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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의 복음(눅 2:21-39)
교회 역사가 시작된 후 약 천여년 동안은 대림절은 그리스도 오심에 대한 다만 순수한 대 망의 뜻에서 기쁨으로 지켜왔다. 그런데 12세기 경부터 그리스도의 대림이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즉 그리스도의 대림은 과거에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역사적 사건으 로 이해하고 현재에서는 신자들의 마음에 은혜로 찾아 오시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마지막 심 판날에는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사건으로 해석하게 된다. 대림절기에 참회를 하고 신앙적인 새결단을 하게하는 풍습이 생긴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는 대림 을 이와같은 3중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신앙의 정서와 삶의 현 장에는 추수감사절이 끝나고 시작되는 대림절 초반부터 모든 것이 상업화되고 사회는 이로 인하여 크게 상혼을 불러 일으켜 장사소득의 방법으로 취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케롤과 장 식품들로 요란해진다. 오늘날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부터 벌써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유혹 들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정작 기쁨의 최고의 구주탄일의 참된 의미는 정령 크리스마스날에 는 무의미하게 되고 허탈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대림절의 의미 찾기는 뜻있는 일이라 생각 한다. 한마디로 대림절의 그 뜻을 헤아려 본다면 "그리스도가 오셨고, 오시고 있고, 오실 것 이다"라는 대림절 메시지에 모두 담겨져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대강절을 지키는 의미는 이미 2천년 전에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그 리스도의 구주탄일을 회상하면서 또다시 우리들의 마음속에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며 또한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고 있는 불신의 세계와 역사 속에 임재해 주실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그리고 앞으로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계절로 지키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감격과 기쁨이다. 말구 유 같은 우리의 더러운 마음에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구주성탄절은 사망과 어두운 그늘 밑에 앉아있던 우리들에게 빛을 비춰 주시고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벅찬 가슴으로 살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계절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뜻을 깨닫고 어려운 이 시대를 용기와 기쁨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메시지를 선포하는 계절이다. 말씀의 선포뿐 만 아니라 말씀이 성육신 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눈길을 소외된 자들에게 돌리고 아직도 어 두움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는 계절 이 되어야 한다.
처음오신 그리스도는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 나 이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만난 그리스도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초림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로 오셨으나 재림의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로 오시게 된다. 초 림의 주님의 초라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주의 당당한 모습을 말씀 하고 있다. 재림하실 주님은 심판이 주 업무임을 말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래 인간들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안과 불신 그리고 불 확실성이라는 삼불(三不)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고통과 사망으로부 터 해탈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해 왔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으로의 복귀, 즉 하나님께 나가기를 희구해 온 것이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희구와 노력이 바로 종교의 형태를 지니고 나타났고 갖가지의 종교가 이 땅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불 안의 시대'라는 것을 핵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 지 못할 것이다. 폴틸리히(P. Tillich)는 '존재의 불안, 양심의 불안, 죽음의 불안'이 그것이 며 더욱이 종말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다고 했다. 인구의 폭발, 환경의 오염, 자 원의 고갈, 그리고 핵무기의 공포에 위협을 느낀 과학자들을 비롯해서 현대 지성인들이 '앞 으로 100년을 존속하기 어려우리라'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갖는다. 그래서 EC당국은 이에 '아이는 둘만 낳고, 기술대신에 예술을 숭상하고, 개발 대신에 자원을 아끼고, 그리고 난 다음 역사의 종말을 잊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기쁨에 즐겁게 찬송 부르면서 기다린 두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시므온이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게 메시야가 올 때까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인물이다. 또 한 사람의 노인은 안나이다. 그는 결혼 한지 7년만에 과부 가 되어 84년 동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 고 기뻐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가 예수를 영 접한 사람들이다. 오늘의 신앙인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일관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간의 약속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는 약속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에 더욱 초 점을 둔 것이다. 등불을 밝히고 기다리는 신앙을 성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2000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푸대접 하고 말았다. 정녕 그가 이 땅위에 오셨는데 그를 마구간에 모시게 된 푸대접은 기다림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만민을 구원할 구주로 오신 예수와 죄인을 불러 친구로 삼아 죄 사함 받게 하시고 섬기는 종으로 고요하게 오시는 예수를 그들은 기대밖에 두고 있었기에 구주 오심의 의미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구약 역사 전체는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역사이다. 그 약속이나 예언이 모두 예수의 오 심을 두고 한 말이다. 약속은 기다림이고 구주탄일은 오심이며 예언은 기다림이고 허락은 오심이며 율법은 기다림이고 복음은 오심이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2세기 동안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특별한 축제로서 알려진 것이 없었 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 확장시기에 교회의 강조 점을 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12월 25일이 축제일로 받아들여지고 확정된 것은 4세기경이다. 2천년의 세기말 에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의미를 새기며,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하여 주실 것을 기다리며,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 부하고 있는 불신의 세계와 역사 속에 임재하여 주실 '좋은 소식'의 메시지를 증거 하는 것 은 오늘의 선교의 사명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나심을 '좋은 소식'으로 알고 고백하는 삶의 현장이 되기를 간구 하는 마음으로 대림절을 맞이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그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적인 지위에 대한 압도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량없는 구원의 축복이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 는 값없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그 분이 그 백성들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비밀 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에 구원을 가져다준다. 즉 그것은 하나님 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불 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은혜스러운 구원의 행위인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 준다. 의인 즉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스럽고 거져 주 시는 사면을 강조하는 것이 특히 바울의 복음 메시지에 나타난 특징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된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화해를 이루셨고 평화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려 오셨기 때문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복음의 시작'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이 평화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를 세상에 보내시어 성령 의 능력을 힘입어 온 세계에 평화와 화해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우선 적인 존재 이유는 이 좋은 소식을 증거 하는 것이다.
이제 대강절의 메시지는 예언의 성취와 준비와 기다림에 초점을 맞추고 재림을 대망 하는 자에게 회개와 참회를 강조한다. 이것은 새 천년의 대림절을 지키는 자리에 초대교회가 사 순절과 함께 참회의 절기로 지키면서 복음의 증인 사역 의미를 새 천년의 교회가 다시 구현 해가야 한다.
