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무렵 학교 교사는 인기 직종이 아니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면 뜻만 있으면 누구나 중등교사를 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심지어 교사를 하겠다고 사범대를 지망해 나라의 도움 - 당시 국립 사범대학은 수업료가 면제되었음 - 으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교사를 포기하고 타 직종으로 직업을 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는 1977년 3월 대학졸업과 동시에 경상남도교육청에서 발령을 내겠다는 것을 스스로 어려운 절차를 밟아 ‘발령 유예 신청’을 하여 그해 3월 18일 스물여섯의 나이로 군에 입대한 것이다. 그 때 생각으로는 한 달도 안 되는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입대를 해버리면 아이들이 받는 불이익을 먼저 생각한 결론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생각은 타당하고 옳은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실정법은 생각보다 많은 불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1정 교사 연수를 받으면서 도교육청에서 강의를 오신 당시 김수곤 장학관에게 이런 전후사정을 이야기하며 억울하다 했더니
선생님은 참다운 교육자적 양심을 가진 분입니다. 하지만 선생님만 스스로 바보짓을 한 것입니다.
그 장학관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 했고, 지금은 고인이 된 내 친구 상연군은
아이구, 이 쪼다야,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고 핀잔을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감생심이지만 나도 군에서 제대할 무렵에는 선생노릇을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할까? 를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1979년 6월 18일에 제대를 하고 당시 경상남도 도교육위원회에 제대신고를 마친 후 5일이 지나지 않아 발령이 났다는 전보가 왔다. 부산의 서대신동에 있는 위원회에 찾아가니 당시 김sk 장학사님께서 함양의 백전중학교에 발령을 내었다. 고향이 경북 월성 감포인 나로서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그 뒤에 듣기로는 당시 초임교사의 비공식적 발령기준은 주소지에서 멀리 띄우는 것이 첫 번째 기준이었다는 말이 있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인사기준이라 할 것이다.
나는 군에서 제대신고 할 때 강제로 깎인 머리가 아직 흉터로 남아 있기도 하고 또 너무 멀리 발령이 난 것에 대한 섭섭함도 있고 해서 사령장을 받아 나오는 즉시, 함양교육청에 전화를 해서 교육장을 바꿔 달라 해서는 내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정리할 일이 있어서 한 일주일 뒤에 부임할 터이니 그리 알라는 통보를 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교육장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하는 나의 통보조의 이야기를 듣고도 그 교육장님은 아주 친절하게 '그 때까지 기다릴 테니 꼭 오시라'는 당부를 몇 번이나 하셨다.
진주에서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당시만 해도 나에게 함양이란 고을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일 뿐만 아니라 나와는 전혀 무관한 먼 오지인 것으로 여기고 있을 때였다.
물어 물어 함양교육청을 찾아 간 날은 7월 1일 전후인 걸로 기억된다.
오후의 지역교육청은 늘그수레한 장학사 두어 분이 꾸벅꾸벅 졸고 계셨고, 인사를 드리니 귀찮은 손님이 왔다는 듯이 나를 이끌어 2층의 교육장실로 안내했다.
교육장은 나를 보자 이전의 졸고 있던 장학사 분들과는 달리 반가움을 표시하며
백전은 울고 들어가 울고 나오는 곳입니다. 젊음을 바쳐 봉사하면 반드시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아리송한 말씀을 하셨다.
백전은 함양에서도 한 40여분을 털털거리는 비포장도로에 낡은 시외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가도 가도 막막한 산만 보일 뿐 사람 사는 집조차도 잘 보이지 않았다.
백전면사무소 소재지에 내려 조그만 가게에 들러 백전중학교를 물으니, 이 아주머니(나중에 이분이 도척댁 아줌마란 것을 알게 됨)가 먼저 알아보시고
"새로 오시는 선생님이시지요?" 라고 말을 붙이며 아래위를 훑어본다. 그리고는 바로 집 앞의 시냇가를 향해
"교장선생님! 빨리 오세요. 새로 선생님이 오셨어요!"
그러자 트레이닝복을 입고 피라미 낚시를 즐기시던 50대 후반의 교장 선생님께서 낚싯대를 둘러 멘 채 가게로 들어서신다.
"아이구! 반갑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지요. 아줌마, 여기 막걸리 한 되만 주시오."
그리고는 연거푸 막걸리 대폿잔으로 두 잔을 권하신다. 이어서 핸들을 잡고 돌리는 까만 전화기로 교감을 찾아 '지금 수업 중단하고 운동장에 전교생을 집합시키라는 분부'를 하신다.
교장선생님께서 이렇게 서두시는 것은 내 앞에 이미 두 분의 선생님이 발령을 받고 오셔서는 너무 막막한 산골이라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도망을 치신 뒤여서 그렇다는 것은 그 뒤에 안 사실이다.
아무튼 초임교사가 우습게도 낮술로 막걸리 대포를 두 잔이나 마시고 전교생 앞에 올라가 인사말을 한 것이다.
