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고 오늘은 그 옛날 떡고물 이야기 쫌 하시더.
그 옛날 잔치 집에는 마을 조무래기들이 고방 시루떡이나 찰떡 써는 사람 옆에서 올망졸망 쪼그리고 있었다 아잇껴.
마시고 나면 오줌만 잔뜩 나오는 쌀이 동동 뜨는 잔치 집 감주 한 그릇 보다는 찰기 있는 찰떡이나 혹 시루떡 쪼가리라도 얻어먹고 싶어서 .
고방 앞에서 하마나 하마나 가슴 조리면서 기다렸리던 아이들은 그저 손님방에 올릴 밥상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지가 갖고 가까요?”
하고는 찬치 일도 서로 할려고 나서서 거들었는데...다 나중에 떡 고물이라도 얻어 묵을 꿈을 갖고 종일 잔치 집에서 도와 준 것 아잇껴.
하이고 근데 통 시루떡이나 말랑말랑한 찰떡은 점점 어른들이 다 드시고..... 나무 통 방티에는 드디어 일일이 찰떡에 묻치던 떡고물만 남는데.
떡 고물 정도는 아이들이 먹어도 안 뭐라카는 시절이라서 고방에서 떡고물뿐인 통 방티이를 고방쟁이가 내 놓으면
"우리 이 콩망세이(떡고물) 묵어도 되니껴?"
"그래 싸우지 말고 농가(나누어) 먹어라"
쪼무래기들이 후다닥 손을 비집고...밀치고 서로 한 움큼 잡으려고 생난리였지요.
“야 이누마야 밀치지 마라 씨”
“썩은 모개야 니는 한 주먹만 갖고 가지..왜 그쿠 많이 갖고 가노? .에이 도돼지 새끼!
머리를 처박고 한바탕 소란을 치면서 떡고물 한 움큼씩 집어 들고는
마치 원숭이 새끼들이 주인이 주는 바나나를 하나 씩 움켜잡고 행여 빼앗 길 세라 도망치듯이........
죽자사자 우선 저거 집으로 도망가는 넘!
개집 옆으로 실실 웃으면서 도망가는 넘!
담 뒤안으로 사라지는 넘!
냅다 앞산으로 도망가는 넘!
멀리 안가고 우선 뚱두칸 뒤로 도망가는 넘!...
그 중에 통시 뒤로 가는 이유는
우선
냄새나는 곳 까지 따라와서 한입 같이 묵자!
달라들 넘이 없을 끼고,
안심하고 꿀꺽 꿀꺽 도돼지 죽 먹듯이 묵을 수 있고 해서 하필 냄새나는 똥두칸 뒤에 숨어서 묵었지.
그나마 떡 고물 한 주먹도 못 얻어먹은 아이들은 처다만 보다가 집에 와서 괜히 어메 한데
"우리도 시루떡 대신에 수꾸떡이라도 해묵자 씨!"
칭얼거렸던 어주자도..........소위 떡고물 세대다.
그 당시 떡고물은 잔치 집에 일을 도와 드리고 얻어먹는 일종의 노력의 대가요
배고 품을 극복하는 일종의 삶의 방도이다.
글 둘:
정치 떡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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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TV를 잘 보지 않는데 어느 날 친구가 방문하여 난로 불에 고구마를 꾸어서
“아이구 뜨거버라!
‘
후후 불면서 TV를 겼더니 턱 수염이 숭숭 난 늙은 사람이 검찰에 잡혀가고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하여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그 옛날 우리나라 최고 미남이였던 신성일씨였다.
곧이어 이마가 훌러덩 까진 데모꾼 출신 이부영인가 하는 국회의원도 나오고
한나라당 소속의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국회의원이 또 나오고........
얼마 전 친일청산 외치던 얼굴 드세게 생긴 아지매 ...
자신의 입지를 위하여 본향이 의성 김이지 안동 김인지 족보마져 헷갈리게 떠들던 그 아지매 국회의원도 나왔다.
어디서 돈을 받아먹었는지 잔뜩 꾸린 얼굴에 화장을 떡칠해서 화면에 비쳐졌다.
곧이어 다 늙은 노인 한분이 또 화면에 비쳐졌다.
친구에게 물었다.
“어이 저 사람은 누구로?”
“부총리 아이가”
“저 어르신이 부총리라?”
“니는 부총리도 모르나?”
