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동안 詩 200편 발표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 제사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臨淸閣 기왓곡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鶴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을 곤두세우고/ 찬바람 거스른/ 솔개 한 마리> (金宗吉 詩 「솔개」 全文)
「안동에서」란 副題(부제)가 붙은 이 詩는 깃털을 세우고 겨울 하늘을 유유히 나는 솔개를 노래한 것으로, 솔개의 이미지를 통해 詩人 자신이 詩에 임하는 자세를 피력한 것이어서 소개한다.
金宗吉(김종길) 시인. 우리 나이로 올해 일흔여섯인 그는 세간에선 詩人으로서보다 영문학자로, 고려대 교수로, 문학비평가로 더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우리 詩壇에서 漢詩와 英詩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유일한 詩人인 그는 영어로 쓴 詩나 비평문이 「런던타임스」의 주간 문예부록인 TLS(Times Literary Supplement)에 네댓 번 발표되거나 언급된 소수의 극동 사람 중 하나다.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詩壇에 데뷔한 이래 54년 동안 그는 약 200편의 詩를 써왔고 네 권의 본격적인 시론집을 냈다. 특히 詩는 寡作(과작)이었다고 하겠다.
이는 「聖誕祭(1969년)」 「河回에서(1977년)」 「黃沙現象(1986년)」 「달맞이꽃(1997년)」 등 네 권의 시집에 실린 약 150편과 최근 몇 해 동안 쓴 50여 편의 詩를 다 합쳐도 조금 볼륨 있는 시집 한 권 분량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평서의 경우도 1965년에 나온 「詩論」의 경우 문고판이고, 1974년에 나온 제2시론집 「眞實과 言語」, 1986년에 낸 「詩에 대하여」, 1997년의 「詩와 詩人들」은 비평서 치곤 비교적 얇은 편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가 오늘날 詩壇의 거목으로 서게 된 것은, 詩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시론이 한국 詩의 흐름을 제시하고 방향을 잡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어려운 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오직 꼿꼿하고 학구적 처신으로 일관, 우리 시대 지식인의 한 규범을 제시해 왔다.
그는 감성의 엄정한 자기 제어로 詩에 임했기 때문에 한 편 한 편의 詩가 보석과 같다.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부터 漢詩를 쓰며 사물을 관조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한 그가 청년시절부터는 英詩에 대한 이해로 무장하면서, 자신의 詩에 대해 엄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라 하겠다. 그의 이런 시적 편력에 대해 그를 따르는 후배 許萬夏(허만하) 시인이나 평론가 이남호 씨가 『이는 그의 천성적인 「廉潔性(염결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최근 계간 詩誌(시지) 「詩眼(시안)」 여름호부터 「현대詩 깊이 읽기」란 기획 연재를 시작해 관심을 끌고 있고, 월간 詩誌 「現代詩」엔 「나의 등단 시절」을 처음으로 밝히면서 1940年代 한국 시단의 모습을 그려놓는 등 오랜만에 그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연재물의 첫 회는 李陸史(이육사)의 시 「광야」의 셋째 행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에 대한 저간의 해설이나 비평에서 보인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자신의 관점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한국 詩史 정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金시인의 「현대詩 깊이 읽기」 연재에 거는 詩壇의 기대는 크다.
金宗吉 시인과의 만남은 6월4일과 6월7일, 그리고 6월13일 등 세 번에 걸쳐 이뤄졌다. 첫 번째는 서울 도봉구 수유동 자택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술자리를 겸해 환담하는 형식으로 만났다.
金시인과 이처럼 마주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었다. 풍부한 경험과 해박한 지식에 바탕을 둔 그의 물 흐르는 것 같은 달변에서 많은 것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북한산 자락 수유리 자택을 찾아
지하철 4호선 수유전철역에서 1번 마을버스를 타고 백련사 입구인 「하얀집」 앞 정류장에 내려 전화를 할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金宗吉 시인이 이미 길 건너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웃음이 스칠 듯 말 듯 하는 金 시인 특유의 무표정에 가까운 시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전화로 설명해도 찾기 힘들 것 같아 아예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며 수 인사를 끝내고 앞장을 섰다. 큼직큼직한 2층집들 사이로 「××주택」 하는 빌라가 많이 들어서 있는, 북한산 자락 숲 속의 전형적 중산층 동네였다. 그는 1972년에 이 수유리 골짜기로 이사왔으니 29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함께 걸으면서 『선생님, 몸이 좀 준 것 같네요』하니까, 『그렇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다가, 혼잣말하듯 『매일 아침 백련사 뒷산을 올라 가벼운 운동을 했더니 체중이 좀 줄었나?』 했다. 얼굴이 작아졌지만 더욱 맑았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어깨를 펴고 걷는 모습은 전과 다름 없었다.
여러 번 꺾인 골목의 한 끝에 金시인의 집이 있었다. 문패에는 도봉구 수유동 532번지 62호 金致逵(김치규)로 돼 있고 괄호 속에 작은 글자로 宗吉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詩人이 벨을 누르고 『여보, 손님 오셨어요』했다. 문이 열리고 고운 얼굴의 부인(姜信香)이 현관에 나와 목례로 우리를 맞았다. 젊었을 땐 상당한 미인이었을 것 같았다.
