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87
3월5일[사순 제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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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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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i0l9FCuyc0
[인천교구 신교선 가브리엘(역곡2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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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용서니 뭐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저 밥 먹듯이 용서하십시오!>
복음서는 온통 하느님 아버지의 흘러넘치는 자비와 우리를 향한 측량할 수 없는 너그러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무거운 죄와 악습, 치명적인 실수와 허물이 떠올라 괴로울 때마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는 즉시 복음서를 펼쳐 드는 일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와 관련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후 그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공동생활을 시작한 베드로였습니다.
성장 배경이나 출신 성분이며 모든 것이 다른 사도들이 함께 동고동락하다 보니, 너무나도 당연히 충돌할 일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공동체 역시 우리와 비슷한 공동체였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삐거덕거렸을 것입니다.
더구나 수제자로서 사도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했던 베드로는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유난히 미운 마음이 드는 사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한 상처가 컸던 베드로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나름 고민한 흔적이 있습니다. 마음 크게 먹고 심호흡도 한 후,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면서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 사도를 뒤로 나가떨어지게 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곱이란 숫자는 충만함, 완전함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니!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씀은 결국 용서니 뭐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냥 습관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삼시 세끼 밥 먹듯이 틈만 나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내면 깊숙이 차곡차곡 쌓아둘 때, 우리 영혼과 육신에 끼치는 악영향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한두 번, 일곱 여덟 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수시로, 숨 쉬듯이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용서를 통해 충만한 대자유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차곡차곡 쌓아둠을 통해 혹독한 고통 속에 살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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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K38pCEwn4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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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미워진다면 우선 감사일기 쓰고 십일조 내고 자선부터 실천하라>
영화 ‘레인 맨(Rain Man)’에서 돈만 아는 이기적인 찰리 배빗은 자폐증이 있는 그의 형 레이먼드와의 동행을 통해 성숙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찰리는 빚에 허덕이면서 파산 직전에 몰렸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유산을 받으려면 형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이먼드를 고인이 된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고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던 중 어렸을 때 형이 자기를 구하려다 오히려 부모님에 의해 시설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기는 형이 있는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레이먼드와 함께 다니며 모험을 경험하고 그 과정에 형과 정이 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형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시설에 살게 하는 것이 더 형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유산을 포기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은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관계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과 반대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용서에 관한 내용이지만, 비유 말씀은 돈을 주제로 하십니다. 곧 일만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일만 탈렌트는 하루 일당을, 곧 한 데나리온을 10만 원이라치면 6조 원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액수를 탕감받은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꾸어간 돈 100데나리온, 곧 천만 원을 갚지 않는 것에 더 화를 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6조 원을 받은 기쁨이 천만 원 잃은 고통보다 당연히 더 커서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치부할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는 내가 받은 용서의 기쁨이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가 나에게 주는 고통보다 크지 못하게 느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피해의식’이 막습니다. 피해의식이란 내가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보통은 어렸을 때 받지 못했던 사랑의 상처가 너무 커서 나이가 들어서도 생존에 필요한 재물을 잃는 고통을 남들보다 몇 배나 크게 느낍니다. 그래도 6조 원의 기쁨보다 천만 원의 고통이 더 큰 것은 문제입니다.
미움은 교만에서 옵니다. 그러나 그 교만은 또한 육욕과 탐욕을 자아냅니다. 가장 이기기 쉬운 것이 탐욕이고 그다음이 육욕이고 마지막이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우선 탐욕을 먼저 없애야 나에게 돈을 꾸어간 사람에 대한 원한이 줄어듭니다.
