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
이번 책을 추천하긴 했지만 이 책은 발제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네요. 걷기 예찬적인 글들은 글귀마다 뜻이 있는 것 같은데도 계속 중언부언하는 느낌이고 철학자/예술가들의 삶과 걷기의 관계는 연관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북두런의 고수들께서 제가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토론에서 깔끔하게 밝혀주시리라 기대하며 발제를 하겠습니다.
1. 안과 밖
걷는다는 것, 그것은
곧 ‘밖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밖에 있는 것을 ‘자유로운 공기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걷다 보면 도시 사람의 논리가 달라지고, 심지어는
널리 퍼져 있는 인간적 조건도 바뀐다.
우리가 ‘밖’에 가는 것은 항상 어느 ‘안’에서
다른 ‘안’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다. 즉 집에서 사무실로, 자기 집에서 근처에 있는 가게로 가는 것이다. 집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무엇인가를 하러 간다. 밖에 있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이행으로, 경계를 짓는다. 장애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곳과 저곳의 사이, 그러나 그것은 고유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 (P 51)
저자는 걷기를 하나의 ‘안’에서 다른 ‘안’으로 이동하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곳과 저곳의 사이 즉 이동중에는 고유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걷기를 통해서 사유하고 진리를 추구한다는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과는 다른 듯한데요. 이것에 관해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2. 순례
도대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조건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떠나는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가지 동기가 있다. 우선은 자신의 신앙심을
한층 더 돈독히 하고, 자신이 믿음에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P 165)
순례를 떠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잘못에 대한 속죄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만일 어떤 신자나 성직자가 양심에 거리끼는 심각한 죄나 엄청난 신성모독 행위, 그리고 심지어는 사법권을 초월할 살인을 했을 때, 저지른 죄의 중대성을
따라 순례의 고행을 떠남으로써 속죄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P 166)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순례도 여럿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성지순례 뿐 아니라 이슬람인들이 한다는 메카순례, 티베트에서
오체투지하면 설산을 도는 것, 일본 시코쿠 순례길도 있다고 하는데요.
종교마다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 순례를 떠나는 문화가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침묵과 동행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결국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즉시 둘이 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걷고 난 뒤에는 특히 그렇다. 내
말은, 심지어 혼자 걸을 때에도 육체와 영혼이 항상 그렇게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다. 나는 일정한 속도로 걸으면서 내 몸을 격려하고 그의 비위를 맞추고 칭찬한다.
나를 끌고 가는 튼튼한 다리……(p 89)
루소는 독서에 끝없이 빠지기보다는 숲 속에서 오랫동안 배회하기를 요구하는 이 의외의 탐구를계속하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마음속에서 원시적이고 야생적이며 순수한 인간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흔들리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느낀다. (P 113)
소로는 친구들(자연)과 논다고 하고 저자도 3~4명이 같이 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서로 말없이 걸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걷기의 방법일 수도 있고 사유의 방법일 수도 있는데 과연 저자의 말처럼 혼자서
걷는 것이 걷기의 진정한 가치를 느끼는 방법일까요. 19세기 전인적인 인격이 가능한 시대를 떠나 개별화된
현대사회에도 이런 방법으로 통합적인 사유가 가능할까요? 또는 걷기의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해서라도 동행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4.걷기의 풍경
쉘레에 따르면, 산책의 기술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외부적 여건이 필요하다. 만일 공공장소를 산책할 경우에는 지나가는 사람과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넓은 산책길이 있어야 하고,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은 산책객들이 있어야 한다. 산책객들이 거의 없으면 아는 얼굴을 찾고 조사하려는 유혹(저 사람은
누구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원래의 사회적 역할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산책객이 너무 많으면 영상들이 쇄도하고 증가하여 자신의 종합 능력을 벗어나게 되므로 실망하게 될
것이다. 만일 시골길을 산책하기로 했다면 상상력이 색깔과 형태의 다양성에 매료될 수 있도록 산과 계곡, 개울, 초원, 숲이 교대로
나타나는 풍경을 택하고, 찬란한 태양을 선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상력의 유희가 어두운 표상들 때문에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P. 237~238)
책에 소개된 사람들을 보면 랭보처럼 도시를 옮겨 다닌 사람도 있고 소로처럼 자연을 산책한 사람, 벤야민처럼
도시를 산책하거나 주로 주변을 산책했던 니체나 칸트도 나옵니다. 위의 인용문처럼 산책하는 때의 외부
환경에 대해 필요한 것을 엄격히(?) 규정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걷기를
할 때 바람직한 주변환경이 있다면 어느 경우에도 걷고 싶지 않은 풍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리고
주변환경에 따라 걷기의 가치가 달라질 수도 있을까요? (예를 들자면 뜨거운 사막을 가로질러야 한다면
차라리 걷기를 포기하거나 차량을 이용하는게 나을까요?
5. 목적으로서의 걷기
재기발랄한 여성들 대부부분은 뤽상부르 공원이나 튈르리 공원에서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곳에 가면 새로운 남자들을 매일같이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
244)
혼자 걸으라
그들이 그대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혼자 걸으라.
그들이 두려워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벽 쪽으로 돌아서더라도. (P 289)
공원에서 실제적인 필요(사교)를
위해 걷는 파리의 여인이나 인도의 독립을 위해 걸어간 간디에게 있어 걷기는 구체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넓게 보면 유사한 것으로 마르틴 루터가 인종차별 반대를 위해 벌인 행진이나 우리나라의 민주화 행진도 있을 텐데요. 어떻게 이러한 걷기를 통한 주장은 큰 힘을 갖게 될 수 있을까요?
6. 내인생의 걷기
우리는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많은 걷기의 본보기가 될 사람들을 읽었습니다. 어떤
걷기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는지요. 그리고 그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걷기의 추억은 무엇입니까. 또 앞으로 하고 싶은 걷기에 대해서도 즐겁게 상상해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