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시 변두리 Idea Hotel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티칸 시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호텔이 로마시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버스로 아침 일찍 바티칸 시로 이동한다고 하는 것은 전쟁이나 다름 없었다.
출근버스의 정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근시간의 러시아워와 겹쳐 예약시간인 오전 08:00까지 바티칸 시 박물관 입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가 차츰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직장인들이 출근시간에 늦지않기위하여 아침 일찍 수도권이나 원거리에서 로마시로 대거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마다 차량이 지체로 정체가 되기 시작하더니 도심에 근접 해서는 마치 주차장을 방불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출근하는 차량들은 거의가 소형 이어서 그런대로 소통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인에게 권위나 품위를 과시하는 경향이 농후하여 중∙대형 차량을 선호하고 있는데 반해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실용성을 강조하여 소형차량을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과거 로마시대 건축이나 토목사업이 활발하게 설계되어 건조 되었던 것은 거의가 시민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로마시대의 실용적인 사고방식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탓인지 이탈리아에서는 신분이나 직업에 귀천이 없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여있었다.
또한 그들의 보편적 생활에서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마져도 소형차량이 거의 상용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품격이나 격식을 의식하지 않고 소탈하게 살아가려는 이탈리아인들의 실제적이고 실용 적인 사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집트 왕 파라오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
어느덧 바티칸 시국을 둘러싼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는 듯 성벽은 어둡고 스산하게 보였다.
성벽은 벽돌로 쌓은 것 같았는데 게라이트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게라이트는 화산재가 퇴적하여 형성된 암석으로 이미 로마시대 콜로세움 경기장과 판테온 등의 건물에 시멘트 대신 사용되었던 재료였다.
비잔틴시국 성벽 벽돌의 색깔이 본래 갈색 같았으나 이끼가 끼어 거무스름한 색깔로 변해가고 있었으며 곳곳이 헐려서 구멍이 뚫려 있는 곳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러한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성벽위에 노랑, 파랑, 빨간색 제복에 베레모를 쓰고 교황청을 지키는 근엄한 근위병이 경계를 하고 있었더라면 분위기가 훨씬 역동 적이고 산뜻 하였을 것이나 그러한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본래 성벽은 교황청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축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벽이 바티칸 시국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어야 할 테데도 곳곳이 헐려저있거나 잘려 나가있어 종교국가로서 베일에 감춰진 신성한 곳 이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교황청이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독립된 국가라고 하더라도 이탈리아 영토 내에 위치하여 있고, 국방이 이탈리아에 위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티칸 시국을 이탈리아에 개방하지 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버스는 계속 박물관쪽으로 이동하여 입구에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바티칸 시국의 외부는 오랜 역사에서 비껴간다고 할지라도 내부는 불가사의한 신성 감으로 가득하리라 생각하였다.
신비스럽고 베일에 싸인 바티칸 시국의 진면목은 어떤 모습 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에 이어 부활탄생으로 세계 기독교의 총본산이 되었던 바티칸 시국은 침묵을 지킨 채 말이 없었다.
신비스럽고 베일에 감쳐진 바티칸 시국은 이제 양파껍질처럼 한겹 두겹 벗겨지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해서 내가 추구하고 탐색 하려 하였던 목적이 달성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내가 그동안 의문시 하였던 가톨릭은 어떤 종교이며 순교자들이 예수의 보편적 사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죽음까지도 불사 하였던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이 지금까지 머리에서 떨쳐 버릴 수 없었는데 이런 것들을 이번 바티칸 시국 여행을 통해서 찾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버스가 거의 박물관 입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하차하였다.
박물관 입구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박물관 입구에서 북적거리고 있었던 이유는 각자가 추구하고 있었던 사상이나 역사관을 찾아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람들이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해 입구 앞에 길게 늘어서고 있었고 주변은 많은 사람들로 장사진을치고 있어서 현재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하여 줄을 선다고 하더라도 하루가 더 소요될 것 같았다.
그래서 현지 가이드가 필요했던 것 같았다.
현지 가이드가 일찌감치 표를 예매하여 박물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일행이 입구에 도착하자 곧바로 일행을 인솔하여 바티칸 시국으로 입국할 수 있게 하였다.
현지 가이드가 제대로 빛을 발휘한 것이다.
바티칸 시국을 바티칸시 라고도 한다.