대림절의 의미(요 10:7-15)
1. 예수님은 양의 문으로 오셨습니다.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특히 “나는-이다”라는 구절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신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예수님의 신성을 차별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이란 출입하는 곳이며 침입자나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우리로 인도하는 목자처럼 인생을 바르게 인도하시고 인생을 도적 같은 거짓 교사들에게서 지키시는 목자이십니다. 양은 우둔하고 고집이 세지만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양과 목자는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는 교회를 “문”은 그리스도를 “양”은 신자를 “목자”는 목사를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가면 예수님은 안전과 자유를 주시고 풍성하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2. 예수님은 양으로 하여금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1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도둑”은 거짓종교의 거짓 선지자를 가리키며 거짓선지자는 사람을 미혹해서 마음을 도적질하고 영적으로 죽게하며 결국 멸망케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는 사람들을 미혹해서 그의 마음을 도적질하고 영혼을 고갈시키며 결국 인생을 멸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인생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공급받고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곳입니다. 러시아의 문호였던 톨스토이가 인생의 고뇌와 갈등 때문에 자살을 결심하고 집을 나와서 배회하다가 교회 앞을 지나다가 문득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나 하고 죽자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들어왔다가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자살을 포기하고 기독교적 사상과 가치관에 입각한 소설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3.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인생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려고 오셨습니다.11절에 “나는 선한목자라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인생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류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 값을 속량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이 대속의 죽음이요, 속죄의 죽음입니다. 인류는 아담이래로 불순종한 죄인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과 이웃의 죄를 속죄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이 자신과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양이나 소를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일시적으로 속죄가 이루어지지만 완전한 속죄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친히 속죄제물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으로 오셨고, 더 풍성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으며 선한 목자로서 인생들의 죄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랑의 계절을 만들자(요일 4:10-11)
벌써 11월이 끝나가고 12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카렌더가 덩그렇게 벽에 걸려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해도 며칠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의 빠름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되는 한편 지나간 한 해 동안에 허락되었던 귀중한 순간을 무의미하게 허송하여 버리지나 않았는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과 자책감이 앞서기도 합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지금은 대강절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이 대강절을 다른 말로는 대림절, 또는 강림절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대강절을 한마디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를 말합니다. 우리는 기다림의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주께서 이 세상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성탄절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성스러운 성탄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 성탄은 지금부터 약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예수라는 한 인간이 탄생하였다는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데 만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한 역사적인 사실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왔으며 또 현대적으로 무엇을 가져오고 있는가 하는 데에 더 심오한 뜻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그 예수가 지금도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그의 뜻을 따르는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그저 선물이나 받고 흥에 겨워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죠.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성탄절은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다리는 날입니다. 그래서인지 약삭빠른 사람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크리스마스를 중심으로 큰돈을 벌기 위해 용품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크리스마스를 미리 준비합니다. 그러나 정작 믿는 사람들은 캐롤이 들려야, 문방구에서 카드를 팔아야,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야 ‘와! 이제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구나’하며 그제서야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먼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이 아니라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가, 그리고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다시 한번 기다리며 그 날을 준비하는 마음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만왕의 왕이시고 만유의 주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맞는 우리는 이 날의 의의를 살려서 이 날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의 마음 자리 가장 귀중한 곳에 모시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크리스마스는 무의미할 뿐더러 성탄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사람들끼리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크리스마스는 진정한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참된 크리스마스 행사는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성탄절날 들리는 새벽송의 찬양소리와 술취해서 비틀거리며 떠드는 소리의 차이점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오히려 성탄절은 경건해야 어울리는 절기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화되고 현실화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사랑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참 크리스마스를 지키려는 신자들의 자세일 것입니다. 아이들의 도덕 교과서에 보면 불교의 근본이념은 자비이고 기독교의 근본이념은 사랑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의 의미는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하튼 세상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보는 눈이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의 대부분이 사랑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남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축복된 계절에 우리도 주는 계절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사랑하면 할수록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줍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아까워서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아까워하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경우에는 주는 것이 기쁨이요, 보람이요 축복이요, 만족입니다. 주고 나서 아깝지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경제학적 원리에서 보면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주고 나면 나는 그만큼 적어지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주고 난 다음에 내가 더 풍부해졌다고 느끼게 되고 더 충만해졌다고 느껴집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주면 줄수록 나는 기쁨과 풍족감을 느낍니다.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극치에 도달하면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치게 됩니다.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것처럼,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지극히 작은사랑의 행위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결코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조그만 성의를 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로부터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작은사랑이 모아져서 큰사랑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하신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셨습니다. 성탄은 이러한 예수님의 강림의 목적과 정신을 되살려서 모든 크리스천들이 사랑의 사도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탄은 사랑의 계절이요, 그러기에 사랑을 주는 계절이 되어야 합니다.
1990년대 초에 시내 어느 교회에서 개최된 성탄절 준비 강습회에서 성탄절 장식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강사가 산타클로스를 교회의 성탄절 장식에서 제거해야 된다고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성탄절하면 어린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무엇을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산타클로스를 더 기다리기까지 되어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받고 카드를 받음으로 신이 나고 즐거워하는 계절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선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합니다.
이제는 받기만 하는 성탄이 아니라 주는 성탄이 되어야 하겠고 그래야 비로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성탄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탄의 정신입니다.
끝으로 내려오는 전설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하루는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산에 오르시게 되었습니다. 오르실 때 제자들에게 돌을 한 개씩 들고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돌 한 개씩을 들고 갔습니다. 가롯 유다는 계란 만한 것을 들고 올라가는데 그 뒤를 따르는 베드로는 큰돌을 들고 오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그것을 보고 비웃으면서 "무엇 하려고 그처럼 힘들여 바보같이 무거운 돌을 가지고 가느냐"고 하면서 자기의 계란 만한 작은 돌을 보여주며 현명한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산에 올라와서 얼마 있다가 점심때가 되어 주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원을 지어 앉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올라온 돌을 각각 자기 앞에 내어놓으라고 하셨고, 제자들 앞에는 작고 큰돌들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눈을 떠본즉 제자들 앞에 놓인 돌들이 모두 떡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 앞에는 한 입 밖에 안될 계란 만한 떡덩이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앉은 베드로 앞에는 큰 물동이 만한 떡덩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 떡을 떼어서 가롯 유다를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오늘과 같은 강림절처럼 힘들고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는 기다림과 준비함이지만 준비해야 한다는 것과 있는 것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어제는 이곳에서 김장을 하면서 겨울을 준비했습니다. 다행히 따뜻한 날씨 속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렇게 비록 힘들고 지루한 준비이지만 이제 우리는 성탄절을 준비하며,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강절 절기를 사랑의 계절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날을 위하여(마 24:29-44, 살전 4:13-5:8)
우리의 나라가 가난을 탈피하기 위하여 땀을 흘리던 60년대와 70년대에는 참으로 가슴아픈 사연이 너무도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상처를 씻지 못하고 있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어느 이웃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내집이라도 마련해 보겠다고 가족의 품을 떠나서 먼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내는 첫해는 남편의 귀국을 기다리면서 남편을 맞을 준비를 성실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해 두해 연장하면서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지친 아내는 어느 순간 남편과의 굳은 약속을 망각하고 탈선을 합니다. 어두운 사연을 벗어버리고 남편을 다시 맞을 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만을 되 뇌이면서 죄악의 깊은 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집을 사고도 남을 돈을 손에 쥐고 귀국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반겨줄 가정을 찾아 왔건만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는 남편의 귀국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아니했습니다. 용서를 받기에는 너무나 깊어진 상처였기에 그들은 기쁨의 만남을 이룩하지 못하고 영원한 남이 되어 오늘도 지내고 있습니다.
수많은 날을 고독과 싸우고 수많은 밤을 유혹과 싸우면서 누구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목적은 반갑고 감격에 찬 만남에 있습니다. 그 만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에는 인간의 행복이 안겨지고 그렇지 못할 때는, 그 만남자체가 너무나 슬픈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본문접근
오늘은 우리의 기독교에서 의미 깊게 시작하는 교회력의 첫 주일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오늘 대강절 첫 주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소중한 진리입니다.
그리스 반도 북쪽에 있는 마게도냐 수도이며 항구도시인 데살로니가에 세워진 교회의 식구들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반대한 그곳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은 기독교의 진리가 잘 못된 것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박해가 심하여지자 교인들 일부는 지극히 문란한 이방인들의 생활에 젖어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나 그 시기에 대한 확신도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그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 가르침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이 시간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우리의 쉬운 언어로 다음의 부분들을 다시 경청하십시다.
본문사역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어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기에 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태평세월을 노래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해산할 여자에게 닥치는 진통과 같아서 결코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암흑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그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주제접근
하나님이 바울을 통하여 주신 오늘 이 귀한 말씀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실 메시지는 바로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망각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주님의 오심이 어떠하리라고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현대의 기독교는 주님의 다시 오시는 재림에 대하여 서서히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설혹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오심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기되기를 바라는 마음들입니다. 전쟁과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진 시대에서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마르나타”를 부르짖으면서 그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주님 맞을 준비를 서두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식주가 해결이 되고 아쉬운 것이 없는 세상이 되기에 “주님 오시더라도 조금 있다가 오십시오”라는 신앙상태로 변질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빼버린다면 그 신앙은 소망이 없는 세상이요 인간 중심의 신앙이 되어 버립니다. 탈선을 일삼는 무책임한 그리스도인들로 타락을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수를 망각한 껍데기 만의 신앙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앙이 이 아침 다시 다짐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오늘의 물질문명에 도취되어 있다가 우리 주님 갑자기 오실 때에 주님 앞에 불림을 받지 못하고 완전히 실패한 성도들이 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고 주님 맞이할 준비와 자세를 확립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본론
먼저,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재림의 현장의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 주십니다.
