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항전 남원성, 일제 때 헐고 역사 건축 / 2004년 새로 지어 이전…최근 KTX덕 이용객 급증 / 남원시, 동충동 옛 역 자리에 공원 조성 계획
2017년 11월 04일 (토)
권혁일 milpislove@jjan.kr
교룡산 자락을 돌아, 철길은 터널에 누운 채 남쪽으로 뻗었다. 전주에서부터 나란히 동행하던 춘향로는 이즈음에서 전라선 철길과 영영 이별하고, 대신 국도 제17호선의 바통을 넘겨받은 서부로가 철길과 함께 달린다. 삼거리를 지나자, 맞배지붕을 얹은 커다란 한옥 양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광장에는 그네 뛰는 춘향과 부채를 펼쳐 든 몽룡이 보였다. 전라선 전북 구간의 마지막 여객 정차역, 남원역이다.
▲ 남원을 상징하는 캐릭터라면 역시 춘향과 몽룡을 빼놓을 수 없다. 남원시 신정동 남원역 광장에 춘향·몽룡 조형물이 서 있는 모습. 권혁일 기자
△활기 넘치는 그 플랫폼
10월 20일, 남원역.
역사 앞에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역사에서 나오는 사람이 교차하는 풍경 뒤로, 소풍을 온 것 같은 어린이들이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플랫폼으로 나가려면 선로 위를 통과하는 다리를 이용해야 한다. 전라선의 모든 여객열차가 서는 역답다.
▲ 남원시 신정동 남원역의 상행 플랫폼. 열차를 기다리는 이들이 벤치에 앉아 있다. 권혁일 기자
전주·익산·용산행 플랫폼에서, 김혜정 씨(55)는 인천공항행 KTX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외 일정이 있어 공항에 가는 길이라는 그의 좌우에는 짐이 한가득이었다. 부피도 부피였지만 무게도 그냥 딱 봐도 무거워 보였다.
직장 동료 손모 씨(41)가 그를 도우러 나왔지만, 정차시간 내에 짐을 열차에 실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열차는 편리하니까 자주 이용하죠. 자주 없어서 문제지. 그런데 이 짐을 정차시간 내에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좀 도와주시겠어요? 하하”
▲ 지난 10월 20일, 남원역으로 인천공항행 KTX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권혁일 기자
대학교 입학 면접시험을 앞두고 있던 채수인 씨(19)는 군산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이 마침 졸업 앨범 사진을 촬영하는 날이었단다. 일찍 끝났으니 일찍 돌아가서 면접 준비를 할 요량이라고 했다.
“열차요? 자주 이용하는 편이에요. 급하면 KTX를 타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궁화호를 타기도 하고요. 학교가 바로 이 근처라서 역으로 걸어서도 오기도 해요.”
▲ 지난 10월 20일, 남원역에 여수행 누리로가 들어와 멈춰 있다. 권혁일 기자
한쪽에서는 분홍색 옷을 맞춰 입은 어린이들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줄잡아 열댓 명 정도인 이 행렬은 진안 안천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나들이 나온 어린이들이었다. 남원에 어떤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차를 타보기 위해’ 전주역에서 KTX를 타고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기차를 타 본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돌아가며 한마디씩 한다.
“빨라요!”
“신기해요!”
“난 타봤는데! 안 신기하거든?”
△침체를 딛고 다시 흥하다
남원역은 1931년 전라선(당시 이름 경전북부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될 때 동충동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옛 남원성 북문이 있던 자리인데, 일제가 성을 헐고 그 자리에 철길을 깔고 역을 지었다.
남원성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항전했던 곳이다. 그 혈전 끝에 전사한 이가 관군과 남원 주민, 명나라 원군 등을 합해 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모신 곳이 만인의총이다.
지금의 남원역은 2004년 8월, 전라선 임실~금지 구간이 복선으로 다시 깔리면서 새로 지어졌다. 옛 남원역으로부터는 직선거리로 2km 남짓 떨어져 있다.
지도를 놓고 보면 그다지 멀어 보이지는 않는데, 막상 직접 찾아가 보면 새 남원역은 도심과 좀 격리돼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는 지리적인 요인도 있겠고, 새 남원역 주변 택지개발이 지지부진하면서 신도시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탓도 있겠다.
▲ 남원시 신정동 남원역 전경. 권혁일 기자
역 광장에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기사 김모 씨(54)는 “아무래도 옛날 역이 낫다. 거긴 상권이 형성돼 있으니까. 여기(새 남원역)는 식사를 하기도 불편하다”고 말했다.
사실 남원역이 외곽으로 옮겨지면서 접근성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하루 이틀 얘기는 아니다.
