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시열(宋時烈)이 안방준(安邦俊)선생에게 보낸 편지글
1787년 간행된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의『송자대전(宋子大全)』제27권에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1573~1654) 선생에게 보낸 6통의 편지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1640년, 1642년, 1648년, 1651년, 1653년, 1654년에 보낸 편지이다.
上安隱峯(은봉 안방준 선생께)이라는 6통의 편지를 연대순으로 살펴보자.
1. 경진년(1640) 윤정월 13일에 안은봉(安隱峯)에게 올림
주요 내용은 돌아가신 부친 송갑조(宋甲祚,1574∼1628)의 절친한 벗인 안방준(安邦俊,1573~1654)에게 부친의 언행 가운데 기록할 만한 것을 적어 보내 달라고 청하는 글. 이 무렵 송시열은 부친의 행장을 초안하고 있었다.
上安隱峯 邦俊○庚辰(1640)閏正月十三日 a_109_010c
時烈頓首再拜。侍生自幼講服文丈之盛德久矣。旣 而。得其所爲後栗先生抗義編讀之。又得所爲大學文字讀之。其中竊有未釋然者。而未獲灑掃之禮於門下。則無由啓發困蒙。而景仰之誠食息不置也。丁卯之春。先君子始得傾蓋於完山。契誼甚篤。旣歸亟稱德義之崇茂。論議之正大。不肖等嚮風之意。尤倍於昔時之萬萬也。曾未一年。先子背違。遲逾怨慕無所及焉。則思得侍先子之舊要。以寓羹墻之慕。而獲受薰陶之益者。誠不偶然也。第以屛伏深山。貧病苟活。未有宿舂之資。則無以得伸其微忱。而一念至此。炳然如丹也。且緣失學無知。先子行誼。訖未能形諸 文字。玆者。始欲草修。而不肖無狀。兼且早孤。平生言行。百不都記。皇恐自悼。無地自容。竊念當時論議之際。必有一二可記者。幸乞錄示數字。以爲不朽之地。則不至於無徵而泯沒矣。感恩之意。宜如何報也。不勝區區祈懇之至。地遠跡阻。未有瞻拜之期。慕義馳情。日以勤止。敢因尺牘。以道寸愊。餘祝爲時保重加護裀席。以慰瞻仰。謹不備。
2. 임오년(1642) 9월 2일에 안은봉(安隱峯)에게 올림
주요 내용은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의 서원을 옥천(沃川)에 세우기 위해서 유생들과 논의하였으나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으니, 원근의 지원을 얻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유학의 영수(領袖)인 안방준(安邦俊)에게 주장(主張)이 되어줄 것을 청하는 글이다.
上安隱峯 壬午(1642)九月二日 a_109_011a
平生景仰。不翅飢渴。而孤露餘懷。馳慕尤深。卽惟天朗氣淸。德履休適。起居神相。侍生每思拔去。供灑掃 於門下。以扣緖餘。而親年已至喜懼。實非遠游之日。兼且貧病苟活。汩沒侵尋。近出猶難。況於宿舂之地哉。頃年嘗以書。專伻仰候於牛山。則適會杖屨遷就綾州。以致鄙忱未達。何恨如之。今者輒有一事。仰瀆威尊。以俟可否也。重峯趙先生晩居沃川近數十年矣。此地不可無書院。而世變多端。鄕議携貳。徒有不靖之爻象。頃緣方伯淸風公之直前擔負。一打正之。論議大定。而適値仁守來涖此邦。與一郡諸生謀建院宇。而第此時屈之日。財力難措。不免通告於兩湖。而但念必須遠近之所推服。儒巾之所領袖如尊丈 者爲之主張。然後多士響合矣。此非特侍生之意。此間士子之論。亦莫不皆然。故方擬專人仰告。適逢趙友進造門屛。敢此冒陳。想所樂聞。而不以僭汰爲罪矣。且以趙先生易名之命已下。諡狀之作。正不可緩也。伏念尊丈之揄揚盛德。盡在抗義之編。而其間亦豈無不敢盡者哉。並望掇拾遺漏。以爲編入之資。如何如何。自餘只祝爲時保重。以慰瞻仰。無緣望履。不勝馳爽。不備。
3. 무자년(1648) 6월 29일 안은봉(安隱峯)에게 올림
주요 내용은 안방준(安邦俊)이 자신에게 편지와 서문(序文)을 보내어 절실한 가르침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글이다. 충효전가설은 1648년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上安隱峯 戊子(1648)六月二十九日 a_109_011c
昔年委進門下。獲償平生積慕。然彼時行色甚忙。未 得穩承淸誨。茹恨在心。蓋至今而未沫也。前月晦間。務安宰褫到。今春所惠書及序文一篇。濯手莊誦。蓋至於墨渝紙弊。而不敢釋也。序未致意。尤警切精篤。敎生雖萬萬無似。敢不終身佩服。以不負君子以德之愛也。噫。先人平日。不知不肖而期待甚重。誨責甚篤。然質旣卑駁。行又不力。尤咎日多。悔吝山積。甘自棄於小人之歸。倘或因此改圖。果有進益。則文丈眞不負先人。而先人取友之端。於此而益驗矣。未知此志終不渝也否。信后暑雨蒸鬱。未審靜裏起居神相萬福否。傾遡如渴。敎生藏縮窮鄕。菽水屢絶。雖吾道 之固應如此。然人子之情。不能不傷歎也。相去絶遠。未涯承際。實覺悵恨。伏惟蓍龜珍藏。歲久益神。更祝加護晩景。以副遠誠。
(번역문)
여러 해 전에 문하(門下)에 나아가서 평소에 늘 사모하던 마음을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형편이 매우 바쁜 참이어서 훌륭하신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기에 그 한스러운 마음이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습니다. 지난달 그믐쯤에 무안 현감(務安縣監 유계(兪棨))이 체직되어 오는 길에 어르신께서 올봄에 저에게 주신 편지와 서문(序文) 한 편을 전해 주기에, 손을 씻고서 정중하게 읽어 보았는데, 거의 먹이 흐려지고 종이가 해지도록 감히 손에서 놓지 못하였습니다. 서문의 끝에 뜻을 충분히 밝혀 주신 대문은 경계됨이 더욱 간절하고도 정밀하고 독실하게 되었으니, 교생(敎生)이 비록 천만번 불초한 사람이지만 감히 종신토록 명심하여 덕(德)으로 사랑해 주신 군자에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제 선인(先人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평소에 불초한 저를 알아보지 못하여 매우 크게 기대하시고 훈계하여 책임지우기를 매우 돈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자질이 이미 낮고 박잡한 데다가 올바른 행동 하기도 힘쓰지 않아 허물이 날로 많아지고 후회와 한탄이 산처럼 쌓이므로 자포자기하여 소인이 되는 것도 달게 여겨 왔었습니다. 