나중에 전화로 『두 분이 연애결혼 하셨어요?』 해봤더니, 그냥 수줍음 끼 있는 경상도 억양으로 『아…아닙니다』했다. 金 시인이 스물셋, 경북 봉화 일대의 명문 姜씨 집안 딸인 부인이 스무 살 때, 두 집안 어른들이 이미 한 「약조」대로 성년이 되자 결혼식을 올린 것이었다. 1948년 2월이었으니 53년이 넘게 해로하고 있는 셈이다. 슬하엔 2남 3녀가 있다.
넓은 마당에 잔디밭이 깨끗하게 손질돼 있었다. 대지 103평에 건평 67.8평. 1층엔 거실과 안방, 취사공간 등이 있고 2층은 서재를 포함해 방 세 개가 모두 책으로 가득차 있다. 老 부부가 사는 공간 치고는 넓은 편이었지만 말끔하게 정돈이 돼 있었다.
서재엔 스티븐 스펜더 등 名士들의 증정본도
金宗吉 시인의 8평 정도 되는 오래된 서재는 작은 도서관 같았다. 모든 벽의 천장까지 책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書架의 것은 대부분 英書들이었고, 집안 대대로 물려받았다는 꽤 많은 고서들도 그 즐비한 書架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서재의 가운데에 대형 책상이 있고 그 위에는 전동 타자기가 한 대 커버를 쓴 채 놓여 있었다. 영어로 글 쓸 때만 사용하는 것인가 보았다. 30인치 정도의 TV도 한 대 책 더미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선생님께서 가장 아끼는 책들은 어떤 것입니까?』하고 사진 찍히는 데 정신 없는 그에게 내가 말을 걸었다. 그 많은 책들에 대해 무식했으므로, 이런 식으로 접근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서가를 둘러보더니 책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T.S 엘리엇의 저서였다.
『엘리엇이 이 책을 내놓고 스스로 절판시켜 버렸으므로 세계적으로 희귀본이 된 것이지요. 「After Strange Gods」란 건데, 우리말로 옮기면 「낯선 神들을 좇아서」가 될까… 1985년 영국에 가 있을 때 케임브리지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구입했지요. 1961년, 영국 셰필드 대학에 1년 동안 있으면서 윌리엄 엠퍼슨 교수 주선으로 엘리엇을 만나본 적도 있고, 내가 실제 제일 좋아하고 연구한 詩人의 희귀한 책이라 늘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는 잇따라 몇 권의 영서들을 보여 줬다.
「일곱 유형의 모호성(Seven Types of Ambiguity)」이란 詩論書로 유명한 엠퍼슨의 저서 두 권, 스티븐 스펜더의 「T.S. ELIOT」, 로버트 로웰의 시 전집 「NOTE BOOK」, 199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이니의 「Sweeney Astray」, 현존하는 영국 최고의 문학비평가 프랭크 커모드 前 케임브리지大 교수의 저서 등. 이 책들엔 한결같이 「金宗吉 교수에게 드린다」는 글과 함께 저자의 서명이 쓰여 있었다.
특히 커모드 교수와는 두터운 사이여서 편지왕래도 잦다면서 그에게서 온 편지도 보여줬다. 커모드의 편지 속에는 英譯된 金시인의 詩에 대해 자신의 소견을 적은 것도 있다고 했다.
『나중 이 많은 책들을 어쩌시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직한 소리로 『읽을 수 있는 데까지 읽다가 나 없어지고 나면 집의 아이들이 어떻게 하겠지 뭐』하고, 그는 침통해진 얼굴을 하고 앞장서 층계를 내려갔다.
다른 방엔 국내 서적들이 가득했는데 그 동안 기증해 온 詩集 등이 2000권 정도 되더라고 내려가면서 그가 말했다.
6월7일에 만났을 땐 『어제하고 오늘은 집 도배하느라, 책들 정리하느라, 중노동을 했다』면서 시집 등 많은 책들을 다시 접했고 새로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희귀본 시집들이 꽤 많았겠군요』하자, 『미당과 청마의 시집들,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의 초기 시집 등 귀한 것들이 좀 있더라』면서, 이번에 추려낸 1000여 권의 시집들은 고려대 도서관에서 곧 다 가져갈 것이라고 했다.
여섯 살에 漢詩 쓴 안동의 수재
「五柳先生宅(버드나무 다섯 그루 선생님 댁은) 門前靑天地(문 앞이 온통 푸른 천지라네)」
이 漢詩는 金시인이 여섯 살 때 쓴 것이다. 이 詩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한학자인 그의 조부는 마을의 청소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날 漢詩를 지으러 몰려갈 때 여섯 살의 그도 졸랑졸랑 따라가 큰 아이들 틈에 끼었다. 남이 詩 쓰는 것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그에게 할아버지가 농담 삼아 『니도 한 수 지어 볼래?』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붓을 얻어 들자마자 글자를 또박또박 써 내려가는 것이었다. 크게 놀란 할아버지는 유독 「門前靑天地」란 글에다 두세 겹의 「貫珠(글이나 글자가 잘 되었을 때 글자 옆에 치는 동그라미)」를 쳐주었다. 어린 손자의 활달한 기상을 높이 산 것이었다.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우며 자란 그는 행동도 늘 의젓했다. 뛰어난 총기 때문에 동네 어른들의 혀를 내두르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손자가 신식 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인 아홉 살이 되자 할아버지는 率家(솔가)를 지시해 30리나 떨어져 있지만 학교가 있는 경북 청송군 진보로 이사를 간다.
