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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책)/ 노거수이야기 · 09.
신천리 이팝나무, "6백여 년 희로애락 나이테에 담고 서서
6백여 년 희로애락 나이테에 담고 서서 |
"옛날에는 금은산 자락에서 마을 안으로 내려오는 개울이 여러 개 있었거든. 골목골목 건너다니자니 자연히 조그만 다리들이 많았지. 개울과 다리가 그물처럼 얼기설기하다고 해서 '그물망' 자를 써서 '망천網川'이라 부른 거지요."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천연기념물(제185호) 지정돼 김해를 대표하는 노거수인데도, 내력을 들려줄 사람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한림면의 신천리新泉里 이팝나무에 대한 이야기다. 수소문 끝에 허영진(77) 씨를 만나고 보니, 이팝나무와 대문을 마주하고 사는 마을 원로였다. 그러나 난감한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안내판에 적어 둔 것 이상은 별 내용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기 때문이다. 산에 있는 과수원에 올랐다가 몸이 으슬으슬해서 들어왔다는 허노인은, 계속 이것저것 물어대자 차마 물리치지 못하고 자리를 권했다. 막상 마주 앉은 다음에는 이야기보따리도 술술 풀렸다. 마을 주민이 '천연기념물' 지정에 앞장 이팝나무가 서 있는 곳은 신천리 망천마을의 안길 옆이다. 마을 이름의 '바랄 망望'자가 예전에는 '그물 망網' 자였다며 그 연유까지 소상히 설명해 준 허노인의 집안은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된 토박이다. 하지만 6백 살로 추정되는 이팝나무의 나이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아들까지 6대째라니 대략 2백년을 '이팝나무 그늘'에서 살아온 셈이다. 실제로도 이팝나무는 허씨 집의 마당 안으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우리 집안에도 전해오는 말이 없으니, 이팝나무에 특별한 사연이 있었더라도 알 도리가 없고, 원래 상태를 생각하면 저절로 난 것은 아니고 누군가 정성 들여 심었을 거라는 짐작만 할 뿐이지요." "그 분 아니면 도움 될 만 한 얘기를 해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던 주민들의 말이 생각났다. "원래는 어떤 상태였습니까?"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허노인은 "이팝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과정을 들어 보았느나?"고 됨불었다. 답변 대신 질문만 오가던 대화는, 그의 자문자답自問自答으로 이어졌다. "67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신문에 큰 기사가 났어요. '전라도 어느 지방의 천연기념물 이팝나무가 봄이 됐는데도 깨어나지 않는다. 죽어가고 있다고 주민들의 걱정이 대단하다......,"이런 내용이었지요.. 그런데 사진을 보니까 이 동네 이팝나무보다 훨씬 못해요. 그래서 여러 신문사에 편지를 썼어. '우리 마을에 신문에 난것보다 훨씬 더 큰 이팝나무가 있다. 비교하면 천연기념물 감이다. 와서 봐라.' 이런 내용으로 보냈지요." 얼마 후 이팝나무 개화기開花基가 되자 위치를 묻는 전화가 오고, 기자들이 몰려들더란다. 며칠 지나자 신문에는 꽃이 만개한 이팝나무 사진이 실렸다. 허씨는 내친 김에 서울의 문화재관리국으로 올라갔다. 마침 친척인 허련許鍊 당시 부산시 부시장이 신문을 읽고 관심을 가져, 담당 공무원을 소개해 주었다. 군처야당시 김해군)에서도 현장 조사를 벌여 천연기념물 지정을 신청했다. 심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그 해 7월 천연기념물 지정이 확정되었다. 허시는 김해 최초 천연기념물 탄생의 숨은 공로자인 셈이다. 이팝나무 '출세'하자 옆의 회화나무는 베어져 "그런데 이팝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나자 생각지도 않던 문제가 생겼지 뭡니까, 이팝나무 옆에 장골 두 아름은 되는 큰 회화나무가 있었는데, 이걸 잘라내야 한다는 거야, 회화나무로만 치면 그 나무도 대단한 크기였는데 이팝나무 때문에 희생을 당한 거지요." 그가 서두에 말했던 '원래 상태'는 회화나무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두 거목이 나란히 선 것으로 미루어, 저절로 나서 자랐다기보다는 그 예옛날 누군가 일부러 심었을 거라는 짐작이었다. 