바티칸 시국은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성베드로 대성당과 교황궁, 여름 휴장지를 포함하여 5개소, 그외 이탈리아에 흩어져 있는 일부 23개소를 영토로 하고 있다.
여기에 전세계 가톨릭교회와 교구를 통괄하는 가톨릭 교회 최고 통치기관인 교황청이 있었다.
하나의 국가이지만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되어 있었고 소수의 스위스 근위병이 교황청을 경계하고 있었다.
바티칸 이란 국명은 바티칸 언덕을 뜻하는 라틴어 몬스 바티카누스에서 유래되었다.
바티칸 시국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은 베드로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진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서기 324년 처음 건물이 들어선 이후 약 1200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성당이 매우 낡아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로 하여금 성 베드로 대성당을 다시 새롭게 건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도나토 브라만테는 성당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지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후 여러 인물들이 성당 보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상갈로, 지오콘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당대 최고의 장인들 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미켈란젤로였다.
지금의 대성당은 대부분 미켈란젤로의 설계안을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각 공간마다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었으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상징하는 것은 높이 132.5m, 지름 42m인 돔이라 할 수 있었다.
이 돔 역시 미켈란젤로가 만든 것으로, 매우 역동 적이고 화려하게 보였다.
돔의 중앙 천장은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찬란하게 베드로 대성당 내부를 비치고 있었다.
햇빛 속에서 아름다운 비단 천을 두른 천사들의 율동을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천사가 햇빛을 타고 하강하는 모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환상적인 베드로 대성당 내부의 분위기는 마치 내가 천국에 와있다는 느낌을 들게 하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는 베드로 광장이 있었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과 콘칠리아치오네 대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1666년 완성된 부채꼴 모양의 성 베드로 광장은 베르니니가 설계한 광장이다.
광장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회랑은 284개나 되는 기둥이 받치고 있었으며 기둥 위에는 140개의 가톨릭 성인 조각이 놓여 있었다.
성인 조각은 마치 순간에 정지된 동작처럼 장식되어 있어서 슬로우 모션을 보는 것같았다.
분수대에서 베드로 대성당과 성인 조각을 바라보는 느낌은 매우 숙연하고 엄숙하여 종교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이렇게 눈부시고 황홀 할 정도로 신비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예술가와 조각가의 피나는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도 많은 것들이 감명을 주곤 하였는데 특히 광장 가운데 있는 이집트 오벨리스크였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여러 신들 중에서 가장 숭배 하였던 태양신 라(Ra)를 상징하는 기념탑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주요 장소에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태양신을 모셨는데 이집트를 침략 하였던 다른 나라들이 그곳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가져가 자신들의 도시에 세워 놓곤 하였다.
성 베드로광장에 우뚝 솟아있는 오벨리스크도 이집트에서 약탈해 로마로 옮긴 것이다.
성베드로 광장 앞에 서있었던 오벨리스크가 이집트에서 고대 로마제국으로 옮겨진 것은 3대 황제 였던 칼리굴라 때였다.
로마시의 대 화재 사건을 저질러놓고도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 들에게 전가시켜 기독교인들을 탄압 하였던 네로가 로마제국 당시 제5대 황제였으니 고대 로마의 기독교 탄압 역사를 지켜본 유물은 오벨리스크일 것 같았다.
그러하니 이 오벨리스크가 가톨릭교도 들에게 숭배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당연 하리라 여겨졌다.
성 베드로 광장에 세워졌던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전 25~24세기 무렵 이집트에서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어 헬리오 폴리스에 세워 놓았던 높이 25.5m의 기념탑이었다.
오벨리스크를 로마로 옮겨와 세워 놓았던 근처에 본래 콜로세움이 위치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네로가 전차경기를 보며 열광하였다.
또 베드로가 네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로마시 외곽으로 피신갔다가 예수의 환상을 목격하고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외치며 다시 로마로 돌아와 바티칸 언덕에서 박해를 받아 순교 하였다.
그 언덕에 세워진 성당이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오벨리스크 양쪽으로는 마데르나와 폰타나가 만든 2개의 분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분수에서 바라본 성 베드로 광장은 바닥 넓이만 해도 1만 5000㎡에 달하며 6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큰 광장이었다.
실제로 교황이 연설하는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도서관 발코니로, 이곳에 서서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곤 하였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신자들에게 강론을 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성 베드로 광장은 가톨릭 신자들 에게는 그 어떤 곳보다도 신성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성 베드로성당과 광장, 회랑의 성자상, 분수대, 오벨리스크 등 외부의 모습 모두 아름답고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뭐니뭐니해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곳은 박물관 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바티칸 시국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장소 중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시국을 대표하는 바티칸 궁전이었다.