진보국민학교에선 늘 수석을 차지했는데 그의 기억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알려 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노래하는 시간이었다. 그의 차례가 되자 노래를 잘 못 부르는 金宗吉은 선생에게 노래 대신에 『외워서 출석을 부르겠다』고 제의했다. 허락을 받은 그는 일어서서 담임선생이 아침마다 출석부를 보며 호명하는 50명이 넘는 아이들의 이름을, 1번부터 끝번까지 완벽하게 외워내 교실 전체를 아연케 한 것이 그것.
훗날 金시인이 수업료가 없고 졸업하면 학교 선생이 보장되는 대구사범으로 진학하자 이 일대에선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秀才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렸을 적부터 재주 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고… 심한 경우는 나를 神童(신동)으로 불렀다고 하지만…』 하더니 쑥스럽다며 화제를 돌리고 만다.
靑馬, 趙芝薰 등과 만나고 문단 데뷔도
『초등학교 低학년 때부터 나는 자라서 글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지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외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어른이 「너 크면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고 묻기에 대뜸 「커서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대구사범에 입학하고서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어서 처음부터 수학이니 체조, 음악, 교련 과목 같은 건 의식적으로 게을리했지요. 문학하려는 사람에게 이게 뭐 필요한가 하는 건방진 생각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다가 4학년 땐 동기생 몇 사람과 함께 「銀河帶(은하대)」라는 詩 동인지도 냈어요. 펜으로 써서 나눠 가진 거였지만』
그 무렵 중학생으로선 매우 조숙했던 그는 일본어로 번역된 폴 발레리나, 폴 클로델 등 프랑스 詩人들의 詩를 탐독하면서 반드시 대학에 가서 폭 넓은 문학공부를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는 또 우리말로 된 문학잡지나 詩集을 접할 수 있는 「희귀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방학 때면 찾아가는 외가에서였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詩를 쓰던 외숙 李秉珏씨와 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 문과에 다니던 외종형의 서가에서 「文章」 「詩學」 등 잡지와 「花蛇集」 「靑馬詩抄」 같은 호화판 시집도 꺼내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들은 그에게 문학이란 파라다이스를 맛보게 했고 일본어로만 읽던 문학에서 逸脫(일탈), 우리 글로 된 문학을 읽는 편안하고 비밀스러운 행복감도 만끽하게 했다.
1945년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한 그는 4월에서 9월까지 안동 서부국민학교(지금의 안동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한다. 한문을 가르쳐 주던 할아버지는 국민학교 6학년 때 별세했고 집은 안동의 고향 주변으로 다시 이사를 해 있었다.
광복이 되자 그는 서부국민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한다. 집안 사정으론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서울에 가서 본격적인 문학을 하겠다는 결심을 실천하고 싶어서였다.
그해 10월 서울에 올라와 보니 몇 안 되는 전문대학의 신입생 모집은 이미 다 끝나가고 있었다. 남은 학교는 혜화전문(지금의 동국대학교)밖에 없어 일단 거기에 시험을 치르고 들어갔다. 아들의 향학열을 어쩔 수 없었던 아버지는 입학금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가정교사 등을 해서 학비를 조달했다. 돈이 없어 끼니를 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혜화전문 문과에는 梁柱東, 金珖燮, 李軒求, 異河潤, 金晉燮 등 유명 문인들이 대거 재직하고 있거나 출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강의를 경청하면서 金 시인은 문학서클을 조직, 「隱花植物」이란 동인지도 낸다.
『1946년 봄 을유문화사에서 尹石重 선생이 주간을 맡은 「주간 소학생」이란 잡지에서 童詩 현상모집이 있었는데 「바다로 가는 나비」란 작품을 응모해 입선이 됐어요. 상을 받으러 을유문화사에 갔더니 朴斗鎭 시인이 직원으로 있어 만났고, 또 거기서 처음 趙芝薰 시인과도 만났어요. 芝薰과는 만나자마자 서로 말을 놓는 이른바 許交(허교)를 한 거였어요』
광복 후 문단은 좌익세력의 「문학가동맹」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우익 진영으로 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란 것이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했다. 金宗吉 시인은 순수문학파였고, 좌익의 「傾向詩」는 「詩 같지도 않아」 자연 청년문학가협회 쪽으로 기울어졌다.