철도통계연보 기록을 보면, 이전 전인 2003년 한 해 68만9041명에 달하던 남원역 이용객 수가 이전 다음 해인 2005년 55만5978명으로 13만여 명이나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또 사정이 달라졌다. 열차 이용의 편리함이 역을 오가는 불편함보다 크면, 이용객은 자연히 늘기 마련이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KTX 운행이다.
2011년에 전라선 KTX가 개통되고 2012년에 KTX 필수정차역이 되면서 이용객 수가 크게 늘어, 2015년에는 71만 명을 넘기기도 했다.
▲ 지난 10월 20일, 남원역에서 승객 한 명이 플랫폼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권혁일 기자
관광도시 남원답게, 수도권에서 단체로 오는 여행객도 많다고 한다.
정병훈 남원역 부역장(45)은 “봄·가을이면 여행상품을 기획해서 많이들 내려오는데, 특히 봄에 많이 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한편 남원역에서는 여행객들을 위해 자전거를 빌려주기도 한다.
홍보가 많이 되지 않아 이용객은 아직 적은 편이라고 하는데, 동선에 따라서는 이 자전거도 매력적일 수 있는 선택지다.
▲ 남원역에 자전거들이 비치돼 있다. 요청하면 빌려 탈 수 있다. 권혁일 기자
▲ 남원역사 입구에 적힌 글귀, "여기가 지리산 둘레길 시작이자 끝입니다." 권혁일 기자
▲ 지난 10월 20일, 남도해양관광열차 한 편성이 남원역에서 남쪽 순천·여수 방향으로 떠나고 있다. 권혁일 기자
△광한루, 사랑과 전쟁
남원역에서 나와, 남쪽으로 빠져 남문로를 타고 도심으로 향했다.
길가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고, 저기 원경으로는 맑고 파란 가을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지리산이 보였다.
왼편으로는 곧 만복사지가 나온다. 김시습의 소설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그 만복사다. 고려 문종 때 처음 세워졌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 지금은 석인상을 비롯한 몇 가지 석조물만 남아있다.
▲ 남문로 길가에 핀 코스모스. 권혁일 기자
▲ 남원 만복사지. 권혁일 기자
▲ 이렇게 옛 '만복사'의 흔적만 남아 있다. 권혁일 기자
▲ 만복사지 석인상. 목에 난 상처가 안쓰럽다. 권혁일 기자
왕정교를 건넌 뒤 남쪽으로 길을 틀었다.
남원역에서 길 따라 약 3km, 요천 북쪽에 광한루원이 자리해 있다.
조선 초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를 와 ‘광통루’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었다고 한다.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광한루원을 흐른다. 문자 그대로, ‘흐른다’. 물은 이제 곧 용이 되든 뭐가 되든 될 것 같은 거대한 잉어들을 품고, ‘호남제일루’ 광한루를 제 얼굴에 비춘다.
연못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오작교’다. 견우와 직녀 사이를 이어주었다던 그 오작교에서 딴 이름이 맞다. 그렇다면 아래 흐르는 물은 은하수가 되겠다. 그러니, 광한루는 ‘작은 우주’다.
전설 속 광한전과 은하수, 오작교를 바라보는 자리에는 춘향제의 무대로도 쓰이는 ‘완월정’이 서 있다. 사실 지어진 지는 얼마 안 되지만(1971년 신축),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 연못에 비친 광한루의 자태. 권혁일 기자
▲ 오작교에서 바라본 광한루. 권혁일 기자
▲ '호남제일루'라는 글귀가 선명하다. 권혁일 기자
▲ 광한루원 완월정. 권혁일 기자
춘향과 몽룡이 나오는 ‘사랑’ 이야기의 배경으로 알려진 자리지만, 반대로 ‘전쟁’의 자리이기도 했다.
1597년 남원 전체를 불태우다시피 했던 정유재란의 전화가 이곳에도 미쳐, 광한루 또한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누각은 나중에 인조 때 다시 지은 것이란다.
또 동학농민혁명 때, 남원성을 빼앗기고 쫓겨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던 성밖시장 저잣거리 자리가 지금의 광한루원 주차장 인근이라고 한다.
▲ 광한루원이 동학농민혁명과도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비석. 권혁일 기자
광한루원에서 시나브로 걸을 작정을 하면, 요천과 천변길, 춘향테마파크며 함파우 소리체험관이며 남원 항공우주천문대며 하는 남원의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들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물론 지리산도 식후경. 추어탕 전문점이 광한루원을 둘러싸다시피 할 정도로 성업 중인데, 먼저 한 그릇 비우고 길을 나서도 괜찮겠다.
▲ 남원의 명물 추어탕. 권혁일 기자
▲ 광한루원과 춘향테마파크 사이를 잇는 승월교. 권혁일 기자
▲ 남원을 가로지르는 요천은 맑기도 하다. 아직 미세먼지가 몰려오기 전이던 지난 10월 20일은 하늘 또한 맑았다. 권혁일 기자
△옛 남원역과 겹겹이 쌓인 시간들
까딱- 까딱- 까딱…….