만일에 이렇게 해 주신 것으로 하여 제가 생각을 바꾸어 과연 진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어르신께서는 참으로 제 선인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 되고, 제 선인께서 바르게 벗을 사귀었음도 여기서 더욱 증험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뜻이 끝내 흐려지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서신(書信)을 받은 이후 여름 장마로 찌는 듯이 무더운데, 정양(靜養)하시는 중의 기거(起居)가 신명의 도움을 받아 만복(萬福)하신지 궁금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참으로 간절합니다. 교생은 궁벽한 시골에서 지내는데 숙수(菽水 변변치 못한 음식을 뜻함)도 자주 떨어지곤 합니다. 우리의 도(道)는 생활이 본디 이러한 것이기는 하지만, 자식된 사람의 심정으로서는 상심되고 한탄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리가 서로 동떨어져 뵐 날을 헤아릴 수 없는지라 진실로 섭섭하고 한스럽습니다. 삼가 시귀(蓍龜 훌륭한 계책을 뜻함)를 고이고이 간직하시어 세월이 오래될수록 더욱 신기로워지게 하시기 바라며, 만년의 옥체를 잘 보호하시어 먼 데 있는 사람의 성의에 부응해 주시기를 거듭 빕니다. 忠孝傳家說。贈宋持平英甫序。 080_453c 余少時。聞宋奉事 龜壽 與其弟圭庵先生。忠孝俱至。幼年喪母。任情過哀。所伏苫席。因淚必腐。燕巢廬幕。生雛皆白。人以爲誠孝所感。後圭庵立朝。名動一時。及仁廟卽位。圭庵不量時勢。欲做三代事業。群奸側目。竟得重罪。壁書之變。李芑會賓廳。錄罪人名。點其當死者。至圭庵。芑大點之。鄭順朋曰。此子可惜。芑不聽殺之。後芑謂人曰。宋某豈不是善人。但行大事。不可拘小仁。譬如作室。欲修基址。則雖有奇花異草。不可不芟刈也。李判書潤慶。與其弟議政公。同有時望。仁廟末。判書公子中悅。與其友李輝。有私語犯時忌。及乙巳難作。中悅欲以輝言告變自明。稟于判書公。公曰。身死雖可惜。朋友豈忍背乎。中悅問于議政公。公曰。不可爲朋友而自就死地也。中悅乃自告于朝。而亦不免死。乙卯倭變。判書公尹全州。議政公以都元帥。鎭羅州。貽書于判書公曰。賊鋒甚銳。願兄勿進兵少避。判書公答曰。吾受國厚恩。當以死報。遂以兵赴靈巖。助戰得捷云。嗚呼。彼宋,李兩家忠孝大節。雖在千百載之上。人無不感奮興起。況近代乎。生也最晩。旣不得登門覿德。則景慕風義。徒切山仰。思識其子孫。屛伏遐荒。聞見未及。曩在癸丑年間。余寓居洛下時。有宋邦祚永叔者。登第筮仕。以行義爲儕輩所推許。余問其先世於人。則宋,李兩家。是永叔之內外祖也。余私喜幸自語。平生宿願。庶幾可償。一日。遇永叔於隣舍。聆其音聲。接其辭氣。非悅草戰豺之類。而宜其爲忠孝家子孫也。甲寅冬。余搬家南下。杜門牛山深谷。自此京鄕隔絶。夢寐不到。永叔之卒於西塞也。經數歲。因人聞計。痛傷特甚。以爲永叔旣不幸早世。雖有諸子。想未及成長矣。未知其昆弟幾人而亦有如永叔者乎。嗟嘆不已。最後。人有自京來者。語及廢論。謂余曰。去丁巳司馬榜。榜首傳會邪議。劫諸生上疏。請勿拜西宮。有一士子非徒不參兇疏。獨詣西宮。依例拜恩。人皆謂之堅剛不屈者。爭相稱譽。子其聞歟。余問其姓名。其人曰。姓名則不知。而居湖西者也。余曰。今世豈有斯人。此必傳之者誤也。然猶不忘于心。會趙江陰德安。偶至溪上。余問無恙外。不暇出一言。先以此事詰之。德安曰。此乃宋佐郞永叔之弟。而名某字某。號睡翁者也。因言睡翁其時擧措及平居言行。纖悉備具。余喟然歎曰。不有是兄。焉有是弟。加寶田杜氏數等。而宜其爲忠孝家子孫也。丙寅閏月。睡翁自沃川訪余於牛山。余時以事適在松山舊莊。睡翁留書曰。嘗以同時爲幸。而每有地遠之歎。不意今者進駐孔邇。竟値巧違。同志之一見。亦有數歟。然神交已久。豈以不面。情意有損也。遂悵然而去。余以此爲平生至恨。丁卯春。余領義兵至全州。睡翁以散官。亦來屬撫軍司幕下。余因與同處累日。未幾。行朝命罷義旅。余卽解兵而歸。睡翁拘於事勢。爲姑留計。客橐無糧資。余傾一行餘儲以贐之。握手揮涕而別。居無何。睡翁亦還家。臨行。寄書曰。國事罔極。言之痛哭。羞辱之極。萬古難雪。只恨吾死不早。以致此事。及耳徒憤慨無益。則欲決意入山。以終餘年。卽當還鄕。以卜藏身之地。然後擬進兄所。展此衷曲。而何可必也。明年戊辰夏四月。睡翁病歿。道途綿遠。邀(邀作邈)不聞知。庚午冬。德安書以報之。余爲位而哭。哭之長慟。以爲睡翁眞趙嘉之流也。噫。永叔早世。睡翁又逝。天何奪善人至於此耶。天意未可知也。雖然。忠孝家子孫。豈止於斯二人乎。當必有繼之者。尋常言語間。每向人說不置。後永叔子時瑩(瑩作榮)。以主簿微官。丙子之變。入江都。同仙源金相公死節。今竝享忠烈祠。睡翁第三胤時烈英甫。以學行爲世名儒。望重朝野。古所謂靑成藍藍謝靑者。此也。忠孝家子孫。久而愈顯。雖四代翟氏。無以過矣。英甫以余爲睡翁知己。上年季冬。命駕來訪。相對悲歡。破涕爲笑。英甫因請余曰。吾先子知己莫如公。願記一言。以爲家傳。余感其至誠。不敢以不文辭。第其言行遺蹟。已載於諸公記事。而淸陰金相公所撰墓碣銘。尤爲有道不愧之文。則以余犬吠驢鳴。其如玉上加泥。取人譏侮何。雖然。越千里來辱之意。不可不報塞。聊書所懷如右。以答其請。又以一說繼之於後。惟英甫察之。英甫其時行色忙遽。不得信宿而去。雖欲贈言。尙可得乎。只以先賢之出處可疑。近世師友間晚節之未盡者。爲英甫略及之。英甫其亦記憶乎否。英甫得之於家庭。質之於先覺。學博而行全。識高而見明。其於出處大節。不待人言而講之熟矣。余何敢容喙於其間乎。顧余年逾七旬。去入纔五。此日之別。卽是永訣。歸見睡翁。當在朝夕。睡翁倘問贈吾兒何言云。則余將無以爲辭。僭易及此。未知英甫以爲何如。詩曰。風雨如晦。鷄鳴不已。吾英甫勉之哉。 (국역은봉전서 번역문) "충효전가설"을 지평 송영보(우암 송시열)에게 주면서 쓴 서문 (忠孝傳家說 贈宋持平英甫序) 나는 젊었을 때 봉사(奉事) 송귀수(宋龜壽)와 그의 아우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충효(忠孝)가 모두 지극했다고 들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모정에 사무쳐 몹시 슬퍼하여 깔았던 거적자리가 눈물로 썩을 정도였고, 제비가 여막(廬幕)에 둥지를 틀었는데 낳은 새끼가 모두 희니, 사람들은 정성스런 효성에 감응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후에 규암은 조정에 나아가 한때 명성을 드날렸다.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규암은 시세(時勢)를 가리지 않고 삼대(三代)의 사업을 이루려고 했는데, 간신배가 이를 시기하여 결국 죄를 얻게 되었다. 벽서(壁書)의 변[명종2년(1547) 9월에 발생한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 을사사화의 한 여파로 정언각(鄭彦慤)이 발견하여 임금에게 올린 벽서에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니, 국가가 망하는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권신(權臣) 윤인경(尹仁鏡), 이기(李芑), 정순봉(鄭順朋) 등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죄인의 성명을 거짓으로 적어 올려 봉성군(鳳成君) 완(岏)과 송인수(宋麟壽) 등은 사사되고, 이언적(李彦迪)과 유희춘(柳希春) 등은 유배되었다.]