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장 천하우물(天下尤物) 백화미(白花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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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을 입은 청년, 즉 호불범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숙부님들, 잠시만 물러나 주십시오."
그의 음성은 여전히 청량하고 차분했다. 세상의 그 어떠한 일도
호불범이라는 청년에게는 놀라운 일이 못되는 것같았다. 그는 마
치 모든 일이 예측 속에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공손패와 마운로는 그를 무척이나 믿는 듯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
났다. 호불범은 신비한 광채가 감도는 눈으로 하후성과 금악비를
주시하며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은 만사귀재의 손자로 호불범이라 하오."
그는 창백한 얼굴에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계속 말했다.
"조부님은 여지껏 한 번도 무림의 일에 관여하신 적이 없소. 뿐만
아니라 강호의 흑백도(黑白道)에 골고루 교분을 맺어 오히려 이
지역의 평화에 크게 공헌을 하셨소. 그런데 그대들이 조부님을 암
습하여 시해하다니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오."
호불범의 영준한 얼굴에는 한 가닥 무서운 원한의 기운이 떠올랐
다.
그러나 금악비는 오히려 조소를 지었다.
"흠, 결국 호불귀는 죽었다 그 말이군. 그 늙은이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들려 혹시나 해서 왔는데."
호불범의 창백한 얼굴에 살기가 점차 깊어졌다.
"조부님은 분명 돌아가셨소. 그리고 소생은 손자된 도리로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소."
그는 차갑게 덧붙여 말했다.
"그대들은 오늘 절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후성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음. 저 청년의 눈빛은 실로 기이하구나. 무공을 익힌 것도 같고
전혀 모르는 것도 같으니.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 자의 심계(心
計)가 놀라울 만큼 무섭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말고 하후성은 문득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졌음을
깨달았다.
'잘못하면 이 자리에서 오해를 풀지 못하겠구나.'
하후성은 곧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소생의 말을 들어주시오."
그러나 그가 입을 떼자 즉시 금악비가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형. 이들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소? 이렇게 된 이상 계획
대로 제거합시다."
하후성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금악비의 말 한 마디에 꼼짝없이
그의 동료로 인정되고 만 것이었다. 실로 금악비의 심계는 악독하
기 그지없었다.
'무서운 자다.'
그는 절로 가슴이 떨렸다. 이때 호불범이 살기띈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나는 조부님이 시해당한 후 일부러 그대들을 유인하기 위해 강호
에 소문을 퍼뜨렸다. 그대들로 하여금 조부께서 정말 돌아가셨는
지 의심이 들도록 말이다."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결국 그대들은 나의 계책에 걸려 들었다. 나의 천라지망(天羅之
網)은 당신들을 꼼짝없이 옭아맬 것이다."
금악비가 히죽 웃으며 빈정거렸다.
"글쎄... 그게 뜻대로 될까?"
호불범은 지체 없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혈의삼십육궁! 연환마궁(連還魔弓)을 발사하시오!"
사방의 휘장을 뚫고 수십 개의 피빛 광채가 퍼부어졌다.
한결같이 궁(弓)의 달인들이랄 수 있는 혈의삼십육궁, 그들의 솜
씨는 정확했고 모두 공력이 일 갑자(一甲子) 이상을 넘었다.
비 오듯 쏟아지는 핏빛 화살은 그야말로 연환마궁이었다.
파파팍!
하후성과 금악비는 조금도 태만하지 못하고 양 손을 펼쳐 광선같
은 화살을 떨쳐냈다. 그러나 수십 수백 줄기로 끊임없이 퍼부어지
는 공세를 계속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마침내 화살을
막아내며 자신도 모르게 한 곳으로 몰렸다.
하후성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났다.
'이제 보니 이 연환마궁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구나!'
그의 눈에 금악비가 여전히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채 연달아 수도
(手刀)로 화살을 쳐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음, 저 자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한편 그들이 빈청의 구석에 몰리자 호불범의 낭랑한 외침이 터졌
다.
"건위(乾位)에 걸렸다. 천라지망을 쳐라!"
쏴아!