(정말로 어주자는 부총리가 누군지 몰랐다)
“그마 저 나이 많이 드신 분이 거 뭐로...아이구 그사람 이름이 뭐드라?
"누구?"
"왜 데모꾼 출신으로 은사 앞에서도 막 고함친다는 성질 사나운 사각형 얼굴의 젊은 총리 있잖나...아이고 이름이 퍼득 생각 안난다만.."
" 아 이해찬이?"
"그래 그럼 그사람이 더 높잖아...그런대 저래 늙은 어르신이 그 젊은 총리
밑에서 일한다 말이라?...부총리라 카면서”
"총리 부총리 같이 근무할까?...아이낀데.." 친구도 잘 모르는 가 보다.
노인이 부총리란 말에 아무래도 젊은 총리 밑에 일하기가 뭐 한 것 같아서 물었다.
그랬더니 옆에서 고구마 먹던 친구는 어주자 질문에 대답은 아니 하고
“오늘도 TV 뉴스에 도둑넘들 줄줄이 나오네...하하” 하였다.
"......야당여당 관계없이 똑같지?"
"하도 저치들이 이당같다가 저당 같다가 쇼를 하니 도대체 저누마가 야당인지 여당인지 그것도 몰라...자낸 더 모르지?"
"쩝...그런 뉴스 보느니 마누라 설거지 도와 주겠다."
"365일 9시 뉴스 첫머리에 사기꾼들 뉴스가 나오니까 자네 말되로 우리 민족이
쫌 이상한거 아이가?"
" .........안그래 그래도 바른 사람들이 더 많아..저런 사람들 처럼 나서지를 않해서 그렇치..." 어주자는 친구 말을 막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들 나라 일에는 신경 안 쓰고 곡간에 쌀이 넘치면서도 떡고물에 머리를 처박고 허겁지겁 훔처 먹다가 검찰에 잡혀가는 모양이다.
“근데 저 나이 드신 부총리 분도 뭐 해묵었나?“
“해먹었지....운전수 앞세웠다카던가?...수십억 대출 받아서 뭐 해먹었다 카드라...청와대에서는 아니라 카지만, 눈감고 아웅이지 우째 트럭 기사가 수십억 대출 받겠노?”
“그마 전두환씨 때나 참여정치 꾼들이나 맹엥 그나물에 그밥이라?”
"개비름 나물에 코 풀어 놓은것처럼..맹엥 똑 같애!"
삶은 개비름 나물은 정말로 미끄덩 거린다.
친구는 고구마 섬유질이 장에 좋다하면서 벌써 두개째 군 고구마를 까먹고 있었다.
친구 이야기를 종합 해보면 이야기인 즉은
하나같이 떡통에 궁뎅이 꺼꾸로 처박고 떡고물 훔처먹다가 들키자 먹은 입을 급히 닥아 내고는...절대 떡고물을 훔처먹은 것이 아니고 빌려서 먹었는데...곧 돌려 줄끼다!
뭐 이러시는 것 같았다.
어주자는 자신도 몰래 이런 말이 입에서 불쑥 뛰어 나왔다.
“유럽족과 우리 동의족이 다른 점은 유럽족은 인간위주의 르네상스를 피운 나라고
동의족은 그저 권위주의에 오랜 세월 매달린 부산물이지!“.
뜬금없는 어주자 독백에 친구는
“야 방금 자네 한말이 뭔 말이로?” 한다.
반도로 내려 온 동의족 떡고물 론을 설파 하자면 소설 몇 권은 나와야하니 그만 고구마 단 맛에 얼버무렸다.
글 셋
교민회 회계장부 떡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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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주자는 머리가 나빠서 당체 돈 계산이 잘 안되는 사람이다.
천성적으로 계산 자체를 싫어한다.
그래서 결혼 후 지금껏 돈은 내가 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몽땅 아내가 한다.
어차피 한국 남자가 평균 10년 정도 먼저 마누라 앞서 죽는다는 통계도 있는데 그까짓 복잡한 돈을 우부려 잡고 매번 마누라에게 생색 낼 이유도 없는 것이 돈이다.
그래서 솔직히 어주자는 도대체 돈이 얼마 있는지 마누라 통장이 몇 개인지도 모른다.
1978년 미국 서부 도시에서 살 때다.
교민회가 무척 시끄러웠다.
조영남씨가 한바탕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시절, 쇼가 끝나고 대판 교민회가 시끄러웠다.
