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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 뿐냐담모 지음
김 한 상 옮김
고요한 소리
Letter From Māra
Ajahn Puṇṇadhammo
(The Wheel Publication No. 461)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2006.
아잔 뿐냐담모(Ajahn Puṇṇadhammo 1955~)
1979년에 불교에 입문하였고 1990년 태국에서 출가하여 1995년까지 태국 냐나짜트 사원에서 수행하였다. 현재 캐나다 온타리오 주〈Arrow River Forest Hermitage〉의 선원장.
마라의 전투부대들
너의 첫 번째 부대는 ‘감관적 욕망’이고, 둘째는 ‘권태’이며, 그리고는 ‘기갈’이 셋째를 이루고, ‘갈애’가 이 대열에서 네 번째이며 다섯 번째는 ‘해태와 혼침’이고, ‘공포’가 여섯 번째를 차지하는 한편, ‘의혹’이 일곱 번째이고, 여덟 번째는 ‘완고함’과 그 짝이 된 ‘적의’이다.
그 위에 ‘이익, 명예와 명성’ 그리고 ‘도리에 벗어나게 얻은 평판’, ‘자화자찬과 남 헐뜯음’― 이들이 너의 부대들이다, 나무찌2)여. 이들이 사악한 자3)의 전투부대들이다. 누구도 아닌 참 용자(勇者)만이 그들을 무찔러 승리가 주는 지복(至福)을 누리게 될 것이다.⟪숫따니빠따⟫III품 2경(냐나몰리스님영역(英譯)⟪부처님의생애Life of the Buddha⟫20쪽)
2) [역주] 마라의 다른 이름. 원어 Namuci는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자’ 즉 ‘해탈을 방해하는 자’라는 뜻으로, 아무도 그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는 의미이다.
3) [역주] 마라의 또 다른 이름. 원어 Kaṇha는 ‘어두운 자’, ‘검은 자’, 즉 ‘사악한 자’라는 뜻이다.
서 문
저 까마득히 요원한 곳에 우주의 온 천상계를 통틀어 가장 가슴 설레도록 현란한 환락의 동산이 있다. 이 광대무변한 우주 저 편 어딘가에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환희의 동산4)이 있다. 기화요초 만발한 그 동산을 걱정 근심이라고는 없는 아리따운 천인천녀들이 즐겁게 노닌다. 현란한 색깔과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새와 나비들이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는 황금빛 잎사귀들 사이로 한가롭게 날갯짓을 한다. 경사가 완만한 구릉 너머 저 멀리 바위언덕 위에 그림 같은 성채가 하나 우뚝 서있다.
4) [역주] 환희의 동산(Nandanavana)은 즐거움의 숲이라는 의미에서 환희원(歡喜苑), 환림원(歡林苑)이라고도 한다. 각 천상마다 있다는 천신들이 노는 동산.
휘감겨 돌며 솟아오른 성탑과 미로 같은 성벽의 기하학적 구조, 그리고 황금 지붕과 갖은 보석을 박아 치장한 외벽에 희고 매끄러운 돌을 다듬어만든 이무깃돌 등 온갖 조형물이 어우러진 그 성채는 웅장하면서도 호화롭기 그지없다. 성채 꼭대기에 호사스러우면서도 중후하게 치장된 방이 하나 자리하고 있는데 사무실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귀한 목재를 정교하게 짜 맞춘 육중한 책상이 놓여 있고 그 뒤에 귀공자풍의 한 인물이 푹신한 가죽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아 있다. 그는 키가 크고 미남이다. 옷은 나무랄데 없이 깔끔하게 잘 차려 입었다.
그의 차림새는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도 미적 감각을 잘 살렸다. 태도는 세련되고 상냥하다. 이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미모의 천녀가 그의 옆 낮은 의자에 앉아 손톱을 다듬어주고 있다. 책상 맞은편에는 비서 임무를 맡은 또 다른 천녀가 그의 지시를 받아 쓸 준비를 하고 앉아 있다.