이 일어나 이기(李芑)가 빈청[賓廳, 조선조 비변사(備)邊司)의 대신이나 당상관이 정기적으로 모여 회의하는 곳으로 궁중에 있었다.]에 모여 죄인의 이름을 기록하고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을 점찍었다. 규암에 이르러 이기가 점을 크게 찍으니 정순붕이 말하기를, ”송 아무개는 어찌 착한 사람(善人)이 아니겠는가? 다만 큰 일을 행하려면 조그만 인정에 구애 받을 수 없으니, 비유하면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다듬고자 한다면 비록 기화이초(奇花異草)가 있다 하더라도 베어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하였다. 판서 이윤경(李潤慶)은 그의 아우 의정공[議政公 이준경(李浚慶)]과 더불어 당시에 중망(重望)을 얻었다. 인종말기에 판서공의 아들 중열(中悅)이 그의 친구 이휘(李輝)와 더불어 사사로운 말을 나누다가 시기(時忌)를 범한 적이 있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중열은 이휘의 말을 고변하여 자신을 밝히려고 판서공에게 아뢰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네 자신이 죽는 것은 애석하다 하겠으나, 벗을 어찌 차마 배반하겠느냐?” 하였다. 중열이 의정공에게 물으니 공이 말하길, “벗을 위해서 스스로 사지로 들어갈 수는 없다.”하였다. 이에 중열이 스스로 조정에 고변하였으나 자신도 또한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을묘왜변 지난 계축년(광해군5, 1613) 무렵에 내가 낙하(落下)에서 살 때[서울 낙산(駱山) 아래 매계동(梅溪洞) 옛집에서 살았음] 송방조(宋邦祚) 영숙(永叔)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과거에 합격하여 처음 벼슬에 나아가 행의(行義)로 동류들의 추대를 받았다. 그와 그의 선세(先世)를 사람에게 물어보니 바로 송(宋) 이(李) 두 집안 영숙의 내-외조(內外祖)였다. 나도 몰래 기쁨에 겨워 스스로 ‘평생의 숙원이 이제 보상받나 보다’라고 말했다. 하루는 영숙을 이웃집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사기(辭氣)를 접하니 사욕을 탐하는 사나운 승냥이의 유가 아니라 충효를 숭상하는 집안의 자손이 될 만했다.
갑인년(광해군6, 1614) 겨울에 나는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문을 걸고 우산(牛山)의 깊은 계속에서 살았다. 이로부터 경향(京鄕) 간에 소식이 끊어져 꿈속에서라도 이르지 못했다. 영숙이 서쪽 변방에서 죽었으나 몇 해가 지나서야 사람들 편에 부음을 듣고 몹시 슬퍼하면서, 영숙이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져버렸으니 자손이 있다해도 아직 성장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형제가 몇 사람이며 또한 영숙과 같은 사람이 있는지를 몰라 탄식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찾아왔는데 말이 폐모론(廢母論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논의)에 이르자, 나에게 말하기를, “지난 정사년(광해군9, 1617) 사마(司馬)시험 합격자 중에 장원 급제한 사람이 간사한 논의에 견강부회하여 여러 유생들을 위협하고 소장을 올리게 했는데 ‘서궁(西宮)을 배알하지 말 것’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선비가 흉악한 상소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홀로 서궁에 나아가 관례대로 사은숙배하니, 사람들 모두가 ‘의지가 굳세어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하고 앞다투어 칭송하였습니다. 그대는 이 소식을 들어보았습니까?” 하였다. 내가 그의 성명을 물으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성명은 모르겠으나 호서(湖西)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오늘 같은 세상에 어찌 이러한 사람이 있겠는가? 이는 필시 잘못 전해진 것이리라.”하였으나, 오히려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그 때 강음(江陰) 조덕안(趙德安)이 우연히 계상(溪上, 은봉이 우산에서 살 때 거처한 집이 우산전사인데 전사 옆으로 시냇물이 흘렀다.)을 찾아왔다. 나는 별고 없는지를 묻고 다른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먼저 이 일을 힐문했다. 덕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곧 좌랑 송영숙(宋永叔)의 아우로 이름은 아무개요 자는 아무개요, 호는 수옹(睡翁)이란 자이네.” 하였다. 이어 수옹의 그 당시 행동거지와 평소의 언행을 상세하게 갖추어 말해 주었다. 나는 깊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런 형이 있지 않았다면 어찌 이 같은 아우가 있겠는가? 보전(寶田) 두씨(杜氏)[보전(寶田)은 송(宋)나라 두맹(杜孟)의 호. 휘종(徽宗) 때의 대신 채경(蔡京)이 원우(元祐)의 구신(舊臣)을 내쫓고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되살려 쓰면서 네 차례나 정승을 지내면서 국사를 마음대로 하자, 두맹은 태학(太學)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찍이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충효(忠孝)는 우리 집안의 보물이요, 경사(經史)는 우리 집안의 밭이다.“하였는데 이로 해서 보전 두씨라 불렀다.] 보다 몇 등급이나 뛰어나니 마땅히 충효를 숭상하는 집안의 자손이 될 만하다.” 하였다.
