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 십계명 중 제4계명은 무엇인가? [출 20]
답: 출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질문 2 그리스도인이 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곧 무엇과 같은가?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답:
###참된 그리스도인이면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음[요일 2:4]
2.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됨[약 2:10]
3.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임[계 14:12]
질문 3 만일 그리스도인이 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는 십계명중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안 지킬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일을까요?
답: 선택의 여지가 없음
질문 4 고후 3:3-8을 읽고 다음에 답하시오.
가. 돌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 4:13]
답:“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나. 새 언약은 어디에 쓴 것입니까?
답: 심비에 기록하심: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참조]
시편 119편 172절에서 시편 기자는 주님께 이렇게 말한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찌니이다.” 계명은 관념상의 의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그 증거로 다음의 말씀을 보자.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사 51:6, 7).
이 말씀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 자들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다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모든 불의는 죄”로다(요일 5:17).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죄는 범법이므로 불의이다. 그러므로 죄와 불의는 동일하다. 그러나 만일 불의가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면 의는 율법에 순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다. 돌비에 쓰인 의문의 언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구속력을 가질 수 있는가?
답: 돌비에 쓴 십계명은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진 십계명과 동일하다. 오늘날 우리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 언약궤 안에 십계명이 들어있다.
[참조]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 … 더라”(계 11:19). 이 언약궤는 성전의 둘째 칸, 곧 지성소에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인 지상 성막의 봉사에 있어서, 지성소는 오직 대속죄일에만 성소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열리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였다는 말은 1844년에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마지막 사업을 하시기 위하여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실 때에 그 지성소가 열린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 지성소의 봉사를 위하여 그 곳으로 들어가실 때 믿음으로 그들의 대제사장을 따라간 자들은 언약궤를 보았다. 성소 문제를 연구함에 따라 그들은 구주의 봉사가 변경된 것을 알게 되었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봉사하시되 당신의 피를 가지고 죄인들을 위하여 중보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지상 성막에 있는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 언약궤는 율법의 돌판을 넣어두는 궤짝에 불과하였으나 돌판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 언약궤는 귀중하고 신성하였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렸을 때 언약궤가 보였다. 하늘에 있는 성전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께서 친히 시내산의 우레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당신의 손으로 친히 돌판 위에 기록하신 그 십계명이 거룩하게 보관되어 있다.
하늘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은 원본이며, 돌판에 새겨지고, 모세를 통하여 그의 오경에 기록된 것은 그 원본을 정확하게 옮긴 사본이었다. 이 중대한 점을 이해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신성하고 변함없는 본질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하신 구주의 말씀의 뜻을 전에 없이 강하게 깨닫게 되었다.
질문5: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다음의 물음에 답하면서 결론을 내려보자:
가. 안식일은 본래 무슨 요일인가[참조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
답: 안식 후 첫날은 일요일이며 결코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다.
[그때에](「제임스왕역」에는 “Now”[그때]라는 말이 있음-역자 주). [예수의 부활, 눅 24:1~12=마 28:1~15=막 16:1~11=요 20:1~18. 주요 주석: 마태복음과 요한복음]. 헬라어 데(de). “그러나” 혹은 “그리고.” 23장의 결론적인 진술과 24장의 첫 구절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해 주는 말이다. 다른 번역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진정으로 그들은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었다. 그러나 주일 중 첫째 날에는….” 이 번역은 초기 그리스도교회 신자들이 제7일 안식일에 부여한 신성성을 아주 분명하게 해준다. 그들이 금요일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한 것이었다(23:56). 그런 다음 “[안식일] 계명을 좇아” 모든 일을 접어두고(참조 출 20:8~11 주석),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는 그들의 사랑의 수고를 재개하지 않았다. 복음서 기록 가운데서도 여기에 뿌리 박혀 있는 안식일의 신성성과 일요일의 세속적 성격에 나타난 강한 대조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웅변적으로 말한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다. 그리고 주일 중 첫째날 [일요일] 아침에 하늘과 땅에 있는 거룩한 자들이 일어났을 때 그분이 무덤에서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그의 가르침을 새롭게 하셨다. 그러나 이 사실이 주일 중 첫날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안식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나.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것을 적어봅시다:
출 20:10/민 15:32-35]/출 35:3/ 출 16:29/ 느 10:31, 13:15-17; 암 8:5
사 58:13-14.