이 책상 앞에 앉은 존재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거대한 화면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화면은 어린 천인들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광경을 비추고 있다. 부성애 가득한 눈길로 한동안 화면을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여비서를 부른다.
“공문을 하나 하달해야겠으니 문서를 작성할 준비를 하시오. 커피도 한 잔 가져다주겠소? 그동안 나는 내 왕국을 좀 돌아봐야겠소.”
손톱 다듬던 천녀가 도구를 챙기고는 눈웃음을 던지며 물러난다. 그가 바로 욕계5)의 군주, 마라6)이다. 여비서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커피 제조기 쪽으로 다가가는 동안 욕계의 제왕은일을 시작하기 전 재미삼아 욕계시찰을 해보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방금 잘 다듬어진 손으로 일각수(一角獸) 뿔에 루비버튼을 박은 컴퓨터 마우스를 잡고 능숙하게 새 창을 연다.
5) [역주] 욕계(kāma-loka)는 삼계(三界) 중 감각적 쾌락인 오욕(五慾)이 주가 되는 세계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사악도(四惡道)와 인간계, 천상계[六欲天]가 모두 포함된다.
6) [역주] 마라(Māra)는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에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사악함의 의인화 혹은 상징화된 존재로서의 마라, 천인으로서의 마라, 그리고 세속적인 모든 존재로서의 마라 등이 그것이다. (1)사악함의 화신으로서의 마라는 빠삐만[波旬Pāpimant]으로 불리는데 사악한 자, 악마(惡魔)라는 뜻이다. 또 나무찌(Namuci)라고도 하는데 해탈을 방해하는 자라는 뜻이다. (2)신으로서의 마라는 욕계(欲界)의 최상천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이다. 그는 중생들이 욕계를 못 벗어나도록 방해하는 신이라고 한다. 이런 마라는 범천(梵天)이나 인드라신(神)처럼 대단한 위력을 가졌으며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3)그리고 경에 따라서는 세속적인 모든 존재 즉 열반(涅槃)이 아닌 모든 것은 마라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상응부》에서는 오온(五蘊)을 마라라고도 기술하는 등, 마라는 실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세속적인 모든 것은 마라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말하자면 예류과 이상의 성자가 되기 전에는 항상 마라의 감시영역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런저런 것을 모두 포함하여 마라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것은 각각 ➀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➁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➂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④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⑤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이다.
마라는 자신의 통치권에 속하는 여러 천상계들부터 차례로 살핀다. 그곳은 천인천녀들이 기화요초 만발한 공원과 동산에서 밤낮없이 어우러져 놀이판을 벌여대고, 천상의 수레를 휘몰아 이 잔치판에서 저 잔치판으로 또 이 축제장에서 저 연회장으로 전전하며 끝없이 유희를 즐기는 세계이다. 화려한 비단옷에 영락(瓔珞)으로 장식한 화관을 쓰고 갖가지 보석장신구들로 치장한 천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미모에 도취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악공들의 감미로운 천상음악과 아름다운 천녀들의 고혹적인 춤이 영겁을 거듭하며 쉼 없이 이어진다. 그런 와중에도 가끔씩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가 퍽하고 불이 나가듯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하나씩 사라진다.7) 대부분의 천인들은 그런 일 따위에 별반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만, 사려 깊은 이들은 그럴 때마다 잠시 숨을 멈추고 눈을 한두 번 쯤 깜박여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도 이내 그런 의기소침함을 벗어나 다시 신나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7) [역주] 주석서(SA.i.88f.; DA.iii.750; MA.i.190f)에 따르면 수브라흐마(Subrahma)라는 삼십삼천의 천인이 하루는 1천명의 요정들을 거느리고 ‘환희의 동산’으로 놀러 갔다. 5백 명의 요정들은 나무아래에 앉아 있었고, 다른 5백 명의 요정들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화환을 던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나무 위에 있던 5백 명의 요정들은 순식간에 사라져서 무간지옥에 태어났다. 수브라흐마는 사라진 5백 명의 요정들이 모두 무간지옥에 태어난 것을 보고 자기 운명을 들여다보니 자신도 7일밖에 더 살 수 없음을 알았다.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인 수브라흐마는 위안을 얻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가 법문을 듣고 예류과를 성취했다.