1946년 6월20일 저녁 종로 YMCA에서 열린 청년문학가협회의 「詩의 밤」 행사에서 空超, 月灘, 永郞 같은 선배 詩人들과 함께 학생복 차림으로 詩낭송도 했다. 그날 그는 靑馬 柳致環, 金東里, 李漢稷 씨, 그리고 대구에서 올라온 朴木月과도 첫 대면을 했다.
이듬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 鄭芝溶이 주필로 있는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門」이란 詩를 응모해 입선을 하고 문단에 데뷔한다. 詩 부문 심사는 정지용이 혼자 했는데, 좌파의 문학가동맹에 속해 있던 그는 金시인의 불교적 색채가 엿보이는 「門」을 높이 사지 않았던 것 같다.
가난한 대학생활… 영문학에 입문하다
『1946년 9월부터 모든 전문대학이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됐어요. 혜화전문이 동국대학으로, 보성전문이 고려대학으로, 연희전문이 연희대학 식으로 말이지요. 나는 동국대 문과 1학년에 들어가 1년을 다녔는데 국어학이나 국문학 같은 데엔 크게 재미를 못 붙였어요. 그래서 사범학교 때 발레리나 클로델을 탐독한 적이 있어 불문학을 할까 싶었지만 불어는 잘 모르고, 영어는 좀 아니까 영문학을 하기로 작정을 했지요.
당시 英詩전공의 영문학 교수로 누가 제일인지 수소문해 봤더니 고려대의 李仁秀 교수(6·25 동란 때 작고)라고 하더군. 梁柱東 선생에게도 문의를 해봤는데 梁 교수 역시 李 교수가 최고라고 하고… 그래서 1947년 8월 하순에 고려대 영문과 2학년에 편입시험을 치렀는데 문제가 너무 어려워 난생 처음으로 시험에 낙방하는 줄 알았지요. 보니까 20명의 응시자 중 나 혼자만 합격을 했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깁니다만 동국대학의 梁柱東 교수가 나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고 키우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그만 고려대로 가버렸다고 두고두고 애석해 하더라는 겁니다』
그때 고려대 영문과 2학년엔 학생이라 해봤자 네댓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卞榮泰, 權重輝, 李仁秀 등 쟁쟁한 교수들이 있었다. 李仁秀 교수의 강의 가운데에는 「받아쓰기」가 있어 특이했다. 강의 案을 영어로 만들어 와서 그걸 읽으면 학생들이 받아쓰는 형식이 그것. 영어공부에 좋은 트레이닝 방법인 것 같았다고 金시인은 회고하고 있다.
서울에 있는 영국인 가정에서 중학 低학년 시절부터 寄食(기식)하고 런던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李교수는 오리지널 발음을 구사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듣고 말하는 것에 많은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金宗吉 시인은 그때 李 교수를 통해 비로소 현대 英詩를 접하게 되었고 특히 T.S. 엘리엇의 詩와 시론에 접하게 되어 그로부터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金 시인이 T.S. 엘리엇 詩를 번역하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인 1948년 11월이었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자 한국에서도 엘리엇 붐이 일었던 것인데 당시 엘리엇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李仁秀 교수였으므로 그에게 원고청탁이 많이 들어왔다.
「신세대」란 잡지에서 李 교수에게 엘리엇의 「황무지」의 完譯(완역)을 부탁해 왔는데 李 교수는 이 번역 일을 金宗吉 시인에게 맡겼던 것이다. 신춘문예를 통해 이미 詩人으로 인정받았고 우리말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것을 李 교수가 눈여겨 봐 왔기 때문이다.
나중 李仁秀 교수가 번역된 詩에 더러 손을 보긴 했지만 「역자의 말」에서 이 번역 속에는 金 아무개의 말솜씨가 도처에 숨어 있다면서 「共譯(공역)이란 말은 군의 겸손이 허락지 않으리나…」라고 썼다고 한다. 그때 이후 엘리엇은 金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詩人이 되었다.
李仁秀 교수는 영자신문 「서울 타임스」의 주필도 겸하게 되었는데 金宗吉 시인에게 아르바이트로 통신기사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기자가 되도록 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당시 중학교 교원이 받는 봉급만큼의 월급을 받아 제법 풍족하게 지내면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1950년 5월 고려대 대학원에 입학을 했지만 한 달 이후 6·25 동란이 터지고 그는 대구로 피란을 해야 했다.
대구 피란 생활에서 본격 문학활동
피란 고려대는 대구에다 진을 쳤고 휴전이 되자 서울로 올라가지만 金宗吉 시인은 대구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전쟁 중인 195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대구 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한국기지 사령부에서 통역으로 취직해 누구보다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피란 시절이라 대학원 강의가 없었지만 그는 등록을 했다. 2년 후 졸업식이 있었지만 그는 석사학위 논문을 내지 않았다. 가장 존경하던 李仁秀 교수가 사변 통에 작고했으므로 누구에게도 논문을 작성해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력이 문제지 석사학위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것이다.
