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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장군문화유적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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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미지 스크랩 강화도의 북쪽코스를 가다
野草 추천 0 조회 175 11.06.27 17:3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강화도는 여러번 갔지만 북쪽코스는 처음...

 

 개인적으로 묘지답사를 하게되면 이상스럽게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다.

 이번 강화도답사는 마음먹고 묘지답사로 나섰지만 함께한 가족들은 묘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환심을 살 생각으로 몇군데의 문화재와 맛기행을 빙자해서 함께했다.ㅎㅎ

 강화도가 이즈음은 밴댕이회로 유명하여 몇차례 식도락을 탐하여 찾아간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의 제안에 흔쾌히 따라준다. 내심 쾌재를 부르며 일정을 잡았는데 하필이면 태풍 메아리가 북상하는

 그런 날이 되었다.

 그래도 어쩌랴? 어차피 먹는 거는 날씨하고는 상관없는 일 아니냐 하면서 강행했다.

 강화도는 수차례 다녀와서 왠만한 곳은 거의 다 둘러봤다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상스럽게도 강화도의

 북쪽은 미문답지나 다름없다. 이번에는 연미정과 황형 유적지를 둘러보고, 고인돌유적지와 최근에

 개관한 강화역사박물관을 위주로 볼 심산이었다.

 

▼ 강화답사도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우측으로 돌아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연미정이 나온다. 지도상으로만 봐도 툭틔워나온 형상으로 빼어난 절경이 예상된다. 이곳은 지금까지 군사지역으로 닫혀있던 곳이었는데 최근에 개방을 하여 다행이 관람을 할 수 있다. 아래 문화재청 자료는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연미정(燕尾亭)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연미정은 강화십경의 하나로서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으나, 현재 민간인통제구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인용>

▼ 연미정과 월곳돈대

▼ 연미정.. 여행 다녀온뒤 TV에서 런닝맨 재방송을 보니 이곳이 나왔다.

▼ 연미정은 월곳돈대 안에 있다.

 

황형 [黃衡 ]

본관 창원(昌原). 자 언평(彦平). 시호 장무(莊武). 1480년(성종 11) 무과 및 진현시(進賢試)에 급제, 상서원(尙瑞院) 판관이 되어 내승(內乘)을 겸임하고 1486년 무과중시에 장원, 혜산진(惠山鎭) 첨절제사에 특진하였다. 그후 훈련원 도정(都正)·의주(義州) 목사·회령(會寧) 부사, 함경도·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 때 전라좌도 방어사로 제포(薺浦)에서 전공을 세우고, 경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후 도총관·훈련원지사를 거쳐 1512년 함경도 변경에서 야인(野人)이 반란하자 순변사(巡邊使)로서 이를 진압하고, 이어 평안도·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공조판서가 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황형 신도비와 사당

▼ 황형 묘소..풀이 무성하다.

 

강화향교(江華鄕校)(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

 

성현들에게 제사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세웠던 국립교육기관으로 고려 인종 5년(1127) 세웠다. 그 뒤 여러 차례 옮기고 복원하였는데, 지금 있는 위치는 영조 7년(1731) 유수 유척기가 옮긴 것이다.
남아있는 건물로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해 여러 부속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제사와 교육의 기능을 담당했으나,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문화재청 자료에서 인용>

 

▼ 강화향교...문이 닫혀져있어 안을 들어가지는 못했다.

 

연무당옛터

일찍이 여기에서 강호부의 군사들을 훈련 했었고 최근에 1876년 고종 13년 2월 26일 이른 바 병자년 한일 수호조약을 체결했던 집이다. 이미 그 전년에 일본의 군함 운양호가 들어와 침략적인 야욕을 품고 초지진 포대를 공격하고 영종도에 내려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고 갔었다. 이듬해 봄 다시 군함과 수송선을 이끌고 와서 한국과 일본이 수호조약을 체결하자고 강요하자 우리는 거기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여 그로인해 서구문명을 받아 들이기는 햇지마는 실상은 도둑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것과 같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이 시작되어 마침내 망국의 쓰린 역사를 맛보고야 말았었다.<연무당옛터 비문중에서>

  

▼ 연무당 옛터..

 

강화산성(江華山城) (사적  제132호)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문화재청 자료에서 인용>

 

▼ 강화산성의 서문 첨화루..

▼ 강화산성 동문..

 

강화지석묘(江華支石墓) (사적  제137호)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하는데,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에는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이 중 부근리 고인돌이라 부르는 규모가 큰 탁자식 고인돌이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체높이는 2.6m이며, 덮개돌은 길이 6.5m, 너비 5.2m, 두께 1.2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 고인돌에 대한 발굴조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인근 삼거리에 있는 고인돌에서 무문토기조각과 간돌검(마제석검), 돌가락바퀴(방추차)를 비롯한 유물들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삼거리 유적과 비슷한 유물들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2000년 12월 고창, 화순 고인돌 유적과 함께 강화 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인용>

  

▼ 대표적인 강화도 고인돌... 크기도 엄청나고 모양도 멋지다..