(말씀)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노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어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니라.(4:14-17)
(해석)
많은 성도들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다시 오실 것인지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들은 이 재림과 심판의 날이 금방 있을 것으로 알고 언제나 강조하고 준비를 했으나 재림이 인간들의 생각대로 오지 않아서 때로는 실망을 하게 됐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오면 그 때 주님의 재림이 온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뜻대로 이룩되지 않은 이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일들로부터 지치게 되었고 오지도 않는 재림을 준비시킨다는 불만도 터뜨렸습니다.
그래서 언제인가 오겠지 하는 막연한 신앙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오는 날 그 때 가서 보기로 하고 재림에 대한 신앙은 잊혀진 사건으로 버려지기까지 되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어떤 이들은 이 신앙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주님의 재림은 예수 믿는 것으로 족하다고 반대의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적용)
사실, 주님의 재림을 믿는 뜨거운 신앙의 사람들도 적지 아니 하지만, 오늘의 20세기 후반에 와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수많은 회의와 불신이 만연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의 신학적인 조류가 어떻게 흐르던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세히 보면서 경청해야 합니다.
먼저 사도행전 1:11절의 사건과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 부활 후 40일째 되던 날.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시고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하늘로 올리어 가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자세히 쳐다봅니다. 그 때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반론을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구약 창세기의 노아 홍수 때도 똑같은 반응과 질문이 있었습니다.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고 타락을 하고 취하면서 노아가 나타나 하나님의 심판의 도래가 가까워 옴을 외쳤으나 아무도 “미친 영감의 소리라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누가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조롱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홍수는 왔고 비웃던 무리들은 전멸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예언을 구약에서 수백 년, 수천 년 전부터 있었으나 그들은 실감 있게 믿지 아니했습니다. 모두가 실의에 찬 채 메시야의 오실 것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웃기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던 때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사실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을 함께 동거 동락했던 제자들마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고 또 무슨 말씀인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연약한 소수의 연인들만이 그 말씀을 믿었을 뿐입니다. 주님은 역시 부활하였습니다.
재림, 우리 주님이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신약성서에서는 318회나 언급이 되어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신약의 이 말씀도 분명히 성취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시 오실 그 현장을 분명히 묘사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고 천사장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때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은 먼저 살아나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살아 있는 자는 변화된 몸으로 구름 속으로 이끌어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면서 주님 앞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현장을 다음과 같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다시 경청하십시다.
그 때에 인자가 올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날 터인데, 그 때에는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천사들을 큰 나팔 소리와 함께 보낼 것인데 그들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마 24:30-31)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도 믿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318회나 언급되어진 이 사실을 외면하고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으실 분이 아직도 있는지요. 우리 주님의 말씀이 어느 곳 어디에서 틀려 본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약속하신 미래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고 오늘을 사는 성도들만이 참된 기독교의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우리 주님은 다시 오시는 그 시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말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다”
(행1:7)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해석)
기독교의 역사에서 많은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성도들은 포기까지 합니다. 현대의 지성인들은 항의를 합니다. 무작정 그 날을 기다릴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막연한 가르침이 어디 있느냐 많은 비난과 도전과 불신을 합니다.
정말, 주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몇 년, 몇 월, 며칠이요 하면 얼마나 권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막상 그 시기를 인간이 알게 된다면 그 날을 위한 준비작업보다 그 직전까지 펼쳐질 죄악과 먹고 마시고 파괴하는 탈선이 오히려 더 심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그 날은 미지수에 놓고 한 날 한 날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정상입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 주님께서는 어렴풋이 그 때를 짐작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셔서 제자들과의 얘기를 나누신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 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십니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 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또 여러 번 난리가 일어나고 전쟁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당황하지 마라. 그런 일이 꼭 일어나고야 말 터이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한 민족이 일어나 다른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다른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터인데 이런 일들은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또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마태복음 24:4-7, 12-14)
(적용)
이 주님의 대답 가운데 모두가 오늘의 20세기 후반에서 더욱 뚜렷하게 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전쟁이 금방이라도 있을 것만 같은 소문이 늘 쉼 없이 들립니다. 기근과 지진의 지극히 변수적인 발생이 수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구의 기하급수적인 팽창은 미래의 식량을 염려하게 됩니다. 불법이 성한 것, 윤리 도덕의 피폐는 극치에 달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인륜의 타락은 벌써부터 나타났습니다.
말씀대로 말세의 시작입니다. 오직 단하나, 우리 주님의 말씀 중에 있던 사실이 이룩되지 않는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이 아직도 200여 종족에게 미처 전파가 되지 못한 사실입니다. 이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최대의 교통시설과 풍부한 선교의 지원은 그들에게 미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징조들이 보이자 세계의 도처에서는 재림의 일자를 설정하고 명예와 돈을 모으는 종교지도자들이 등장한 사례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는 이 장림이라는 사람이 다미 선교회를 조직하고 1992년 10월에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휴거가 있을 것이라 하여 나라 안팎을 시끄럽게 했습니다.
윌리엄 밀러라는 사람은 아주 유명한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843년에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설교했다. 밀러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1843년이 다가오자 광분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집을 팔고 농장과 소유물을 처분했고 웨스트포드라는 곳에서는 약 500명이 모여 흰옷을 입고 주님 오실 날을 기다렸다. 1842년 12월 31일 자정이 되었을 때 아모스(Crazy Amos)라는 늙은 술주정꾼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물 밖에서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그들이 모인 자리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고 주님 강림의 나팔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나가느라 여러 사람이 다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 재림에 관한 그릇된 예언은 밀러 사건으로 그치지 않았다.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였던 러셀(C. Russell)은 1874년에 주님의 재림이 있고 그 후에는 천년왕국이 계속된다고 또 한번 교회를 어지럽혔다. 한국에서도 길 선주 목사가 1922년 4월 29일 주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해서 한동안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켰다.
재림의 시기에 관한 성도들의 관심은 지대합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고 세상의 어떤 인간도 알 수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도 알 수 없습니다.
글쎄요. 도둑이 들어오는 날을 알 수 있었더라면 그 큰 손실을 당하겠습니까 탈선한 부인이 해외를 떠난 남편이 돌아올 시간을 정확히 알 수만 있었더라면 그 가정이 어찌 파탄이 왔겠습니까 불행히도 예고 없이 닥쳐온 주인이었기에 그 파멸에 이르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와 그 시기는 우리의 알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다”(행1:7)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셋째로, 문제는 그날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의 대답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너희는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5:6)
(해석)
주님을 신랑으로 생각하고 그분의 오심을 위하여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임무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힘과 행복을 얻는 비법이요, 우리 생활의 어느 시기를 물론하고, 늙지 않게 하는 비법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신앙의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믿음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풀 수 없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깨어 있는 믿음 깨어 있는 근신만이 최후의 순간에서 환호성을 지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변의 불신앙의 사람들이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말려들지 말고 그 속에서 정신을 깨어 주님을 기다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적용)
이 도령과 성 춘향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소중한 작품이 되는 것은 춘향의 고귀한 기다림 때문입니다. 갖은 유혹과 시련을 굳게 딛고 기다림의 자세를 흔들리지 않는데 그 가치성을 지닌 것입니다.