그의 말이 떨어지자 갑작스런 변화가 일었다. 천정에서 방원이 무
려 오 장(五丈)이나 되는 거대한 철그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엇!"
금악비는 경악성을 질렀고 하후성도 고소를 금치 못했다.
'잘못하면 그물에 걸린 물고기 신세가 되겠구나.'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후성의 혜지어린 눈은 예리하게 사방을 살
폈다.
'좌삼방으로 틈이 보인다.'
그의 신형이 유령같이 날았고 때맞춰 금악비도 그와 함께 신형을
날렸다. 그들이 간발의 차이로 철그물을 벗어나 막 바닥에 발을
디딜 때였다.
"좌삼방에 마검정(魔劍井)을 열어라!"
"앗!"
하후성과 금악비는 동시에 경악성을 질렀다. 바닥을 내딛던 발밑
이 허전해지며 시커먼 함정으로 쑥 빠져들고 만 것이었다.
너무나 찰나지간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었다.
"호호호호호!"
갑자기 사나이의 간장을 녹일 듯한 교태스런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더우기 그 웃음에는 기이한 마력(魔力)이
깃들어 있어 듣는 이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휙!
한 개의 가늘고 부드러운 채찍 끝이 함정 속으로 뻗더니 교묘하게
움직여 함정 속으로 이미 일 장(一丈) 가량 떨어진 금악비의 손을
휘감았다.
"앗!"
금악비는 매우 놀랐으나 그 채찍에 의지해 구사일생으로 허공을
향해 붕 떠올랐다.
쾅!
간발의 차이로 바닥은 원래대로 닫치고 말았다.
"으으!"
금악비는 전신에 식은 땀을 흘리며 신형을 안정시켰다.
그는 함정에 빠진 순간 함정 밑에 독이 발라진 날카로운 검이 무
수히 꽂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그곳에 떨어지면 온
몸이 걸레처럼 되고 말 것이 뻔했다.
공손패가 고함을 질렀다.
"어떤 계집이 방해를 하느냐?"
"호호호! 당신은 무척이나 말이 거칠군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빈청 안에 한 명의 백의여인이 떨어져 내렸는
데 그녀는 실로 월색이 빛을 잃을 정도의 절세미녀였다.
천하의 온갖 미가 오직 그녀의 전신에 뭉쳐있는 것만 같았다. 그
로 인해 공손패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백의미녀의 폭발적인
미모가 일시지간 그의 가슴을 마구 울렁이게 한 것이었다.
"호호호! 금사형, 꼴좋군요.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결국 저 아니면
당할 뻔 했잖아요?"
백의미녀는 주위환경을 둘러보며 마치 제 집인 양 이렇게 말했다.
금악비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실수였소, 사매. 만약 무공 만으로 했다면 절대 당하지 않았을
거요."
백의미녀는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큰소리는 여전하군요."
그녀는 주변 인물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계시는 영웅대협들께 소녀 백화미(白花美)가 인사드립니
다."
절세의 미색을 지닌 이 백의미녀는 바로 수년 전 단혜령과 함께
소림에 나타나 당시 소림의 승려였던 하후성을 유혹한 요화(妖花)
백화미였다.
천성적으로 무서운 미태를 갖고 있는 그녀로 인해 천안통수 마운
로는 전신에 끓어오르는 무서운 욕정을 느끼고 대경했다.
'이럴 수가! 이 계집은 천하의 우물이다. 단지 눈웃음만으로 백
세에 가까운 내가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아, 무서운 일이
다!'
그는 즉시 공력을 일으켜 심신을 안정시키며 공손패를 보았다. 그
러나 공손패는 멍청히 굳은 채 충혈된 눈으로 백화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마운로는 섬뜩하여 외쳤다.
"공손형! 정신 차리시오!"
외치는 소리에 공손패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간신히 정신을 차리
고는 수치감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는 욕화를 발산해 버리려는 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혈의삼십육궁! 저 년놈들에게 연환마궁을 발사해라!"
백화미의 자극적인 교소가 그의 말을 받았다.