“이런 귀여운 내 백성들, 어찌 저리 놀기를 좋아할꼬! 그런데 저기 몇 녀석들은 별로 신이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다시 마우스를 가볍게 클릭하자 이번에는 축생계가 나타난다. 화면 속의 축생들은 끝없이 쫓고 쫓기고, 잡아먹고 잡아먹히고, 짝을 짓고 새끼를 낳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덫에 걸리고 추위와 더위로 죽는 등, 그들은 순식간에 존재로 나타났다 덧없이 사라져버린다. 다시 화면이 바뀐다. 음습하고 어두운 아귀계가 나타난다. 거칠고 추한 몰골을 한 아귀들이 울부짖고 탄식하며 정처 없이 헤매는 모습이 화면에 가득하다. 그들은 대부분남산만한 배에 조막만한 머리를 가진 흉측한 몰골이며, 개중에는 해골 형상을 한 존재들도 있다.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를 부여잡고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무리들의 모습이 마라 역시 애처로운지 얼른 마우스를 누른다.
이번에는 지옥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불과 고통의 세계, 형언할 수 없는 잔인성과 공포의 세계, 거기서 존재들은 벌겋게 달궈진 쇠꼬챙이에 꿰여있거나 이글거리는 불구덩이 속에 던져졌다가 다시 갈고리에 낚여 올라온다. 무쇠솥 속에서 끓여지고 칼로 다져진다. 마라의 입술이 약간 일그러진다.
때마침 여비서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와 마라에게 건넨다. 몸무림 치는 존재들 한 무리가 시 뻘겋게 단 석탄구덩이 속으로 떨어져가는 모양을 보면서 커피 잔을 우아하게 받아든다. 여비서가 화면을 보고 천녀답게 입을 예쁘게 삐죽거린다.
“너무 끔찍하네요, 마라. 왜 저런 끔찍한 곳을 그냥 놔두시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요.”
마라가 검은 눈썹을 치뜬다.
“뭐라고? 마치 내 과실인양 말하는구려. 지옥은 솔직히 내 마음에 드는 보처(補處)8)가 아니요. 나도 저 비참한 존재들이 제 푼수에 맞게 살 만큼의 양식이라도 지녔으면 싶어. 그러나 저들이 한사코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데야 난들 어쩌겠어. 천상이든 지옥이든 실은 모두 자기네가 벌인 잔치놀음이지. 나는 다만 그들이 욕계 중생살이의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가치를 알아차리도록 도와주어 문제를 쉽게 만들고 있는 것뿐인 걸. 흠, 그런데 자네 커피는 언제 마셔도 자네처럼 질리질 않으니 이건 또 무슨 까닭일꼬?”
“아이, 짓궂으시기는……. 그나저나 이제 제발 화면을 다른 데로 좀 돌리세요.”
마라가 눈살을 찌푸린 채 마우스를 클릭한다. 바뀐 장면에 천녀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와, 이번엔 인간계네! 정말 재밌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 어린9) 사람들 노는 모습은..”
8) [역주] 보처(補處): 인간계가 중심이고 그 나머지는 인간일 때 지은 업의 뒤처리를 하는 곳이므로 보처가 됨.
9) [역주] 어린 : 원문에는 little. 신들의 긴 수명에 비하면 인간은 고작 100살 정도밖에 살지 못하니 갓난아기나 다름없겠다.
마라는 좀 더 깊이 이마를 찌푸리며 명멸(明滅)하는 영상들을 자세히 살핀다. 지하철 승강장을 바삐 오가는 행인들, 넋 잃고 텔레비전을 보며 앉아있는 일가족들, 거리에서 호객하는 매춘부들, 마을을 불태우는 군인들. 마라는 생각에 잠긴 채 커피를 홀짝인다.
