되거나, 동굴이나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는 없다. 아무리 불교가 거룩하고 순수하다 하여도 요즘 세상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따를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 대중들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불교의 정신을 정확히 이해한다면(문자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 일반인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따르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There may be some who find it easier and more convenient to accept Buddhism, if they do live in a remote place, cut off from the society of others. Others may find that that kind if retirement dulls and depresses their whole being both physically and mentally, and that it may not therefore be conducive to the development of their spiritual and intellectual life.
어떤 이들은 사회에서 단절되어 외딴 곳에서 산다면 불교를 받아들이기가 더 수월하고 편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식의 은둔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을 무디고 침체하게 만들어서 정신적, 지적 생활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True renunciation does not mean running away physically from the world. Sāriputta, the chief disciple of the Buddha, said that one man might live in a forest devoting himself to ascetic practices, but might be full of impure thoughts and 'defilements'; another might live in a village or a town, practising no ascetic discipline, but his mind might be pure, and free from 'defilements'. Of these two, said Sāriputta, the one who lives a pure life in the village or town is definitely far superior to, and greater than, the one who lives in the forest.
참된 출가란 육체적으로 속세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처의 수제자 사리뿟따는 어떤 사람이 금욕적인 수행에 헌신하면서 숲 속에 살더라도 불순한 생각과 '더러움'이 가득할 수도 있으며, 다른 어떤 사람은 금욕적인 수행을 하지 않으면서 고을이나 도회지에 살더라도 순수하고 '더러움'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리뿟따는 이들 둘 중에 고을이나 도회지에서 순수하게 사는 사람이 숲 속에 사는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고 더 위대하다고 말했다.
The common belief that to follow the Buddha's teaching one has to retire from life is a misconception. It is really an unconscious defence against practising it. There are numerous references in Buddhist literature to men and women living ordinary, normal family lives who successfully practiced what the Buddha taught, and realized Nirvāna. Vacchagotta the Wanderer, (whom we met earlier in the chapter on Anatta), once asked the Buddha straight-forwardly whether there were laymen and woman leading the family life, who followed his teaching successfully and attained to high spiritual states. The Buddha categorically stated that there were not one or two, not a hundred or two hundred or five hundred, but many more laymen and women leading the family life who followed his teaching successfully and attained to high spiritual states.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생활을 떠나야 한다는 상식적인 믿음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그것은 실천하지 않는 데 대해 생각 없이 변명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불교 문헌에는 평범한 보통 가정생활을 하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열반을 깨달은 남녀들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한번은 "방랑수행자" 밧차곳따(우리는 이미 "나없음"의 가름에서 그를 만났었다)가 부처에게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남녀 평신도[優婆塞(우바새)와 優婆夷(우바이)]가 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처는 한 둘이 아니고 일이백이나 오백도 아닌 훨씬 많은 수의 평신도들이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자기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분명히 말한다.
It may be agreeable for certain people to live a retired life in a quiet place away from noise and disturbance. But it is certainly more praiseworthy and courageous to practice Buddhism living among your fellow beings, helping them and being of service to them. It may perhaps be useful in some cases for a man to live in retirement for a time in order to improve his mind and character, as preliminary moral, spiritual and intellectual training, to be strong enough to come out later and help others. But if a man lives all his life in solitude, thinking only of his own happiness and 'salvation', without caring for his fellows, this surely is not in keeping with the Buddha's teaching which is based on love, compassion, and service to others.
어떤 이는 소음과 혼잡에서 멀리 떠나 조용한 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기분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료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을 도우며, 봉사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불교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더 칭찬할 만하고 용기 있는 일이다.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훈련을 미리 하여 충분히 성숙된 다음에는 남을 도울 양으로, 자기 마음과 성품을 향상시키려 한동안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유익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동료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행복과 '구원'만을 생각하며 고독하게 온 생애를 산다면 이는 분명히,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연민하며 봉사하는데 근거를 둔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One might now ask: If a man can follow Buddhism while living the life of an ordinary layman, why was the Sangha, the Order of monks, established by the Buddha? The Order provides opportunity for those who are willing to devote their lives not only to their own spiritual and intellectual development, but also to the service of others. An ordinary layman with a family cannot be expected to devote his whole life to the service of others, whereas a monk, who has no family responsibilities or any other worldly ties, is in position to devote his whole life 'for the good of the many, for the happiness of the many' according to the Buddha's advice. That is how in the course of history, the Buddhist monastery became not only a spiritual centre, but also a centre of learning and culture.
