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쿠차카의 장날 풍경
정 성 천
페루 남부 건조지방의 ‘모케구아(Moquegua)’에서 한국교육자문관으로 2년 근무하고 2018년 9월초에 1년 연장근무를 위해 안데스 고원지대에 위치한 ‘쿠스코 꼬아르(Cusco COAR)’ 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처음 살림집을 얻을 때 대도시인 ‘쿠스코(Cusco)’가 아닌 시골 중소도시인 ‘이즈쿠차카(Izcuchaca)’에 거주지를 정한 것은 학교에 가까워 출퇴근이 용이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안데스 고원지방의 농촌 풍속을 좀 더 많이 접해 보고 그들의 생활상을 좀 더 가까이에서 알아보자는 내 나름의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이즈쿠차카’는 ‘쿠스코’에서 자동차로 4-50분 걸리는 위성도시로 ‘쿠스코’에서 수도 ‘리마(Lima)’와 인근 ‘아푸리막(Apurimac)’주의 주도인 ‘아방까이(Abancay)’로 가는 주요 간선국도인 ‘잉카로’에 위치한 ‘안타(Anta)’군의 중심 소도시이다. 그 옛날 잉카제국의 형성 초기 라이벌 관계에 있던‘창카(Chanca)’족과 ‘잉카(Inca)’족의 마지막 격전지 ‘야와르 팜파(Yawar Pampa:피의 벌판)’로 잘 알려진 해발 3,500m의 광활한 고원 평야가 바로 인접해 있어 농산물이 풍부하고 인근에 많은 작은 마을 공동체가 흩어져 있어‘안따(Anta)’군의 경제적인 중심지가 되고 있다.
이곳에도 매주 일요일마다 ‘페리아(feria)’라고 불리는 장이 선다. 가로 200m 세로 120m 정도 면적의 직사각형 장소에 세멘트 바닥을 만들고 기둥으로 지붕을 이어 시장을 만들어 놓았다. 상당히 넓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장날마다 시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항시 만원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모습도 활기차지만 안데스 원주민 복장을 한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내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케추아(Quechua)’말로 서로 흥정을 하며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 고향 ‘김천’의 장날풍경이 생각 나 왠지 가슴이 훈훈해 진다.
내 고향 ‘김천’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의 5대 시장 중의 하나로 불릴 만큼 그 규모가 컸고 사람도 많이 붐볐다. 아득한 과거시절이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래 장터에서 장날마다 노점상을 하시던 외할머니를 가끔 뵈러 갔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지금은 조각공원으로 변모되었지만 ‘직지천’변의 ‘김천’ 우시장은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우시장의 국밥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나만의 소중한 추억이 되고 있다.
아내와 나는 이곳에서 매 주 일요일 함께 장을 본다. 일주일 동안 먹을 음식재료들을 사야하기 때문이다. 상설시장이 가까이에 있지만 장날의 물건은 신선하고 값도 싸다. 무엇보다도 장날에는 구경거리가 많아서 매주 일요일 장보는 일이 즐거운 주말의 일상이 되었다. 매주 가는 장날이지만 장마당에 들어 설 때는 항시 가슴에 작은 설렘이 일어난다.
아내와 나는 장마당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과일 가게들이 늘어 서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수박을 잘라 저울에 달아 파는 가게로 가서 수박 한 조각씩 사서 먹는 일을 제일 먼저 한다. 살림집에서 장마당까지 오는 거리도 꽤 멀지만 해발 3,400m 고지대의 적응을 위해서 시작한 하루 만보걷기를 위해 중앙광장을 다섯 바퀴 돌고 오기에 장마당에 들어 설 때면 항시 갈증이 나기 때문이다.
