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모 교수가 방송에 나와 대담하면서 우스갯소리로, 대학이라는 사회에서 가르치는 사람 중에는 이상한 X, 더 이상한 X, 진짜 이상한 X"이 많은데~~~
그 이상한 X들 중의 #폴리페서>
한 사람이 정계에 진출해서 나름 정치 활동을 하는 중에 그 사람을 지켜 본 대부분의 기존정치인들 여론이 "그래도 이 분이 제일 깨끗하다"는 최고의 좋은 평가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저질의 ‘X'라는 명칭에서 난데없이 똑같은 인격체를 두고 존대의 ’분‘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 그분의 삶의 좌표는 어디를 찍고 있는가?
지금 그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진짜 세상이 이상하다"는 것을 확인 받았다고 했다.
그만큼 세상은 인식과 민심이 괴리되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정답이 없다.
#서경'에서 말하기를,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고, 바보라도 잘 생각할 줄 알면 성인이 된다.”고 했다.
이는 성인과 바보의 다름이 다만 ‘생각’하기에 달렸다고 한다.
학자들, 지식인들, 사회 지도층들, 때로는 세상 학문의 범주를 벗어나 머리를 들어 위를 바라보며 깊이 생각하는 하늘의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다. .
지식인, 학자, 연예인, 언론인, 정치인 등 사회의 <인풀루언서, Influencer>들, 기존의 <#셀럽, Celebrity>들은 물론, <#인싸, Insider>들도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 안간힘으로 붙잡고 있다.
그 뒤를 이어 그 자리에 함께 숟가락 올리겠다는 수많은 경쟁자들의 별의별 '뻘짓"으로 이 사회에 상식과 윤리의 실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나타난 인간 삶의 좌표는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느낀다.
사람은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가파르고 비좁은 산 정상에서 평생을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삶의 ‘목표’와 인생의 ‘의미’를 혼동해선 안 된다. 삶에서 내가 이루려는 목표와 삶에서 내가 찾고 싶은 의미는 다르다는 것이다.
‘의미’는 언제나 ‘목표’이며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목표를 이루고 싶은 이유가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앞만 보고 가기도 바쁘고 벅차다. 그것을 왜 묻는가?
묻지를 마라”라 그것은 나의 성취를 지연시킬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끝까지 물어야
한다. 왜 오르려고 하는지, 정상을 향한 이런 노력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기쁨도, 고통도 끝이 있다는 것 알게 되는 날이 있다. 중요한 건 언젠가는 내려와야만 하는 그 길, 그 시기를 건강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다음 삶의 화복을 결정할 때가 더 많다.
<셀럽과 인싸>만 된다면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들 그것들을 인생 최대의 가치와 행복으로 생각하며 삶의 가장 높고 가치 있는 곳이라고 좌표 찍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사람이 원하는 삶의 <셀럽, 인싸>는 패망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셀럽과 인싸가 좋은가?”
19세기,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이며, 정서 심리학자,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낸,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는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미안해하고, 어떤 이는 분노한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의 분노에 분노한다.
이성과 신념, 진실과 가치가 곳곳에서 부딪친다. 반성(Reflection)의 사고를 할 수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에 머문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도 다시금 놀란다."고 한다.
이 시대 사람들은 생각 없이 오직, <셀럽과 인싸>가 행복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윌리엄 제임스> 교수는 동시대 덴마크의 심리학자 <#칼 랑게>와 함께 한 <#제임스-랑게 이론>에서 "슬프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는 상황을 느끼기 때문에 슬픈 것이고, 마찬가지로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상황이 행복을 만든다."고 했다.
특별히, <펜데믹>의 이 시대, 세계 속의 특정한 나라들은 슬픔을 느낄 여유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사망한 인간의 존엄성이 그렇게까지 훼손되는 일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들은 슬픔으로 울기보다는 울 수 있는 상황 때문에 슬픔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는 없을까?
계속해서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은 스스로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The greatest discovery of my generation is that a human being can alter his life by altering his attitudes)
<펜데믹>의 장기화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 힘들다는 호소를 하고 있다. 내가 외로울 때, 오히려 힘을 내어 타인의 외로움을 위로하려고 행동해 보자.
그때 사람은 더 강한 <헬퍼스 하이, helper's high>를 경험할 수 있다. 은둔 가운데 절망하고 포기하는 가운데 자신이 가진 삶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타인이 나에게 주는 위로보다 역으로 가보자.
내가 타인을 위로하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더 강력한 나의 고독함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삶의 태도를 변화시킴으로 얻게 되는 생활의 지혜가 행복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지금까지 인생을 깊이 사고하는 철학자의 이야기도 들어 보았다.
사회의 현실을 짚어 보는 혜안도 있었다.
좋아 보이는 위로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뚜렷하게 인간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친다.
사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복은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겠는가?
여기서 성경으로 방향을 바꾸어 보자. 말씀은 언제나 인간의 사고를 뛰어 넘는 영원한 복된 말씀이다. 말씀에서 능력이 나온다.
그렇지만, 말씀은 사람들에게 복이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학문을 조건 없이 공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과 성취에서 만족감을 가지며 행복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학문, 신학만큼은 반드시 조건이 있다.
그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순종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경이 주는 의미는, “삶에서 복은 셀럽과 인싸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과 나의 연합과 일치와 그 분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에서의 순종을 요구한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 : 6-7)
지금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의 삶을 요구하며 순종할 때,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연합이 되지 못할 때, 세상은 원하며 기대하지만, 결국 말라버리고 불에 던져져 없어질, <셀럽, 인싸>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복을 주시겠다고 한다. 이어서 말씀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 : 1-2)
지금도 말씀은 ‘부활신앙’에 대한 믿음의 순종을 요구한다.
위의 조건에 대한 순종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삶 속에서만 ‘땅의 것’을 버리고 ‘위의 것‘을 추구하며 그곳에서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한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
그래도, 셀럽과 인싸가 좋은가?” 그것이 복과 가치가 아니라고
한다.
첫댓글 수고하셨읍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