우리는 위의 성경구절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알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이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 1:21]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박해자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였을 때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하였다. 그때 이후로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전부였고, 모든 것 속에 그리스도가 있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고 그는 선포하였다. 이 말씀이 모든 성경절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 몇 마디로 된 가장 완전한 해석이다. 이것이 복음 진리의 전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생애를 대표하셨다.
그분은 안식일에 벙자들을 고치고 착한 일을 행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우리도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한다.
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날에 모였는가? [행 20:7, 고전 16:2]
답: 안식후 첫날, 매 주일 첫 날에 모임
라. 안식 후 첫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의미 깊은 날이며 이 날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참조 눅 24:1; 행 2:1]
답:
어떤 저자들은 이 표현을 가지고 초기 그리스도인이 일요일을 준수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누가가 유대식 시간 계산법을 썼느냐 혹은 로마식 시간 계산법을 썼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이 모임이 “안식 후 첫날”에 있었음을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유대인의 계산법을 사용했다면 일요일이 되기 전날 저녁은 첫째 날로 간주되었을 것이며, 그가 만약 로마식 시간을 사용했다 해도 일요일 저녁은 여전히 첫째 날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이 일요일을 준수했느냐는 문제에서, 중요한 요소는 이 첫째 날 모임이 정규적인 그리스도인 모임인가 아니면 단순히 바울의 방문으로 인하여 첫째 날에 이러한 일이 우연히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를 고려해 볼 때, 이날이 주중 첫째 날이기에 바울이 특별히 이 모임을 열었다는 견해를 지지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는 드로아에서 7일을 거했으며 거기서 이미 한 번 이상 성도들을 만났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제 그는 떠날 입장이었고, 그 전에 고별 모임을 갖고 성찬식을 거행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지극히 논리적이다. 이 일이 주중 첫날에 있었다는 누가의 표현은, 명확한 일요일 준수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이 여행에서 묘사하고 있는 일련의 연대기적 전체 기록들과 조화를 잘 이룬다(참조 20:3, 6, 7, 15, 16; 21:1, 4, 5, 7, 8, 10, 15). 그러므로 이 절을 이해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 모임이 일요일이어서가 아니라 바울이 “떠나고자 하여”(20:7) 사람들이 모였던 것이며, 누가는 유두고 사건 때문에 이 이야기를 포함시켰고, 이날이 “안식 후 첫날”이었다는 기록은 단순히 여행에 대한 바울의 연대기적 기록의 한 부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절을 초기 그리스도인의 일요일 준수에 대한 증거라 평가하는 것에 대해 저명한 교회사학자 아우구스투스 네안더(Augustus Neand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성경절이 일요일 준수에 대하여 전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떠날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에 그 작은 교회가 형제애를 나누는 고별식사로 모였을 것이며, 그 경우 일요일을 특별히 기념할 일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차제에 사도가 마지막 기별을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The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tr. Henry John Rose, vol. 1, 337).
기타 질문: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로, 일요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켰는가?
답: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넷째계명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폐하거나 변경될 수 없다.
마. 신약에서 안식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골 2:16,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 17].
답:
위의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왜 이러한 권면이 하필이면 골로새교회에 주어졌는지 그 배경과 앞뒤 문맥을 아는 일이 필수적이다.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이 편지를 쓸 무렵[A.D. 62년경], 소아시아의 골로새교회는 “골로새 이단”[The Colossian Heresy]으로 알려진 특별한 이단에 의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53 골로새서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표현들, 즉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 2:8], “자의적 숭배와 몸을 괴롭게[골 2:23]함 등은 그 이단의 내용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페르샤와 헬라의 이원론[二元論]에 기초를 두고 동양의 신비사상을 혼합한 일종의 종교철학으로 영지주의[灵知主義: Gnosticism]로 불리운다. 이 거짓된 가르침이 일찍이 유대교에 침투했음을 사해사본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되었고 후에는 그리스도교에도 파고들어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가운데 하나인 “골로새 이단”으로 나타나는 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54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도 각급 천사들을 높은 하나님과 낮은 인간을 연결하는 창조와 구원의 중보자로 소개하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성과 성육신을 부인하였다. 또한 십자가로 이루어진 구원을 무시하고 자기 학대와 엄격한 금욕[禁慾]을 실천하여 충만[充滿]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한편, 할례 등 구약의 의식을 구원의 방편으로 소개하고 자신들이 물려받은 은밀한 영적지식[gnosis]에 의한 구원을 전파했다.55
이러한 이단에 맞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시오, 교회의 머리이시며 유일한 중보이심을 확신시키고 있다[골 1:16, 18, 20].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고 있다[골 2:9]. 십자가로 말미암는 속죄의 완전함을 논증하고 있다[골 2:11, 12].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칼빈이 안식일 폐지의 근거로 인용한 본문[골 2:16, 17]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바로 앞의 문맥을 살펴보자.