바티칸 궁전이 한 때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겨진 적이 있었다.
이것을 유대가 신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하여 유다 인들이 인질로 붙잡혀 간 바빌론 유수에 비유하여 아비뇽유수라고 도 하였다.
이때부터 유럽은 왕권이 점점 신장되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왕 필리프 4세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싸워 이긴 것이다.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왕의 강력한 간섭으로 로마로 들어가지 못한 채 70여년간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체류하게 되었다.
바티칸 궁전은 교황이 아비뇽에서 로마로 다시 돌아온 뒤 교황이 살았던 곳이다.
바티칸 궁전은 성 베드로 대성당 북쪽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중심으로 라파엘로의 방, 바티칸 박물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티칸 궁전은 다양한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한 번에 완성한 것이 아니라 수 차례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바티칸 궁전의 중심은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설계한 사람은 조반니 데 도르티라는 건축가였으나 내부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당대의 최고 예술가 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시스티나 예배당이 완공된 뒤 조반니 탑과 로울데스 동굴, 신학교, 교황 저택, 도서관, 문서 보관소 등 크고 작은 여러 건물이 들어서면서 바티칸 궁전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바티칸 궁전은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바티칸 박물관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 대영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곳으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 최고 작가들의 작품이 가득한 곳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종교화와 미술품으로 가득한 바티칸 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이나 예술품을 모아 놓은 공간이 아니라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서양 미술을 이끌어 나갔던 모체였다.
바티칸 박물관이 프랑스 루브르와 대영 박물관과 다른 점이 있다면 두 박물관이 유물과 예술품을 전시하는 곳인데 비해 바티칸 박물관은 그 자체가 거대한 예술품 이자 박물관이라는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걷다보면 미켈란젤로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천장 화”를 비롯하여 당대 최고 작가들이 합동으로 그려 놓은 벽화를 볼 수 있다.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하여 특별히 고안해 낸 발판을 이용해서 “천장 화”를 그렸다.
이 “천장 화”는 33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대작으로 1508년 작업을 시작하여 4년이 지난 1512년에 완성되었다.
구약과 신약 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세상이 창조되는 순간부터 인간이 타락해 가는 전과정을 화폭에 담은 것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을 빛나게 하는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또 시스티나 예배당 중앙 벽에는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6명의 화가 작품이 그려져 있었는데 요르단강 가에서 세례받는 예수로부터 모세의 최후까지 그린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 주고 있었다.
또한 가장 유명한 그림을 들어본다면 〈최후의 심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벽화 즉 프레스코였다.
미켈란젤로가 혼자서 7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제작한 작품으로 죽은 영혼들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그림은 역동성과 감성적인 면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박물관 밖의 입관판에 붙여진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어낙 그림에 문외안이었던 나에게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그 설명이 끝나고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들어갔을 때서야 비로서 입을 벌리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천장 화”와 “최후의 심판”이라는 벽화였다.
중국 윈난성 용산 용문석굴을 탐방한 적이 있었다.
산의 높이가 거의 1,000m에 가까워서 곤돌라를 타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야 하였다.
산 정상에서 전방에 펼쳐져 있는 곤명 호와 희미하게 보이는 쿤밍시를 내려다본 광경은 그야말로 환상 적이었다.
다시 동굴을 통해서 원점으로 하산해야 하여서 잠시 동굴에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았더니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걷고 있었던 용문 석굴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 아니라 인간이 정을 들고 뚫은 인위적인 동굴이었다.
원래 산 정상에서 부터 하산하는 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석공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동굴을 파기로 마음 먹었는데 동굴을 파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위치였다.
그러나 오늘날 등반가처럼 로프를 자신의 허리에 묶은 다음 산 정상에서 절벽 아래로 300m 정도 내려와 거기서 부터 정을 들고 굴을 뚫기 시작하였다.
돌 가루가 바람에 날려 입 속과 코속, 눈으로 들어가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뜨지 않은 상태에서 동굴을 뚫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밖 없었다.
그러나 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동굴을 뚫기 시작하였다.
앞을 볼 수 없었던 석공은 망치로 정을 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을 치기도 하였다.