어떤 사람은 이제 물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보통 재가신도로 살아가면서 불교를 따를 수 있는데 왜 부처가 설립한 "승려들의 동아리"인 승가가 있는가? 승가는 자신의 정신적, 지적 발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데 생애를 바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가족이 있는 보통 재가신도가 승려같이 자기 전 생애를 남에게 봉사하는데 바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부양 의무가 있는 가족이나 다른 어떤 속세의 구속이 없는 승려는 부처가 지도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전 생애를 '많은 이의 이익을 위해, 많은 이의 행복을 위해' 바쳐야 될 위치에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사원이 정신적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각주1]
[각주1] <역주> 이 말은 승려인 지은이가 단지 의도적으로 승가를 좋게
말하려고 함이 아님을 분명히 해 두어야 겠다. 지은이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으며, 스리랑카를 비롯한 몇몇 불교 국가에서는 승려가 사
회봉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출가는 봉사하기 위하여'라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다시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The Sigāla-sutta (No. 31 of the Digha-nikāya) shows with what great respect the layman's life, his family and social relations are regards by the Buddha.
《시갈라-경》[善生經(선생경), 六方禮經(육방예경)]은 부처가 재가신도의 삶과 가족과 사회적 관계를 얼마나 대단히 존중했는지를 보여준다.
A young man named Sigāla used to worship the six cardinal points of the heavens-east, south, west, north, nadir, and zenith- in obeying and observing the last advice given him by his dying father. The Buddha told the young man that in the 'noble discipline' (ariyassa vinaye) of his teaching the six directions were different. According to his 'noble discipline' the six directions were: east: parents; south: teachers; west: wife and children; north: friends, relatives and neighbours; nadir: servants, workers and employees; zenith: religious men.
‘시갈라’라는 젊은이가 선친의 유언에 복종하여, 하늘의 여섯 주요 지점에, 즉 동서남북상하에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부처는 젊은이에게 자기 가르침의 "거룩한 계율"[聖律(성률)]에서의 여섯 방향은 다르다고 말했다. 부처의 "거룩한 계율"에 의한 여섯 방향은 동쪽이 부모요, 남쪽이 스승이며, 서쪽이 아내와 아이들, 북쪽이 친구와 친척 그리고 이웃이며, 아래쪽이 하인과 일꾼 그리고 피고용인이고, 위쪽이 성직자이다.
'One should worship these six directions' said the Buddha. Here the word 'worship' (namasseyya) is very significant, for one worships something sacred, something worthy of honour and respect. These six family and social groups mentioned above are treated in Buddhism as sacred, worthy or respect and worship. But how is one to 'worship' them? The Buddha says that one could 'worship' them only by performing one's duties towards them. These duties are explained in his discourse to Sigāla.
'이런 여섯 방향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부처가 말했다. 여기서 '예배'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신성한 것과 명예스럽고 존경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에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위에 언급한 이 여섯의 가족과 사회집단을 신성하여, 존경하고 예배드릴 만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 부처는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해서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의무들이 시갈라에게 해 준 설법에서 설명된다.
First: Parents are sacred to their children. The Buddha says: 'Parents are called Brahma' (Brahmāti mātāpitaro). The term Brahma denotes the highest and most sacred conception in Indian thought, and in it the Buddha includes parents. So in good Buddhist families at the present time children literally 'worship' their parents every day, morning and evening. They have to perform certain duties towards their parents according to the 'noble discipline': they should look after their parents in their old age; should do whatever they have to do on their behalf; should maintain the honour of the family and continue the family tradition; should protect the wealth earned by their parents; and perform their funeral rites after their death. Parents, in their turn, have certain responsibilities towards their children: they should keep their children away from evil courses; should engage them in good and profitable activities; should give them a good education; should marry them into good families; and should hand over the property to them in due course.
첫째,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는 신성하다. '부모님은 브라흐마라 불린다.'라고 부처는 말한다. 브라흐마[梵(범)]란 용어는 인도사상에서 최상이며 가장 신성한 개념으로 정의되는데, 부처는 여기에 부모를 포함시켰다. 그래서 요즘도 훌륭한 불교 집안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매일 조석으로, 말 그대로 '예배'를 드린다. 자녀들은 "거룩한 계율"에 따라 부모에 대해 정해진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부모님이 늙으면 봉양해야 한다. 부모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집안의 전통을 계승하여야 한다. 부모님이 벌어놓은 재산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사지내야 한다. 반면에 부모에게는 자식들에 대해 정해진 의무가 있다. 자식들이 나쁜 길에 들지 않도록 한다. 유익하고 옳은 활동에 참가시켜야 한다. 훌륭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 좋은 집안과 혼인을 시켜야 한다. 온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
Second: The relation between teacher and pupil: a pupil should respect and be obedient to his teacher; should attend to his needs if any; should study earnestly. And the teacher, in his turn, should train and shape his pupil properly; should teach him well; should introduce him to his friends; and should try to procure him security or employment when his education is over.
둘째, 스승과 제자의 관계. 제자는 마땅히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께 복종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시중을 들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반면에 스승은 제자를 올바르게 훈련시키고 향상시켜야 한다. 제자를 잘 가르쳐야 한다. 제자를 자기 친구에게 소개시켜야 한다. 교육이 끝났을 때 생계대책이나 직업을 마련해주기에 힘써야 한다.