(예화)
어느 처녀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바쳐 사랑했던 연인이 떠나면서 오고야 말겠다는 한마디의 말을 믿고 자신의 일을 끝나면 지체 없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저 먼 모퉁이 길이 보이는 뜰에 나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너무나 많은 세월을 애타게 기다리는 딸의 모습에 아버지는 화가 났고 더 좋은 신랑감을 소개합니다. 그 처녀는 듣지 아니합니다. 매를 잡아 때린다는 것이 그만 눈을 다치게 되었고 그 딸은 드디어 실명을 하게 됩니다. 장님이 된 딸은 그래도 쉼 없이 희망을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변함없이 합니다. 일이 끝나면 발길을 옮겨 기다리던 자리에 가서 행여나 지금이나 오실까 하면서 그 님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립니다. 그 처녀의 머리에 백발이 솟기 시작하던 때 드디어 그 님은 찾아왔습니다. 장님이 된 채 기다린 자신의 연인을 본 그 님은 놀랍고 괴롭고, 감격스러운 심정으로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고마운 심정을 표하면서 영원한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이단 사교집단들 처럼 일손을 놓고 함성을 터뜨린 행위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준비가 수반된 기다림입니다. 우리 주님 예비하라는 말씀은 신랑을 맞이할 신부처럼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의 정조와, 성결한 신앙인의 생활과, 주님을 사모하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이 준비가 없이는 주님을 영접하는 자격이 없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마 25장)
열 처녀가 모두 손에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 중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합니다. 함께 기다리지만 신랑은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신랑이 갑자기 닥쳐오는 소리가 납니다.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은 모두가 꺼져갑니다. 그 기름이 충분히 예배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처녀들은 기름병을 하나 더 준비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는 들뜬 마음만 있을 뿐 장시간 준비해야 할 기름은 없었습니다. 동료들에게 기름을 좀 달라고 하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합니다. 그때야 기름을 사러 뛰어갑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신랑은 오고 그 문은 닫힙니다.
미련한 처녀들-주여 문을 열어 주소서.
주님-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그렇습니다. 슬기 있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만이 우리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영광과 기쁨이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이 마지막이라고 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애라 그날까지 실컷 먹고 즐기다 죽자고 합니다. 소위 케싸라 쎄라 , 될 대로 되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과 인격을 갖춘 사람은 자신의 준비와 결산에 바쁩니다. 누구에게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었던가 나의 지난 길에 흠집은 없었던가 성실한 준비와 점검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흔들림 없이 슬기롭게 오늘을 준비해간 사람들의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고 할 때 이리 밀려다니고 저기 있다고 할 때 저리 밀려다니는 사람들의 발길은 충실한 준비자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파멸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이비적인 무리들의 유혹이 적지 아니합니다. 여기만 참 진리가 있다고 현혹하는 무리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주님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 있다는 것, 정신을 가다듬고 산다는 것, 준비를 한다는 것, 이 모두는 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주위로부터 외로운 존재가 됩니다. 많은 오해도 받습니다. 중상모략의 고통도 받습니다. 가난한 길을 걷기도 합니다. 육신의 욕구를 잠재우는 고통도 겪어야 합니다.
넷째로, 주님이 다시 오셔서 새롭게 전개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의 관심은 큽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계시록 21장에서 말씀하십니다. (계21)
(말씀)
보아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리라. (계21:3-5)
(해석)
이 말씀은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약속입니다. 이 약속 안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그 백성과 같이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감히 접근 할 수 없는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갖은 수난과 핍박을 당하였던 하나님의 자녀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가장 반가운 소식입니다. 거기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어떤 고통이 없는 새로운 세계임을 보여주십니다.
(적용)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오시는 날 그 때 남모르게 흐르던 눈물이 거두어 지고 환한 미소와 함께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세상의 그 많은 오해와 중상과 모략이 자취를 감추어 우리의 가슴은 모두 평화의 동산이 됩니다. 우리의 육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동분서주하던 모든 발길도 멈추게 되고, 오직 주님을 모시는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진정 근심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됩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 앞에 분명히 전개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새 세계에 손에 손을 잡고 들어가야 합니다.
결론
창조, 노아 홍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구속의 수난, 부활, 승천, 성령의 역사를 믿을 진데 어찌 심판주로 오신다는 우리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겠습니까
깊은 잠에서 깨어납시다.
어두운 밤에서 밝은 대낮으로 나옵시다.
게으르고 태만한 오늘의 진부한 삶에서 새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찬란한 광채가 빛나는 우리 주님의 영접을 받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새 하늘과 새 땅에 한 사람의 낙오도 발생되지 않도록 이 대강절에 새롭게 마음과 몸을 단장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우리를 향하여 부탁을 하십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 3:12-13)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이 설교가 있기까지의 정황과 사연
교회력을 시작하는 대림절(대강절)을 맞이하는 첫 주일의 설교를 앞에 두고 설교자는 깊은 명상과 기도를 해야 했다. 아기 예수의 오심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보다는 심판으로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당연히 강조되어야 할 주일이기에 "무슨 말씀을 어떻게 운반하오리이까"하는 기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때 주어진 영상(靈想)은 오늘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있는 신앙으로부터 떠나 오히려 '재림의 연기'를 원하는 편으로 기울어진 신앙의 변절에 관한 것이었다. 기독교의 신앙 형태의 신앙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종말론적인 신앙이 자난 세기 동안 한국교회를 오늘의 성장에 이르게 했는데 그 신앙이 사라진다면 우리 신앙의 후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절박한 심정이 발생하였다.
본문의 주제의 선정
주제는 바로 주님의 재림으로 쉽게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본문이 바울 서신에서 나와야 하는지 아니면 복음서에서 나와야 하는지에 대한 망설임이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이 망설임은 바로 기도로 이어지고 고요한 마음을 가지고 본문을 다시 읽고 또 읽으면서 어느 말씀을 본문으로 해야 하는지 주어진 생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본문은 현대인들의 눈에 훨씬 명확하게 주님의 재림을 보여 준 데살로니가전서 4:13-5:8이 적합하다고는 생각이 들었고 주님이 말씀한 마태복음 24:29-44은 설교의 내용에서 다시 들려주기로 결정하였다.
목적의 설정
본 설교의 주제는 선포적인 설교로 충분하지만 재림의 확신과 시기의 준비에 관한 말씀의 운반은 교훈적인 설교로 함이 타당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현대의 교인들이 재림이라는 단어마저 생소하게 여기는 현상이 한국의 강단에서 재림에 대한 설교가 거의 사라져 가는 현실을 감안할 때 재림의 교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우선적인 임무였다. 따라서 그 시기에 대한 혼란이 한 때 이 땅을 휩쓸었다는 사실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에 대하여 취해야 할 태도를 말씀으로 일관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본 설교를 교훈적인 설교(Didactic Preaching)로 그 목적을 정하게 하였다.
설교의 유형과 형태
본 설교의 유형은 주제설교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본문설교이다. 본문을 정의해 가는 과정에서 본문에 나타난 메시지가 재림이라는 기본적인 주제이다. 그러기에 본문을 중심하여 재림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운반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말씀에서 주안점(대지항목)을 뽑아 하나님의 말씀과 회중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특히 대지마다 거기에 해당하는 본문을 다시 선포하여 경청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말씀의 해석과 적용을 시도하였다.
설교자의 등장 문제
한국의 설교가 가장 큰 상처를 입고 있는 부분이 설교자의 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본 설교에서는 어떤 순간이라도 설교자의 등장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대지의 표현도 성삼위 하나님을 주어로 하였고 어떤 문장도 일인칭 단수가 불필요한 문장으로 구성하기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어떤 예화도 설교자가 주입되거나 등장하는 경우를 철저히 억제하는 노력을 해 보았다.