"호호호! 연환마궁은 이미 쓸모없게 되었어요. 그들이 나를 보고
내 음성을 들은 이상 절대로 쏠 수가 없을 걸요? 벌써 혼(魂)이
빠졌을 테니까. 호호호!"
"뭣이?"
공손패와 마운로는 대경했으나 곧 넋을 잃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휘장 뒤에서 연환마궁을 발사해야 할 혈의삼십육
궁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있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그들이
미혹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백화미의 폭발적인 유혹이 깃든 몸짓과 음성에도
아무런 동요를 받지 않은 자가 한 사람 있었다.
호불범이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심력(心力)이 이
미 섭혼령술이나 미심대법을 극복할 정도로 반석지경(盤石之境)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의 침착한 태도를 백화미도 보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안색이
오히려 미미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이때 금악비가 음침한 어조로
말했다.
"호불범, 이제 네 놈에게 방금 당한 것을 갚아주겠다."
그가 전혀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번쩍 하는
금빛이 호불범의 이마로 날아들었다.
"금마비(金魔匕)!"
호불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가 피하기에 금마비는 너무
도 빨랐다. 중인들은 모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들은 호불범이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챙!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며 금마비는 무엇엔가 방해받은 듯 방
향이 비뚤어져 빗나가더니 한 쪽 기둥에 가 박혀 버렸다.
"어떤 놈이냐?"
금악비는 안색이 대변해 외쳤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호불범의 입
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진인(眞人), 들어오십시오."
그의 음성이 떨어지자 즉시 밖에서 낭랑하고 부드러운 도호소리가
울려퍼졌다.
"무량수불."
중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빈청 안으로 한 명의 도인(道
人)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약 삼십 세 정도 된 젊고 청수한 용모
의 도사로 손에는 푸른 색 불진을 들고 있었으며 두 눈은 맑기가
수정(水晶)과 같았다.
조용히 걸어오는 젊은 도인의 전신에서는 기이할 정도의 현기(玄
機)가 어려 있었다. 그를 보자 백화미의 아름다운 눈은 반짝 빛났
으며 반면 금악비는 섬뜩한 살기를 뿜었다.
금악비가 거칠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젊은 도인은 부드럽고 담담히 말했다.
"무량수불... 소도(少道)는 무당(武當)의 청수(靑水)라 합니다."
"무당(武當)!"
금악비와 백화미는 물론 공손패와 마운로마저 안색이 변했다.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무림에 제자를 내보내지 않았던 무당에서
사람이 나오다니!'
그것은 그들 모두의 공통된 놀라움이었다. 실상 구파일방(九派一
幇)은 수십 년래 이름만 걸려 있을 뿐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중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무당의 젊은 도인에 대해 경이로움을 금
치 못했다. 단지 한 사람, 호불범 만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바로 그가 무당 도인을 초청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금악비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이 변하여 물었다.
"그대가 청수(靑水)라면, 그럼 무당오행자(武當五行子) 중의 막내
인 청수자(靑水子)란 말이냐?"
도인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렇소이다."
금악비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당오행자(武當五行子).
그들은 현 무당파의 중심인물로 장문인인 을목자(乙木子)를 위시
하여 무토자(戊土子), 천금자(天金子), 화룡자(火龍子), 그리고
막내인 청수자(靑水子)까지를 이르는 것이었다.
첫째인 을목자는 이미 백 세가 가까웠으나 막내인 청수자는 불과
삼십(三十), 그러나 무당오행자의 무공은 나이와 상관없이 하나같
이 통천지경으로 알려져 있었다.
단지 그들은 이십 년래 활동을 중지했으므로 그 실력이 외부로 드
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금악비는 청수자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 소문에 듣기로 무당의 오행자는 모두가 무공이 신(神)의
경지이며 특히 청수자는 무당의 정종무학(正宗武學)을 완벽하게
터득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청수자가 이곳에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즉시 시선을 돌려 호불범을 응시했다. 그러나 호불범은 벌써
그의 생각을 알았는지 입가에 싸늘한 조소를 머금은 채 그를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금악비는 가슴 한 쪽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무서운 놈!'