Third: The relation between husband and wife: love between husband and wife is considered almost religious or sacred. It is called sadāra-Brahmacariya 'sacred family life'. Here, too, the significance of the term Brahma should be noted: the highest respect is given to this relationship. Wives and husband should be faithful, respectful and devoted to each other, and they have certain duties towards each other: the husband should always honour his wife and never wanting in respect to her; he should love her and be faithful to her; should secure her position and comfort; and should please her by presenting her with clothing and jewellery. (The fact that the Buddha did not forget to mention even such a thing as the gifts a husband should make to his wife shows how understanding and sympathetic were his humane feelings towards ordinary human emotions). The fire, in her turn, should supervise and look after household affairs; should entertain guests, visitors, friends, relatives and employees; should love and be faithful to her husband; should protect his earnings; should be clever and energetic in all activities.
셋째, 부부 관계. 부부간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라고, 또 신성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거룩한 가정생활'이라 부른다.[각주2] 여기서도 '브라흐마'라는 용어의 중요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 관계에 대해 최고의 경의가 주어지고 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며 서로에게 헌신하여야 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정해진 의무가 있다. 남편은 항상 아내를 존경하여서 결코 얕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아내를 사랑해야하고 아내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 아내에게 지위와 안락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옷과 보석을 선물해서 아내를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부처는 남편이 아내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야 하는 선물 같은 것까지 잊지 않고 말했다. 이 사실은 보통 사람의 감정을 향한 자비로운 정이 얼마나 이해심 있고 동정적이었나를 보여준다.) 반면에 아내는 가사를 감독하고 돌보아야 한다. 손님과 방문객, 친척, 친구, 그리고 고용인들을 대접해야 한다.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 남편의 수입을 보호해야 한다. 모든 활동에서 슬기롭고 생기가 있어야 한다.
[각주2] <역주>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梵行(범행)]는 원래 인도에서 전통
적인 출가수행자의 독신생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렇게 부부의 삶
에 대해서도 성직자와 다름없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Fourth: The relation between friends, relatives and neighbours: they should be hospitable and charitable to one another; should speak pleasantly and agreeably; should work for each others' welfare; should be on equal terms with one another; should not quarrel among themselves; should help each other in need; and should not forsake each other in difficulty.
네 번째, 친구, 친척, 이웃들 간의 관계. 서로 인심이 후해야하고 자비로워야 한다. 유쾌하고 기분 좋게 말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의 복지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에게 평등한 말씨를 써야 한다.〔즉, 하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 간에 싸움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필요한 것에 대해서 서로 도와야 한다. 다른 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Fifth: The relation between master and servant: the master or the employer has several obligations towards his servant or his employee: work should be assigned according to ability and capacity; adequate wages should be paid; medical needs should be provided; occasional donations or bonuses should be granted. The servant or employee, in his turn, should be diligent and not lazy; honest and obedient and not cheat his master; he should be earnest in his work.
다섯째, 주인과 하인 간의 관계. 주인 또는 사용자에게는 하인이나 고용인에 대한 몇 가지 의무가 있다. 노동은 소질과 능력에 따라 할당되어야 한다. 충분한 임금을 주어야 한다. 의료보장이 되어야 한다. 특별 수당과 상여금을 인정하여야 한다. 한편 하인이나 고용인은 응당 근면해야 되고 게을러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유순하며 주인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일을 최대한으로 열심히 해야 한다.
Sixth: The relation between the religious (lit. recluses and brāhmanas) and the laity: lay people should look after the material needs of the religious with love and respect; the religious with a loving heart should impart knowledge and learning to the laity, and lead them along the good path away from evil.
여섯째, 성직자(원문에는 사문과 바라문)와 재가신도 간의 관계. 재가신도는 성직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애정과 존경으로 돌보아야 한다. 성직자들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평신도에게 지식과 배워야할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해악을 멀리하도록 좋은 길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We see then that the lay life, with its family and social relations, is included in the 'noble discipline', and is within the framework of the Buddhist way of life, as the Buddha envisaged it.
그렇게 우리는 가족과 사회적 유대를 가지고 평신도로 사는 것이 "거룩한 계율"에 속해있음을 본다. 그리고 평신도의 삶도 부처가 구상한 불제자의 생활방식의 골격을 이루는 것을 본다.
So in the Samyutta-nikāya, one of the oldest Pali texts, Sakka, the king of the gods (devas), declares that he worships not only the monks who live a virtuous holy life, but also 'lay disciples (upāsaka) who perform meritorious deeds, who are virtuous, and maintain their families righteously'.
그래서 가장 오래된 빨리 원전의 하나인《상윳따-니까야》에서는 신(神)들의 왕인 제석천(帝釋天)이 덕망 있게 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칭송할 만한 행위를 다하고 덕망이 있으며 올바른 방법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는 평신도 제자들께도 예배를 드리겠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첫댓글 관세음보살
복사해서 공부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