병인년(인조4년, 1626) 윤달에 수옹이 옥천(沃川)에서 우산으로 나를 찾아왔는데 때마침 일이 있어 송산(松山) 옛집에 있었다. 수옹은 “일찍이 한 시대 사람임을 다행으로 여겼으나 멀리 떨어져 있어 늘 탄식만 하였더니, 뜻밖에 요즘 머무르고 있는 곳이 매우 가깝건만 끝내 만남이 공교롭게 어긋나는구려. 동지를 한번 보는데도 또한 운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신교(神交 정신적인 교분)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어찌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여 정의(情意)에 손상이 있겠는가?”라는 글을 남기고 서글픈 마음을 가지고 돌아갔다. 나는 이를 평생의 지극한 한으로 여겼다.
정묘년(인조5, 1627) 봄에 나는 의병을 이끌고 전주에 이르렀다. 수옹(睡翁)도 산관(散官)으로 내려와 무군사(撫軍司)의 막하에 배속되었으므로 나는 여러 날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행조(行朝)에서 의병을 파할 것을 명하니 나는 곧장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왔다. 수옹은 사세(事勢)가 여의치 않아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전대 속에 양식이 없었으므로 나는 일행의 남은 양식을 털어 그에게 주면서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뿌리면서 헤어졌다. 이윽고 수옹도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길을 떠나면서 편지를 부쳐 말하기를, “국사가 망극한 지경에 이르니 말하려면 통곡이 앞서네. 이 망극한 치욕은 만고에 씻기 어려우니, 다만 내가 일찍 죽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을 한탄할 뿐이오. 안갓 분개함이 무익하면 입산을 결심하여 여생을 마칠 것일세. 곧 귀향하여 몸을 감출만한 곳을 잡은 뒤에 형이 거처하는 곳으로 달려가 속마음을 말하고자 하나 어찌 기필(期必)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듬해 무진년 여름 4월에 수옹이 병으로 죽었으나 길이 아득히 멀어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경오년(인조8, 1630) 겨울에 조덕안이 편지로 알려주었다. 나는 설위(設位)하고 곡하였으며 오랫동안 통곡하고 나서 “수옹은 참으로 조가(趙嘉)의 유이다.”라고 말했다. [조가(趙嘉) ; 동한(東漢)시대 장릉(長陵) 사람인 조기(趙岐)를 말함. 조기의 초명이 가(嘉)이다. 젊어서부터 경전에 밝았고 재예(才藝)가 있었다. 후에 중상시(中常侍) 당형(唐衡)에게 죄를 얻어 집안 식구와 종친들이 모구 피살되니, 조기는 성명을 숨기고 북해시(北海市)에서 떡을 팔면서 액둔가(戹屯歌)를 지었다. 당형이 죽자 비로소 세상에 나와 병주자사(幷州刺史)가 되었으나 당(黨)에 연루되어 면직되었고, 영제(靈帝) 초에는 당고(黨錮, 환관들이 학자 태학생들을 종신 금고에 처하여 벼슬길을 막아 버린 일)를 만나 10여 년을 고생했다. 헌제(獻帝) 때에 다시 태상(太常)에 발탁되었다. 저서에 맹자장구(孟子章句) 등이 있다.]
아! 영숙이 일찍 세상을 떳는데 수옹이 또 가니, 하늘이 어찌 선인(善人)을 빼앗아 감이 여기에 이르렀는가? 하늘의 뜻을 알수가 없다. 비록 그렇지만 충효를 숭상하는 집안의 자손이 어찌 이 두 사람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그들을 잇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보통 말하는 사이에서도 항상 사람들을 대하여 말하곤 하였다.
4. 신묘년(1651) 8월 15일에 안은봉(安隱峯)에게 올림
주요 내용은 가르침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안부를 전함.
去歲外弟金灦。承致手書且傳所聞之緖餘。極知文丈之愛我厚期我深。銘感在心。不能名喩。厥後。疾病沈痼。朝夕待盡。且無的便。迄稽拜復。尋常罪歎。曾未自喩也。卽日旱暵未委。文丈尊座。履用康毖。杖屨休健否。區區瞻溯無日不勤。仍念衛武蘧瑗篤實之功。想默契於閒靜之地。而未能供灑掃而請問。則其爲 小人之歸。烏得免哉。以此愧訟。未嘗不發汗沾衣也。第於前書之敎。或未有釋然於心者。亟欲拜稟一一請誨而褫便。恐有未盡其愚者。玆復呑縮。以俟後日。耑人奉質也。侍生奉親窮居。菽水粗遣。而自去年夏間。重患腹脹。付身醫藥。一味放倒。舊學荒廢。只得無聞而死也。適有興陽便。力疾亟作此。以冀早晩登徹耳。自餘只祝爲道保重。以慰仰止。不備。
5. 계사년(1653) 12월 12일 안은봉(安隱峯)에게 올림
주요 내용은 이 무렵 신면(申冕,1607~1652)의 무리가 안방준(安邦俊)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낸 편지를 초록해 서로 전하여 읽으면서 송시열의 출처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들은 송시열이 안방준에게 자신과 스승인 김상헌(金尙憲) ․ 김집(金集)의 출처에 대해 해명하는 글. 먼저 자신은 복수설치(復讎雪恥)의 춘추의리에 근거하여 효종을 주대(奏對)하기를 청했으나 즉시 인견(引見)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상소를 올려 물러난 것일 뿐이며, 이후 인산(因山, 왕실의 장례)을 마친 후 효종을 인견하였을 때에 복수의 설에 대해 은미하게 허락하는 듯하다가 정작 실행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지체없이 귀향하였을 뿐이라고 해명함. 또한 자신의 이러한 출처로 인해 김상헌․김집까지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함.