한편, 장내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혈의마검 공손패는 여전히 살기띈 표정이었고, 천안통수 마운로는
노안 가득히 침중함을 담은 채 금악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기이한 것은 백화미의 태도로써 청수자가 나타난 이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뇌쇄적인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호불범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차갑게 입을 떼었다.
"조부님의 사후(死後) 나는 그대들을 한 명도 살려두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첫 번째로 이곳에서 너희들을 제거하겠다."
금악비가 음침하게 웃었다.
"후후후! 너희 네 명의 힘으로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
냐?"
그의 눈 깊숙한 곳에서 한 줄기 녹광(綠光)이 스쳤다.
"삼 세(三歲)때 무공수련을 시작하여 이십여 년 간 외길 만을 걸
어온 나다. 무당의 오행자가 아무리 뛰어나고 공손패의 마검이 제
아무리 빠르다 해도 나를 꺾지는 못한다."
혈의마검 공손패가 나직히 웃었다.
"흐흐흐! 금가 놈, 아까는 노부가 네 놈을 너무 얕봐서 당했다.
나 혈의마검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줄 안다면 큰 오산이다."
뱀처럼 축 늘어져 있던 그의 혈검(血劍)이 독오른 독사처럼 곤두
섰다.
"혈영생사절유검(血影生死絶有劍)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
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마치 붉은 구름처럼 허공으로
솟구쳤고 동시에 그의 혈검이 가공할 피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금
악비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덮쳐갔다.
파파팟! 파... 파... 팍!
무서운 혈광이 죽음의 냄새를 뿌리자 금악비의 눈꼬리가 순간적으
로 파르르 떨렸다.
'과연 사도(邪道)의 거마(巨魔)답다.'
그러나 어느새 그의 쌍수는 십 자로 교차되어 있었으며 그의 양
발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그는 덮쳐오는 혈검의 검기 속을 파고 들며 쌍수를 수평으로 뻗었
다.
슈... 슈슉!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파공성이 중인들의 고막을 강타했다. 금
악비의 장법을 보고 있던 천안통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저 장법은?"
청수자의 고요하던 얼굴에 어둠이 스쳤다.
"무량수불.... 불사지존의 독문장법인 십자강살장(十字 殺掌) 입
니다.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저 장법이 다시 나타나다니."
청수자는 힐끗 호불범을 응시했다. 그러나 호불범은 여전히 무심
한 표정으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
양 높은 청수자마저도 호불범의 그런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싸우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돌렸다.
금악비와 공손패는 실로 무시무시한 대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
손패의 혈영생사절유검은 섬전같이 빠르고 잔인무도한 반면 금악
비의 십자강살장은 극히 패도적이고 웅혼했다.
파파팟! 파.팍!
귀청을 찢는 날카롭고 험악한 파공성이 혼백을 달아나게 했다. 그
것을 본 천안통수 마운로는 침통하게 말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오, 공손형의 혈영생사절유검은 강호일절로써
평생 무패(無敗)를 자랑했는데 한낱 젊은이와 평수를 이루다니."
그 사이 금악비의 입가에 야릇한 살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그의 장
법이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양 손이 순식간에 녹색으로 변하며 녹색기류를 뻗었다. 마운
로는 대경하여 외쳤다.
"단혼녹혈수(斷魂綠血手)! 공손형, 위험하오! 정면으로 부딪치지
마시오!"
그러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파파파팟! 펑!
"으윽!"
녹색 장력은 혈광 속을 곧장 꿰뚫고 들어갔다. 공손패는 처절한
비명을 발하며 뒤로 오 보나 연달아 후퇴했다. 그의 안색은 순식
간에 핼쑥해졌으며 입가에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금악비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번졌다.
"흐흐흐... 아주 죽여주마!"
번쩍!
그의 소매 속에서 금마비가 뻗었다, 신형을 미처 바로 잡지도 못
한 공손패는 금마비가 미간으로 파고 들자 눈을 감고 말았다.
실로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였다.
"무량수불... 손속이 지나치시오."
낭랑한 불호와 함께 한 인영이 유령처럼 공손패의 앞을 막았다.
쨍!