우리는 탐욕을 없애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일기 쓰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나에게 돈을 안 갚는 사람이 덜 미워집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는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버는 이유는 가정을 위해 내어주라는 뜻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만 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록펠러는 십일조를 철저히 내는 사람이었지만,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쓸데없는 보험료가 나갔을 때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병이 들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때는 당연히 미운 인간들이 많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불치병에 걸려 오래 못 살게 되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하게 되었고 그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진 것에 감사한 것을 넘어서서 줄 수 있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잃은 재물은 오히려 좋은 일에 쓰였다고 하며 미워지던 사람이 고마워질 수도 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그 한 군데의 상처 때문에 건강한 다른 많은 지체의 행복을 잊어버립니다. 오직 그 상처에만 집중하고 그 상처에 아주 작은 아픔이라도 더해질라치면 기겁합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그 상처를 건드리면 용서할 수가 없게 됩니다.
재물이나 명예, 인기나 혹은 내가 가진 무엇으로도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미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분노는 나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옵니다. 그 욕망을 무력하게 만드는 게 이웃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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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에 와서 처음 만난 교우는 이발소 형제님입니다. 전임 신부님도 그 형제님 이발소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저도 첫인상이 중요할 것 같아서 이발소를 찾았습니다. 이발소 형제님은 제가 오기 전에 부제님도 왔었다고 합니다. 부제님도 첫인상이 중요할 것 같아서 왔다고 합니다. 뉴욕에서는 미장원을 이용했는데, 이발소에 오니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노련한 이발소 사장님이 젊은 제자를 두었습니다. 드디어 제자가 처음으로 손님을 받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손님의 머리를 깎았는데 조금 길게 깎았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길게 깍은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리가 조금 기니까 예술가처럼 보입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다음 손님이 왔을 때는 머리를 조금 짧게 깎았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짧게 깎은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리가 짧으면 강인해 보인답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다음 손님이 왔을 때는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오래 걸린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시간을 아끼지 않는답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다음 손님이 왔을 때 시간이 너무 짧게 걸렸습니다. 손님이 ‘이거 너무 대충한 것 아닙니까?’ 제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은 금이랍니다.” 손님은 만족해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첫 미사를 마치고 사목위원, 구역장님들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분은 4월에 성지순례를 하는데 같이 가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본당의 일정과 보좌신부님의 일정을 보고 알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9월에 성령대회를 하는데 참석해 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5월에 꾸르실료 교육이 있는데 제가 지도신부라고 합니다. 뉴욕에서 아직 오기 전인데 중남부 사제 모임에서 제가 지도신부가 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뉴욕에서도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도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구역 모임이 있는데 참석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함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함께하는 날 중에 맑은 날도 있을 것입니다. 흐린 날도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비가 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다 눈이 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불행은 불평과 불만의 문으로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행복은 이해와 용서의 문으로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노련한 이발소 사장님처럼 불평과 불만의 문은 꼭 잠가놓고 이해와 용서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면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믿습니다.
용서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 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과 규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갈등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 까지도 놓아버리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서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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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러시아는 영토가 가장 큰 나라입니다. 지하자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마치 아합 왕이 자신의 포도원이 많이 있음에도 하나밖에 없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 같습니다. 나봇은 힘이 없었습니다. 아합왕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서 아합왕의 부당함을 이야기하게 하였습니다. 아합왕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부당한 침공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것은 제국주의 시대의 유물입니다. 국제사회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침공을 멈추고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물속에서 살아야 하는 장구벌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속에서 보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영롱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물속에 있는 장구벌레들은 물 밖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잠자리가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선배들은 물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 밖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려 줄 수 없었습니다.
잠자리가 되면 반드시 물속으로 돌아와서 알려주리라고 결심한 장구벌레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자리가 되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물속의 장구벌레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반드시 허물을 벗어버리고 하늘을 높이 나는 잠자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세상을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처벌과 제재는 법과 규칙의 문제입니다. 사회는 이와 같은 법과 규칙이 있어야지 질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양심과 내적인 자유의 문제입니다.
처벌과 제재는 질서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주거나, 상처를 치유해 주지는 못합니다. 용서는 마음의 평화를 주기 때문에, 내적인 상처를 치유해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는 물속의 장구벌레가 하늘을 나는 잠자리가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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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21-35: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일흔일곱이라는 수의 신비는 이 특별한 수가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았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는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그에게 일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과 셈을 시작한다. 종은 많은 돈을 맡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많은 돈을 잃은 듯하다. 이익을 내기는커녕 엄청난 돈을 잃어 많은 빚을 지고 말았다. 임금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탕감받는 빚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려 줌으로써 그를 가르치고자 했다. 그도 그와 같은 자비의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했는가?