손바닥과 손등의 아픔도 고통을 주었으나 더 힘든 고통은 천장을 올려다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윈난성 용문석굴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3대가 72년이나 지속 하였던 것과 미켈란젤로가 천장을 바라보며 붓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은 끈기와 집념이 없으면 달성할 수 없는 것 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혼을 작품에 담아 넣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조각가 이자 예술가라 생각이 들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의지로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 작품이 “천장 화”였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고안한 의자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천장을 바라보아도 신과 인간을 접목시킬 수 있는 구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수십번의 노력으로 습작을 그렸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찢어버리곤 한 것이 지금까지 손가락으로 셀 수가 없었다.
때로는 미친듯이 울부짖기도 하고 며칠동안이나 길거리를 걸으며 방황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장 화” 라는 작품이 그 자신이 생각한 의도대로 쉽게 그려 지지는 않았다.
수십번의 연습과 집념으로 작품을 완성 시켰을 때는 몸이 지쳐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몇조각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난 후 다시 작업장으로 걸어갔다.
자신이 그린 “천장 화”를 보고 또 보았다.
그러나 더이상 붓을 댈 곳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붓을 내려놓고 만 것이다.
이 것이 바로 “천장 화”였다.
유사이래 이러한 작품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니 그는 역시 천재화가 였던 것이다.
볼로냐에서 율리우스 2세의 동상을 만들고 있을 때, 그와 그의 조수 세사람을 위하여 제공된 침대는 하나 뿐이었다.
그때도 옷을 갈아입지 않고 장화를 신은 채 잠을 잤기 때문에 한 때 다리가 부어 장화를 칼로 찢어야 만 했던 적이 있었다.
무리하게 장화를 빼면 다리의 살점까지 찢어져 함께 묻어나올 것 같아서 였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거기에 미쳐버리곤 하였다.
어찌 미치지 않고서야 “천장 화”와 같은 명작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인가?
미켈란젤로는 1564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제작하고 있었다.
여기서 피에타는 라틴어로 베드로를 말한다.
만년에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달려가기도 했고 하인의 등에 업혀 가기도 하였다.
병치레를 하면서도 끼니를 거르고 일에만 몰두 했다.
이런 고통의 삶 속에서도 그가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집착과 초인적인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예술가의 울타리 안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였으며 울타리 밖을 내다 볼 줄도 몰랐다.
오로지 예술 만을 사랑했을 뿐 사랑하는 여인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과 슬픔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켜 사람들에게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여기서 큰 교훈을 얻었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과 인간 잠재 가능성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예술을 감상하고 한 인간이 완성되는 과정을 배웠다.
그가 비록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았을 지언정 그는 세계적인 화가이자 건축가이며 천재였다.
그의 이러한 천재적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은 지구 상에서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좀더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배웠으면 하는 욕심은 분수에 넘치는 것 같아서 바티칸 시를 뒤로 하고 고대 로마시대 유적지인 포로로마나로 이동하였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 중에서 나를 가장 긴장시킨 것은 콜로세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등재되어 있어서 학생들에게 지도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문화 유산에 비해 훨씬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바티칸 시국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차창밖을 바라보니 고대 로마시대 유적지가 눈에 띄었다.
바로 이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연신 카메라 샷터를 눌러댔다.
버스가 도로 코너를 돌자 멀리서 고대 로마시대 격투장인 콜로세움이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삽화를 여기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터키 에페수수에서 목격한 원형극장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 시에 있는 콜로세움 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콜로세움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서기 7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인 80년에 완성한 타원형의 대 격투장 이었다.
둘레 길이는 527m이며 외벽 높이 48m의 4층 건물로 5만 명이 넘는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외부는 각각 다른 양식의 기둥을 세워 놓고 있었는데 1층은 도리스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이었다.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이나 맹수들 과의 싸움을 시민들에게 구경시켜줌으로서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경기를 치룰 검투 사나 맹수가 있는 곳은 지하 12m 깊이의 공간으로 이들을 등장시킬 때엔 수동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끌어 올렸으며, 4층 천장에 베라리움이라는 천을 덮어서 햇빛을 가리기도 했다.
이외에도 계단과 독립 공간인 갈레리아가 있었다.
갈레리아는 이집트산 콩, 음료수 등을 파는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조우했다.
친구를 만나 와인을 마시며 그간 소식을 듣기도 하고 투기를 위한 정보를 교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풀지 못한 의문 들로 가득차 있다.