 

고인돌유적지 맞은편에 현대식 건물로 아름답게 지어진 강화역사박물관이 있다. 고인돌유적지만 있을 때보다 역사박물관이 함께있다보니 관람객이 더 많아진 느낌이다. 주말을 맞아 학생들이 많이 방문을 했다.

 

▼ 2010년에 개관한 강화역사박물관

▼ 신미양요때 가져갔다가 최근에 미국으로부터 반납 받은 수자기(帥字旗)

 

강화동종(江華銅鍾) (보물  제11-8호)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숙종 37년(1711)에 제조한 종으로, 높이 198㎝, 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것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 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이 종은 전통적인 고려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 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인용>

▼ 강화동종(보물 제11-8호)

 

1993년 6월1일 강화도 삼별초 연구회에서 강화도가 삼별초의 출발지라는 점을 정립하고  삼별초 유허비를 강화도의 외포리 선착장 망양돈대 아래쪽 공터에 세웠다
삼별초의 항쟁은 비록 뜻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몽골에 대한 고려 무인들의 항쟁 의식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 삼별초유허비

▼ 삼별초유허비 바로 옆으로 올라가는 망양돈대

▼ 망양돈대 입구

 

이건창묘(李建昌墓)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 선생의 묘소이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충의와 문학을 배웠으며 5살 때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고종 4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종 11년(1874)에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어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고종 12년(1875)에 충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서쪽 지역에 파견되어 지방 관원들과 민생을 살피는 암행어사가 되었다. 또한 예문관의 벼슬을 거쳐 함경도의 경성 이북을 다스리는 안무사에 올랐다.
이건창은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였으며, 저서로는『명미당집』,『당의통략』등이 있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인용>

 

네비가 최신 업데이트가 되어있지않으면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665-27 번지가 나오지 않는다. 내 차의 네비에 번지가 나오지않아 포기하려다 정말 산을 뒤져 겨우 찾았는데 알고보니 차를 주차해 놓은 그곳에 묘가 있었다. 정말 힘들게 찾은 묘다.

 

▼ 이건창 묘..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묘비도 상석도 없다..

▼ 이건창 묘 후경

  

정제두(鄭齊斗)

 

1649년(인조 27)∼1736년(영조 12). 조선 후기의 유학자·양명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1668년(현종 9)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으나 정국의 혼란을 통탄,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가 되나 사퇴하였고, 1684년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잠시 지낸 뒤 다시 사직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중신(重臣)의 천거로 30여 차례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숙종 때 주부(主簿) ·호조참의 ·회양부사(淮陽府使) ·한성부윤, 경종 때 대사헌 ·이조참판, 영조 때 우찬성(右贊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등을 잠시 지냈을 뿐, 거의 다 거절하고 주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처음에는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연구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웠다. 문집으로 《하곡문집(霞谷文集)》과 저서로 《존언(存言)》 《성학설(聖學說)》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說)》 《중용해(中庸解)》 《천원설(天元說)》 《경학집요(經學集要)》 《경학서성(經學書成)》 등이 있다. <인터넷에서 발췌>

 

▼ 정제두 묘...

▼ 정제두 묘 근경..

 

▼ 효령대군의 손자인 예천군 묘소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 비가 너무 내려 묘소는 못갔다.

 

▼ 인터넷 상에 맛집으로 소문난 충주식당.. 지금은 콩누리한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식을 하는 집인데 굳이 콩을 강조하는 이름을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 콩요리도 별로 없던데... 젓국갈비와 병어찜으로 점심을 했다.

▼ 거의 해마다 가는 후포항 청강회집.. 밴댕이회가 맛있다. 세트메뉴로 회,무침,완자전골이 7만원인데 4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 해질녘에 갈매기들의 휴식.. 빗줄기가 거세어지는 석양녘에 서울로 귀경...

▼ 강화연미정을 오르면서 인증샷... 처부모님과 함께... 저는 찍새하느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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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6.27 21:35

    첫댓글 작년 12월 천하장군 강화도 송년답사시에 들린
    역사박물관과 그곳의 고인돌, 동종, 수자기등이 눈에 익네요.
    잘보고갑니다.
    편집 솜씨가 몰라보게 좋아졌습니다.

  • 11.06.30 06:14

    '야초 좋은터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계십니다.
    강화도는 언제가도 많은것을 느끼고 돌아오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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