上安隱峯 癸巳(1653)十二月十二日 a_109_012b
卽日陽德已昭。春令將申。伏惟閒居味道起居萬福。衛武,蘧玉九十七十。功益進德益修。伏想文丈不以 衰老自畫於用力。則其所造詣何可量哉。曩在庚寅。有人自京來。傳申冕輩錄得某丈與君書。相與傳誦以爲至論。侍生趣語曰。誠有是哉。亟因人求於京中。則只錄別紙以來。而原書終不得見焉。厥後。外弟金灦自門下錄一本以歸。雖與自京來者詳略不同。然其大致無異也。累日潛玩。有以見大君子愛人以道。而高明之見。出尋常萬萬也。不勝感鐫欽歎之至。第其中有一二未相悉者。私竊以爲此非面承提誨彼此傾倒。則不足以講究同異。以求一定之論也。萬一疾病少間。則當再進門墻。供灑掃而從容請敎。故中 間因興陽全守便。先以書布達此意。未知得免浮沈否。今者舊疾益痼。筋力益耗。無復有四方之志。則此計恐不得遂。而遂成千古之恨。故玆敢專人仰候鼎裀。而兼以書替質悃愊。伏乞下敎也。孔子之作春秋也。大義數十而尊周最大。朱子初見孝宗。罄陳所學。而討復爲先。此義一晦。則三綱淪九法斁。中國入於夷狄。人類化爲禽獸矣。士君子不幸而生乎此等時節。則其出處去就。宜有所在。而不敢苟焉。頃歲丁丑之禍。皇朝淪沒之變。思之腸裂。不忍復言。爲臣子者。痛憤怨疾。沫血飮泣。以盡死於復讎雪恥之義。自 是天理人情之不可已者。而當是時。一有以孔朱之義出於口。則吐舌掉頭而不敢聞。至或挾彼勢以要吾君者有之。識者之寒心久矣。故雖自知不足有無於世。而斂跡空山。與世長辭。此則函丈之所嘗知而奬許之者也。及至聖上臨御。天地一新。蓋自初潛睿志卓然。以爲漢武優於文帝者。以其有復平城之羞也。則其自任之意。已可見矣。逮其被召入臨。猥蒙禮遇。不許退歸。狂妄之意以爲虛受恩禮。不若一罄所懷。幸有以當上心。則庶有世道萬一之補矣。然則一番妄動。不爲無名矣。遂敢請對。而不得進 焉。則進退維谷。計無所出。遂以一疏告退矣。至遣承旨敦諭。則眷意隆重。迥出千古矣。然一日之間。旣出還入。有關廉恥。故狷介之性。終不能回。到今思之。罪當萬死。第其素心炳然如丹。終欲一暴於明主之前。故復上一疏於中路。略陳孔,朱之義矣。及其歸家。伏承別諭及疏批。天語丁寧。可泣鬼神。而又敎曰。疏中引而不發者。更須從容盡言之。適丁大行啓殯之日。召旨又下。愚意以爲因此上去。卒罄未盡之懷。則犬馬之誠。庶幾少伸矣。乃於因山之後。以一疏竭其愚衷。則卽於便殿引見。酬酢如響。神 采灌輸。至於討復之說。則尤示微意。當此之時。聖意所在。大可見矣。然做時不似說時。人心不如我心。況此鄙陋。寧可遲留。自取狼狽哉。疏入翌日。卽向歸途。館學章甫疏請勉留。而亦終於退歸。區區去就。雖不足言。其終始則不過如此。然每竊私謂如此狼狽。亦文丈有以致之也何也。先儒以爲顏子在陋巷。簞瓢自守者。以世有孔子。明先王之道以敎於天下也。若無孔子。則顏子必不但已。向若文丈以道自任。前後疏章。進陳孔子,朱子之大訓大法。則侍生豈敢以眇然醜劣。自取僭踰之罪哉。然旣陳此義於吾君。則 雖滅死。萬萬無恨矣。至因侍生之不肖。並疵淸陰,愼齋二老。則有不然者。聖人之訓。宜莫如大學。而大學之道。不過曰明德新民而已。不能自修。而急於時務者固不可。若一於自守而遭可爲之時。長往不返者。亦非大中之道矣。彼時二老所遭。可謂千載一時矣。値可爲之會。遇有爲之君。而以事之難易。而縮手傍觀。爲自暇自逸之計。則亦私意計較之發。而非仁者大公之心也。故二老以至公血誠。自任甚重。密扶大義。主張淸議。收拾士類。黜退凶邪。數月之內。風采頓異。倘靡兇徒結外援以爲斬伐之計。則有爲之兆二 三分成矣。若曰。不知時勢而率爾擔當。則有不然者。古人有言曰。爲之在我者。當如是耳。若其成敗。則聖人亦不能必。吾何苟哉。二老豈無所受而爲哉。然此亦蠡測之言。未知果爾否。又蒙諭以李友惟泰稱許侍生之過。故謂之阿附。李友若坐以愛而不知其惡之律。則渠亦無辭。侍生有甚勢而彼乃阿附耶。侍生與李友。生同學死同傳。恩義如骨肉。雖果有希望之心。何待於阿附耶。李友之錯認侍生至此。則侍生之錯認李友。固不可知。然其不爲阿附之人。則十分無疑矣。大抵天有陰陽。地有華夷。人有君子小人。方以 類聚。物以群分。如此剖判之後。則一番人所爲。未必盡善。一種人所爲。未必盡非。然在扶抑之道。則不可不嚴。故元祐諸賢。憂蔡確之不可制。至案以詩句。雖似已甚。然朱子不甚非之。而反以范忠宣爲不是者。豈以淑慝之大分已定。故左右之道。有不得不然耶。今二老與李友。與一種人爲氷炭。而大爲彼國之所咆哮。其爲陽之類審矣。於斯時也。君子之扶抑當有所在。而彼一種人。乃借重於文丈之言。以爲攻二老李友之公案。則識者有不能無疑於文丈之意。而侍生之愚則以爲高明精詣之見。必非常情所測。故敢 此仰質。伏乞詳賜下敎。以袪蒙蔀。千萬幸甚。仰恃眷私。悉布腎腸。語涉支離。尤增惶恐。並乞矜恕。時序向新。伏祝爲道加重。以慰瞻仰之誠。不備。
(번역문) 이제는 양덕(陽德, 만물을 생장(生長)시키는 양기(陽氣)를 미화하여 일컫는 말이다.)이 이미 나타나서 봄기운이 장차 펴지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한가히 지내시며 도(道)를 음미하시는 기거가 만복하신지요? 위 무공(衛武公)과 거백옥(蘧伯玉)(위 무공은 춘추 시대 위 나라 임금. 무공은 시호. 그는 나이 95세 때 국중(國中)에 경고하기를 “경(卿) 이하 모든 조정의 관원들은 나를 늙었다 하여 방치하지 말고 반드시 조정의 일을 조심해서 하고 서로들 나를 경계해 줄 것이며 한두 마디라도 들은 말이 있으면 반드시 나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었다. 《國語 楚語上》 거백옥은 춘추 시대 위 영공(衛靈公) 때의 어진 대부(大夫)로 나이가 50이 되어서는 49세까지의 잘못한 일을 알았고, 60이 되어서도 계속 이 기질이 변화되어 갔다고 한다. 《논어(論語)》 위령공 주(衛靈公註) 원문(原文)의 ‘칠십(七十)’의 칠(七)은 ‘육(六)’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은 나이 90이 되고 70이 되어서도 공부가 더욱 진보되고 덕이 더욱 닦아졌었으니, 삼가 생각건대 문장께서도 노쇠했다 하여 공부에 힘쓰기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조예(造詣)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지난 경인년에 서울에서 누가 와서 전하기를, “신면(申冕,조선 중기의 문신. 부제학(副提學)ㆍ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였는데, 뒤에 김자점(金自點)의 옥사(獄事)에 관련되어 국문을 받다가 자살했다.)의 무리가 아무 어른이 그대에게 준 글(안방준(安邦俊)이 송시열에게 보낸 글의 별지(別紙)를 가리킨다. 안방준은 여기에서 송시열의 출처(出處)에 관해 말하기를 “송모(宋某)는 벼슬을 그만두어서는 안 될 때에 그만두고, 그만두어야 할 때는 그만두지 않는다.” 하고, 또 송시열이 상소만 남겨 놓고 윤허를 받기 전에 미리 돌아와 버린 것을 들어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고 하였는데 신면 등이 이 말을 구실로 하여 송시열을 공격했었다. 《宋子大全隨箚 卷3》)을 초록(抄錄)해다가 서로 전하여 읽으면서 대단한 논쟁거리로 삼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생(侍生)이 다그쳐서 묻기를,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고는, 시급히 사람을 시켜 서울에 가서 그것을 구해 오게 하였는데 다만 별지(別紙)만을 베껴 왔고 원서(原書)는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외사촌 아우 김현(金灦)이 문하에서 한 장을 초록해 왔는데 비록 먼저 서울에서 가져온 것과는 내용이 같지는 않았습니다마는, 대강은 다름이 없었습니다. 