임원이 교민회 공금통장을 꿀꺽 한 것이다.
한바탕 싸움이 지나고
새 교민회장이 덜컥 재정이사 자리를 이 어주자에게 맡긴 것이다.
고사를 몇 번이고 했지만 다들 떠드는 바람에 얼덜 결에 맡았다.
그리고 3년 후에 유럽으로 전근되어 그 곳에서 10년을 넘게 살다가 다시 198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가자 말자 한인회에서 또다시 재정이사를 나에게 맡겼다
어주자가 잘 생긴 것 때문이 아니고 그사이 또 공금 문제를 겪은 한인회가
다들 떡고물은 고사하고 시루떡 전체를 도둑맞을까 걱정을해서 취해진 조치였다.
글 넷
000회 떡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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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곧바로 지기들 모임인 00회를 갔다.
00회를 가니 난리가 났다.
해마다 00회에서 봄 야유회 및 단합대회를 기별로 맡아서 했는데... 다음 년도 전국 총 00회 봄야유회가 주최가 바로 우리 기였다.
그런대 총무가 그만 덜컥 700만원을 꿀꺽 해버렸다.
믿었던 총무가 그넘의 공금 통장을 떡고물로 착각했는지 한입에 처넣고 도망을 간 것이다.
할 수 없이 쪼자리가 난 00회를 어주자가 회장 자리를 맡았다.
그리고 첫 인사가
“어주자가 회장 자리에 있는 한 단 1원도 직접 지출을 하지 않겠다”
즉 회장은 일체 떡고물에 손을 되지 않고 그저 돈만 모으겠다 했다.
우선 그동안 말 많았던 수기 장부를 버리고 외환은행 통장을 장부로 했다.
일체의 회비는 손으로 받지 않고 무조건 은행으로 입금하도록 유도했다..
월례회 모임 날도 회비를 직접 받지 않고 내일 은행으로 넣어라하니 말이 많았다.
그래서
“아 이 사람아 회장이 노루 불알 쯤되나? 은행에 돈 심부름나 시키게...자네 부인을 시키든지 우짜든지 은행으로 넣어라!”
고함을 쳤다.
일체의 돈은 은행으로 넣고 그날 먹은 음식비는 각자 부담인데 그도 식비 각출 후에 나머지가 돈 만원 남으면 다들 보는 앞에서 주방 아지매나 심부름 아지매를 불러서 노래방 가시라고 다 줘버렸다.
즉 단 일원도 남김이 없이 했다.
동의족은 무엇이든지 떡고물이 남으면 말썽이다.
주머니 넣어 두었다가 내일 은행에 입금하면 되지....하지만 소위 배달사고가 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아예 모임 날 식사비로 걷은 돈 중에 남은 떡고물은 식당 아지매들 노래방 비로 줘버리고 회장이든 총무든 주머니에 단 백원짜리 동전도 남지 않게 했다.
그렇게 하여 일년 후 무려 1700만원을 기금을 걷어서 총 00회 봄 야유회 겸 온천 여행을 부부 동반으로 치루었는데
회장인 어주자는 총 00회에 사용한 돈 1400만원은 어디에 썼는지 잘 모른다.
왜냐하면 회장은 단 1원도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있었고 도대체 공금 사용에는 질겁인 나다.
그 후 내리 5년을 회장 직을 맡았다.
원래 1년에 한번씩 새로 회장을 뽑는데...회계문제로 5년을 독재한? 것이다.
회장 직을 그만두면서 통장을 다음 회장에 넘긴 지금....그 많던 돈이 불과 400만원 밖에 없단다.
자고로
사람이란
가난하게 사는 어느 날 친구가 방문하면
입고 있던 고이적삼을 맡기고 막걸리를 사갖고 오는 한이 있더라도
남의 주막 집 막걸리 통을 공짜로 엿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옛날이야기처럼
지아비 일찍 죽고 홀로 사는 과부가
끼니마다 굶는 자식들이 안스러워 부자 집 영감에게 속치마 한번 들춰주고 감자 몇 되를 얻어서 집으로 당당 걸음을 칠망정.....남 곡간에 쌀이나 감자를 공짜로 노려서는 안 된다.