이집트 카이로 남서쪽 기자 유적지에 고 왕조시대 왕의 무덤인 피라미드가 여럿 있다.
그 피라미드 중에서 이집트 고 왕국 제4 왕조 2대 왕인 파라오 쿠푸 왕의 무덤이 가장 유명하다.
피라미드는 높이가 152m 이고 바위벽돌 한개의 무게가 2.5톤이며 이러한 벽돌 230만개를 쌓아서 만들어졌다.
이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스핑크스와 신전, 무덤 등 다양한 유적이 모여 있다.
그래서 누가 무어라고 해도 이곳이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피라미드도 거대 했지만 콜로세움 또한 더욱 장관이었다.
갑자기 E.H.카의 저서인 What Is History?가 생각났다.
What Is History?란 E.H.카의 저서이다.
196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역사학 강좌에서 카가 강의한 부분의 원고를 바탕으로 쓰인 것이다.
역사란 사실로 서의 역사와 기록으로 서의 역사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의 정의대로라면 사실로 서의 역사를 강조하여 역사란 객관성이 생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혹자는 역사를 기록으로 서의 역사 라고도 하여 다분히 기록자의 주관이 내포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나 사실을 역사라 할 수 있고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사실을 기록하는 사람까지도 역사로 보고 있다.
어디까지나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해야하며 비판적인 안목으로 사건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해 전에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대표적 장편소설인 쿠오 바디스를 읽은 적이 있었고 영화로도 감상하였다.
소설은 1896년에 발표된 소설로 제목은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 까’이다.
사도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탈출할 때 로마를 떠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한 말이다. 이로 인해 베드로는 로마로 다시 돌아가 십자가에 꺼꾸로 못박힌 채 죽게되었다.
이것은 폭군 네로 때의 이야기다.
서기 1세기 무렵 로마의 다신교 적 고대 세계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투쟁이라는 흥미있는 역사적 대 사건이 배경이었다.
광기와 음란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네로는 그리스도의 신앙을 전파하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박해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청년 귀족 비니키우스는 열렬한 그리스도 신자인 소녀 리기아를 사랑했다.
네로황제의 총애를 받아 로마 귀족의 이상형이라고 할 페트로니우스는 조카 비니키우스를 위하여 네로에게 더욱 밀착 하려 하였다.
네로는 몰래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그 죄를 그리스도교도에게 뒤집어 씌우려 하였다.
이때 리기아도 붙잡혀 결박되어 물소에게 죽게 되려는 순간 충복 우르수스가 괴력으로 물소를 죽이자 감동한 관중들의 간청으로 리기아는 목숨을 구했다.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하고 페트로니우스도 죽음으로 몰리게 되었지만 군대의 반란이 일어나 모든 신하에게 버림을 받은 네로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 소설은 정의와 진리는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을 호소하여 박해받는 폴란드 민족의 운명에 희망을 불지핀 애국적 역사소설이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콜로세움을 돌아보고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수많은 가톨릭 교도들이 단지 기독교를 숭배한다는 이유로 밧줄로 묶인 채 포박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맹수에 의해 신체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저 태연하게 기도만 하였다.
어떠한 연유에서 였을까?
답답하고 두렵기만 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믿음이란 알 수 없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콜로세움은 2,000년이란 시공간을 떠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콜로세움 내부의 우람하고 웅장한 광경을 보고 또 한번 넋을 잃고 말았다.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맹수와 사투를 벌이는 노예 검투사의 거친 숨소리가 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고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어가는 기독교교도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콜로세움 안을 진동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처참하고 참혹한 모습이 생생하게 연상되고 있었다.
물소를 죽인 검투사 우르수스의 괴력에 놀란 관중은 떠나갈듯 함성을 지르고 옆구리에 칼이 꽂힌 물소는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막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경기가 진행 되려는듯 진행 요원들이 연단 아래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검투사와 맹수가 목숨을 걸고 한판 경기를 진행하려 하고 있었다.
드디어 검투사가 연단아래로 걸어나와 양어깨를 하늘로 쳐들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황제를 비롯하여 황족과 귀족들이 일어선 채 와인을 들고 답례를 하였다.
검투사는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 출신 노예 신분으로 로마 남쪽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기관에서 오랫동안 전문적인 격투훈련은 받았다.
사자 또한 격투를 위하여 며칠동안 굶겼기때문에 배가 고파 아주 예민하였다.