여러 날을 두고 잠심하여 완미해 보니 대군자(大君子)께서 도로써 사람을 애호(愛護)하신 것으로 고명(高明)하신 견해가 보통 사람보다는 만 배나 뛰어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깊이 감명(感銘)하고 경탄(敬歎)하는 마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두 가지 서로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이는 면전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피차간의 의견을 충분히 토로해 보지 않고서는 서로 같고 다른 점을 따져서 일정한 의논을 찾아낼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만일 신병이 조금 나으면 다시 문하에 나아가 청소라도 맡아 하면서 조용히 가르쳐 주시기를 청해야 하겠기에, 중간에 흥양(興陽) 원 전(全)씨 편을 이용하여 먼저 편지로 이런 뜻을 써서 올렸는데 아무 일 없이 편지가 잘 전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본래의 병이 더욱 고질이 되고 근력이 더욱 떨어져서 다시는 사방을 유력(游歷)하고 싶은 뜻이 없으니,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천고(千古)의 한이 되어 버릴 듯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감히 사람을 보내어 우러러 정인(鼎裀 기거(起居)를 뜻함)이 어떠신지를 살피고, 겸하여 글로써 대신 저의 진심을 말씀드리오니, 삼가 하교(下敎)하시기 바랍니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을 적에 대의(大義)가 수십 가지였지만 주(周) 나라를 높이는 것이 가장 큰 의리였고, 주자(朱子)가 처음으로 효종(孝宗 송 나라 제11대 임금)을 뵙고 배운 것을 남김없이 진달하였으되 금(金) 나라를 토벌하여 복수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었으니, 이 의리가 한 번 어두워지면 삼강(三綱)이 없어지고 구법(九法,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나오는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리킨다.)이 무너져서 중국이 이적(夷狄)의 손에 들어가고 인류가 금수(禽獸)로 변하게 되는 법입니다. 사군자(士君子)가 불행히 이런 때에 살게 되면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에 반드시 지키는 것이 있어서 절대 구차하게 하지 않는 법입니다. 지난 정축년의 화(1637년(인조15)인 정축년에 청군(淸軍)에 의해 강화(江華)가 함락되고,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淸太宗)에게 항복했던 일을 가리킨다.)는 본조(本朝)가 멸망하게 된 변으로서, 생각하면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차마 다시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자(臣子)된 사람들이 통분하여 피를 토하고 눈물을 삼키면서, 복수하고 설욕하는 의리에 죽음도 무릅쓰는 것은 본시 천리와 인정상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때를 당해 한 사람이라도 공자와 주자의 의리를 들어 말을 하면, 혀를 빼 물고 머리를 흔들며 감히 들으려 하지 않고, 더러는 저 오랑캐들의 세력을 끼고서 우리 임금에게 협박하는 자까지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긴 지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스스로 이 세상에 제가 있든 없든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고서 산속에 자취를 감추어 세상과 길이 하직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어르신께서 일찍이 알고 계시던 바 저에게 권장하고 허여하신 것입니다.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시기에 이르러서는 천지가 한 번 새로워지게 되었는데, 대개 당초 잠저(潛邸) 때부터 슬기로운 뜻이 뛰어나시어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문제(文帝)보다도 우월한 것은, 평성(平城)에서의 수치(羞恥)(한 고조(漢高祖)가 흉노(匈奴)를 토벌하러 평성에 이르렀다가 묵돌(冒頓)에게 7일 동안 포위되어 안팎의 연락이 끊어지고 먹을 것이 떨어져 크게 곤욕을 치렀던 일을 가리키는데,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서 수차에 걸쳐 흉노를 정벌, 흉노 수십만 명을 잡아 죽였다.)를 무제가 씻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곧 스스로 복수를 책임지려고 하신 뜻을 이미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고 들어갔을 적에는 지나치게 예우(禮遇)해 주시고 물러나 돌아갈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므로, 망녕된 생각에, 쓸데없이 예우만 받는 것보다는,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한번 털어놓아서 다행히 성상의 마음에 합당하게 된다면 세상의 도의(道義)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있게 될 것이니 이것이 더 나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망녕되이 움직이는 것도 명분(名分)이 없지는 않겠기에 감히 주대(奏對)하기를 청했었으나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효종(孝宗) 1년에 유계(兪棨)가 인조(仁祖)의 묘호(廟號)를 논한 일로 효종의 노여움이 극도에 달했던 차에, 송시열이 주대를 청하여 이를 논하려 했었으나, 즉시 인견(引見)하지 않으므로 송시열이 그날로 향리(鄕里)에 돌아와 버렸던 일을 가리킨다. 《宋子大全隨箚 卷3》) 그래서 나아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한 채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방법이 없기에 드디어 한 장의 상소로 물러갈 것을 고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승지(承旨)를 보내 친절하게 타이르기까지 하였으니, 권애(眷愛)하시는 뜻의 융숭함이 천고에 드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사이에 이미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는 것은 염치에 관계됨이 있기 때문에 고집스럽고 개결한 성질을 끝내 돌리지 못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죄가 만번 죽어도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본디 마음을 단사(丹砂)처럼 환하게 끝내 밝은 임금 앞에 한번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에 중로(中路)에서 다시 소 한 장을 올려 공자와 주자가 말한 의리를 대략 진달했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삼가 특별한 유지(諭旨)와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을 받았는데, 성상의 말씀이 친절하고 간곡하여 귀신(鬼神)도 울릴 만했고, 또 분부하시기를, “상소 가운데 기미만 보이고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다시 조용하게 다 말해 주기 바란다.” 