수박으로 갈증을 해소 하고 과일가게를 둘러본다. 과일가게들은‘셀바(Selva:밀림)’지역과 인근‘씨에라(Siera:2,500m 이상의 고원)’지역에서 올라온 다양한 과일들을 진열해 놓고 확성기로 호객행위도 하고 머뭇거리는 손님에게는 맛 뵈기로 유혹도 한다. 이곳 과일들은 농약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하나 같이 우리나라 과일에 비해 상품성과 당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희귀한 과일들이 보이면 꼭 사서 먹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한 과일들이 아주 많지만 그 중 가장 신기한 과일은‘루꾸마(lucuma:영어로 egg fruit)’이다. 맛은 우리나라 감 맛과 비슷하다. 하지만 크기도 감보다 약간 크고 속에 밤톨만한 한 개의 씨앗이 들어 있는 것도 다르며 과육의 식감은 단감의 아삭아삭 함도 아니고 홍시의 식감인 흐물흐물하거나 찐득찐득하지도 않다. 우리나라 감보다는 당도가 약간 떨어지지만 떫은맛은 없고 식감이 파삭파삭하다고나 할까? 건조지역에서 생산되어서 그런지 물기가 다소 부족하여 뽀송한 감 가루를 겨우 뭉쳐 놓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입안에서 퍼지는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다.
그리고 ‘그라나디야(granadilla:영어로 passion fruit)’라고 하는 과일이 있다. 산지에서 나무를 직접 보진 못했어도 사진 상으로 보니 덩굴성 식물의 열매인 것 같다. 크기는 테니스공만 하고 황갈색 껍질이 연해 손톱으로 누르면 쉽게 반으로 자를 수 있다. 안에는 회색의 씨앗들이 미끌미끌한 과육에 쌓여 담겨 있다. 씨앗이 연해 함께 씹어 먹을 수 있고 맛은 독특한 향기와 함께 무척 달고 시원하다. 반으로 잘라 놓은 ‘그라나디야’를 처음 대했을 때 누군가가 원숭이 골이라고 농담을 하는 바람에 먹기가 꺼림칙하여 한참을 주저하다가 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물렁물렁하고 미끌미끌하여 이쑤시개와 같은 자그마한 꼬챙이로 살살 들쑤시면 껍질과 쉽게 분리되어 한입에 후루룩 마시기 좋게 된다. 영어이름에서 암시해주듯이 이 과일에는 열정을 유발하는 물질이 들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브라질에서는 부부싸움을 한 부부에게 이 과일을 먹이면 쉽게 화해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미운 감정은 진정시키고 서로 좋아하는 열정에 불을 지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치리모야(chirimoya :영어로 custard apple)’라는 과일도 신기하다. 말랑말랑한 연두색 과일을 쪼개면 딱딱하면서도 새까만 씨앗들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햐얀 과육이 나오는데 미끌미끌하지 않으면서 상큼하고 무척 달다.
‘뻬삐노 멜론(pepino melon)’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과일이다. 어른 주먹만 한 크기에 껍질은 베이지색 바탕에 자주색 무늬가 들어 있는 모양이다. 이름의 ‘뻬삐노(pepino)’는 스페인어로 ‘오이’라는 뜻이다. 오이와 멜론을 교배시켜 탄생한 것은 아닌 것 같고 그 맛이 오이의 시원함과 멜론의 수분과 단맛을 함께 가졌다고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이름처럼 당도가 약하지만 과즙이 무척 많고 시원하여 갈증해소에 제격이다. 경계성 당뇨기가 있는 나에게 가장 적합한 과일이라고 아내가 적극 추천하여 자주 사서 먹는다.