종은 무릎을 꿇고 참아달라고 탄원한다.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27절). 주인은 종이 이 일에서 배워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자신의 불행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그가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탕감해 주기는커녕 참지도 않고 그를 옥에 가두어 빚을 갚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는 영원히 고문 형리에게 맡겨졌다는 뜻이다. 그는 결코 그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하느님을 이렇게 사악한 사람의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 형제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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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비유로 이러한 가르침을 주시는데, 만 탈렌트는 ‘일억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일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고 할 때 백 년을 일하여야 벌 수 있는 금액이 삼만 육천오백 데나리온입니다. 그런데 일억 데나리온을 빚졌다면, 이는 평생을 일하여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빚입니다. 결국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한번 상상을 하여 볼까요?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자신은 물론이고 ‘아내와 자식까지 팔아야 하는’ 채무자에게, 채권자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이를 모두 탕감하여 준다면 그는 어떤 심정이 될까요?
그러나 이 종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같은 종들 사이에서는 이런 자비와 탕감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간절함을 아시고(제1독서, 아자리야의 기도 참조), 가난을 볼모로 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자신을 희생하시어 인간을 가장 안전한 상태에 있도록 배려하시지만, 인간은 상대의 간절함을 이용하고 착취하며 파괴합니다. 같은 동료에게 가혹하게 굴었던 종의 소식이 전해지자 비유는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베풀었던 용서와 탕감을 거두어들입니다.
우리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여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상대가 회개하였거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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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매정한 종의 비유>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마태 18,24-30)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2-35)
‘매정한 종의 비유’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니 너희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어라.” 그런데 실제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큰 자비는 막연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실감 나지도 않는데, 이웃이 나에게 준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살아 있고,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고, 끊임없이 나를 괴롭힙니다. 많은 경우에, 이웃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셨다는 자비보다 더 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만일에 진짜로 큰 죄를 지은 경우라면, 회개하면서 하느님의 큰 자비를 체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이웃을 용서하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을 좀 더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큰 자비를 체험한 적이 없다면, 머리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도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먼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 또 그 큰 자비를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이 받고 있는지를 묵상하고, 체험하려고 노력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만 탈렌트를 빚진 적이 없다. 그러나 저자가 백 데나리온을 나에게 빚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고, 그 덕분에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 그것은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그 빚을 탕감받은 일과 같다.”고 설명하면 될까? 사람 중에는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말부터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만 탈렌트를 탕감받았다는 말은 더욱더 공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큰 죄를 지은 적 없으니 큰 자비와 큰 용서를 받을 일도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전해 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도 본래 마음이 따뜻해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과 자기에게 상처를 준 이웃을 용서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대부분은 상처를 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합니다, 사실 그게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면, 이야기의 순서를 바꿔서, 첫 번째 종이 동료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않고 동료를 감옥에 가둔 다음에 임금에게 가서는 만 탈렌트를 탕감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면 임금은 “너는 네 동료의 빚은 탕감해 주지 않았으면서 무슨 염치로 나에게 와서 큰 빚을 탕감해 달라고 청하느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 앞에 가서 용서를 간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너는 이웃을 용서하지 않았으면서 어찌 감히 나에게 용서를 청하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테니까 주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용서 은총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 응답으로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교리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주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나중에 취소하게 될 일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그래서 한 번 주신 은총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이미 주신 은총을 온전히 받아서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내가 이웃을 용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이미 주신 은총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만 탈렌트라는 엄청난 거액은 하느님의 큰 은총을 상징하고, 백 데나리온이라는 상적으로 취급하는 소액은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잘못들과 실수들을 상징합니다. 돈의 액수에 초점을 맞춰서, 이 이야기를 ‘백 데나리온이라는 소액을 투자해서 만 탈렌트라는 거액을 벌어들이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백 원을 투자해서 일억 원을 얻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신앙생활이 무슨 투자는 아니지만, 나중에 열매를 얻기 위해서 지금 씨를 뿌리는 생활이기 때문에, 뜻으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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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