1952년 봄에 그는 呂石基 선생의 주선으로 경북대 사범대 영어강사를 하게 되고 이내 대구공고 영어교사로 취직한다. 그리고 이듬해 신학기부터는 청구대, 대구대, 고려대 등에서도 출강을 요청해 올 정도로 그의 강의는 인기가 있었다. 시간강사 2년 만에 경북대 영문과 專任(전임)이 된 것은 순전히 李 교수에게서 배운 20세기 英詩에 관한 탁월한 강의실력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대구 문인 朴暘均 시인과 절친하게 지냈다. 나중에 「녹향」다방을 중심으로 詩 지망생들이 모였는데 거기서 경북의대에 다니던 許萬夏를 만나게 되고, 그의 詩的 자질을 높이 사고 친하게 된다. 그때 경북대 영문과 학생으로 金潤煥이 있었는데 당시 詩를 쓰고 있었다. 그는 훗날 언론계로, 정계로 나다니면서 詩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 된다.
1954년 7월에 대구의 신생문화사에서 나온 金宗吉 편저의 「20世紀 英詩選」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켰다. 李仁秀 교수가 1950년 초 경북사대에서 강의하던 내용을 주축으로 한 것으로 金시인이 몇 편을 더 보충하고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이 나오자 김동리 씨는 「1954년 문단총평」을 쓰면서 이 번역시집은 우리나라 詩 번역사상 획기적인 것이라고 극찬했다. 바로 再版(재판)에 들어갔던 「20세기 英詩選」은 21년 후인 1975년 「일지사」란 출판사에서 증보판을 냈는데 이 분야 책으론 아직도 이 책을 능가할 것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1956년부터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조교수로 취임한 그는 2년을 머물다 1958년 8월 고려대학교 영문과 조교수로 옮기게 돼, 1992년 2월 정년까지 34년 동안을 근무하게 된다.
4개 국어로 詩를 쓸 수 있는 詩人
『1960년 브리티시 카운슬 스칼러로 한국에서 세 사람, 일본에서 다섯 사람이 영국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나는 윌리엄 엠프슨 교수가 있는 셰필드 대학을 지원해서 1년 동안 영문학 연구를 했었지요. 그때 엠프슨 교수의 주선으로 엘리엇도 만나고 그와 대화도 나누고 했습니다. 1965년에 나온 나의 「詩論」에 그때 엘리엇 만난 것 등 글이 좀 나옵니다만…. 아무튼 그때 나는 셰필드에서 또 한 사람의 詩人 G.S. 프레이저도 사귀는 등 보람이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갈 땐 비행기로 갔다가 1년 후 돌아올 땐 배로 오게 되었어요. 사우스햄튼에서 일본 요코하마까지 35일이 걸리는 지루한 여행이었지만 유람이라 재미는 있었습니다. 배에는 한국인으론 김창렬씨와 내가 탔고, 우리 또래 일본인 다섯이 타서 동행이 되었어요. 포르투갈을 돌아 지중해에 들어와 포트사이즈까지 오는 데 1주일이 걸리더군요. 수에즈 운하를 빠져나가 홍해의 끝에 있는 아덴에 이르렀을 때였어요. 그들도 심심했던지 일본인들이 모여 「하이쿠(俳句:일본의 짧은 詩)」를 짓기 시작해요.
대구사범 다닐 때 하이쿠를 지어 일본인 선생에게 격찬을 받은 바 있어, 나도 그들과 하이쿠를 지었더니 그들은 깜짝 놀라는 거였어요. 자기들 것보다 내 것이 훨씬 낫다면서 자기들이 지은 하이쿠를 들고 와서 고쳐달라거나 평을 해달라 그럽디다. 심심풀이로 그들과 하이쿠를 아마 수십 수는 지었을 겁니다.
홍해를 나와 인도양에 있는 지금의 스리랑카인 실론의 콜롬보항에 배가 정박했으므로 거기 상륙하게 됐지요. 배 안에서 「수에즈 운하(Suez Canal)」란 영어로 쓴 詩가 있어 마침 G.S. 프레이저에게 보내는 편지에 「詩가 되는지 모르겠다」며 그걸 동봉했지요. 그 사람이 그 詩를 TLS에 실었던 것이지요. 싱가포르에 도착해서 싱가포르 대학의 D.J. 엔라이트 교수를 만나 그에게 그 詩를 보였더니 리듬이 좋다 합디다.
서울에 왔더니 엔라이트에게서 편지가 왔더군요. 영어로 쓴 詩가 있으면 자기들 대학에서 나오는 문학지 「포커스(Focus)」에 싣겠다고 말이지요. 민재식의 詩 두 편을 번역해 보냈더니 엔라이트가 내가 번역했다는 말과 함께 TLS에 보내 한 편이 게재되었습니다』
金宗吉 시인이 어렸을 때부터 漢詩를 지었던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그의 漢詩는 책으로 묶여져 나온 바는 없다. 그러나 1992년 2월 고려대 정년퇴임을 기념하면서 서예가 如初 金膺顯의 글씨로 그 동안 썼던 漢詩 25수를 공개한 적이 있다. 金시인은 그때의 詩書展 수익금 3100만원을 고려대 영문과 장학기금으로 出捐(출연)하고 石英奬學會를 설립했다.