자료의 수집
설교는 자신의 구상과 분석과 자식으로 포장될 수 없는 하나님 말씀의 운반이며 그 말씀을 알아듣도록 하는 해석과 적용이 우선적인 설교자의 과제이다. 그러기에 객관성이 있는 사례와 연구의 결과들을 찾는 설교자의 수고는 너무나 당연하다. 이러한 필연적인 임무를 위하여 본 설교는 먼저 기다림과 준비에 실패한 한국가정의 이야기를 서론으로 인용하여 말씀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는 한국의 이 장림을 들었고 해외는 윌리엄 밀러, 여호와 증인의 창시자 러셀, 안식교 등을 들어 그들의 허황된 선전을 공격하는 차원이 아니라 시기에 대하여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 사영하였다. 재림의 준비에 관한 부분에서는 어는 눈먼 소녀의 안타까운 기다림과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를 인용했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먼저 본 설교는 주제가 삶의 현장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교리에 속한 것이며 거기에 더하여 교훈적 설교로 가르침을 목적으로 했기에 회중의 심금을 울리는 부분이 빈약하다. 특별히 이러한 약점은 전달의 과정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강하게 강조하고 호소하는 음정의 사용을 위한 적절한 순간을 포착할 수 없었다는 데서 입증되었다. 호소의 설득을 결여한 설교는 회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힘이 없다는 이론을 상기하면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좀더 충분한 자료의 발굴이 있어야 함에도 설교자의 사정은 차분히 본 설교만을 위한 자료의 수집에 최선을 기울이지 못하여 통상적인 자료 외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지 못하였다. 설교가 언제나 충분한 자료를 수집하지 못할 때 설교자의 언어와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는 단조로운 해석과 적용으로 끝난다는 사실이 본 설교에서 다시 한번 보인다.
셋째, 한국교회 초기 신앙의 선배들이나 신사참배의 현장에서 재림을 바라보고 옥고를 치르던 아름다운 신앙의 보혈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재림을 바라보고 사는 성실한 신앙인들을 발굴하여 보여주고 그들을 향한 따뜻한 위로나 격려가 부족함을 보게 된다.
끝으로, 마지막 대지에서 시도한 굿 뉴스(Good News)로서의 재림에 대한 부분에서 감동적인 예화를 들어 적용할 수 있었으면 훨씬 더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촉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보인다.
12월을 사랑의 계절로(요 1 4:10-11)
벌써 12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카렌더가 덩그렇게 벽에 걸려 있어서 이 해도 며칠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월의 빠름을 새삼 스럽게 실감하게 되는 한편 지나간 한 해 동안에 허락되었던 귀중한 순간을 무의미하게 허송하여 버리지나 않았는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과 자책감이 앞서기도 합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지금은 대림절 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 성스러운 성탄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 성탄은 지금부터 약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예수라는 한 인간이 탄생하였다는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데만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 히려 그 한 역사적인 사실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왔으며 또 현대적으 로 무엇을 가져오고 있는가 하는대에 더 심오한 뜻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그 예수가 지금도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를 진심으로 환영 하며 그의 뜻을 따르는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크리스마스는 만왕의 왕이시고 만유의 주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신 날입니다. 그러므 로 성탄을 맞는 우리는 이 날의 의의를 살려서 이 날의 주인공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일과 그 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에게 깊은 관심을 가 지고 사랑의 뜻을 나누어 주는 일이며 그리고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마음 자리에 가장 귀중한 곳에 모시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없는 크리스마스는 무의미할 뿐더러 성탄을 모독하는 일입니 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인간까리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크리스마스 는 진정한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참된 크리스마스 행사는 그리스도 를 경배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화되고 현실화된 날입니 다. 그러므로 이 날은 사랑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 의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참 크리스마스를 지키려는 신자들 의 자세일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단순한 관심의 표시나 피상적인 이해만을 뜻하는 것 이 아닙니다. 보다 더 구체적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곧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시 는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 은 축복된 계절에 우리도 주는 계절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 런데 이 사랑은 사랑하면 할수록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줍니다.사랑하 지 않을 때는 아까와서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아까와하지 않고 주 는 것입니다. 무엇을 얼마큼 주느냐를 보고 얼마큼 사랑하느냐를 측정 할 수가 있습니다. 적게 사랑하면 적게 주고 깊이 사랑하면 많이 줍니 다. 사랑하는 것과 주는 것은 정비레합니다. 많이 주면 많이 사랑하는 것이요 적게 주면 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에는 주는 것이 아깝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때는 주는 것이 아깝기만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주고 정성을 주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줍니다.
사랑하는 경우에는 주는 것이 기쁨이요, 보람이요 축복이요, 만족입 니다. 주고 나서 아깝지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가진 것 을 남에게 주고 나면 나는 그만큼 적어지는 법입니다. 물리학적 경제 학적 원리를 주고난 다음에 내가 더 풍부해졌다고 느끼게 되고 더 충 만해졌다고 느껴집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주면 줄수록 나는 기쁨고 풍족감을 느낍니다.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 니라 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극치에 도달하면 자기 의 목숨까지도 바치게 됩니다.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것처럼, 지극히 작은 소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지극히 작은 사랑의 행위로부터 시작됩니 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결코 요구하시지 않습 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조그만 성의를 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로 부터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작은 사랑이 모아져서 큰 사랑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작은 사랑이 모이면 큰 추위도 이겨낼 수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어 둠이 빛으로 변하게 됩니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계속 쓰다듬은 물질입니 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하신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셨습니다. 성탄은 이러한 예 수님의 강림의 목적과 정신을 되살려서 모든 크리스챤들이 사랑의 사 도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탄은 사랑의 계절이요, 그러기에 사랑을 주는 계절이 되어야 합니다.
몇 해 전에 시내 어느 교회에서 개최된 성탄절 준비 강습회에서 성탄 절 장식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강사가 산타클로스를 교회의 성탄절 장식에서 제거해야 된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의미있는 말이라 생각 합니다.
성탄절하면 어린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싼타클로스 할아버 지가 무엇을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 이 아니라 싼타클로스를 더 기다리기가지 되어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받고 카드를 받음으로 신이 나고 즐거워하는 계절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 스의 선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으로 족합니다.
이제는 받기만 하는 성탄이 아니라 주는 성탄이 되어야 하겠고 그래 야 비로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성탄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 탄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성탄은 싼타클로스가 되어서 이웃에 게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증거하는 일과 그늘진 곳에 처해 있는 불우 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계절이 되게 합시다.
12월은 사랑의 계절이 되도록 무언의 캠페인을 온 교회가 전개함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이 땅에 환하게 비칩시다.
끝으로 내려오는 전설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예수께서 하루는 제자 들을 거느리시고 산에 오르시게 되었습니다.오르실 때 제자들에게 돌 을 한개씩 들고 가자고 명령하셨습니다.제자들은 저마다 돌 한개씩을 들고 갔습니다. 가롯 유다는 계란만한 것을 들고 올라가는데 그 뒤를 따르는 베드로는 큰 동이만한 돌을 들고 오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그것을 보고 비웃으면서 "무엇하려고 그처럼 힘들여 바 보같이 무거운 돌을 가지고 가느냐"고 하면서 자기의 계란만한 작은 돌을 보여주며 현명한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산에 올라와서 얼마 있 다가 점심 때가 되어 주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원을 지어 앉았습니 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올라온 돌을 각각 자기 앞에 내어 놓으라 고 하셨습니다. 작그 큰 돌들이 각각 제자들앞에 놓이게 되었고 예수 님이 기도를 드리고 눈을 떠본즉 제자들 앞에 놓인 돌들이 모두 떡으 로 변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유 다 앞에는 한 입 밖에 안될 계란만한 떡떵이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앉은 베드로 앞에는 큰 물동이만한 떡덩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 떡을 떼어서 가롯 유다를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 어 주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기쁨(눅 1:46-55)
우리 인간은 희망하고 기다리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생은 현재가 전부가 아니고 언제나 미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은 희망하고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 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 치고 희망하고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 니다. 지금 현재 희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언제인가 는 그렇게 한 경험이 있었고 또 앞으로 그럴 일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기다리림에는 온갖 종류가 있습니다. 소풍 날짜를 손꼽 아 기다리거나 나이 먹는 설날이나 선물 받는 성탄절을 흥분 가운데 들떠 서 기다리는 어린이의 소박한 희망과 기다림에서부터 대학입시를 치른 후 합격되기를 희망하며 초조하게 합격발표를 기다리는 젊은이들의 희망과 기다림, 만기일을 앞두고 달력의 날짜를 빡빡 지우면서 출소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출소후 자유의 공기를 숨쉴 것을 희망하고 있는 감옥 속의 죄수 들의 절박하고 심각한 희망과 기다림이 있습니다.