“아주 좋았어. 역시 인간계는 대체로 내 뜻대로 잘 돌아가 준단 말이야! 내 백성다워…….”
화면은 어느새 뒤뚱거리는 닭 몇 마리와 비루먹은 개들이 어슬렁대고 있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거리로 바뀌어 있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소년이 코뚜레 꿴 물소를 끌고 지나가는 길 옆 망고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축 늘어져 기대앉아 담배를 빨고 있다.
“그런데 저기 조그만 틈이 있네. 성가시게시리.”
이제 화면의 오른편 위에서 왼편 아래쪽으로 사선을 그리며 가사를 걸친 인물들이 줄을 지어 눈을 아래로 향한 채 조용히 걷고 있다. 몇몇 노부인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스님들의 발우에 찰밥덩이를 경건하게 담는다.
“정말 성가신 일이군. 다행히 새는 틈이 작긴 하지만 크나 작으나 중단시키자면 한참 바빠져야 하는 건 매한 가지니 말이지. 너무 많은 존재들이 내 그물을 빠져나가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안 그렇소? 만약에 대윤회의 세계가 고갈돼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땐 우리는 어디서 살지? 자, 시작해볼까. 이리와요. 내가 각 부대 사령관들에게 보낼 공문을 구술할 테니 내 무릎에/내 옆에 앉아 받아써요”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발신 : 마라 나무찌 대왕
수신 : 전(全) 마군사령관
작전대상 지역 : 인간계, 태양계, 지구
안건 : 현 상황 및 향후 역점사업
일자 : 현(現) 불기(佛紀) 26세기10)
친애하는 나의 군사령관들이여! 충성스러운 그대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이 자리를 빌어 치하해 마지않노라. 모두 주지하고 있듯이 우리의 웅대한 전략은 전반적으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의 자그마한 놀이터인 윤회계를 방황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자신들이 처한 곤경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런 어리석은 인간들이 앞으로도 우리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0) [역주] 서기 2010년은 불기 2554년으로 26세기임.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뭐라 불러야 할까. 매우 영리한 물고기랄까, 그 한 마리가 우리의 그물을 뚫고 나갔던 사건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본인은 그 엄청난 실책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그대들도 군사훈련을 통해 그 내용을 모두 숙지했을 것이니 이 자리에서 다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당시에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내 딸들의 유혹의 춤11)으로도 그를 흔들 수 없었고, 나 스스로도 끔찍할 정도로 가공스런 형상을 지어 협박도 해봤지만 그에게만은 소용이 없었다. 더 참담한 것은 그가 우리의 작은 게임(윤회)의 본질을 확실히 꿰뚫어본 이후에라도 내가 그를 설득해서 그 비밀을 혼자만 알고 발설하지 못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로선 당시 그를 거의 납득시킨 줄 알았었다.
이미 지난 일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한 번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이후에도 인간들의 탈출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큰 문제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의 여러 징후들로 미루어 그 구멍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있다. 우리 그물에 갇힌 어린 물고기들로선 그 그물 밖에 진정한 행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들이 종국에는 통조림이 될 운명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도록 그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내모는 일만 계속하면 된다.
11) [역주] 마라의 세 딸은 딴하(Taṇhā 갈애), 아라띠(Arati 권태로움, 혐오), 라가(Rāga탐욕)로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기 직전 앞에 나타나 득도를 방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의 충성스런 군지휘관들이여! 나는 이 자리를 빌어 그대들의 성공적인 임무수행을 치하하며, 앞으로도 각자 맡은 바 임무수행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재삼 당부하는 바이다. 오늘은 그러한 우리의 다짐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각 부대별로 차례차례 임무점검을 해보기로 한다.
