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학기 1주차 과제
“다윗, 내 아들아!”
정 우 조
“대장, 이 기회는 야웨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입니다. 저 미친 왕이 범의 아가리로 스스로 기어들어온 형국이잖습니까. 대체 뭘 망설이십니까. 방금 아비새를 동굴 입구쪽으로 보내어 자칼 소리를 흉내내도록 했습니다. 신경을 빼앗긴 사울은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할 것입니다.”
“미안하네, 아디노. 나는 저 사람을 차마 죽일 수 없어. 사울은... 내가 도무지 죽일 수 없는 사람이야.”
“대장! ... 좋습니다. 대장이 도저히 저 미친놈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우리가 대신 죽이게 해주십시오. 그동안 저 자로 인해 우리가 감내해야했던 그 엄청난 고통과 희생들을 제발 생각해보십시오. 놉에서 살해당한 제사장들을 떠올려보세요! 저 인간은 여기서 죽어야만 합니다. 뒤를 보러 들어온 이 자리가 저 자의 비참한 무덤이 될 것입니다.”
“안 돼. 그 또한 허락할 수 없네.”
“대장, 제발!”
다윗은 조용히 일어나며 발목쪽에 차고 있던 단도를 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디노는 행여 대장의 마음이 바뀐건가 싶어 표정이 확 밝아졌지만, 이내 다시 일그러지고 말았다. 사울을 찔러 죽일 수 있을만큼 가까이 접근했지만 그저 겉옷 자락만 살짝 베어내 들고 돌아오는 다윗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디노는 다윗의 저 이중적인 모습, 약자나 지인들에겐 한없이 자애롭고 약하지만 전투 중에는 마치 악귀가 씌인 듯 적군들을 베고 찌르는 무자비함이 넘치는 그 절묘함에 반해 그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셨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만큼 좋은 이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리며 사울을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 그 마음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곧 붙잡혀 모두 죽게 된다면, 그건 지금 이 순간 때문일 거야라고 생각하며 그는 쓰린 입 끝을 깨물었다. 어쩌려는 건가, 우리 대장은.
사울은 물론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전쟁을 숱하게 경험했으며 죽음의 격랑들을 헤쳐왔던 그는 특히나 보이지 않는 위협을 감지하는 본능이 날카롭게 발달해있었다. 그저 양 우리 근처에 있던 작은 동굴 입구를 보곤 편안하게 뒤를 보러 들어왔던 그였지만, 들어오자마자 사방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섣불리 행동하거나 도망치려 하다간 오히려 즉살당할 것을 직감한 사울은 태연히 아무것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의가 이글거리는 수십 명의 눈길을 묵묵히 받아내며 뒤를 보았다. 동굴 입구에서 어설프게 자칼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저 놈은 분명 요압의 아우 아비새겠지. 어릴 적부터 내 앞에서 수백 번은 보여주고 자랑했던 저 짓거리에 내가 속아 넘어갈 거라 생각한 건가.
문득 사울은 저 수많은 흑암 속 암살자들 중, 단 한 명만이 살의를 품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오고 있다. 곁눈으로 확인해 본 실루엣은 어딘지 익숙한 걸음걸이였다. 그러더니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겉옷의 끄트머리만 살짝 잘라내고는,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돌아가버린다. 옷자락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는 게 딱 두 번째군. 왕권을 빼앗기는 게 두려워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애타게 붙잡았던 적이 있다. 그 때 그 선지자의 옷자락이 찢어졌고, 그는 내게 이 찢어진 옷처럼 내 왕국이 찢어져 나보다 나은 이웃에게 돌아갈 것이라 예언했었다. 이제 내 옷자락이 잘려나가는구나. 아마 이것을 잘라간 놈은, 필시 내 왕국을 내게서 빼앗아갈 바로 그 녀석이리라.
다윗은 마음이 무거웠다. 옷자락을 살짝 잘라낼 때, 왜인지 사울의 시선이 내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사울은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무심한 듯 동굴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다윗은 그가 모든 것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다윗을 휘감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사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 위로 뜨거운 액체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울은 이제 충분히 동굴로부터 멀어졌음을 깨달았다. 천천히 뒤돌아서는 그의 눈에, 동굴 안으로부터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다윗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윗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곧 머리를 조아려 사울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곤 통곡했다. 그것은 사울의 진영에서도, 다윗의 수하들 사이에서도 그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슬픈 통곡이었다.
“사울, 나의 주님, 나의 왕이여! 당신도 저처럼 야웨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선을 베푼 것처럼 당신도 제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저는 저의 왕이자 주인이었던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과 저 사이에 야웨 하나님께서 얽어놓으신 기막힌 운명의 사슬이 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저는 당신을 제 손으로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도 제 마음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윗의 심장 깊은 곳으로부터 뿜어져나왔던 통곡보다 더욱 깊고 슬픈 울음소리가 사울에게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군사들과 다윗의 추종자들은 이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고요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울의 심복들조차 사울이 저렇게 찢어지는 슬픔으로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파르르 떨리던 그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내 아들아. 내 아들 다윗! 나를 주님으로, 너의 왕으로 부르지 말아다오. 너는 내 아들이고, 나는 네게 아버지가 되어주고 싶었다. 차라리 네가 저 동굴 속에서 나를 죽였더라면, 그랬다면 더 좋았을 것을!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고 이 나라가 평안하게 네 손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나를 죽이지 않았느냐. 왜 내 옷자락만 베었느냐!”
“나의 왕이시여, 아니, 나의 아버지시여. 사람들은 저를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이라 불렀지만 저는 그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밤낮 없이 그의 가축떼를 끌고 다니던 목동인 저를 사람답게 살게 해준 것은 바로 당신, 내겐 진짜 아버지인 사울 당신입니다. 나를 향해 처음으로 은총을 베풀어주고, 처음으로 칭찬해주고, 처음으로 위로하고 다독여준 사람은 사울 당신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당신을 죽일 수 있습니까... 아들이 어찌 아버지를 죽인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야웨는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워놓고, 또다시 저를, 하필이면 저를 택해 기름을 부은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 줄 알았더라면 저는 사무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이란 말을 들은 순간 사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마 잠시 후에는 다시 야웨가 부리시는 악한 영이 자신의 정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제정신일 때 꼭 다윗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 사울은 자신의 마음으로 낳은 아들을 향해, 목청을 높여 악을 쓰듯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가며 고함을 질렀다.
“다윗, 내 아들아! 반드시 내 청을 들어다오. 너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될 것이다. 나처럼 반쪽짜리 왕이 아니라, 진짜 왕이 될 것이야! 야웨의 이름으로 내게 하나만 맹세해다오. 내 이름과 내 가문이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우리의 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만세에 이어지도록,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아버지와 아들이 왕좌 때문에 서로를 죽여야만 했던 이 불가해한 ‘하나님의 뜻’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노래로 지어져 불리도록 만들어다오. 그것이 우리를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짓밟히게 만든 야웨를 향한 나의 복수가 될 것이다.”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다윗의 모습을 뒤로 하고, 사울은 다시 돌아서며 나직이 말했다. “그래야만 많은 이들이 나를 미치광이로 기억하고, 너를 의로운 왕으로 추앙하게 될 거다. 미안하다 내 아들아. 끝까지 살아남아 이 나라를 이끌고, 나와 달리 야웨께서 기뻐하시는 왕이 되어다오.” 광야를 무심히 스쳐가는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