희망하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혼식을 올릴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연인들, 불안한 가운데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출산일을 기다리는 예비 엄마, 유세를 끝내고 투표가 시작되었 을 때 투표결과로 나타나는 국민의 심판을 기다리는 공직 출마자들,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될 무서운 날을 기다리면서 그러나 감형이 내릴까 하는 가느다란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기적의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형 수,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하고 기다리는 것은 개인만이 아닙니다. 혈연이나 문화, 운 명과 역사를 함께 가진 민족 공동체, 또는 지구공동체가 함께 공통된 꿈 을 가지고 그것이 실현될 날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이 어지러워져 난세가 되고 위기가 심화될수록 그 희망과 기다림은 진하 게 되고 절실해지게 마련입니다. 그 희망과 기다림은 역사상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대망입니다. 또는 문화 권에 따라서는 천지가 개벽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메시아 대망의 다른 형태일 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민족은 소중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 희망이 이 루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로마제국에 식민지로 되어 억압과 수탈을 받는 어려운 시련을 당하고 있었고 수난 당하고 신음하고 있던 민족이었기에 그들은 메시아가 출현할 것을 열망하고 하느님께 호소 하며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보면 여러가지 사람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한 편에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 부한 사람들, 제왕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 에는 낮은 사람들, 주린 사람들, 그리고 두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들 은 아기를 임신한 여인들입니다. 이 후자의 사람들, 즉. 낮은 사람들과 주린 사람들과 임신한 두 여인들은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기를 임신 한 여인들은 물론 배속의 아기가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이들 을 포함하여 모두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기다 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연인의 기다림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한 여인은 나이가 아주 많은 엘리사벳입니다. 이 여인은 메시아의 선구자가 될 아기를 임신하였습니다. 이미 임신 6개월 째가 되어 아기가 배 속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다른 여인은 젊은 처녀 마리아였습니다. 그는 이제 임 신했는데 그 아지가 장차 메시아가 될 것이라는 천사의 고지를 받았습니 다.
이들은 그들이 임신한 아기가 태어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러나 이 아기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곧 메시아의 선구자와 메시 아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기다림, 기다림의 자세를 주 목하고 자 합니다.
이들의 희망과 기다림은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하는 기다림이었습니 다. 이들은 은혜의 체험자들이 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에게 베푸신 하느님 의 은총과 축복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느님께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친히 그들을 구원해 주심을 체험하였고 하느님의 은혜가 그들과 함께 하셨음을 그들은 체험했습니다. 그들의 아기를 임신한 것은 전적으 로 하느님의 은총의 사건임을 그들은 체험하였습니다. 한 여인은 할머니 로서 임신할 수 없는 나이에 하느님의 기적으로 임신하게 되었고 다른 여 인은 젊은 처녀로서 성령의 개입으로 임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임신이 곧 하느님의 은총의 사건임을 확신하고 체험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세상 구원의 도구로 선택되었다는 데 대하여 그들은 감격, 감사, 기쁨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뻐했습니다.
이들의 기다림은 믿고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믿음의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줄 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메시아 를 보낸다는 약속, 그들 민족을 강대국의 억압에서 해방해 내어 자유하고 자주하는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 이 세상에 끝내 정의를 세워 주 시고 사랑과 평화가 사회적 현실로 실현되게 하시리라는 약속, 이런 약속 들이 역사에서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기다림은 성령에 충만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기다리는 것이었 습니다.이 말은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떤 희망이나 꿈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의해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희망이 이루어지리하는 것을 기다리 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령체험의 사 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다리는 것은 인간의 사욕이나 탐욕이나 이기적인 동기로 어떤 희망을 형성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 다. 성령 충만의 희망과 기다림이 아닌 희망과 기다림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와 관계없는 순전히 인간의 스스로의 임의적인 희망이고 기다림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희망할 것이 많고 기다리는 것이 많습니 다. 우리는 모두 희망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대림절을 맞이하 여 우리는 희망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희망과 기다림은 어떤 것입니까 희망하고 기다리는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의 기다 림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들의 희망과 기다림이 은혜체험의 감사, 감격, 찬양의 희망과 기다림입니까 믿음의 희망과 기다림입니까 성령체 험의 희망과 기다림입니까
설교를 듣고 응답하는 교우들의 기도 마지막 날 까지도 꺼지지 않을 소망의 촛불 하나 가슴에다 켜 놓고 기쁨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짓눌려 찌그러진 낮고 약한 무리들 가운데로 절망을 넘어 새로운 소망으로 오시는 주님.
이제 주님 다시 오실 그날에는 이런 곳, 이런 삶도 있음을 잊지 마소서.
분단의 역사 용트림할 때마다 고통으로 아우성치는 이 땅의 이름 없는 이야기들 골짜기마다 넘치고, 무지한 독재의 군화 발에 짓밟힌 젊음, 오늘에 이르도록 추스르지 못한 자식 위해 30 여년 하루같이 새벽제단에 통곡을 쌓아 가는 외로운 어머니의 기도도 기억하소서 저마다 지고 가는 갖가지 아픔들은 주님 다시 오실 그날 위한 준비로 감당하고 오늘 여기가 메시아의 구원이 떨기나무처럼 불타오를 현장임을 깨달으니 기다림의 기쁨 가슴 저려 또 하나의 촛불에 불 당기오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오시옵소서. 아멘.
희망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눅 1:51-53)
계절이 바뀌는 것에서, 달력이 바뀌는 것에서 우리는 만만치 않은 교훈을 얻습니다. 같은 시간의 연속이며 같은 삶의 반복인데도 마지막 달이 주는 의미는 사뭇 색다릅니다. 눈을 돌려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살피어 보게 하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에게는 어떠한 다짐이 필요합니다. 준비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새로운 시간들을 맞이하는 준비. 건강하고 활기찬 시간들을 일구어 가려는 가슴 뜨거운 결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억압과 착취가 상식이 되어버린 이 수치스런 역사가 끝장나고 비로소 시작될 새로운 현실을 갈망하였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요구이거나 얇팍하고 속된 바램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었습니다. 오랜 아픔의 시절 속에서 사람다운 삶에 갈증을 느끼었고, 의로움에 굶주리었던 모든 이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염원이었습니다.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는 불의한 현실 한 복판에서 가슴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고, 펄펄 뛰는 양심을 가두어 두지 못하여 몸서리 치는 이들의 희망이기도 하였습니다.