아무튼 이팝나무가 천연기념물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자 수백 년을 함께 섰던 회화나무가 비운을 맞았으니, 나무들의 세상도 사람살이와 다르지 않은 듯해 입맛이 썼다. 이팝나무는 복개된 개울과 주택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리가 협소하기는 하지만, 일부러 옆의 나무를 없애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원인은 다른데 있었다. 두어 해 전 마을 처녀가 회화나무에 목을 매는 바람에, 사람들이 흉살凶殺이 끼었다고 믿은 탓이었다. 마을 주민들조차 근처에 가기를 꺼린다면 천연기념물 지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논란 끝에, 회화나무는 결국 잘려나가고 말았다. 적합한 표현은 아니지만, '결자해지' 차원에서 허씨가 나섰다고 한다. 아무도 회화나무에 톱을 갖다 대려고 하지 않아 '이팝나무의 천연기념물 지정에 애를 쓴 죄로' 그가 악역을 맡아야 했다. 사실, 이팝나무가 쳔연기념물로 지정받고 나서 허씨는 원망도 적지 않게 들었다. 이팝나무의 뿌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 구간을 도로포장에서 제외하는 등 주민들의 생활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허씨는 "흙길에다 이팝나무 앞에 샘터까지 있었으니 바닥이 늘 질척거렸지요. 그래도 이팝나무 때문에 손을 못 대다가 몇 년 전에야 주변에 보호 울타리를 치고 길을 포장한 겁니다.."라고 말했다. 마을 숲, 가지 하나도 함부로 상하지 않게 관리 이팝나무는 마을의 수호목이라기보다는 서너 걸음 앞에있던 '이판나무 샘'을 지켜주는 나무였다. 그래서 매년 한 차례 올리는 제사도 당산제가 아닌 용왕제龍王祭였다. 섣달 그믐밤에 이팝나무 앞에서 소지燒紙를 사르며 새해에도 샘이 마르지 않고 역신疫神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켜주기를 기원했다. 샘터는 웅덩이처럼 길 아래로 쳐져 있었다. 잡물雜物이 들어가지 않도록 둘레에 돌을 쌓았고 그 위에는 길이 다섯 자에 너비 넉 자, 두께 한 자가 넘는 커다란 뚜껑돌을 얹었다. 조선시대 이 마을에 살던 어느 장사가 남쪽 금음산 중턱에서 칡넝콜로 묶어서 지고 온 바위라는 전설도 남아 있다. 박대薄待 당한 이팝나무, 섬김 받는 당산 숲 샘과 이팝나무는, 80년대 들어 간이상수도가 설치되자 어느새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쓰임새도 없으면서 좁은 마을길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눈총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샘은 결국 몇 년 전 마을 안길을 넓힐 때 길바닥에 묻히고 말았다.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샘을 묻으면 재앙이 든다는 속설때문이었다. 주민들은 갑론을박 끝에 샘물에 공기가 통하도록 파이프를 설치하고, 뚜껑돌 위에도 부직포를 깐후 흙을 채웠다고 한다. 필요할 때 흙만 걷어내면 샘물을 다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샘을 묻은 후로는 매년 올리던 용왕제마저 흐지부지하다 중단돼, 이팝나무는 더 외롭고 쓸쓸해졌다. 천연기념물 지정이라는 영예를 지니고도 '뒷방 할아버지' 신세가 된 이팝나무와 달리, 마을의 당산은 여전히 각별한 섬김을 받는다. 당산은 마을 서쪽 자락의 '당고개' 들머리 작은 숲에 지어져 있다. 고갯길은 지금은 끊여져 어느 공장의 진입로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주촌면 덕암리로 통하는 산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지체 높은 이라도 말에서 내려 고삐를 끌어야 하는 구간이 있었다. 길이 험해서가 아니라, 당산 앞에만 오면 말이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백여 년 전, 바람결에 비단 한 폭이 날아와 당산 앞 나뭇가지에 걸린 일이 있었다.펴보니 '유인孺人 아무 곽씨郭氏'라 적힌 명정銘旌(죽은 사람의 품계와 성씨 등을 적어 관棺을 덮는 기旗)"이었다. 해괴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주변 마을에는 상喪을 당한 집이 없었다. 주민들은 명정을 당집으로 옮겨 정성껏 제사를 올린 다음 불태워 없앴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때부터는 사람이 내리지 않아도 말들이 당산 앞을 고분고분 지나다니더라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명정이 당산 숲에 살던 잡신雜神을 쫓아준 것이라 여겨, 당집에 '곽씨 할머니'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정원 보름날 당제를 지내고 있다. 