의문에 쓴 증서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3, 14].
위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영지주의와 같은 종교철학이 아니요, 할례와 같은 의식적인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속죄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할례인 침례와 “의문에 쓴 증서”의 실례를 들고 있다[골 2:11-14].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의문에 쓴 증서”는 무엇인가? “의문”[儀文]은 헬라어로 “도그마”[dogma]인데 고시된 일반 법규나 종교적인 제도나 규정으로 모두 법적인 책임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56 유대인들이 스스로 만든 여러 가지 의식적인 법규들을 가리킬 때도 이 말이 쓰였다[엡 2:15].
그런데 “증서”[證書]라는 말은 성경 전체에서 이 곳에 한번 밖에 쓰여지지 않은 특별한 용어인데 고대문서 연구를 통해 근년에야 그 참 뜻이 밝혀졌다. 이 “증서“가 헬라어로는 ”케이로그라폰“[cherographon]인데 ”손으로 쓴 것“[handwriting]을 뜻하고 실제로 쓰일 때는 채무자가 자신의 채무를 인정하고 직접 날인[捺印]한 “빚 문서”를 가리키는 용어였다.57
그러므로 14절의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의 참 뜻은 흔히 해석하는 대로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개정역 성경에 바로 번역되었듯이 “법적인 요구를 가지고 우리를 맞섰던 법적인 [죄의] 채무증서를 끄집어내사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폐기하셨다”58는 본 뜻이 나온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서 죄의 빚을 갚아주셨기 때문에 죄의 채무증서가 폐기된 것이다.
불의한 율법이 아니라면 율법을 없앰으로 죄인을 무죄하게 만든 것은 있을 수 없는 불의이다. 예수께서 그런 불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리가 없다[롬 3:25, 26] 오히려 죄인을 대신하여 모세의 율법을 포함한 모든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채우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죄의 빚진 기록을 말소하신 것이다[롬 3:23; 벧전 2:24]. 14절의 이와 같은 설명이 문맥에도 맞는 것은 13절의 끝말이,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로 되어 있어, 14절에서는 빚 문서를 예증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죄의 완전한 용서를 확신시키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처럼 복음이 나오면 논법상 의례이 등장하게 마련인 율법이란 말이 골로새서에는 한 마디도 없어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취급하고 있는 주제가 율법문제 자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59 2장 20절에 쓰여진 “의문에 순종하느냐”는 말의 참 뜻도 21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쉽사리 알게 된다. 동사형으로 쓰여진 20절의 의문[儀文]이란,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금욕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적인 유대교의 거짓된 가르침을 경계한 것이다[골 2:22, 23].60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러한 문맥의 흐름을 염두에 둘 때 16절의 “그러므로”로 연결되는 말씀의 내용이 분명해진다. 즉 십자가를 통하여 베풀어지는 용서로 죄의 빚을 청산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확실한 길이 마련되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다른 길을 제시하는 그릇된 가르침을 좇음으로 왜 십자가의 의의[意義]와 효력을 저상[沮喪]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의지에 근거한 인간의 노력을 내세우는 “자의적 숭배”[will worship - 골 2:23]와 금욕을 실천하는 영지주의적인 유대주의자들이 16절에 나오는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그릇된 준수방법을 부과하여 자신들의 목적에 맞추어[골 2:23] 가르침으로써 십자가로 이루어진 구원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61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거짓 교사들] [16절에 언급된 행사들에 관하여] 너희[골로새교회 신자]를 [함부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렇다 저렇다] 폄론[판단]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62 사도는 지금 절기 자체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기의 의미와 준수를 왜곡시키고 있는 거짓된 교사들을 경계시키고 있는 것이다.63
그런 다음에 그는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으로 성취될]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실체]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는 말로 그러한 제도의 참 뜻을 설명하고 있다.
장래 일의 그림자
그렇다면 이 곳의 “장래 일의 그림자”는 무엇이고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같은 내용을 다룬 다른 곳의 평행절을 찾아 그 대답을 찾는 것이 성경이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해석이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1, 4].