금마비는 아슬아슬하게 무엇엔가 부딪쳐 날아갔다 그곳에는 청수
자가 불진을 흔들며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금악비의 안색이 살기를 띄며 외쳤다.
"청수자! 무당의 알량한 힘을 믿고 나서느냐?"
그러나 청수자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빈도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손패가 처절하게 외치며 나섰다.
"청수자, 비켜나게! 노부가 동귀어진하는 한이 있어도 저 어린 놈
을 죽여버리겠다!"
그의 안면에는 비장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남에게
패했으며 그 치욕은 정녕 그에게 엄청나게 타격을 준 것이었다.
이제껏 담담히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호불범이 나섰다.
"공손숙부님, 잠깐만!"
그러나 공손패는 거칠게 말했다.
"불범, 나를 말리지 말게!"
호불범은 여전히 침착했다.
"숙부님, 이것은 감정 만 갖고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이 조카에
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공손패는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간신히 노화를 참고 물러났다. 이
때 이제껏 가만히 있던 백화미가 갑자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그 웃음소리에 중인들은 또 한바탕 기혈이 뜨거워지며 마음이 흔
들리는 것을 느꼈다. 다만 단 두 사람, 즉 청수자와 호불범 만이
예외일 뿐이었다.
백화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교태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의 이름이 호불범인가요?"
"그렇소."
호불범의 대답은 여전히 침착했다. 백화미는 큰 눈에 마력적인 광
채를 발산하며 말했다.
"확실히 만사귀재의 손자답게 당신의 계략은 놀랍군요. 그러나 당
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을 거예요."
호불범의 얼굴에는 기이한 빛이 떠올랐고 백화미는 주위를 둘러보
며 말했다.
"이 만경루의 힘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수라궁(修羅宮)에 비
교하면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에요."
호불범을 제외한 모든 인물의 안색이 변했다.
"수라궁, 역시 수라궁의 짓이었구나!"
공손패가 참지 못한 듯 분노성을 터뜨렸으나 호불범은 역시 짐작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백화미는 날씬한 교구를 묘하게 돌리며 금악비를 향했다.
그녀는 사소한 동작일지라도 미묘한 충동과 유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금사형, 제가 수라궁에서 올 때 어떤 인물들을 데려 왔는지 아세
요?"
금악비는 흠칫하더니 곧 눈빛을 빛냈다.
"금, 은, 동, 철 중에서 말이오?"
"그래요."
금악비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철마수(鐵魔手)? 아니면 동마수(銅魔手)?"
백화미는 꽃같은 얼굴을 저으며 웃었다.
"호호호...! 아니에요, 틀렸어요. 소매는 은마수(銀魔手)를 데려
왔어요."
금악비의 안색이 변했다.
"은마십이수(銀魔十二手)를?"
"그래요."
금악비는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그럼 싸움은 끝난 셈이군."
백화미도 교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그녀는 밖을 향해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외쳤다.
"은마십이수, 모습을 보여라!"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변해 밖을 주시했으나 호불범 만은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
았다 백화미의 안색은 그만 동요되고 말았다.
그녀는 재차 외쳤다.
"은마십이수!"
호불범이 담담히 그녀를 향해 말했다.
"낭자가 부르는 그들은 이곳에 없소. 그들은 이미 남창으로 오기
전에 제지되었소이다."
"뭐라고요?"
백화미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화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은마십이수는 절정고수예요, 그런데 천하에 누가 그들을 제지시
킨단 말인가요? 거짓말 말아요!"
"아미타불.... 자만은 곧 패배를 의미하는 법, 천하에 절대란 있
을 수 없는 법이외다."
느닷없이 들려온 불호소리에 백화미는 안색이 대변했다.
"누구냐?"
백화미는 앙칼지게 외쳤다. 그러자 빈청 안으로 세 명이 올라서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회의가사를 입은 중들로, 가운데 중은 이제 이십 오
륙 세의 청수하고 눈빛이 고요한 젊은 승려였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소림의 정혜(丁慧)였다. 그의 양 옆에는 두
명의 중년승려가 대동해 있었는데 그들 또한 눈빛이 모두 물처럼
고요했다.