당산 숲은 약 1백 여 평 규모로 팽나무, 느티나무, 서어나무 등이 자생하고 뒤쪽은 대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한 노거수는 없고 가장 큰 나무도 직경 50cm 내외에 불과하다. 오래된 나무들은 50년대 한국전쟁 당시 시름시름하다 모두 고사했다. 주민들은 곽씨 할머니가 동족상잔을 노여워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그로부터 주민들은 곽씨 할머니의 영험을 더 믿게 돼 당산제에 정성을 기울여 왔다. 작은 들 하나를 사이하고 선 이팝나무로서는 시샘이 날만 한 일이다. 과다 결실 등 '고사枯死' 징조 보여 걱정 신천리 이팝나무는 지면에서 바로 세개의 큰 둥치로 갈라진 다음 지상 50cm 지점에서 다시 여러 개의 가지로 나뉘어졋다. 밑둥치의 둘레는 3.5m, 키 15m에 수관 폭은 사방 20m 정도의 균형 잡힌 우산꼴이다. 하지만 밑둥치는 절반 가까이 삭아서 외과 수술로 메웠고, 지엽밀도枝葉密度 역시 낮다. 이팝나무는 또 근래 들어 철따라 변뎍을 부려 주위를 걱정시키고 있다.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봄에는 활력을 되찾았다가 여름이면 벌써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가을에는 다시 왕성한 결실을 보이는 식이다. 비정상적인 조기 개화나 과다결실은 고사枯死를 앞둔 식물들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죽기 전에 씨앗을 남겨 대를 이으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팝나무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는 허영진 씨나 마을 주민들은 이팝나무도 자신의 '최후最後'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마음을 졸인다. "특히 작년에는 가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매를 많이 맺었지요. 그렇잖아도 노쇠한 나무가 무리를 하고 나더니 올해는 더 생기가 없습니다." 허씨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2007뇬 가을에는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열렸던 이팝나무 열매가, 올해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잎은 여름이 채 끝나기 전에 반 이상 떨어졌다. 그래서 옹이나 상처 위에 생긴 돌기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가뜩이나 허약한 늙은 몸에 양분을 빼앗아 가는 맹아지萌芽枝들을 잘라내고 영양제라도 투여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신천리 이팝나무의 나이는, 보는 이나 구전에 따라 6백 살부터 7백 살까지 백 년 정도 차이가 난다. 조선의 개국이 1392년이었으니, 이팝나무의 나이테 속에는 한 나라의 탄생과 멸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그 장구한 세월을 살아온 몸이 온전할 리는 없지만, 지금만큼이나마 건강하게 오래오래 서 있어 주었으면 하고 기원해 본다.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 (2008년 발행. 김해시) |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 노거수이야기 · 09. 신천리 이팝나무, "6백여 년 희로애락 나이테에 담고 서서 2020.12.25. 노거수 탐사 5차/1차 천연기념물 185호/ 겨울나무로 만나다. 2023.11.29. 노거수 탐사 2차/천연기념물 185호/열매로 만나다. 김해쪽에서 가는 길-> 김해낙원공원묘원 좌회전 하는 곳에서 U턴해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더 쉽다. 신천초교(폐교_쪽으로 좁은 길로 갈 필요가 없다.) 반대편 창원쪽에서 오면 바로 우측으로 들어가면 된다. |
2023.11.29 경남 김해(2차)
야탐 노트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따라 다시 나무 여행을 시작한다.
제목의 괄호 안은 만난 횟수를 적어본다.
한의원 다녀오며 혹시 아직 잎이 안 떨어졌으면 하는 맘으로 두 곳을 들리다.
9편 신천리 천연기념물 이팝나무와 29편 갑분마을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이팝나무는 겨울나무로 열매를 만났다.