골로새서[2:17]의 “장래일의 그림자”가 무엇임을 히브리서는 같은 헬라어인 “그림자”[skia]와 “장래 일”[ton mellonton]을 써서 정확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인 “율법”은 어떤 율법인가? 문맥에 나타난 대로 장차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던 구약의 제사제도인 것이다.
그것을 보통 구약[舊約 - old covenant]이라고 부르는데 “첫 언약”[first covenant - 히 9:1], 혹은 “첫 것”[히 10:9]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제사가 성소의 규정에 따라 드려졌기 때문에 구약의 성소제도와 같은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히 8, 9장]. 그러므로 “장래 일의 그림자”[골 2:17]는 구약에 나타난 표상적인 제사제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장래 일”은 무엇이고 “그림자”의 실체가 되는 “몸”[soma]은 무엇인가? 같은 평행절이 그 대답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5-10].
대답이 모두 주어졌다. 예비된 “한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장래 일”이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구속[救贖]과 그 결과인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type]한 그림자[shadow]였던 구약의 제사제도는 그것의 원형[antitype]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몸”[body] 곧 실체[reality]를 만난 것이다.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7]. 위의 설명이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는 골로새 2장 17절의 확실한 뜻인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
히브리서[8, 9 10장]에 나타난 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표상하는 그림자가 되는 구약의 제사제도는 성소[제도와 현장] - 제물[실체] - 제사장[봉사] - 절기[특정된 제물을 드리도록 지정된 때]로 이루어졌다. 성소 자체도 성육신[聖肉身]하실 그리스도를 가리켰고[요 2:21], 제물은 물론 [히 10:5], 제사장도 그리스도를 가리켰다[히 9:11, 12]. 그런데 골로새서에 언급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골 2:16]은 어떻게 몸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가 될 수 있는가?
먼저 “먹고 마시는 것”은 무엇인가? 성소에 드린 제물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피흘림이 있는 희생제물[sacrifice]과 피 흘림이 없는 예물[offering]이었다[단 9:27]. 피흘림이 없는 제사에는 곡식[가루나 빵]을 기름, 소금, 향과 함께 드린 소제[素祭 meal offering]가 포함되었다[레 2:2-7].64 누룩이나 꿀을 섞지 않은 곡식의 가루, 빵은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양식[요 6:5]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부는 제사장이 먹었다[레 2:3, 10].
또한 소제처럼 번제[燔祭]와 함께 드린 예물은 포도주를 드린 전제[奠祭 drink offering]인데 [민 15:4-11] 이것은 성만찬의 포도즙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마 26:27, 28]65 골로새서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소제와 전제를 가리켰음이 같은 내용인 “예물과 제사”를 언급한 히브리서의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히 9:9, 10]는 말씀에서 확실해진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골로새서의 말씀을 오해하여 그리스도인은 구약 성경에 [레 11장; 신 14장] 언급한 건강에 해로운 식품도 이제는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옮지 않은 일이다.
월삭과 절기들
다음으로 “월삭과 절기와 안식일”은 어떻게 구속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는 “장래 일의 그림자”가 되는가? 골로새서[2:16]의 절기[節期]는 레위기 23장에 준수하도록 명시된 유월절, 무교절, 요제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일절, 초막절 등 일곱 절기[feast]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절기들과 연관되어 제칠일 안식일이 아닐지라도 일하지 않고 성회로 모이는 국경일과 같은 일곱 번의 절기안식일이 있었다[레 23장].
이 절기에 의미를 준 것은 절기가 지켜지는 정한 시간에 예정된 구원의 계획을 정확히 성취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표상하는 제물과 예물이었다. 유월절인 1월 14일 해질 때에 잡은 양은 그 시간에 돌아가실 흠 없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고, 1월 15일 무교절 안식일을 시작으로 한 주간 먹게 되는 누룩 없는 떡 [무교병]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드려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1월 16일 요제절에 바친 처음 익은 곡식 한 단은 유월절 이후 삼일만에, 부활의 첫 열매로 살아나실 그리스도를 놀랍도록 정확히 예표한 것이다.