이스라엘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유다는 결국 바빌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예언자들이 북부 이스라엘 멸망 후에 유다의 왕들에게 간곡히 경고도 보냈지만 애석하게도 그 꿈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집안의 아들인 다니엘은 예언자로 활동합니다. 그는 궁중 교육을 받고 또 왕의 총애도 받았지만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시온 언덕과 이스라엘 동포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과 함께 궁중생활을 하던 유대 청년들, 사드락, 메삭, 아벳이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세운 금상 앞에 절을 하는 것을 거부하자 그는 몹시 노하여 그들을 불가마에 던집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지 않고 불가마에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자르야는 다른 사람이 세 청년과 함께 불가마에 있었고 그 불길 속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찬미와 찬송을 바치지만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비로 받아주시도록 아울러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다니엘 예언서 3,37-38)
그는 다윗이 하느님 앞에 범죄하고 자신을 낮춘 그 심정으로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라는 표현을 하느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바칩니다.
임금 앞에 어마한 돈, 만 탈란트를 탕감을 받은 종이 자신의 빚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 넣는 무자비함을 들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하느님께는 무한한 용서를 받았으면서 내 동료의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무한히 자비하신데 우리는 때로 그 반대의 옹졸한 모습을 지니고 삽니다. 아자르야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는 모습으로 우리도 하느님을 닮을 수 있도록 하느님의 사랑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내 이웃에게 좁고 편협한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넓고 깊은 사랑으로 내 이웃을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아울러 겸손되이 하느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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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태 16,16 참조) 이후 예수님의 시선은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맞으실 사건, 곧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에 걸쳐 예고하십니다.(16,21; 17,22-23; 20,18-19 참조)
세 번의 예고 뒤에 각각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지는데, 특별히 두 번째 예고 다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설교문’(18장 참조)을 삽입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 18장 1-35절은 제자, 곧 교회 공동체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어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마태오 복음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 설교에서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5,21-26.38-42.43-48; 6,12.14-15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께 죄지은 형제를 몇 번 용서해야 하는지 묻지만, 그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횟수는 제한할 수 없다고 답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무제한적 용서에 관한 가르침을 재확인하십니다.
제자들이 죄를 제한 없이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작은 이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18,14 참조)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용서에 대하여 한계를 모르시는 분이십니다.(18,35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용서로써 공동체와 화해할 가능성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죄지은 형제를 기꺼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들도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한 체험은 용서에 한계를 두려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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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8, 35)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18,21)라는 질문은 이미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하는 일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고 번번이 나에게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상처와 아픔 그리고 손실을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무자비한 종처럼 임금, 곧 하느님에게 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에게 무자비하게 대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현재 모습을 봅니다. 그러기에 임금은 무자비한 그 작자에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18,33)라고 호통을 치시며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는 표현에서 하느님의 분노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더 이상 과거의 잘못과 죄의 무게로 불행하게 살지 말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감옥에 갇힌 바로 자신을 풀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는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참된 자기 사랑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18,22)라고 당부하셨는데 살아오면서 우리는 어쩌면 일흔일곱 번이 아니라 강변의 모래알만큼 셈할 수 없는 용서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에 힘입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어쩌면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하느님과 인간 마음의 크기 곧 용서의 크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조건과 단서, 회수에 상관없이 조건 없는 용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가장 극단적인 차이 곧 하느님다운 모습은 어쩌면 용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신의 전능을 용서와 자비로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 주는 비유가 바로 오늘 복음 이야기입니다. 