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시간이 흘렀습니다
일흔네살의 박명훈 할아버지는
지금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이를 만나러 갑니다
바로 사진속의 앳된 소년, 할아버지의 형님입니다
형의 이름은 박동훈
형의 꿈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형 비행기 날리기 대회에서 언제나 1등이던 형은
15살이던 1943년 일본의 소년비행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후. 가족들은 더 이상 형을 볼 수 없었다는데요.
그렇게 70년이 흘렀습니다
형을 찾아나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일본 토쿠시마
형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이분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형이 다니던 소년비행학교 명부에서
형의 이름과 훈련을 받던 비행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형은 박동훈 이름대신
창씨개명한 이름 오가와 마사아키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시모토씨도 형처럼 비행기조종사가 되기 위해
소년비행학교에 입학했고
당시 동기생중엔 꽤 많은 한국인 학생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년비행학교 출신으로 나중에 공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등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형 박동훈에 대한 기록은 더이상 없습니다
형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걸까요?
1941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이 수세에 몰리자 일본은 아직 십대에 불과한
소년비행학교 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형 박동훈도 이때 소년비행병으로 뽑혀갔습니다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 지란은
비행병이던 형이 출격 몇시간 전까지 머물렀던 곳입니다
3대째 이어져온 토미야여관.
이곳은 당시 소년 비행병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었습니다
형을 기억하고 있던 주인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이제는 할머니의 손자가 여관을 지키고 있는데요.
당시 소년비행병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던 안주인 토메여사는
그들의 사진을 여관 곳곳에 전시해 두었습니다.
형이 속해있던 소년비행학교 15기 동기생들의 사진도 걸려있는데요.
흑백사진 속 비슷해 보이는 얼굴들 속에
형을 찾기란 쉽지 않아보입니다
여관에 흐르는 아리랑은 한국인 비행병들을 위한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속 소년비행병들 상당수가 어린나이에
카미카제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국인이었던 형도 카미카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출격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비행기에 250kg의 폭탄이 실렸었고, 돌아올 연료는 없었습니다
출격 직전. 형은 가족들에게 육성을 남겼습니다
형은 왜. 일본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을까요?
7남매 중 장남이었던 형.
늘 의젓하고 따뜻하게 동생들을 살폈습니다
재료조차 구하기 쉽지 않던 시절.
형은 대나무살에 창호지를 붙여 모형비행기를 만들곤 했답니다
어린형제에게 비행기는 세상 최고의 장난감이자 꿈 그자체였습니다
함께 비행기를 갖고 놀던 막내동생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카미카제가 자랑스러운듯한 할배)
카미카제 특공대를 위한 기념관에는
형을 포함해 천여명이 넘는 대원들의 사진과 유서들이 전시되어있습니다
형은 비행조종실력이 남달랐다는데요.
그런데, 이곳에 형 이름으로 된 친필유서가 있었습니다
카미카제 특공대원이 된 형이 남긴 유서는 바로
결사.
결의를 다지며 반드시 죽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형은 그저 비행기를 좋아하던 평범한 17살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결사라니. 모든게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출격전. 형이 육성으로 남긴 유언은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하지만 형의 나이 겨우 17살이었습니다
형은 정말 스스로 카미카제 자살특공대원이 된 것일까요?
일본에서는 카미카제 특공대원을
일본군 중에서도 최고로 꼽습니다
죽음을 불사한 사무라이정신으로 높게 평가하는 것인데요
충성을 맹세하는 유서를 쓰고 일장기를 두른채 출격했습니다
그들의 첫 전투는 곧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형도 일본에 충성을 다짐하고 떠났을겁니다
1945년 3월 29일 형은 오키나와 해상에서 전사했습니다
하지만 형에 대한 친일논란이 할아버지는 답답합니다
출격 전에 다행히 전쟁이 끝나 목숨을 건진 하시모토씨는
자신이 카미카제로 훈련받는 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기생 전원이 특공대에 지원했습니다
지원제는 형식일뿐 아무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럽게 눈물 흘리는 할아버지...)
자신들이 전쟁에 희생되는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걸
당시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이었던 형이 출격을 거부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이 머물렀던 토미야 여관 주인은
출격전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의 기념사진을 보여줍니다
사진 속 모든 대원들이 출격을 기뻐하는 듯 환하게 웃고 있는데요
하지만, 진실은 따로 있다는데요
그는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입니다
이 앨범속 사진 역시 출격전 특공대원들을 찍은거랍니다
그는 할머니의 앨범 속 사진들이
특공대원들의 심정을 담은 진짜 모습이라고 합니다
출격을 앞두고 대원들의 표정이 굳어있자
그들이 웃는 표정을 지을때까지 반복해서 사진을 찍었답니다
이중에는 형과 같은 한국인 대원들도 있었다는데요
출격순간. 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절대 살아돌아올 수 없는 출격이었지만
거부하면 가족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유골조차 찾을 수 없는 열일곱살 소년의 죽음.
비행기에 대한 그의 꿈이 불러온 비극이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에 대한 꿈은
카미카제를 만들기 위한
일본의 치밀한 계획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4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입니다
저학년때부터 비행기를 만드는 과정이 소개되어있습니다
1학년 산수책은 비행기를 세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남학생들이 즐겨보던 잡지표지엔
비행병들의 멋진모습이 실려있습니다
어릴때부터 비행기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하고
그것을 꿈꾸게 만드는겁니다
비행기 조종사는 곧 성공한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소년들은 비행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들은 곧 카미카제 자살특공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은 이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의 편지와 유서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신청을 했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추진하는 걸까요?
그들이 남긴 편지와 유서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일본이 원하는 것은 죽음을 강요했던 전쟁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억지웃음으로 미화된 모습이 아닐까요?
사과와 반성은 없이 그들의 편지와 유서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신청 하겠다는 것은
죽음을 애국심으로 포장하려는 의도에 불과합니다
형이 남긴 결연한 마지막 육성은 식민지 소년에게 강요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일본인들은 형을 야스쿠니 신사의 신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들과 함께 말입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형을 한국으로 모셔오는 일입니다
조국의 의미를 배우기도 전에 일본을 위해 죽어야 했던 형
언제까지 조국을 침략한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갇혀있어야 하는 걸까요
열일곱살 소년이 품었던 비행기 조종사의 꿈.
그것이 스스로 인간폭탄이 되어
희생되는 일인 줄은 몰랐을 겁니다
성공한 조종사가 되어 금의환향 하고 싶었던 소년은
전쟁이 낳은 최대의 피해자가 되어
지금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출처 : 궁금한 이야기 y 204회, http://blog.daum.net/mubila/2
첫댓글 진짜 일본넘들 음침하고...에휴
아 진짜 마음 아프다
저 어린아이가 뭘 알아..진짜 맘아프다
아 진짜너무마음아파ㅠ 일본 진짜 나쁜놈들인건 알았어도 이렇게 인간말종 쓰레기 ㄴ일둘은 ㅡㅡ
좆본 개새끼들 다 죽여버리고 싶어
진짜 미친 일본 진짜 일본은 죽어야돼 진짜 너무 마음아파 천국가서 편안히 사세요..
조팔럼들이 뒤질라면 지들이나 뒤지지 남의 나라 침략해서 지들 이익대로 쓰다가 버리고 지랄이야
씨발 눈물나 진짜 개새끼들 시ㅏㅂㄹ 지들이 가던가 시발
좆같은 일본새끼들 진짜
그저 꿈을 쫓은게 죽은 이유라는게 참.. 일본 개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