때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이른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 4:18-19)”라는 복음이 가까이에 이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비천한 신세” 속에서 복음의 때를 기다리던 마리아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래는 의로운 야훼 하나님의 때를 갈망하던 예언자들의 외침 속에 언제나 담겨있던 주제 이기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 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들을 자유케 하신 야훼 하나님께서 그 때를 시작하시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옳바름)”이 비참한 역사 한 복판에서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교만한자” 즉, 기득권을 누리고 착취자의 마음을 품고있는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통해서, 겸손한 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시작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새로움의 때는 시작되었고, 변화를 앞당기어 경험하고 있다”는 고백을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보면 대림절 둘째주 입니다. 주님의 때, 수치스런 인간의 역사에 쐐기를 박고, 하나님의 의로운 시절을 시작하신예수님의 오심을 깊게 묵상하는 기간 입니다. 마음이 겸손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기다리며 이 땅을 정의의 쟁기로 일구어 내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때가 아닐수 없습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는 어떻게 살것입니까 우리 속에 흐트러진 것들을 묶어내고, 새로움을 위하여 서로의 처진 어깨를 일으켜 세우며, 의롭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함께 시작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오심을 다시한번 진지하게 묵상하며,우리에게서 시작되는 새로움을 기도합시다.
새 천년의 대림절(눅 2:21-39)
교회력의 시작은 대강절(Advent)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교회력으로는 신년이 되며 따라서 대강절 첫째주일이 신년 정월 초하루가 되는 셈이다. 대강절 첫째주일은 해마 다 11월 27일에서 12월 3일 사이의 어느 한 날에 온다. 그리고 대강절은 늘 4주일을 지키게 되는데 대강절절기는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22일에서 28일간의 길이를 가진다. 대강절이란 뜻은 "도착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공항에서 혹은 기차역에서 오시기로 약속이 되어있는 식 구들이나 손님을 가다리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가 대강절 (대림절)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대강절을 지키는 의미는 이미 2천년 전에 이 땅에 육 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주탄일을 회상하면서 또다시 우리들의 마음속에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며 또한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고 있는 불신의 세계와 역사 속에 임재해 주실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그리고 앞으로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계절로 지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감격과 기쁨이다. 말구유 같은 우리의 더러운 마음에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구주성탄절은 사 망과 어두운 그늘 밑에 앉아있던 우리들에게 빛을 비춰 주시고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벅찬 가슴으로 살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계절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뜻을 깨닫고 어려운 이 시대를 용기와 기쁨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메시지를 선포하는 계절이다.
말씀의 선포뿐만 아니라 말씀이 성육신 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눈길을 소외된 자들에게 돌리 고 아직도 어두움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일 을 하는 계절이 되어야 한다.
처음오신 그리스도는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 나 이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만난 그리스도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초림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로 오셨으나 재림의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로 오시게 된다. 초 림의 주님의 초라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주의 당당한 모습을 말씀 하고 있다. 재림하실 주님은 심판이 주 업무임을 말하고 있다.
심판을 통해 상 받을 자와 벌받을 자를 갈라놓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는 땅의 것보다는 하늘의 것을 귀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이미 오신 그리스도의 구주탄일을 앞두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이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 은 시한부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예수의 부활 후 승 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을 두고 이 땅위에 그리스도인들이 소 망으로 살아가도록 성령으로 항상 역사하고 있다.
오늘 주일은 대림절 2째 주이다. 대림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준비한다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나는 날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준비하 는 기간으로 기다림의 의미를 포함한다.
예수 이전 700년 전에 이사야는 "한 아기가 목자처럼 우리를 돌볼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 다. 그리고 미가는 "베들레헴에 나신다"라고 예언하고 있다. 실제로 목자들에게 첫번 크리스 마스가 전해졌었고, 동방박사도 시골 베들레헴까지 찾아 아기에게 경배하였다.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믿는 지식이 바로 산지식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자신의 모든 지식을 버 리고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요즘 병 고침을 보고 믿는 상황이 우리의 주변에서 보여진다.
그러나 신학적 이론이 우리의 신앙 밑바닥에 깔려있어야 한다. 동방박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기독교는 믿고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기쁨에 즐겁게 찬송 부르면서 기다린 두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시므온이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게 메시야가 올 때까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인물이다. 또 한 사람의 노인은 안나이다. 그는 결혼 한지 7년만에 과부 가 되어 84년 동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 고 기뻐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가 예수를 영 접한 사람들이다. 오늘의 신앙인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일관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간의 약속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는 약속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에 더욱 초 점을 둔 것이다. 등불을 밝히고 기다리는 신앙을 성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1999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푸대접 하고 말았다. 정녕 그가 이 땅위에 오셨는데 그를 마구간에 모시게 된 푸대접은 기다림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만민을 구원할 구주로 오신 예수와 죄인을 불러 친구로 삼아 죄 사함 받게 하시고 섬기는 종으로 고요하게 오시는 예수를 그들은 기대밖에 두고 있었기에 구주 오심의 의미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구약 역사 전체는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역사이다. 그 약속이나 예언이 모두 예수의 오 심을 두고 한 말이다. 약속은 기다림이고 구주탄일은 오심이며 예언은 기다림이고 허락은 오심이며 율법은 기다림이고 복음은 오심이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니라(눅2:12) 강보에 쌓 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인류의 구주이시다. Martin Luther는 강보와 구유 를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대로 오셨지만 감추어진 모양으로 계시 되셨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과 참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남루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만 보 고 인류의 구세주는 발견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죄인처럼 돌아가신 분만 볼 수 있는 것 이다. 예수는 지금도 이런 모양으로 오신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면서 정녕 기다리던 메시야가 정말 오실 때는 영접하지 못하고 실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서는 그래서 세상을 지으신 이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 백성이 영 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1:2)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헐벗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그를 돌보 았나 어린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예수는 말하신다. 예수 그리스 도는 몸소 이렇게 오셨고 또 이런 사람을 찾아가시고 이런 모양으로 오신다. 만남의 기쁨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래 인간들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안과 불신 그리고 불 확실성이라는 삼불(三不)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고통과 사망으로부 터 해탈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해 왔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으로의 복귀, 즉 하나님께 나가기를 희구해 온 것이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희구와 노력이 바로 종교의 형태를 지니고 나타났고 갖가지의 종교가 이 땅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불 안의 시대'라는 것을 핵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 지 못할 것이다. 폴틸리히(P. Tillich)는 '존재의 불안, 양심의 불안, 죽음의 불안'이 그것이 며 더욱이 종말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다고 했다. 인구의 폭발, 환경의 오염, 자 원의 고갈, 그리고 핵무기의 공포에 위협을 느낀 과학자들을 비롯해서 현대 지성인들이 '앞 으로 100년을 존속하기 어려우리라'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갖는다. 그래서 EC당국은 이에 '아이는 둘만 낳고, 기술대신에 예술을 숭상하고, 개발 대신에 자원을 아끼고, 그리고 난 다음 역사의 종말을 잊지 말라'고 했다.
딤전 3:1에 보면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야기될 인간사회의 도덕적 타락상을 구체적으로 예 시하고 있다. 자기사랑, 돈사랑, 교만, 부모거역, 무절제, 배반, 쾌락사랑과 경건의 모양은 있 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역적상태를 말하고 있다. 마태 24:5에 말세의 특징을 거짓 선지 자 횡행, 기근과 지진 등 재난이 심하고 나라와 나라사이에 전쟁의 소식 그리고 서로 미워 하고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의 식어짐을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지금이 종말의 때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긴급한 때이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주님의 재림에 준비해야 한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태24:44)고 경고의 말씀을 준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악한자가 받는 형벌은 이 땅에 서도 흔히 있다. 그러나 주의 재림을 통해 주어지는 심판 때는 인간의 상상을 넘을 것이다.
이런 자는 모든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고'(히10:27)있는 자들이다. 심판은 결코 형 벌을 위해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기 위해 심판은 있다.
오늘 주일은 대강절 둘째 주일이다. 주님의 구주탄일을 앞두고 2천년 전에 이미 육신을 입 고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탄생케 하는 축복을 받아야 하고 또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 하는 절기로 삼아야 한다. 대강절을 맞으며 오신 주님을 구주로 믿는 현재의 경험과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미래의 경험될 것을 신앙화 하여야 한다. 연말의 들뜬 기분과 상혼에 지배되던 정신과 습관에서 벗어나 작고 조용한 베들레헴 마을에서 소박 한 말구유에 탄생하신 주님을 맞기 위하여 결정적이고도 필수적인 준비기간을 살아야한다.