요즘 같으면 신문에 나도 크게 날 일이 아닌가!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이 막막한 산골로 들어올 때는 빨리 도망가야지 하는 생각을 한 순간 했었는데, 지금 여러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내 젊음을 바쳐 여러분과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라는 요지의 취중 인사말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이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들만이 아득한 백두대간 중 소백산맥의 막다른 골목에서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이들과 행복하게 만 2년을 넘게 살게 되었고,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울산공고로 중간 발령이 나서 백전을 떠나올 때는 정말 우리 학급의 모든 아이들이 버스를 가로막고 울어 함양읍에 도착할 때까지 나도 혼자서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가슴에 따뜻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 교육장님의 울고 들어가서 울고 나온다는 말의 정체를 나는 실감하게 된 것이다.
첫댓글언젠가 십 수년이 지난 빛바랜 지갑을 보여주시며 "너희들이 졸업할 때 선물로 사 준 지갑이다. 이것만은 버릴 수가 없더구나" 고 말씀하셨지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찡해지는 마음으로 서른해 가까운 시간이 지나버린 유년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봅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이제는 이런 글들을 초연히 읽어 내려 갈 수 있습니다. 이런말 웃습겠지만.. 그시절만 해도 선생님들은 화장실도 안가는줄 알았습니다.. 사실.. 저희들에겐 아니 저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 였습니다.. 단지.. 촌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하지 않았고. 숙제 보다는 소 먹이는 일이 먼저였고. 공부 보다는 물고기 잡는 일이 먼저였던.. 그런 ,,,조금만 일찍 철이 들었으면 좋았게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허교감선생님! 글을 읽고 오죽이나 기가 차셨을지 짐작이 됩니다. 선생님보다 꼭 10년전에 백전초등학교에 근무했었지요. 그때는 중학교가 갓 생겨서 아마 1학년만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함양은 울고 전입하고 울고 떠나는 곳은 틀림없습니다. 집이 있는 학교로 곧장 옮겨 주셔서 매우 짧은 백전 생활을 했지만 그 인정을 지금도 저는 잊지 못하는걸요.
3학년 봄에 우리 반 학생들은 수학여행간다고 들떠 있을 때, 선생님반 학급(B반?) 시험 성적이 연달아 꼴찌를 했다고 반학생들과 같이 운동장을 열댓바퀴 돌고 오셨던 모습이 기억 납니다. 그 때 학생들을 향한 선생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선생님들이 학생들만 돌리지 같이 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첫댓글 언젠가 십 수년이 지난 빛바랜 지갑을 보여주시며 "너희들이 졸업할 때 선물로 사 준 지갑이다. 이것만은 버릴 수가 없더구나" 고 말씀하셨지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찡해지는 마음으로 서른해 가까운 시간이 지나버린 유년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봅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선생님 지금 제가 지방에 네려가 있어 울산 일요일 올라가면 연락 드리 겠습니다 너무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의 글을 읽고 눈시울이 가리 네요 선생님 사랑 합니다.... 선생님 제가 막걸리 대폿잔 드리 겠습니다 건강 하십시요.
이제는 이런 글들을 초연히 읽어 내려 갈 수 있습니다. 이런말 웃습겠지만.. 그시절만 해도 선생님들은 화장실도 안가는줄 알았습니다.. 사실.. 저희들에겐 아니 저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 였습니다.. 단지.. 촌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하지 않았고. 숙제 보다는 소 먹이는 일이 먼저였고. 공부 보다는 물고기 잡는 일이 먼저였던.. 그런 ,,,조금만 일찍 철이 들었으면 좋았게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선생님 잘 계시죠? 다음 기회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전방에 근무하시면서 노간주 나무로 만들었다시며 들고 다니던 회초리 생각이 납니다......이철우님의 수필집에 선생님의 글이 실린 것보았습니다.
선생님 이해 합니다. 그 시절만해도 공무원은 박봉이었어니까요. 제가 중학교 졸업 했을때 순경 초봉이 12만원이 었어니 까요.선생님 들은 생기는돈도 없이 애들한테 시달려야 했으니 오죽 했겠습니까.허남술센님 홧팅!!!!!!!!
허교감선생님! 글을 읽고 오죽이나 기가 차셨을지 짐작이 됩니다. 선생님보다 꼭 10년전에 백전초등학교에 근무했었지요. 그때는 중학교가 갓 생겨서 아마 1학년만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함양은 울고 전입하고 울고 떠나는 곳은 틀림없습니다. 집이 있는 학교로 곧장 옮겨 주셔서 매우 짧은 백전 생활을 했지만 그 인정을 지금도 저는 잊지 못하는걸요.
선생님의 조용하면서 늘 힘이 없어 보이고 웃음기 없어 보였던 모습을 이제야 알겠습니다,지금은 아니시죠? 옛날 어린 마음에 비췄던 선샌님의 모습이요....
3학년 봄에 우리 반 학생들은 수학여행간다고 들떠 있을 때, 선생님반 학급(B반?) 시험 성적이 연달아 꼴찌를 했다고 반학생들과 같이 운동장을 열댓바퀴 돌고 오셨던 모습이 기억 납니다. 그 때 학생들을 향한 선생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선생님들이 학생들만 돌리지 같이 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그래 윤호 기억난다. 그때 내가 아마도 B반 이었는데,,, 힘든기억보다도 하나의 추억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