그의 漢詩나 英詩, 혹은 하이쿠는 해외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적은 것들이 많아 詩人인 그로서는 특이한 일면을 느끼게 한다.
한글로 쓰는 자신의 본격적인 詩를 위해 여타의 사소한 느낌 같은 것은 외국어로 처리해버리려는 시적 결벽성이랄까 우리 詩에 대한 우월감이 잡혀진다는 말이다.
그는 술자리가 흥에 겨우면 늘 눈을 지그시 감고, 그러나 단정하게 앉아 漢詩를 읊조리기로 유명하다. 우리의 漢詩나 시조뿐 아니라 중국 古詩(고시)에 대한 지식 또한 광범위해 그 분야를 이야기하면서 도도한 경지에 잠기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술에 취해 필름이 끊어진다 어쩐다 해도 그만은 자세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풍부한 화두로 좌중을 이끌어 가는 것을 몇 차례나 목격한 일이 있다.
사람을 가리는 편
金宗吉 시인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 「蘭社」의 멤버다. 高柄翊(고병익), 金東漢(김동한), 李佑成(이우성), 趙淳(조순), 李憲祖(이헌조), 李龍兌(이용태), 金容稷(김용직), 李宗勳(이종훈) 씨 등 원로층이 멤버인 이 모임에 나가는 것에 요즈음 재미를 붙이고 있다.
漢詩를 짓고 그것을 고치고 평하고 하는 신선놀음 같은 모임. 전달에 정해진 韻字(운자)에 따라 각각 詩를 지어 그 달 모임에 가져오는 형식이다. 한학자인 이우성씨가 운율법에 어긋나거나 하면 고쳐주고, 한 번씩 자신의 詩를 읊고, 돌아가며 내는 저녁 식사를 하며 환담하고, 그리고 다음의 운자를 정하고 헤어진다. 자신의 연배와 비슷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 모임은 지난 6월 하순의 만남으로 122회째를 맞았다.
金 시인의 교우범위는 크게 문단과 학계 두 가지로 나눠진다. 문단 쪽에는 詩 분야가 거의 대부분이고 학계는 영문학 쪽이다. 그러나 그와 절친했던 국내외의 사람들은 거의 저 세상으로 가고 없다.
그는 사람을 가리는 편에 속한다. 누구에게나 쉽게 대하지 못한다. 경우가 어긋나는 일을 하거나 인품이 저속하면 외면해버리고, 후배 詩人의 경우도 詩가 형편없으면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詩人에 대해선 나이에 관계없이 잘 대하므로 그와 자리를 함께 하는 詩人들의 면면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靑馬 柳致環은 金宗吉 시인보다 18년 연상이었다. 조혼이 풍조였던 앞 세대 때를 감안하면 아버지뻘이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金시인을 친구처럼 대했다. 1954년에서 1956년까지 경북대 영문과 전임을 맡고 있었는데 靑馬도 1954년 국문과에서 현대시를 강의하고 있었다. 눌변인 靑馬는 강의하는 데 애를 먹었다. 어느 날 靑馬는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宗吉이! 자네는 90분이나 되는 그 긴 시간을 우째 다 채우노? 내사 마 몇 마디하고 나니 고마 할 말이 있어야제. 50분도 못 채우고 나와 삐릿다!』
이 말은 한때 경북대 교수 사회에서 화제가 되었다. 靑馬 유치환이라는 당대 거물 詩人이 한 말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1967년 2월17일 靑馬가 「버스에 부딪혀 돌아가셨다는 뜻밖의 비보를 듣고 한참 망연자실해 있다가 냉정을 되찾은 다음에」 金시인은 「靑馬先生追悼」란 詩를 흐느끼면서 썼다.
<슬픔과 寂寞은/ 끝내 용렬한 우리의 것/ 살아서 생각하신 바로 그대로/ 당신은 豫報도 없는 바람처럼 가셨습니다// 한없는 多情과 謙遜어린 眼鏡너머로/ 당신은 엄청나게 큰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지없는 소탈한 웃음과 사투리 속에/ 당신은 엄청나게 큰 성량을 간직하셨습니다…>
趙芝薰이라는 사람
詩壇에서 그의 첫 친구는 趙芝薰이었다. 처음 만난 것은 그가 혜화전문 1학년 때였고, 당시 지훈은 경기여고 교사로 있었다. 여섯 살 차이나 되는 둘은 만나자 마자 말을 놓고 지나기로 했다. 영양 출신의 지훈이나 안동 출신의 金시인이나 같은 안동 문화권이어서 일곱 살 나이 차까지는 서로 말을 놓는 것이 관습이었다. 허교는 지훈이 먼저 제의했었다.
1948년 가을 지훈을 고려대로 초빙하기 위해 당시 具滋均(구자균) 교수의 심부름을 간 것도 金시인이었다. 그 이후 지훈과 그는 스승과 제자관계이면서 친구로 같은 캠퍼스에서 매양 어울렸고 金시인이 1958년 고려대 교수로 옮아간 후 10년 동안은 매일처럼 만날 수 있었다.