진행요원이 지하 우리에서 사자를 연단 아래로 몰아 내자 사자는 앞발톱으로 땅을 파면서 포효하더니 코를 연신 벌름거리기 시작하였다.
지상 최고의 싸움인 검투사와 사자의 혈투가 시작하려하고 있었다.
관중은 모두 손에 땀을 쥔 채 검투사와 사자의 일전에 초점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자는 다시 날카로운 앞발톱을 높이 쳐들고 울부지짖더니 검투사를 응시하고 있었으며 검투사 또한 사자를 불꽃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 검투사와 모든 먹이사슬의 최상위인 사자가 일전을 앞두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 탐색에 집중하고 있었다.
순간 사자의 눈에 섬광이 일더니 순식간에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검투사를 공격한 것이다.
그것은 단 일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이었다.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이 검투사의 왼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빨간 선혈이 줄줄 흐르고 있었으며 이에 놀란 검투사는 숨을 헐 떡 거리며 물같은 땀이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전은 사자의 승리였다.
다시 검투사와 사자는 제 2전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자가 공중으로 뛰어오르자 검투사는 전광 석화처럼 단검을 든 채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더니 사자의 왼쪽 눈을 순식간에 단검으로 그어버렸다.
왼쪽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사자는 행동반경이 줄어들어 주춤 거리기 시작하였다.
지상최대의 싸움꾼 검투사는 이러한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검투사가 사자를 제압한 것이다.
지금까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관중석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콜로세움 밖으로 퍼져났다.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사자는 종이 사자나 다름없었다.
마치 서커스 단원이 동물을 훈련 시키듯 요리조리 행동을 유도 하면서 마음껏 시간을 즐기더니 황제를 쳐다보며 어떻게 처리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는 눈짓을 넌지시 보내는 것 같았다.
황제가 일어서서 관중들에게 손을 들어올리자 원형경기장 안은 관중들의 함성으로 가득하였다.
황제가 죽이라는 손짓을 보내자 콜로세움 안은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도 콜로세움 이면의 어두운 곳에서는 은밀하게 투기 거래가 진행되고 있었다.
로마 인들이 세운 콜로세움은 본래 투기가 목적이었다.
로마인들은 경기장에 나가 벌거벗은 채 거칠게 투기에 몰두하는가 하면, 때로는 거리의 건달들과도 피투성이가 되게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로마 어디를 가나 도박과 같은 투기가 성행 하였다는 것은 중앙집권강화를 위한 의도도 있었으나 도박이 성행 함으로서 말기 현상으로 치닫는 결과를 초래 하기도 하였다.
검투사는 최하층 신분인 노예 이었기때문에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박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던 로마 인들에게는 검투사와 사자가 격투하다가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검투사인 노예를 사자와 같은 하찮은 동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격투의 결과는 사자가 죽고 검투사는 살아 났으나 운이 좋다면 검투사는 시민의 신분으로 상승 되었을 것이다.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이것 때문에 검투사는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로마로 잡혀온 포로들은 시장에서 노예로 팔려 나갔다.
팔리지 못한 노예들은 이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가 되어 싸워서 정해진 횟수만큼 승리를 하면 자유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유를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콜로세움은 608년 까지만 하여도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으나 중세 때는 군사적 요새지로 이용 되다가 그 이후 교회나 빌딩의 건축에 사용될 자제의 제공 터로 변해 버렸다.
서기 526년 게르만족의 일족이 로마에 쳐들어와 콜로세움을 훼손시킨 적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조상들이 당한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다른 목적은 석재를 연결한 구리를 약탈하기 위해서였다.
후에 로마의 귀족 명문 세도가 들에 의해 훼손된 것에 비하면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콜로세움이 간직하고 있는 슬픈 역사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박해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로마 곳곳에 있는 원형경기장에서 자행 되었던 가톨릭교 교도에 대한 박해는 콜로세움에서 계속 되었는데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 하면서 부터 중단되었다.포로 로마노를 뒤로하고 폴리대공의 궁전 정면에 있는 트레비 분수로 이동하였다.
분수의 도시로 알려진 로마의 분수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G.L.베르니니의 설계도 원안을 따랐다고 하는 N.살비 설계의 대표작으로, 1732년 착수하여 살비 사후인 1762년에 완성되었다.
개선문을 본뜬 벽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1쌍의 반인반수의 해신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상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었으며, 주위의 거암거석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이 연못을 등지고 서서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