제1군 -「감관적 욕망」부대
그대들이야말로 나의 제1군으로 칭송받아 마땅한 용사들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대들만으로도 능히 통제 가능하다. 제1군 예하 5개 사단, 즉 시각 사단, 청각 사단, 후각 사단, 미각 사단, 촉각 사단들은 각각 보유하고 있는 감관적 쾌락의 마력으로 우리의 희생물들을 공격하라.12) 존재들은 너희들 곁에 오고 싶어 자신들의 일생을 다 바치고 있다. 너희들의 희생 제물은 기꺼이, 그리고 앞 다투어 제단에 오를 것이다.
12) [역주] 이를 오욕락(五慾樂), 또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고 한다. 감각적 욕망(kāma)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으로 인식되는 대상들 즉 형상[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을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고, 사랑스러워하고, 달콤해 하고, 매혹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공격의 고삐를 늦춰서는 아니 된다. 우리끼리야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우리가 무기로 쓰는 상품이 겉만 번지르르한 허장성세일 뿐이라는 사실을 저들이 눈치 챌 위험성은 늘 있다. 감관적 쾌락이라는 것이 실은 전적으로 불만족스럽고 실체 없는 가공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짜낸다한들 이처럼 완벽할 정도로 만족스럽고, 지속적이며 견고한 쾌락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절대다수의 인간들이 아직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바보 같은 저 어린 녀석들은 모두 자신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쾌락은 불완전할 뿐, 그 어디에선가 자신들을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요술지팡이를 어떻게든 찾게 될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인데도 막상 그들은 이런 것을 골똘히 파고들지를 않는다. 그들은 당장에 좋은 것만 생각하지 앞으로 닥쳐올 결과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그 어리석은 자들이 계속 한 눈 팔며 즐기는 일만 일삼도록 몰아가기만 하면 된다. 인간들이 싫증내는 기색을 보이는 즉시 새 미끼를 계속 던져주는 것이다. 그리고 성욕과 식욕처럼 기왕에 그 효력이 입증된 미끼들도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변형시키고 새로운 맛을 더해 주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친애하는 나의 군사들이여, 그대들의 임무수행이 지금까지 성공적이었음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성욕을 예로 들어보자.
성욕이야말로 우리가 10억년이 넘게 줄기차게 써먹은 최상의 무기이다. 그 단순한 생물학적 작용 속에 창조적 활용 가능성이 무한히 내재되어 있다. 그건 정말 얼마나 멋진 속임수인가! 그들이 그처럼 열광해 마지않는 기이하고 놀라운 변화, 그것도 따지고 보면, 감정의 흐름이라는 전류를 약간의 잔재주를 부려서 배선(配線)해놓는 일과 간단한 육체적 접촉의 설치 이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달리 말하면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일은 섹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부수되는 온갖 주변적인 일들인 것이다. 즉 온갖 기대와 그에 따른 준비행위들, 온갖 액세서리들 그리고 감정적 잡동사니들. 다행히도 세상에는 대부분의 인간들을 평생 매달리게 하고도 남을 만큼 이따위 시시한 소재들이 무궁무진하고, 게다가 우리는 한 생애 단 한번 정도만 관여해주면 족하다. 그들은 같은 것을 더 누려보겠다고 계속 되돌아올 테니까.. 어디 안돌아오고 배기나 두고 보자?
나는 근래 이 분야에서 우리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특별히 밝혀두고 싶다. 과학기술이 바로 그 대표적이고 소중한 자산이다. 은판사진술13)을 쓸 줄 알게 되자마자 그들은 여자의 나신부터 마구 찍어대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컬러 사진술과 영화와 비디오 기술까지 개발하게끔 만들었다.
그 결과 인간들은 성적욕구를 충동질하는 이미지들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그런 자료들이 무차별로 뿌려지고 있으니,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은밀히 그런 것들을 찾아다닐 필요조차 없어졌다. (나도 웹페이지 하나쯤은 가져야 될지 모르겠다. 아니 아니지, 그런 귀찮은 일을 자초할 필요야 없겠지.)
13) [역주] 은판사진술(銀板寫眞術)은 1837년 프랑스의 다게르가 발명한 은판위에 물체의 모습을 고정시키는 방식의 최초 사진술이다.