나무가 힘이 드는지 올해도 열매는 많이 달았다.
내년에 여기 있으면 다시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 따라 꽃이 피는 계절에 돌아봐야지 하는 계획을 오늘 세운다.
1편 천연기념물 307호부터 29편까지 다시 계획을 세워서 꽃 피는 계절에 보자.
쉽지 않겠지만 도전이다.
세워 둔 표찰이 바뀌었다.
그런데 천연기념물 몇 호라는 문구가 사라졌다.
천연기념물 표찰 법이 바뀌었나?
뒤쪽에 집이 있었지 싶은데, 정리해서 정자 2개 들어서 있고 쉼터를 만들어 두었는데, 엄마와 아이들이 놀고 있다.
내년 봄 이팝나무 흐드러게 필 때 꼭 보자.
다음엔 반대편에서 사진을 찍어 보자.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책)/ 노거수이야기 · 09편 신천리 이팝나무, "6백여 년 희로애락 나이테에 담고 서서" 이야기따라 대나무 숲에 있다는 당산도 가 봐야겠다.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 [한림면 관내 노거수]
번호 | 수종 | 소재지 | 본수 (본) | 수령 (년) | 수고 (m) | 흉고 직경 (m) | 수관목(m) | 비고 | |
동서 | 남북 | ||||||||
1 | 이팝나무 | 신천리 946 | 1 | 600 | 15 | 1.5 | 25 | 25 | 천연기념물 제185호 |
2 | 팽나무 | 병동 915 | 1 | 200 | 17 | 70 | 11 | 12 | 시보호수 |
3 | 왕버들 | 안하 673-5 | 1 | 160 | 9 | 110 | 9.5 | 8.5 | 시보호수 |
4 | 상수리나무 팽나무 | 금곡 574 | 1 | 400 | 17 | 140 | 12.5 | 11.5 | 시보호수 |
1 | 400 | 14 | 135 | 17 | 15 | ||||
5 | 팽나무 | 안곡741도 (38-4답 옆) | 1 | 100 | 11 | 90 | 8 | 9 | |
6 | 팽나무 | 인하 1033 | 1 | 500 | 18 | 170 | 28 | 22 | |
7 | 팽나무 | 금 413 | 1 | 200 | 12 | 95 | 11 | 13 | |
8 | 회화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 금곡 574외 6필지 | 7 | 100 ~ 200 | 7 | 30 | 5 | 4 | |
8 | 70 | 8 | 9 | ||||||
15 | 70 | 10 | 10 | ||||||
13 | 90 | 9 | 9 | ||||||
8 | 35 | 5 | 5 | ||||||
13 | 50 | 7 | 6 | ||||||
14 | 65 | 9 | 10 | ||||||
9 | 팽나무 | 가동 152-1 | 1 | 150 | 15 | 85 | 10 | 12 | |
10 | 팽나무 | 가산191-2 (가산분교) | 1 | 150 | 13 | 70 | 12 | 14 | |
11 | 느티나무 | 가산191-2 (가산분교) | 1 | 250 | 14 | 100 | 23 | 22 | |
12 | 느티나무 | 장방 316-4 | 1 | 150 | 13 | 80 | 9 | 8 | |
13 | 감나무 이팝나무 팽나무 팽나무 | 용덕 545임 | 4 | 150 ~ 250 | 15 | 120 | 12 | 12 | |
13 | 90 | 12 | 11 | ||||||
9 | 105 | 13 | 9 | ||||||
14 | 85 | 9 | 11 | ||||||
14 | 은행나무 | 신천417-1 (흥덕사) | 2 | 300 | 25 | 110 | 16 | 17 | |
15 | 왕버들 | 명동1305-5구(인현마을) | 2 | 200 | 9 | 110 | 10.5 | 9 | |
150 | 8 | 95 | 10 | 8 | |||||
16 | 회화나무 | 명동 235 | 1 | 150 | 14 | 95 | 12 | 13 | |
17 | 소나무 | 안곡 산145 | 2 | 250 | 12 | 60 | 8 | 7 | |
12 | 50 | 7 | 5 | ||||||
18 | 느티나무 | 병동 334임 | 1 | 400 | 22 | 151 | 20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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