이제 대강절의 메시지는 예언의 성취와 준비와 기다림에 초점을 맞추고 재림을 대망 하는 자에게 회개와 참회를 강조한다. 이것은 새 천년의 대림절을 지키는 자리에 초대교회가 사 순절과 함께 참회의 절기로 지키는 의미를 새 천년의 교회가 다시 구현해가야 한다
오신 구주와 오실 심판주(사 9:6-7, 눅 2:11)
교회력의 시작은 대강절(Advent)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교회력으로는 신년이 되며 따라서 대강절 첫째주일이 신년 정월 초하루가 되는 셈이다. 대강절 첫째주일은 해마다 11월 27일에서 12월 3일 사이의 어느 한 날에 온다. 그리고 대강절은 늘 4주일을 지키게 되는데 대강절절 기는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22일에서 28일간의 길이를 가진다. 대강절이란 뜻은 "도착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공항에서 혹은 기차역에서 오시기로 약속이 되어있는 식구들이나 손님을 가다리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가 대강절(대림절)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대강절을 지키는 의미는 이미 2천년전에 이땅에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 의 구주탄일을 회상하면서 또다시 우리들의 마음속에 우리들의 삶의 현장 에 말씀과 영으로 새록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며 또한 아직도 그리스 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고 있는 불신의 세계와 역사 속에 임재해 주실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그리고 앞으로 마지막때에 영광의 주님으 로 다시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계절로 지키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토 록 기다리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감격과 기쁨이 다. 말구유같은 우리의 더러운 마음에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구주 성탄절은 사망과 어두운 그늘 밑에 앉아있던 우리들에게 빛을 비춰 주시 고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벅찬 가슴으로 살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계 절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뜻을 깨닫고 어려운 이 시대를 용기와 기쁨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메시지를 선포하는 계절이다. 말씀의 선포뿐만 아니라 말씀이 성육신 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눈길을 소외된 자 들에게 돌리고 아직도 어두움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는 계절이 되어야 한다.
처음 예수님 오심은 그리스도로, 구주로 오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 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고 하셨다. 그러므로 처음 예수 오 심은 그리스도는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일로 3가지 유형의 맞는자를 볼 수 있다.1)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한자이다. 구약시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메시 야를 기다렸다. 메시야 대망사상은 구약의 중심을 이루었다. 4대 선지자 들과 12 소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온 이스라엘 땅 에 전파 되었던 것이다. 그후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으나 만나지 못하고 만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것은 그들의 메시야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없는 시골 목수의 맏아들로 태어나서 30세가 될때까지 나사렛에서 목 수 노릇이나 한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기는 너무나 억울하였다. 그래서 당시 대제사장, 서기관, 바래새인, 장로들은 기다리고 고대하던 분이 오 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접은 커녕 박대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다.
2) 기다리다가 만난자이다.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따 라 탄생하신지 여드레가 되자 할례를 받고 결례의 날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때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있었으니 곧 시므온이란 사람이다(눅2:25). 그는 의롭고 경건하였다고 한다. 당시 백성들은 메시야가 올때만이 이스라엘이 위로를 받게 되리라 확신 하였던 것이다. 메시야가 오셔서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하실때 받는 위로를 가르 킨다(사40:1,49:13). '나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보게 하소서'란 내용으로 유대인들이 매일 기도하였다고 한다. 시므온은 이와같은 기도를 성전에서 계속해 왔던 것이다. 이 기도가 성취되어 결례의 날이 찼을때 그의 부모 와 함께 성전에 오신 아기 메시야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 누가는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 고 기록하였다. 그가 생전에 메시야를 만나기를 소원하면서 기도하며 기 다리던 메시야를 만나 감격하였던 것이다. 이 시므온은 메시야를 기다리 다가 만난 자들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3)기다리지 않았으나 만난자이다. 오시리라 한 메시야가 예언된 구약을 믿지 못한 이방인이야 기다릴 줄 모르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메시야를 보내주시고 그들을 만나 주셨다. 사도행 전은 주로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된 기사를 기록해 놓은 역사서이다. 안디 옥교회에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간데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리라'(행15:3)고 기록하고 있다. 메시 야를 대망하지도 아니한 이방인들이지만 복음을 통해 메시야를 만난 역사 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처음오신 그리스도는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오신 그리스도를 만난 그리 스도들은 장차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초림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로 오셨으나 재림의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로 오시게 된다. 초림의 주님 의 초라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주의 당당한 모 습을 말씀하고 있다. 재림하실 주님은 심판이 주업무임을 말하고 있다.
심판을 통해 상받을 자와 벌받을 자를 갈라놓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는 땅의 것 보다는 하늘의 것을 귀중히 여길줄 알아야 한다.
이미 오신 그리스도의 구주탄일을 앞두고 장차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래 인간들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 안과 불신 그리고 불확실성이라는 삼불(三不)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그 래서 인간은 이러한 고통과 사망으로부터 해탈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 해 왔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으로의 복귀, 즉 하나님께 나이가기를 희 구해 온 것이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희구와 노력이 바로 종교의 형태를 지니고 나타났고 갖가지의 종교가 이땅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 가 살고 있는 현대는 '불안의 시대'라는 것을 핵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알 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폴틸리히(P.
Tillich)는 '존재의 불안, 양심의 불안, 죽음의 불안'이 그것이며 더우기 종말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다고 했다. 인구의 폭발, 환경의 오염, 자원의 고갈, 그리고 핵무기의 공포에 위협을 느낀 과학자들을 비 롯해서 현대 지성인들이 '앞으로 100년을 존속하기 어려우리라'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갖는다. 그래서 EC당국은 이에 '아이는 둘만 낳고, 기술대신에 예술을 숭상하고, 개발 대신에 자원을 아끼고, 그리고 난 다 음 역사의 종말을 잊지말라'고 했다.
딤전 3:1에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야기될 인간사회의 도덕적 타락 상을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자기사랑, 돈사랑, 교만, 부모거역, 무 절제, 배반, 쾌락사랑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역 적상태를 말하고 있다. 마태 24:5에 말세의 특징을 거짓 선지자 횡행, 기 근과 지진등 재난이 심하고 나라와 나라사이에 전쟁의 소식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의 식어짐을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과학 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지금이 종말의 때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긴급한 때이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주님의 재림에 준비해야 한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태24:44)고 경고의 말씀을 준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악한자가 받는 형벌은 이땅에서도 흔히 있다. 그러나 주의 재 림을 통해 주어지는 심판 때는 인간의 상상을 넘을 것이다. 이런자는 모 든 '무서운 마음으로 삼판을 기다리고'(히10:27)있는 자들이다. 심판은 결코 형벌을 위해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한자에게 상을 주시기 위해 심판은 있다.
오늘 주일은 대강절 둘째 주일이다. 주님의 구주탄일을 앞두고 2천년전 에 이미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탄 생케 하는 축복을 받아야 하고 또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절기 로 삼아야 한다. 대강절을 맞으며 오신 주님을 구주로 믿는 현재의 경험 과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미래의 경험될 것을 신앙화 하여야 한다. 년말 의 들뜬 기분과 상혼에 지배되던 정신과 습관에서 벗어나 작고 조용한 베 들레헴 마을에서 소박한 말구유에 탄생하신 주님을 맞기 위하여 결정적이 고도 필수적인 준비기간을 살아야한다.
이제 대강절의 메시지는 예언의 성취와 준비와 기다림에 초점을 맞추고 재림을 대망하는 자에게 회개와 참회를 강조한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사 순절과 함께 참회의 절기로 지키는 의미를 오늘의 교회가 다시 구현해가 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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