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굴이야기’ <23> 실크로드 사막길 향해서 ② 투루판
도굴되고 파손됐지만 여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천불동
문화, 지식, 기술 등을 전수받은 위구르
무역 비롯 과수 재배, 면직물 산업 부흥
베제클리크, 77개 바위 깎아 만든 석굴
천정은 수천 불화로 화려하게 채워지고
6세기부터 9세기 후 양식의 문화재들은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하는 모습 보여줘
투루판 지역은 몇 차례 조사를 목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다. 갈 때마다 변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하길 없다. 지금은 위구르족이 인구의 70%, 한족이 23%를 차지한다. 한족의 비율이 늘고 있어서 투루판의 모습은 사라져 가고 있다.
투루판 지역은 북경 시간과 신장 시간을 같이 사용하는데 4시간의 시차가 있다. 이 지역을 방문하면 시간을 항상 확인해야 한다. 북경시로 계산하면 저녁에도 해가 안 진다.
과거에 투루판 지역을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이용했었다. 지금은 우루무치 공항을 주로 이용하는데, 초기에는 중국의 북경에서 우루무치 공항으로 국내선 환승을 해야 했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투루판 지역은 중국과 가까이 있어서 역사가 복잡하다. <한서> <서역전>에 차사전국(車師前國)의 ‘수도는 교하성(交河城)이고 그 강물은 성 아래에서 갈라져 흐르니 교하라 부른다. 가구는 700호에 인구는 1500명이고 병사는 1865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한지연 교수는 ‘당시 중원과의 외교적인 문제에 불교 경전을 헌납하거나 승려들이 함께 오는 모습이 고창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며 투루판 지역불교의 특징을 중국과의 불교를 통한 외교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투루판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 차사국은 흉노에게 넘어갔으나 한나라가 이들을 몰아내고 둔전을 설치하며 이 지역에 한나라 군인들을 주둔시켰다. 한나라 멸망 이후 로브노프 호수에 살았던 사람이 이주해와 고창국을 세웠다. 고창국에는 많은 소그드인이 이주해와서 살게 되었는데 소그드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고창에서는 한나라가 무너진 이후에도 계속 한문을 사용했다. 소그드인(Sogd人, 속특: 粟特)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하는 스키타이 계열의 유목민들이다. 다만 고고학 발굴 결과 이들이 사용하는 한문은 엉터리 한문이 많았다.
640년에 당나라가 고창을 정복한 이후 투루판 분지는 돌궐, 티베트, 당나라 간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결국 803년에 위구르 칸국에게 정복되었다. 840년에 키르기스족의 침공으로 위구르 제국이 무너지자, 그 유민들은 투루판 분지에 코초를 중심으로 천산 위구르 왕국을 세웠다. 투루판 분지는 소그드인 후손들이 위구르인들에게 여러 가지 문화와 지식, 기술을 전수해준 덕분에 위구르 왕국은 수백 년 동안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동서 무역 외에도 과수 재배와 면직물 산업이 부흥하였다.
투루판 지역은 많은 석굴을 품고 있다. 지리적으로 투루판과 선선(누란)의 중간에 있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동쪽 입구 무토우 계곡의 가오창 유적지, 화염산 등과도 가깝다. 화염산 아래의 서쪽 무토우 계곡의 절벽 높이 있다.
베제클리크 천불동에는 77개의 바위를 깎아 만든 석굴이 있다. 대부분 사각형의 공간에 둥근 아치형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불화 석벽이 있는 네 부분으로 나뉜 것도 있다. 이 동굴들에는 전체 천장이 수천 점 불화가 그려진 벽면으로 되어 있다. 어떠한 천장은 인도인, 페르시아인, 유럽으로 둘러싸여 있는 대규모의 부처를 채색한 불화도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많은 부분이 도굴되고 파손되었지만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불화들로 채워져 있다.
대표적인 화염산 중턱에 있는 ‘베제클리크’는 투루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45km 거리에 있는, 화염산의 무르툭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베제클리크 석굴은 1898년 러시아의 클레멘츠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외관보다 내부는 매우 잘 보관돼왔지만, 석굴은 20세기 초 대규모의 파괴가 있었다. 베제클리크 석굴을 가장 많이 조사한 사람은 독일의 그륀베델로 1902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조사했다.
독일의 르꼬끄, 일본의 오타니, 러시아의 올젠버그, 영국의 스타인 등이 차례로 드나들며 소상(塑像)이나 벽화를 실어 냈다. 오타니가 베제클리크 석굴에서 뜯어온 벽화 4점이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보관돼 있다. 석굴의 벽화를 떼어내는 작업은 힘이 든다.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벽화를 쪼개서 채색된 부분만을 떼어내는 방법이 있는데 투루판 지역은 이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석굴의 숫자는 81개이고 벽화는 40개 정도가 남아 있다. 본 연구팀은 석굴의 비공개 석굴에 대한 조사를 할 수 있었다. 현재 불상이 남아 있는 석굴은 비공개를 원칙으로 한다. 이곳에 남아 있는 문화재들은 6세기부터 당나라 시기의 석굴 양식과 위구르 왕조 시기인 9세기 이후의 양식이 남아 있다. 투루판 지역 특성상 동서문화 교차하는 장소로 양쪽의 문화가 같이 존재 한다.
이러한 석굴은 승금구, 아얼호, 바이하시얼 석굴 등이 남아 있다. 훼손된 것은 문화재 약탈의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영화 촬영지로 쓰면서 훼손된 석굴도 있다. 다음 방문지는 이 지역의 석굴로 할 것이다. 중국은 석굴을 천불동(千佛洞)이라고 한다. 항상 이것 때문에 가이드와 부딪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