제물이 없는 절기는 신랑이 없는 잔치처럼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서의 “장래일의 그림자”였던 이러한 절기들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구속의 핵심으로 가장 적절히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이러한 상용구[常用句]의 기본이 되고 있는 민수기 28장과 29장에서 거기에 상응하는 제물과 예물을 자세히 언급함으로써 확실해지고 있는 것이다.66
골로새서의 안식일
마지막으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와 월삭”과 함께 “장래 일의 그림자”가 된 “안식일”은 어떤 안식일인가? 그리고 그것은 칼빈의 주장처럼, 실체[몸]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그림자처럼 없어져야 하는 것인가? 이곳의 안식일은 헬라어로 복수형[속격 - sabbaton]이어서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고 구약의 일곱 절기 안식일들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구어[口語]였던 아람어의 안식일[단수 shabbetha]을 헬라어로 음역[音譯]한 것[saabbata]이 공교롭게도 헬라어의 안식일[sabbaton]의 복수형[sabbata]과 같아지는 바람에 혼란이 생겼다. 즉 아람어의 단수 안식일이 헬라어의 복수 안식일과 같은 철자[綴字]를 가지게 되어 골로새서에서도 비록 그것이 헬라어 복수[속격]이기는 하지만 아람어의 단수 안식일을 잘못 변형시켰을 수도 있다는67 가능성이다.
한편 골로새서[2:16]의 “절기”[heorte]와 “월삭”neomenia]이 실제의 내용은 모두 복수인데도 표현을 단수로 하고 있어서 여기에 나오는 용어들이 비록 단수로 쓰여졌다 해도 실제로는 복수일 수 있는 문법상의 근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68 그런데 민수기[28:9-29] 등 여러 곳에서 실제로 제칠일 안식일과 절기안식일을 함께 언급하고 있어69 골로새서의 안식일에도 제칠일 안식일이 포함되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제칠일 안식일에도 절기안식일의 경우처럼 지정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제물 목록에 안식일이 포함된 것이다[민 28:9, 10; 대하 8:13; 레 24:8]. 제물로 상징된 그리스도가 없이는 절기가 성립될 수 없듯이 그리스도가 없는 안식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제물을 드린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
문제는 골로새서[2:16]의 안식일이 제칠일 안식일인가, 절기 안식일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장래 일의 그림자”[골 2:17; 히 10:1]인 절기를 포함한 구약의 제사제도가 몸[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심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는 것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 12].
첫댓글 제가 기회를 드리는 것은 그래도 하늘본향님이 재림교 박진하씨의 문제점을 잘 알기때문입니다.
하늘본향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이단사상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명백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셨지요
그리고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이 계명을 그리스도인의 심비에 새기셨다고 말씀하셨지요.
님은 무슨 권세로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시는지요?
딥변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대화를 지금 예수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납니다.
무슨 권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리며 주님을 대적하고 있는지 명백히 밝히십시오
하늘본향님~ 다시 질문을 하겠으니, 답변을 부탁합니다.
하늘본향님~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까?
@CRYSTAL™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하늘본향 안식일을 지키고 안지키고 그것으로 구원을 받고 구원을 못받고 입니까??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제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을 먼저 해주세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까?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16절)
@CRYSTAL™ 그리스도인은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을 얼마나 많이 강조해야 되는지요
님에게 권합니다
지난 밤에 우리가 나눈 대화에 제가 명백히 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지 밝혔습니다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
마지막으로 질문하니, 반드시 답변을 부탁합니다.
하늘본향님~ 구원받는 조건이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까?
@CRYSTAL™ 영생을 얻는 조건은 지금도 옛날-에덴 낙원에서 우리의 시조(始祖)가 타락하기 전-과 똑같으니 곧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완전한 의가 요구된다. 만일에 영생을 이보다 약한 조건으로 허락하여 준다고 하면 온 우주의 행복은 위험을 받게 될 것이고 모든 재화와 비참을 일으키는 죄가 영원히 불멸(不滅)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가 많고 거룩하지 못하므로 거룩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응할 만한 자신의 의는 조금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할 길을 열어 주셨다. 그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과 시험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
고난과 시험 가운데서 사셨다. 그는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지금 그는 우리 죄를 벗기시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다.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된다.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을 변화시키신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마음 가운데 거하신다. 그대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그대의 마음을 항상 그에게 바침으로 말미암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그는 그대의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 성령이시니라”(마 10:20)고 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시면 그대는 같은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또한 같은 행실-의와 순종의 행실-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 높일 까닭이 없다. 우리의 희망의 유일한 근거는 우리에게 입혀 주신 그리스도의 의에 있고 또한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선행에만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 당연하지요
안식일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행위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 하늘본향님을 7일동안 글쓰기 제한시켰습니다. [활동중지]
하늘본향님을 일반회원으로 전향시켜드렸습니다.
저와는 사상이 다르지만, 그래도 꾸준한 관심과 신사적인 토론에 적극 참여해주셔서 등업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