과학기술 자체가 크게는 감각적 욕망의 산물이다. 좀 더 편리하려는 또 쾌락을 쉽게 얻으려는 인간들의 욕망 때문에 여러 발명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술이 그들의 경제 전반을 운전하여 가뜩이나 짧은 인간들의 삶을 더욱 눈코 뜰 새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들은 원한다. 아니 필요하다고 믿어 버린다. 자동차가, 스테레오가, 컴퓨터가, 그리고는 다시 더 새로운 자동차가, 더 새로운 스테레오가, 더 새로운 컴퓨터가…….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이따위 갖가지 기계장치들에 계속 욕심내도록 만들어 놓기만 하면 된다. 일이 많아질수록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은 줄어들 테니까.
우리의 대(大)적수14)의 가르침이야말로 이렇게 원대한 우리 사업의 유일하고 중대한 장애물이다. 그는 감관적 쾌락에 내재된 위험성을 인간들에게 거듭거듭 경고했다. 그러니 우리라고 그런 대적수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우리는 여러 세기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그가 설파한 진리에 갖가지 엉터리 가르침을 뒤섞고 마침내 그들이 바른 법[正法]을 찾기 어렵도록 만드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14) [역주] 부처님을 가리킨다.
또한 인간들 중에는 ‘스승’을 자칭하고 나서는 자들이 많은데, 그들 대부분은 신나서 우리 이론을 자기 말인 듯 떠들고 다니는 자들이다. 그 용감한 자들은 출리(出離)15)의 개념을 흐려놓는 데 만족하지 않고, “열정 그 자체가 바로 깨달음이다.”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서슴없이 펼친다. 게다가 세상에는 그런 미끼를 좋아하는 물고기들 또한 무수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밖에!
15) [역주] 출리(出離nekkhamma): 감각적, 세속적 욕망(kāma)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십바라밀 가운데 하나이며 팔정도의 정사유(正思惟)에 포함된다.
만약 인간들이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하거나 아니면 좀 더 고약하게도 욕망을 자제하고 명상 수행까지 행하는 불행한 상황이 닥친다해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자칫 그런 상황을 방치하다가는 그들이 정말 우리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길을 찾아내는 위험천만한 사태까지도 벌어질 수 있다. 그들이 우리의 속임수에 의한 것이 아닌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상황에 이르기 전에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그들의 주의를 산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혹시 그들이 수행을 한답시고 조용히 앉더라도 적어도 한 동안은 그 마음을 딴 곳을 헤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그 대상이 불선한 것일지라도 잠시라도 집중된 마음은 그 대상을 영상화하고 붙잡게 되는데, 이렇게 생겨난 공상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실로 유용한 무기이다. 저들이 자신들의 신체의 참된 본성을 관찰하는 단계16)에 이르도록 방치해둬서는 안 된다.
16) [역주] 몸에 관한 마음챙김(kāyagatā sati)을 뜻한다. 《염신경》〈금구의 말씀〉(고요한소리 간행) 참조.
그대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백치가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끌고 다니는 살덩어리 몸뚱이가 본질적으로 불결하고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겨우 남들과 잘 어울리고 싶어 그 냄새나는 몸뚱이를 쉬지 않고 씻어대고 향수까지 뿌려댄다! 그렇게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소위 특정 모습을 ‘아름다움’이라고 강조하는 고도의 술수를 써서 인간들의 관심을 늘 자기 외모에나 두도록 만들면 된다. 그거야말로 참으로 손쉽고 효과적인 계략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몸에 관한 마음챙김을 하지 못하도록 세상의 온갖 풍설을 속삭여주는 일을 등한히 해선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몸의 추함에 대한 명상(부정관)17)은 ‘생의 부정이요, 극도의 긴장이며 억압적’이라고 속삭이라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바로 그런 말이니, 이보다 더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에게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세간과 출세간)를 잡을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을 줘야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 방법들이 일단 먹혀들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명상이든 뭐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라. 두 가지 중에 어느 것도 버려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 그들은 여전히 우리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다.