‘삐따하야(pitajaya)’라는 과일은 동남아 여행을 할 때도 흔히 볼 수 있는 ‘용과’라는 과일과 비슷하다. 껍질은 우둘투둘하고 붉은색과 노란 색 두 종류가 있으며 껍질을 까면 깨알 같은 까만 씨앗이 박혀 있는 하얀 과육은 미끌미끌하면서도 무척 달고 시원하다. 주의 할 점은 독성이 있어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프고 설사가 난다는 것이다. 페루 북부지방을 여행할 때 맛이 좋아 2개를 연달아 먹고 설사한 경험이 있어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과일을 사고 난 뒤에는 채소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에서는 고도로 인한 재배의 어려움 때문인지 녹황색 채소가 우리나라보다 풍부하지 못하다. ‘꼴 치나(col china)’라고 부르는 배추는 이곳에서 재배가 되지 않고 ‘리마’인근의 소수의 중국인들이 재배하기에 김치를 담기위해서는 단골 채소가게에 미리 주문해서 사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시금치(espinaca)도 여기서 즐겨 먹는 종류는 우리가 먹는 시금치와 약간 다른 것 같다. 줄기와 뿌리는 끊어 내고 잎만 파는데 잎 모양은 비슷하지만 향초처럼 강한 냄새가 난다. 이곳 사람들은 그 냄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먹는 종류의 시금치는 쿠스코의 대형 마트에 가야 겨우 살 수가 있다. 콩나물은 없고 숙주나물과 비슷한 ‘프리홀 치나(frijol china)’도 쿠스코 대형마트에 가야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 장날의 한 채소가게를 단골로 정하고 배추와 함께 미리 주문하여 사먹고 있다.
‘무’도 이곳에 재배되지 않아 대형마트에 가야 살 수 있다. 이곳에 나오는 ‘나보(nabo)’라고 부르는 ‘무’는 우리나라 ‘순무’처럼 동글동글하고 작고 맛이 너무 아려서 깍두기 담기에 부적합하다. 오이는 껍질이 너무 두껍고 대다수가 너무 웃자란 것들이라서 속이 무르고 씨앗들이 들어 있어 잘 골라서 사야 한다. ‘아쎌가(acelga)’라고 부르는 ‘건대’는 흔하게 보이는 녹색 채소이지만 대다수가 너무 크게 자란 것이라서 어린놈으로 잘 골라야 살짝 데쳐서 쌈 재료로 적합하다. 가지는 우리나라 애호박처럼 둥글고 큰데 아주 드물게 보인다. 호박은 애호박과 늙은 호박 두 종류가 있는데 늙은 호박은 우리나라 누런 호박의 3-4배정도로 상당히 크다. 늙은 호박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껍질이 검은 녹색으로 매끈한 게 있고 껍질이 흰색으로 문둥이 피부마냥 우둘투둘한 게 있다.
장날 가장 많이 거래되는 품목은 감자인 것 같다. 잉카시대에 300종의 감자를 개량했고 지금은 감자의 종류가 3,000종이 넘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엄지 손톱만한 놈에서 부터 어른 주먹보다 더 큰 놈에 이르기까지의 크기 종류는 제쳐두고라도 모양이 동글동글한 놈, 길쭉한 놈, 납작한 놈, 눈이 많은 놈, 눈이 거의 없어 매끈한 놈, 색깔도 흰색, 노란색, 붉은 색, 갈색, 자주색, 검정색 그리고 껍질이 두꺼운 놈, 껍질이 얇은 놈, 정말로 감자의 종류가 많고도 많다. 감자의 한 종류인지 모르겠으나 ‘옥까(oca)’라고 하는 뿌리식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토속잠’종류처럼 생겼으나 색깔은 밝은 황색과 붉은 색 두 종류로 크기는 감자처럼 다양하다. 고구마는 나오긴 하나 아주 드물다. 다른 뿌리식물로는 브라질에서는 ‘만디오까(mandioca)’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까사바(cassava)’라고 하고 여기서는‘유까(yuca)’라고 부르는 아열대성 뿌리식물도 많이 보인다.
다음은 곡물 전으로 가본다. 곡물도 종류가 무척 많다. 같은 종류라도 그 크기가 달라 마치 다른 종처럼 보인다. 이는 고도 차이에 따른 생육조건의 상이함으로 생기는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외래종인 보리(cebada), 밀(trigo), 귀리(avena)만 봐도 알갱이의 크기가 3-4가지 정도 된다. 우리나라에서는‘랜틸’ 콩으로 알려진 ‘렌떼하(lenteja) 콩도 녹두 반쪽 크기부터 대두의 크기까지로 다양하다.