고 하셨습니다. 마침 대행(大行)의 계빈(啓殯)(대행은 왕이 죽은 뒤에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존칭인데 여기서는 효종(孝宗)을 가리킨다. 계빈은 임금을 능(陵)에 안장하기 위해 빈소(殯所)를 열고 관(棺)을 내오는 일을 말한다.) 날을 당해 소명(召命)이 또 내리기에 제가 생각하기를, 이로 인해 올라가서 마침내 다 말하지 못했던 소회를 털어놓는다면, 견마(犬馬)의 정성을 조금이라도 펴게 되겠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인산(因山)을 마친 뒤에 한 장의 상소로 저의 충심(衷心)을 털어놓자 곧바로 편전(便殿)에서 인견(引見)하셨는데, 주고받는 서로의 말이 메아리치듯 하고 성상의 정신과 풍채는 온후 활달하였으며, 청(淸) 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는 데 관한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깊은 뜻을 보이시므로, 그때에 비로소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가 말할 때와 같지 못했고 인심(人心)도 내 마음과 같지 않았는데, 더구나 이 비루한 사람이 어찌 지체해 있으면서 스스로 낭패를 당할 수 있겠습니까. 상소가 들어간 다음날 곧 귀향길에 올랐는데, 관학(館學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만류하기를 청했었지만 끝내 물러나 돌아왔었습니다. 저의 구구한 거취가 비록 말할 것은 못 되지만 그 시종(始終)이 이 같은 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매양 저 혼자 가만히 생각하기를, 이처럼 낭패하게 된 것은 또한 문장(文丈)께서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선유(先儒)의 말에 ‘안자(顔子)가 누추한 시골에서 한 도시락 밥과 표주박 물로 생활하면서 지조를 지켰던 것은, 세상에 공자란 분이 있어 선왕의 도를 밝혀 천하를 가르쳤기 때문이고, 만일 공자가 없었다면 안자가 반드시 그러고만 말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전에 문장께서 스스로 사도(斯道)를 책임지고서, 전후의 소장(疏章)에 공자와 주자의 큰 교훈과 큰 법도를 진언하시었다면, 시생(侍生)이 어찌 감히 하찮은 용렬한 몸으로 분수에 넘치는 외람된 죄를 스스로 지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그런 의리를 우리 임금에게 진달하였으므로 비록 만번을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시생이 불초한 것 때문에 아울러 청음(淸陰)과 신독재(愼獨齋) 두 분 노인까지 흠잡은 것(안방준의 생각이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에는 선비가 나가서 벼슬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겨,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 및 제현(諸賢)들이 효종(孝宗) 때에 벼슬하는 것을 그르게 여기고 심지어 “이전에는 물러났다가 이후에는 나아간다.[前退後進]”는 기롱까지 한 것을 말한다. 《宋子大全隨箚 卷3》)에 있어서도 변명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성인들의 교훈은 《대학(大學)》 만한 것이 없다 하겠는데, 《대학》의 도는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新民]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몸도 제대로 닦지 못하면서 시무(時務)를 급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하지만, 만일 자신을 지키기에만 전일하여 일할 만한 때를 만나서도 영원히 가 버리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 또한 중정한 길은 아닌 것입니다. 그때 두 노인께서 만났던 기회는 천 년 만에나 한 번 있는 기회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고 일을 할 만한 임금을 만났는데 이런 때에 일이 하기 어렵다고 하여 손을 거두고 방관하며 자신만 한가하고 편할 계책을 한다면 이 또한 무엇을 계교하는 사심의 발로인 것이요, 참으로 공정한 인자(仁者)의 마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노인께서 지극한 공심(公心)과 피맺힌 정성을 가지고 더없이 무겁게 스스로 책임을 지고 남몰래 대의(大義)를 붙잡아 세우고 청고한 의논을 주장하여 사류(士類)들의 마음을 수습하고 흉악하고 간사한 자들을 내쫓으니, 두어 달 동안에 세상의 사세가 크게 달라졌습니다. 만약에 흉악한 무리들이 외부의 힘과 결탁하여 그분들을 없애 버리려는 계획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일을 할 만한 기반이 2, 3분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만일 시기와 사세를 알지 못하고서 경솔하게 담당하려 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도 변명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나로서 할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고, 성패(成敗) 같은 것은 성인도 기필하지 못했는데 내가 어찌 구차하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두 노인들께서 어찌 전해 받은 것이 없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또한 제 나름대로 헤아리고 하는 말이므로 과연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깨우쳐 주신 말씀에, 저의 벗 이유태(李惟泰)가 시생을 지나치게 칭찬하기 때문에 그가 아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의 벗 이유태가 사람을 좋아하기만 하고 그 사람의 나쁜 점은 알지 못하는 죄과를 범했다고 한다면 그도 또한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마는, 시생이 무슨 권세가 있다고 그가 아부를 했겠습니까. 