복음에서 제시한 만 탈렌트는 지금의 화폐단위로 말하자면 천문학적인 숫자이며 인간으로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이며, 이는 결국 인간은 어떤 것으로도 하느님의 용서를 갚을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며 형편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이 아드님께서 그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서 인간을 재창조하셨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를 용서하며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에 대한 조건이며 단서입니다. 경험적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만, 그 용서는 늘 조건과 단서 그리고 회수가 붙은 용서이기에 같은 잘못을 반복할 때까지 유효한 조건부적인 용서이며 집행유예와 같은 한시적인 용서입니다. 또한 인간은 마음의 크기가 작기에 자신에게 잘못한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계산하며 다시 반복했을 때는 과거의 죄를 들추어내며 가중처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렇듯이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조건 없는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함에서는 무서울 만큼 참으로 무자비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의 종은 이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용서를 베풀며 산다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효경孝敬이며 공동체 생활의 미덕입니다. 스스로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형제를 용서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공동체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존재로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용서의 최절정은 바로 십자가상에서 다음 기도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23,34)라고 기도하심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본으로 보여 주시고 가르쳐주신 용서를 살도록 초대받은 사람이며, 우리의 용서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용서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나약한 존재이고, 함께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느 분은 누군가에게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바람을 표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왜 하느님께서 인간을 홀로 살지 않게 하고, 함께 더불어 존재하게 했는가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봅니다. 빈대가 무섭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 없듯이,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혼자 산다는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뜻에도 반하고, 삶의 참된 이유나 의미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행동이며 마음가짐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상처는 서로 사랑하기에 겪는 아픔이며 용서를 통해서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끈으로 묶인 가족이며 형제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는 곧 용서가 쉽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상대방에 대한 기대와 바람 때문에 오히려 더 용서가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인생이며 공동체 생활의 신비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18장은 공동생활에 관한 하늘나라의 헌법 혹 가훈家訓과도 같으며, 18장의 주된 흐름은 죄와 용서이며 결론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쉬울 것 같으면서도, 막상 용서해야 할 처지가 되어 보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 중 한 가지가 바로 용서입니다. 하지만 용서를 베풀고 살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도록 바라시는 것은 용서해야 할 사람, 즉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안긴 그 사람보다 용서해야 하는 자기의 행복과 건강한 삶을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살아갈 때 영혼이 파멸되어 가기에 죽어가는 존재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기보다 용서해야 하는 본인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은 신적인 사랑과 능력을 바탕으로 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먼저 용서받은 은총의 체험이 전제될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에는 인간의 몫과 하느님의 몫이 있는데, 인간은 다만 느낌이 아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의지로 용서할 뿐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에 잠재된 느낌까지 용서할 수 있도록 기억의 치유와 내적 평화를 받고서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느낌까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용서하신 분이시며 자비하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용서를 바탕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내 형제자매를 용서하며 살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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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자매님께서 젊었을 때, 남동생이 사고로 하늘나라에 가버려서 어린 조카들을 맡아 키웠다고 합니다. 남의 자식을 함부로 대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또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동생이기에 조카에게 자기 자식들보다도 더 먼저 챙겨주는 등 신경을 써서 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들이 “우리가 의붓자식이야?”라며 어릴 적에 불만을 많이 표시했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남동생의 아들을 잘 키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조카가 성인이 되어 의사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친척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고모인 자기에게 인사는커녕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자녀보다 더 신경 써서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튼 이 자매님은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이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만약 다시 남동생 죽었을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조카를 받을 것 같아?”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은 한참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조카가 커서 나를 섭섭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맡을 거야.”