공금 횡령? 즉 떡고물 근성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의민족성을 거론했지만 실제로는 안 그런 분도 있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내신 서애선생도 낙향하여 서미골(어주자 고향마을부근) 초가삼간에 사실 때 식량이 떨어져 굶고 있었는데..그 소식을 들은 임금이 쌀을 안동으로 내려 보낸 실화가 있고 퇴계 이황 선생님도 그 어려운 살림이지만 나라 임금이 내린 관직(완장)을 무려 73번이나 사양했던 우리들의 조상들이다.
퇴계 선생이 거처했던 방은 겨우 2평이 안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비록 이름없는 평인들이라도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처갓집에는 겉보리 한말도 도움 안받는다는 반듯함을 자랑삼았던 민족이다.
글 여섯
처갓집과 보리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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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적는 어주자도 사실 부끄러운 놈이다.
몇 년 전 고추농사가 병으로 쪼자리 난 해에...고향 고추 밭에서 쭈그리시고 한숨짓는 아부지를 보고 힘을 북돋아 드리기 위하여 대뜸
“아부지요...차라리 이참에 우리 고추 밭떼기로 선매를 하든지 마을고추를 전부 사두었다가 봄에 오르거던 파시더...병이 이리 심하니 틀림없이 봄에 고추 값이 치 솟니더.”
그러자 아부지가 매몰차게
“너는 객지에서 배웠다 하는 놈이 우째 그런 생각을 하노?”
하면서 버럭 역정을 내셨다.
비록 고추는 늘어졌지만 숭고한 땅 앞에서 나같은 인간 미물이 그런 매점매석 안을 들고 나온 것이 애초에 글러먹은 생각이다.
객지 아들 생각이 오직 한심하셨으면 버럭 고함을 치셨을까?
비록 고추 다 해봐야 50만원 정도의 고추 농사지만....재물 욕에 눈이 먼 어주자는 말없는 땅이나 그저 못 배우신 우리 아부지 말씀보다 못 난 놈이 돤 그날이후 많이 뉘우친 기억이 있다.
어주자에겐
5년 전, 아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삼촌이 계셨는데...한평생 땅만 파시다가 돌아가신 분이다.
어느 해(1977년쯤) 봄,
삼촌 집에 보리쌀이 떨 어져 아침을 굶게 되자 숙모님이 서나편달 고개 마루까지 가시고 삼촌 장모님이 굶는 딸, 사위를 위하여 무거운 보리쌀 두말을 이고 구담이라는 그 머-언 (30리길)마을에서 서나편달 고개마루까지 이고 오셨는데,
고개 마루에서 그동안 보고 싶었던 친정어머니를 만나고도 미처 다정한 말씀도 긴히 못나누시고 해 떨어지기 전에 아이들 밥해줄 심사로 허겁지겁 집으로 보리 자루를 이고 돌아온 숙모님을 삼촌이 보게 되었다.
특유의 경상도 북부지방 남정네 자존심이 발동 되어설까?
먼길 숙모가 이고 온 보리 자루를 삼촌이 마당에 내 팽게치고...
한바탕 소란이 크게 일어난 후에 결국 그 다음 날 숙모님이 울면서 다시 그 보리 쌀을 이고 그 머-언 친정 집까지 발이 부르트면서 가서는 두 모녀가 마당에서 부여 잡고 엉엉 한참을 울다가 돌아 오셨단다.
그 당시....못 먹어 바싹마르신 숙모님이 넘 불쌍하여 고향 갔다가 옷 한벌 사드린 기억이 있고 그런 외골수 삼촌이 조금 지나치셨다 생각 했지만,
요즈음 처럼 처갓집 열쇠? 불만으로 마누라 갈 뼈 분질러 버린 어느 의사 이야기가 신문에 가끔 오르내리는 세상을 보노라면
.
비록 무명, 무학에 그저 땅만 파시다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우리 집안에 그런 대쪽 같으신 삼촌이 계셨다는 것이 어주자는 자랑스럽다.
물론 시건방 진 생각인지 몰라도 떡고물 몰래 훔처 먹다가 들켜서
입안에 아직 떡고물이 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은 상태로 우물우물... 벙어리처럼 대답도 제되로 못하고,
작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마치 입안에 아무것도 없다는듯이 국민 앞에서 시치미 떼는 그런 지식인 정친인들 보다야
비록 가난을 벗나시지 못했지만 굳이 인간성 저울 질을 한다면 우리 시골 삼촌이 몇배 더 휼륭한 농사꾼이요 동의족의 후손 한민족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