1968년 지훈이 만 48세의 한창 나이에 작고한 뒤 金시인은 「지훈이라는 사람」이라는 글에서 「비범한 용기와 의지력으로 보면 지훈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평상시의 그는 전혀 딴판으로 지훈이라는 그의 필명이 풍기듯이 훈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친구를 대할 때나 교실에서 학생들을 앞에 두고 강의를 할 때 그의 눈가에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가 어렸고, 술자리에서의 그는 문자 그대로 談論風發(담론풍발)했다」고 썼다.
朴木月과는 지훈과 비슷한 시기에 만났으나 친해진 것은 金시인이 대구에 피란 가 있을 때부터였다. 영국군 사령부 통역으로 있을 무렵 이웃 동네에 목월의 잡지사가 있어 가끔 들러 환담을 하곤 했다.
둘이서 본격적으로 친하게 지낸 것은 지훈이 작고하고, 목월이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또 그가 詩誌 「心象」을 창간할 무렵부터였다. 金시인은 매일이다시피 관철동의 좁고 허름한 詩協사무실을 찾아 朴木月, 朴南秀, 金光林 시인과 함께 「心象」 편집을 논의했다.
월간 心象은 1977년 1월호부터 혁신호를 냈는데, 본문 모조지에다 가로짜기 편집으로 80쪽을 넘지 않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서구적 詩 잡지였다. 이 혁신호는 金宗吉 시인이 「주간」을 맡아 소신대로 만든 결과였다. 그러나 잡지에서 소외된 詩人들 중심으로 말이 많아지고 木月조차 흔들려 8호 정도를 만들고 「心象」에서 손을 뗐다. 학교 생활이 바쁜 탓도 있었다.
1978년 3월24일 木月이 작고했을 때 고려대 중앙도서관장으로 있던 金宗吉 시인은 韓紙 두루마리에 붓글씨로 추도사를 써 가지고 가 눈물을 삼키며 읽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詩協 모임 같은 곳엔 金春洙 시인과 金宗吉 시인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더러 목격됐다. 둘은 술자리까지 나란히 앉았다가 함께 일어나곤 했다.
『김춘수 선생하고는 언제 처음 만났는지 확실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1954년인가 1955년으로, 그와 동향인 靑馬 선생이 대구에 계실 무렵이지 싶어요. 金시인과 나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중요한 것은 「마산시 중성동 59번지」라는 그의 주소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1956년 7월 하순에는 내가 직접 그 주소로 찾아가 그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T.S. 엘리엇과 金宗吉 시인
金宗吉 시인은 1964년 봄부터 김춘수와 김수영의 詩를 두고 「소피스트케이션」이니 「난센스의 추구」니 「의미론적인 해체」니 지칭했던 사실을 밝히고 싶다고 그의 「김춘수論」에서 써놓고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 詩」라는 용어를 맨 먼저 시사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지적이다.
金 시인은 자신의 후배로 許萬夏 시인과 閔在植 시인을 가장 좋아한다. 부산에 사는 許 시인은 서울에 다니러 올 때 반드시 金 시인 댁에 들러 만나고 내려간다. 金시인은 내가 부산에 내려가 있다가 올라오자 『허만하는 잘 있던가?』고 그의 안부부터 묻는 것이었다. 閔 시인의 경우도 인터뷰 중 몇 번이나 『그 「贖罪羊(속죄양)」이란 詩로 유명한…』 하며 그가 새로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등의 근황도 들려 주었다.
1965년 1월 「황무지」의 詩人 T.S. 엘리엇이 작고했을 때, 그의 詩를 연구해왔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바 있는 서울의 金宗吉 시인은 신문에 이렇게 썼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는 미지의 젊은 기자가 찾아와서 현관에서 선생님의 서거를 알려 주었을 때 저는 친지의 죽음을 들었을 때처럼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친지의 죽음」 이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여태까지의 저의 生의 반에 가까운 시기를 두고 어느 누구보다도 저의 머리를 사로잡아온 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年前에는 선생님의 聲容(성용)에 직접 접할 수 있는 희귀한 기회를 얻기까지 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엇 선생님.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1961년 6월7일 오후 3시였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비서였던 마일즈 양이 열어준 런던의 러셀 스퀘어 24번지 페이버 앤 페이버(Faber & Faber) 4층 선생님의 사무실 도어에 들어섰을 때 선생님은 그 헌칠하시던 체구로 일어서 계시었습니다.
그때 이미 선생님에겐 신병이 있었습니다만 선생님은 건강이 나아진 편이라고 말씀하셨고, 제가 뵙기에도 10년은 넉넉히 더 사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하시던 선생님이었기에 선생님의 下世는 저에게는 더욱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金宗吉 시인이 엘리엇의 詩를 접하게 된 것은 1947년 고려대 영문과에 편입하고 李仁秀 교수의 강의를 통해서였다. 이듬해 엘리엇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金 시인이 그의 詩 「황무지」의 원문을 접해보니 다른 英詩와는 판이한 감을 주더라고 했다.