나무로 된 흔들의자가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코스모스와 백일홍이 고개를 끄덕인다.
배는 하얗고 등은 까만, 그래서 무슨 예복이라도 걸친 듯한 고양이 한 마리가 레일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남원 도심 한복판, 동충동 옛 남원역은 조용했다. 쓸쓸하거나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조용했다.
한때 이곳을 시끄럽게 했던 것들이 떠나버리고, 이곳에는 열차 대신 사람과 시간이 찾아와 도심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주민 조효순 씨(79)도 그 풍경 속에 있었다.
“여그 사는데, 가까우니까 자주 와요. 공기도 좋고, 사람도 보고. 쪼께 쉬었다가 가죠.”
▲ 남원시 동충동 옛 남원역, 레일 옆에서 꽃을 탐하는 고양이. 권혁일 기자
▲ 남원시 동충동 옛 남원역 자리에 핀 꽃과, 그 뒤 플랫폼에 앉아 있는 시민들. 어쩐지 별세계처럼 느껴진다. 권혁일 기자
지금이야 도심 속 조용한 ‘별세계’가 됐지만, 기억과 기록을 더듬으면 전북 동남권 최대의 역이자 전라선 철도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했던 과거도 있다.
이를테면 1970~80년대 춘향제가 열릴 때면 전국에서 인파가 몰려오곤 했는데, 남원역 플랫폼도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꼴이었다. 당시 연간 백만을 우습게 넘던 이용객 수 규모에 걸맞지 않게 플랫폼이라고 해봐야 섬식 승강장 하나뿐이었으니, 미어터지는 건 다반사였다.
“얘기헐 것이 뭣이 있냐”던 조 씨는, “그땐 역 마당까지 바글바글했다”고 회상했다.
▲ 왼쪽=과거 춘향제가 열릴 때면 남원역에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전북일보 자료사진) / 오른쪽=같은 자리에서 지난 20일 촬영한 모습. 열차도 이제 오지 않고, 물론 열차를 기다리는 이도 없다. 권혁일 기자
한편 이곳에서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1971년 10월 13일, 남원국민학교 6학년 학생 158명을 태우고, 제192호 완행열차가 서울 방향으로 출발했다.
출발 직후 언덕길을 올라가던 열차는 중간에 멈췄다. 출력 1800마력의 신형 디젤기관차였지만, 급유펌프가 고장나는 바람에 힘도 못 쓰고 주저앉은 것이다. 그러다 브레이크의 공기가 다 빠지면서, 열차는 올라온 길 그대로 다시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이때 남원역에 유조열차가 들어와 있었다. 두 열차는 그대로 부딪혔고, 수학여행길의 남원국민학교 6학년 학생 19명을 포함해 20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정비 불량에다 미숙한 사고 대처가 겹치며 벌어진 참사였다.
▲ 1971년 10월 13일, 20명의 사망자를 낸 남원역 열차 추돌 사고 당시 현장. 전북일보 자료사진
이런저런 기억들을 모두 침목 밑에 고이 접어놓은 채, 동충동 남원역은 2004년에 ‘역’으로서의 기능을 새 남원역에 내주고 ‘안식’에 접어들었다.
그 뒤 그대로 방치되면서 ‘도심 속의 흉물’이 될 뻔했던 이 자리가 꽃밭으로 거듭난 것은 2008년. 바로 옆 묘포장 자리에 2007년 조성된 ‘향기원’과 묶어 ‘꽃 단지’로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지금은 옛 남원역사 4만2000여㎡, 향기원 1만7000여㎡가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다. 꽃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철길에, 플랫폼에 발이 닿게 된다. 어쩐지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도 든다.
▲ 남원시 동충동 옛 남원역사. 권혁일 기자
▲ 지난 10월 20일, 남원시 동충동 옛 남원역과 인근 부지에 조성된 꽃밭에 시민들이 찾아와 여유를 즐기고 있다. 권혁일 기자
▲ 남원시 동충동 옛 남원역 플랫폼에 남아 있는 역명판. 그새 글자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워졌다. 권혁일 기자
▲ 이쪽엔 글자가 좀 남아 있다. 남원시 동충동 옛 남원역 플랫폼에 서 있는 역명판. 권혁일 기자
이 풍경도 조만간 다른 모습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남원시는 2019년 이곳에 ‘중앙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아직 옛 남원역사를 보존할지 허물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 넘실대는 코스모스와 그 뒤의 옛 플랫폼. 꿈인 듯, 현실인 듯, 옛 남원역은 그 경계를 넘나든다. 권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