시생과 이유태는, 살아서는 배우는 바가 같고 죽어서는 전(傳)하는 바가 같을 사이로서 은혜와 의리가 지친(至親)과 같았으니, 저에게 기대하는 마음이야 있었겠지마는 어찌 아부할 것까지 있었겠습니까. 이유태가 시생을 이처럼 잘못 알았다면, 시생 역시 벗 이유태를 잘못 알았었는지도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부는 하지 않을 사람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대체로 하늘에는 음(陰)과 양(陽)이 있고 땅에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이 있고 사람은 군자와 소인이 있어, 방향(方向)에 따라 동류(同類)가 모이게 되고 사물(事物)에 따라 무리가 나누어지게 되는 것인데, 이렇게 판별(判別)이 난 다음에는 이쪽 사람의 행위라고 해서 반드시 모두 착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저쪽 사람의 행위라고 해서 반드시 모두 그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옳은 것을 붙잡아 세우고 그른 것을 억제하여 막는 도리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우(元祐)의 제현(諸賢)이 채확(蔡確)을 억제할 수 없음을 우려하여 그의 시구(詩句)를 가지고 죄를 만들었으니(원우는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제현(諸賢)은 사마광(司馬光)을 비롯하여 문언박(文彦博)ㆍ정이(程頤)ㆍ여공저(呂公著)ㆍ소식(蘇軾) 등 문인(文人)과 학자 119인을 가리킨다. 채확(蔡確)은 왕안석(王安石)의 파당으로, 이때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적극 찬동함은 물론 왕안석에게 매우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러자 원우의 제현 가운데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범조우(范祖禹), 우정언(右正言) 유안세(劉安世) 등이, 일찍이 채확이 안륙현(安陸縣)에 있는 거개정(車蓋亭)에 유람하면서 지은 “높도다 이름난 신하 학 증산이여, 충성된 말 곧은 지조 상원 무렵에 드날렸지.[矯矯名臣郝甑山忠言直節上元間]”라는 시구(詩句)를 가지고 논박하여 그에게 죄를 받게 하였던 고사이다. 상원은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이 무렵에 학처준(郝處俊 봉호가 증산(甑山)임)이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세우도록 간하여, 고종이 죽은 다음에 자신이 정권을 잡았었는데, 채확 역시 선인황후(宣仁皇后 송 고종의 황후)를 측천무후에 비하고 자신을 학처준에 가탁하여 사모한 나머지 이 시를 지은 것이었다. 《唐書 卷115》 《宋史 卷471》), 이는 너무 심한 듯도 합니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그 일은 그다지 그르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범 충선(范忠宣)을 옳지 못하게 여겼던 것(송 철종(宋哲宗) 때에 채확(蔡確)이 원우(元祐)의 제현에게 논박을 받고 귀양 가게 되자 범순인(范純仁 시호는 충선(忠宣))이, 너무 지나치게 되었다며 채확을 구하려 하였으므로, 주희가 이를 논하기를 “뒷날에 자신이 온전하려는 계책을 한 것이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宋史 卷471》 《宋子大全隨箚 卷3》)은 바로 선악의 큰 구분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주선하는 도리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두 노인과 저의 벗 이유태는 어느 일종인들과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고 저 나라[彼國 청 나라]의 협박을 크게 받았으니, 양(陽 선을 뜻함)의 유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때에 있어 군자(君子)들로서는 의당 선을 붙들어 세우고 악을 억제해야 하는 법인데, 저 일종인들이 문장(文丈)께서 하신 말씀이 중함을 이용하여 이것을 가지고 두 노인과 저의 벗 이유태를 공격하는 공안(公案)으로 삼고 있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이 문장의 말씀에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시생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고명(高明)하시고 조예가 정밀하신 분의 견해는 반드시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바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감히 이를 우러러 질문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자세하게 하교하여 몽매함을 열어 주신다면 천만번 다행이겠습니다. 사랑해 주시는 사사로운 정만 믿고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느라 말이 지루하게 되어 더욱 황공스러우니, 아울러 애긍하게 여겨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계절이 바뀌어 가는 이때에 사도(斯道)를 위해 더욱 몸을 보호하시어 사모하고 우러르는 정성을 위로해 주시기를 삼가 빕니다. 갖추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6. 갑오년(1654) 10월 17일에 안은봉(安隱峯)에게 올림
주요 내용은 자신의 안부와 함께 간소한 선물을 전함.
今冬寒事小遲。伏惟文丈道體起居崇毖萬福。區區慕用。食息靡已。竊聽於道途。文丈神觀動止。不爽於前。酬酢人事。未覺衰倦。自是神相豈弟。理應如此。亦豈涵養造詣之功。篤實強健。不與血氣而俱往耶。每擬負笈詣門。以供灑掃之役。而穩承餘誨。只是親年。非遠遊之日。故荏苒差池。以至今日。則小生犬馬之 齒。已自衰謝。而四方之志。亦倦矣。竊懼因循孤負。遂成千古之恨。南望傾溯。不勝嗟惋。或者賴天之靈。則終能遂此志也否。歲初便回。辱賜回帖。感戢良切。惟是所稟諸說。未蒙財敎。則第深悚怍耳。小生年馳學退。不能慰先人泉壤之思。中夜仰屋。旣悲且懼。今春家兄得宰扶餘。以養老母。夏秋以來。災厄荐仍。昨遂奉以東歸。菽水是自家物事。聊以遣去耳。適因趙江陰女壻行。敢此替候。餘祝愼寒加重。以慰遠誠。不備。
|
첫댓글 송시열과 같은 대학자와 터놓고 지내시는 은봉 선조님의 학문은 대단하신 것 같아요.
송시열선생이 편지를 쓸때 上이라는 존칭을 세분에게 사용하였는데(송자대전) 두분은 스승이신 김상헌, 김집선생님과
은봉 할아버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