외래종이 아닌 안데스 토착 곡물로는 ‘끼누아(quinua)’, ‘끼위차(kiwicha)’, ‘까니구아(canigua)’가 있다. 그중 ‘끼누아’의 알갱이가 우리나라 ‘조’처럼 생겨 가장 크고 ‘까니구아’가 가장 작으며 ‘끼위차’는 그 중간이다. 알갱이 크기가 가장 작아 수확하기가 가장 어려운 ‘까니구아’가 가장 비싸다. ‘끼위차’와 ‘까니구와’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단백질 함유량이 다른 곡물에 두 배인 ‘끼누아’는 미국과 서구의 선진국에서 슈퍼 푸드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끼위차’는 단백질 함유량도 높지만 동물성 단백질에 많이 들어 있는 ‘라이신’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미래의 건강식품으로 요즘 많이 알려지고 있다.
옥수수는 ‘마이즈(maiz:말린 강냉이)’와 ‘초클로(choclo:생 옥수수)’두 가지로 판매되는데 말린 강냉이의 색깔은 짙은 자주색과 노란색 두 가지가 있다. 자주색 강냉이는 알콜도수가 없는 음료인 ‘치차모라다(chicha morada)’를 만드는데 사용되고 노란색 강냉이는 우리나라 엿기름처럼 싹을 튀워 안데스의 막걸리인 ‘치차 데 호라(chicha de jora)’를 만드는데 사용한다.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 전 간식거리로 내어 놓는 ‘마이즈 데 와로(maiz de huaro)’는 노란색 말린 강냉이를 살짝 볶아서 만든다.
생 옥수수를 삶은 것을 ‘초클로(choclo)’라고 하는데 이곳 옥수수는 알갱이가 크기로 유명하다. ‘우루밤바(Urubamba)’강 유역의 ‘성스러운 계곡(sagrado valle)’에 위치한 ‘칼카(Calca)’마을은 알갱이가 세계에서 가장 큰 옥수수의 산지라고 공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사먹어 보면 찐 옥수수 알갱이 하나가 어른 엄지 손톱만하다.
이곳 장날에도 우리나라 여느 시장과 마찬가지로 먹거리 식당들이 문을 연다. 이곳 간이음식점에는 우리나라 장터 국밥처럼 페루의 서민들이 먹는 대표음식들이 총망라되고 가격도 저렴하여 장날마다 항시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해발 4,000m이상에서 ‘삐꾸냐(vicuňa)’,‘알파카(alpaca)’등을 기르는 산골 ‘바케로(vaquero:목부)’들도, 해발 3,000m의 광활한 평야 외진 곳에서 ‘끼누아’농사를 짓는 ‘그랑헤로(granjero:농부)’들도, ‘우루밤바’강가에서 옥수수를 기르며 ‘뚜루차’(민물송어)를 잡아 파는 ‘까바예로(caballero:아저씨)’들도, ‘마라 살리네스’의 내륙 천일염전에서 나온 소금을 파는‘아부엘라(abuela:할머니)’들도 장날만큼은 장터 음식점의 나무로 만든 긴 간이의자에 앉아 얼큰하게 안데스의 막걸리‘치차 ’도 한 잔 마시고, 평소 집에서 해 먹지 못하는 음식들도 사먹고, 평소 만나지 못하는 친지도 만나고, 인근 마을로 시집간 딸네미도 만나 수다 떨 수 있는 곳, 사람구경 장 구경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 곳, 사람냄새와 독특한 안데스문화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 내가 사는‘이즈쿠차카’의 장날이 아닌가한다.
첫댓글 과일의 생김과 맛을
직접 먹어 보는것 같이
잘 설명하였네
감사합니다. 혼자 고군분투 수고가 많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