이 모습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그냥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진짜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시지요. 가치 있는 삶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한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한계를 두지 않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사랑을 주시는 모습을 우리는 복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직접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에,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큰 빚을 탕감받고도 동료의 작은 빚을 참지 못하는 못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모습으로, 절대 가치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가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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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의 뜻>
마태오 18,21-22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23-35 (매정한 종의 비유)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님의 뜻>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님 계셔
나 있듯이
나 있어
그대 있음이
나 있게 하신
님의 뜻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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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용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걸맞은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 4,1-2) 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은 말 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바른길을 가려 노력하겠지만, 인간의 연약함으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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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 자신을 알라>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 17,8)
“너 자신을 알라”,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나는 왜 여기 와 있는가?”,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양상은 다소 달라도 날마다 물어야 할 절박한 물음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생각이 있는, 의식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날마다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이들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이 남을 판단하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은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제 좋아하는 말마디 셋이 배움, 섬김, 여정입니다. 배움의 여정, 섬김의 여정중에 날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 제 소박한 소원입니다. 오늘 다산 어른의 하루에 나오는 말마디들 역시 현자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무한하기에 지위로 구분할 수 없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가장 약한 사람이 먼저이다.”-다산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가 가장 가볍다.”-맹자
60년 이상 한결같이 생명운동에 전념해온 큰 어른 정성헌 선생의 귀띰 40가지 중 열만 인용합니다. 자기를 드려다볼 수 있는 거울같은 잠언입니다.
1.보고 싶은 사람이 되라.
2.남이 있어야 내가 있다.
3.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아껴라.
4.따뜻한 사람이 되라.
5.크고 깊은 사람이 되라.
6.마음의 스승을 모셔라.
7.욕심을 버려야 평화로워진다.
8.“오죽하면 그러겠냐”는 측은지심을 지녀라.
9.그윽하고 큰 꿈을 꾸고 말하자.
10.스스로, 함께, 꾸준히.
40가지중 10가지만 선정했는데 나머지 30가지 잠언도 금과옥조의 말씀이요 그대로 하느님의 생각도 이와 같으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정말 무지가 큰 병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 제가 참 많이 배우고 인용한 동방영성에서 특히 강조하는 무지입니다. 어제도 무지에서 파생되는 온갖 불행과 비극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나 국내의 혼란도 인간 무지의 결과임을 봅니다. 전쟁이나 약육강식의 ‘문명의 야만’이란 역설도 무지의 악에서 기인합니다. 참으로 치유받아야 할 불치의 병이 무지같습니다. 무지한 인간, 부정적 사람의 정의라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무지한 인간이 물음이라면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이 답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이요,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사람이 되는 공부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공부입니다. 이 공부에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데 여전히 미완의 존재로서 인생 학교 마치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바로 무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의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았다 취소되는 무자비한 종입니다.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사가 공분을 일으킵니다. 그대로 무지하고 인색한 인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만탈렌트 한량없는 사랑의 빚을 지고 탕감받고 살아가는, 끊임없는 용서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임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는 끝없는 찬미와 감사요, 이웃에게는 참으로 자비로워야 할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무한히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는 용서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기에 사랑해야 하며, 끊임없이 용서받고 있기에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의 의무, 용서의 의무입니다. 오늘 복음의 무자비하고 인색한 종에 대한 주인의 질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 대한 질책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러할 것이다.”
내가 살기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가 안되더라도 용서의 지향을 던져 놓고 보는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용서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 이 또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결국은 무지가 문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공부, 끊임없는 회개와 끊임없는 용서뿐입니다. 기도와 공부, 회개와 용서를 통한 겸손의 하느님 은총만이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바로 그 기도의 모범, 회개의 모범, 겸손의 모범이 제1독서 바빌론 유배중 불타는 화덕 속에서 기도하는 다니엘의 세 동료중 아자르야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불후의 기도가 다니엘서 3장의 아자르야와 세 동료의 하느님 찬미기도입니다. 이런 기도 역시 배워서 훈련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회개와 겸손의 기도가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의 자기인식의 절정에 도달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무지의 병을 온전히 치유하는 기도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이 아깝지만 마지막 부분이 특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주소서.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하느님께 흠숭과 공경을 다하는 하느님 중심의 참 아름답고 깊은 감동적인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의 절정에 도달한 경지입니다. 다니엘서 3장 26-44절까지 아자르야의 노래기도와 이어지는 다니엘의 동료 세 젊은이들의 3장 52-90절까지 하느님 찬송, 찬양기도 역시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불가마 속에서 이들이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음은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이었습니다. 연옥같은, 지옥같은 세상 불가마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 찬양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은총이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우리 모두 참된 겸손의 자기인식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는 누구인가?' 단적으로 우리 믿는 이들의 공통적 신원을 말하면 나는 '주님의 평생 전사', '주님의 평생 학인', '주님의 평생 형제'입니다. 이를 노래한 제 좌우명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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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두렵지만 우리가 청해야 할 것>
오늘 독서는 불가마 속에 곧 죽게 될 절체절명의 상태에서 세 청년을 대표하여 아자르야가 바치는 절절한 기도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너무도 불행한 처지이기에 매우 두렵지만 그래서 막상 제가 이런 처지가 된다면 제가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런 처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선 아무것도 없는 상태 곧 가난한 처지에 처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즈카르야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가난을 얘기합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즈카르야는 물질적 가난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물질적으로도 가난했겠지만 우리의 박해 시대처럼 교회가 완전하게 파괴되어 성직자와 교계 제도도 없고 성전도 없어서 제물도 없고 제사도 드릴 수 없게 된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난이 이스라엘을 겸손케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 즈카르야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주소서.”