마라는 팔을 올려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다음 편지를 구상한다. 잠시 휴식의 틈이 생기자 (냉큼 마라의 무릎에서 미끄러져 내린) 여비서가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무선 마우스를 움켜쥔다.
17) [역주] 부정관(不淨觀asubha-bhāvanā): 몸의 서른한 가지 부분을 관찰하여 이 몸이 여러 가지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달아 몸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지도록 수행하는 방법으로 몸에 관한 마음챙김(kāyagatā sati)의 한 수행법이다. 또한 몸에 관한 마음챙김에는 시체가 변해가는 과정에 대한 명상법이 있는데 이는 시체가 부풀고 문드러져가다가 결국 해골로 되어가는 것을 관상하면서 ‘이 몸도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는 수행법이다.
“마라님은 제1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그녀는 연신 마우스를 클릭해 화면을 바꿔가며 천인천녀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핀다. 그러다 백조가 늘씬한 목에 천상의 감로수병을 걸고 우아한 자태로 떠다니는 연못가에서 멋쟁이 천인들이 노니는 장면에 화면을 고정시킨다. 재미있게 뛰놀던 천인들이 이따금 감로수를 마시러 다가서기라도 하면 백조들이 장난스럽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날아오른다.
“어떻게 즐기는 게 재미있는 건지 마라님은 정말 잘 아시네요!”
마라가 음흉하게 대답한다.
“허허, 그걸 이제야 알았소? 그래, 아무리 제1군이 강력하다고 해도 만사불여튼튼이라 했으니 지원군을 보내서 나쁠 게 없겠지.”
여비서는 어느새 천인들의 놀이판에도 싫증이 났는지 또 다른 세상들을 향해 점점 빨리 마우스를 클릭한다. 마라가 그런 그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자, 이제 그쯤 해두고 다시 일을 시작해요…….”
_(계 속)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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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을 그 철옹성과도 같은 마라의 전투부대로부터 지켜내고 보훈할 수 있을지 깊이 새겨보자는 취지에서 이 글을 연재합니다.
엊그제 봄인듯 하더니
벌써 초여름이 성큼 ~
마음은 뜯겨진 달력만큼 철렁~
TV나 스맛폰 즐기며 볼땐
마라1군 시각사단에 지배을 받는
순간이라 알게 되면 좀 철렁 할라나요.
경전으로 볼때 못 느꼈던 경각심을
새롭게 느끼는건
21세기 언어로 풀어논 탁월함인것 같아 감탄 하면서 읽었습니다.
실상을 보지 못하게 눈과 귀를 가리는
내적/외적 속삭임이 다
어디서 비롯됨인지 잘 사유해야겠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이책을 많은 이들이 읽을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네~, 지난 몇일 지속된 사유가 이 글을 게재하도록 이끌어주더군요.
사실 이 손(hand/手)문고 책자를 보유한지는 꽤 오래되었건만 한번도 읽어보지도 못하고 있던 참에 불현듯 6월의 '보훈'이라는 단어와 매치되면서 책꽂이에서 꺼내들었죠. 아직도 다는 못읽어본 상태로서 이곳에 게재되는 만큼씩 읽어보면서 올릴 예정입니다.
그렇더군요, 저 또한 푸른숲님의 말씀따나 '21세기 언어로 풀어논 탁월함인것 같아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Dhammacitta 실상을 보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가리게 하는 그 철옹성과도 같은 마라의 전투부대를 붕괴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하고 수승한 부처님의 사띠수행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 것 같으면 오직 알아차림밖에 없으며 그래서 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이 수행을 할 것 같으면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아는 위빠사나 지혜와 아라한의 도과지혜를 체득한다고 하셨습니다. 쉐우민 큰 사야도께서도 '알아차림이 있고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이 두 가지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알아차림 하나만 끈질기게 사용하면 마지막에는 열반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두사두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