그 느낌은 충분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현란한 신천지를 보는 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엘리엇의 詩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엘리엇의 비평에 대해서도 천착하기 시작하는데 이후 그를 평생 동안의 학구적, 시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그런데 나는 엘리엇의 詩나 비평을 찬탄하면서도 내 자신의 창작에서는 엘리엇의 영향이 직접 드러나지는 않아요. 나는 나고 엘리엇은 엘리엇이라는 식으로 처음부터 흉내를 낸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高銀 시인의 「未堂 담론」에 대하여
최근 高銀 시인이 「未堂담론」을 써서 그 내용을 두고 몇 詩人이 신문에 반론을 내고 한 것을 화제에 올리고, 『그거 어떻게 보았습니까?』고 내가 물었다. 金宗吉 시인은 그 글이 실렸다는 「창작과 비평」을 일부러 사보았다면서, 신문에 나온 글만 보아선 좀 과장돼 있더라고 서두를 뗐다.
『未堂의 과거 행적이 그랬다는 것은 사실이지요. 未堂의 제자인 고은 씨 개인이 미당의 과거 행적을 뒤져 공격한다고 해서 그 행적이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는 것 아닙니까? 그 반론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나는 고은 씨가 未堂의 詩 「자화상」과 「귀촉도」를 혹평한 데 대해선 동의할 수가 없더군요. 그 두 편의 詩는 未堂의 대표작에 속하는 것인데…』
오늘의 고은씨가 어떻게 5共 초창기 未堂의 행적을 비난할 수 있는가라는 보수 우파적 시선이 그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 아니냐고 슬며시 동의를 구하자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조금 저었다. 더 운위할 가치를 못 느낀다는 표정이었다.
2년 전인가 한국詩協 신년 하례모임 인사말에서 金宗吉 시인은 좀 신랄한 말을 했다. 『이 자리에서도 심사를 맡았던 분들이 있겠지만 각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어봤는데, 어떤 당선작은 왜 이런 것이 당선작이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면서 『심사위원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면 이 사람이 이런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을 수가 있나 의심이 가기도 했다』고 한 것이다. 물론 좌중엔 신춘문예 최종 심사나 예심을 맡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는 그때의 생각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신문사에서야 당선작을 내기 바라겠지만 공정성이란 의미에선 당선작이 될 만한 것이 없으면 심사를 맡은 사람들이 당선작을 안 내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니냐고 했다.
요즘 詩人들은 고전 詩 너무 모른다
―요즈음 한국詩壇, 특히 젊은 시인들의 詩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요즈음 젊은 시인들 「백화제방」이랄까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습디다. 다만 이들이 옛날의 고전 詩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자기 또래들과 바로 위의 연장자들 詩만 읽고 詩를 쓰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연 詩들이 비슷비슷하지.
각자의 詩人들이 고전으로 돌아가서 옛날의 좋은 詩들을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비평의 공정성이랄까, 뭐 이런 게 우리 詩壇에 결여돼 있지 않나 싶습니다. 詩를 잘 이해하는 비평가가 나와서 사심 없이 비평을 해야 시단이 발전할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문학상 심사도 가끔 합니다만 심사가 공정해야 좋은 詩가 어떤 것이라는 기준이 설정되는 것 아닙니까? 좋은 수상작 하나를 낸다는 것이 수십 명의 비평가들이 쓴 수백 편의 평론보다 더 큰 일을 한다는 것을 알아 줬으면 합니다. 심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 현대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많이 해 온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일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까?
『영어로 쓴 나의 詩나 민재식 시인의 詩번역한 것 등은 앞에서 이야기했지요. 1961년 셰필드 대학에 있을 때 거기 「세필드의 詩」란 간행물에다 李箱(이상)의 「거울」, 李漢稷(이한직)의 「東洋의 산」, 김춘수의 「꽃」을 번역해 실은 적이 있는데 본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어요.
문예진흥원의 위촉을 받아 한국의 漢詩 100편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 1987년 런던에서 「더디게 피는 국화(Slow Chrysanthemums)」란 제목으로 출판된 것을 시작으로, 김춘수 선생 詩를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The Snow Falling on Chagal’s Village)」이라는 영어제목으로 출판한 것이 본격적인 영역작업이라고 할까요. 박두진 선생의 초기 詩들을 묶어 번역한 것도 있는데 이것도 머잖아 출판이 될 것입니다.
또 서강대학교에 앤터니 修士(수사)라고, 귀화를 해서 우리 이름으로 안선재 교수라고 있는데 그이하고 공동번역으로 중견 詩人들까지 포함한 한국현대시 앤솔로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도 결과가 좋을 것 같아요』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그는 요즈음도 외출이 잦다. 이런 저런 모임이 겹쳐 「6월말까지 스케줄이 꽉 짜여져 있는 것 같다」고 웃었다. 게다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며느리와 손자 손녀가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 2층을 차지하고 있어 집안도 오랜만에 시끌시끌해졌다.
집에선 글쓰는 일 외에 프랭크 커모드가 보내온 자신의 회고록 「Not Entitled」를 탐독하거나, 영국의 대표적인 詩 잡지 「PN Review」를 뒤적거리며 지나는 것이 그의 근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