그렇습니다. 가난이 겸손케 하고, 겸손이 진정 하느님 앞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겸손이 어제 수많은 예물과 군대를 거느리고 나타난 나아만과 달리 그런 것 없는 자신 그러나 마음만은 진실한 자신을 봉헌케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영적인 갈망이 최고조인 상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제가 부러운 것이 이것이고, 이 때문에 두렵지만 이런 상태가 되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너무 부자이고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과거에 비하면 물질적으로도 무척 아니 너무 부유하고 신앙 환경은 더더욱 부유해졌고 어찌 보면 넘쳐납니다.
사제도 많고, 성당도 많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피정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심은 굳건하지 않고 갈망은 없습니다.
이제는 뭔 배인지 모르기만 배가 불러서 미사가 있어도 가지 않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도 가지 않으며 골라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뭐가 많아도 마음이 없고 갈망이 없는 것이 문제인데 실은 너무 뭐가 많아서 마음도 없고 갈망도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싫고 그런 상황이 닥칠까 두렵지만 가난한 처지와 겸손한 마음을 주십사고 기도하는 오늘 저이고, 주님의 가르침대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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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조건 없는 용서!>
오늘 복음(마태 18,21-35)은 '조건 없는 용서에 대한 말씀'과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조건 없는 용서!'
용서에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 곧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너와 내가 사는 결정적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마태 18,35 참조)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가르쳐 주신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너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바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만 탈렌트'(6천 데나리온)는 현재 하루 노동자 임금(1데나리온) '십 만원'을 기준으로 한다면 6조원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이 엄청난 금액을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서 '백 데나리온'(1천만 원) 빚진 사람을 탕감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매정한 종의 비유'이며,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용서를 받고 있으니,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먼저 조건 없는 용서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루카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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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ouQ8mdrh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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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18, 35)
뺄 수도
더 할 수도 없는
우리의 현실을
살아보면
우리는 압니다.
용서가 있어야
할 곳에
형제가 있고
형제가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께로
흘러가는 삶이
바로
용서의 삶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고통을 모르면
용서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고통도
나누고
용서도 나눌 수
있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주님의 살과 피인
사랑과 용서임을
깨닫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용서할
차례입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건
마음으로부터의
용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해자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에
갇혀있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용서는
우리
영혼을 씻어주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용서는
말보다는
마음이며
마음보다는
행(行)하는
우리의
실천입니다.
아픈 마음으로부터
아픈 이들을 위한
용서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를 위한
용서가 아니라
우리자신을 위한
용서입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도
용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깊은 마음의
용서이십니다.
이 사순의
여정이
진정한
용서의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십자가 아래에서
용서를 청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용서를 통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임이
드러납니다.
용서를 행하는
용서의 사순이며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청하는
마음의 오늘입니다.
오늘이 용서이며
서로의 용서가
오늘을 되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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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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