백화미는 요염한 눈에 경악을 담으며 물었다.
"그대들은?"
정혜는 합장불호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에서 왔습니다."
"소림(少林)!"
이미 백 년 전(百年前) 마애천불(魔涯天佛) 천뢰선사가 소림으로
들어간 이후 줄곧 두문불출했던 소림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백 년의 침묵을 깨고 소림사의 승려가 나타난
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백화미의 고운 얼굴이 변화를 일으켰다. 무당에 이은 소림의 출현
은 정녕 놀라운 변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은마십이수를 제지했단 말인가요?"
정혜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림십팔나한(少林十八羅漢)이 그들을 막았소이다."
"십팔나한!"
백화미가 대경하는 사이 정혜는 고개를 숙였다.
"소승은 십팔나한 중 한 명인 정혜라 합니다."
뒤이어 두 명의 중년승려도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빈승은 정운(丁雲)이오이다."
"빈승은 정료(丁了)이오이다."
백화미와 금악비의 안색은 점차 변했다.
'백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소림사 십팔나한이 나타나다니!'
호불범은 세 소림사 승려의 출현에 줄곧 신비한 미소를 머금고 있
었다. 그러나 그 미소 속에 이미 계산된 무서운 살기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금악비는 정혜 등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오늘은 완전히 실패다. 저 세 중놈이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나머지 십팔나한도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것이 틀림없
다.'
금악비의 눈에 흉광이 어리더니 한 쪽에서 태연하게 서 있는 호불
범을 노려보았다.
'모든 것이 다 저 놈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놈 만은 절
대 살려둘 수 없다.'
금악비는 신형을 날리며 번개같이 우장을 휘둘렀다. 그것은 불사
지존의 절기인 와선장(渦旋掌)이었다.
우르르... 릉!
소용돌이의 장력이 순식간에 호불범을 휩쓸어갔다. 뜻밖의 급공이
었으나 호불범은 여전히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아미타불."
낭랑한 불호와 함께 회색 인영이 호불범을 막아서는가 싶더니 그
로부터 금광(金光)이 번쩍 일었다.
꽝... 꽈르릉!
엄청난 폭음이 일어났다.
"윽!"
금악비는 두 팔이 시큰함을 느끼며 다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났
다. 그를 막은 자는 바로 정혜로써, 정혜는 한 걸음 물러나며 담
담히 미소 짓고 있었다.
금악비는 그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십팔나한 중 한 놈이 나와 평수라니.'
금악비는 정혜의 정순한 내공과 놀라운 무공에 일단 크게 놀랐으
나 정작 모르는 게 있었다. 사실상 십팔나한이 강하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도 정혜의 무공이 가장 강했던 것이다.
정혜는 소림의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으며 동시에 범천승
(梵天僧)에도 들어 있는 소림 제일의 기재(奇才)가 아닌가? 그는
정(丁)자 항렬에서는 가장 강한 고수였다.
더구나 방금 정혜가 전개한 금광이 일어나는 무공은 바로 금강복
호신권(金剛伏虎神拳)으로, 강호의 허수(虛手)가 아닌 소림진학
(少林眞學)이었다.
금악비는 마침내 마음을 달리 먹었다.
'분하지만 오늘은 불리하다. 이대로 물러서는 것이 상책이구나.'
호불범은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금악비, 네 마음대로 쉽사리 물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생각은 버려야 한다."
금악비는 안색이 홱 변했다.
'대체 저 놈의 머리는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남이 생각하는 것까
지 모두 알아낸단 말인가?'
그는 점차 호불범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번에는 백화
미가 교소를 터뜨리며 그에게 말했다.
"호호호호...! 금사형.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호불귀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닌가요?"
금악비는 흠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매."
"그럼 그의 죽음이 확실한 이상 이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겠군
요?"
"그렇소."
그러나 백화미의 안색에 갑자기 요기(妖氣)가 어렸다.
"흥! 그러나 소매는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가 않아요."
그녀는 주위의 인물들을 둘러보더니 야릇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이곳에는 일류고수들이 많아요. 소매는 이들을 상대로 한
가지 시험을 하고자 해요."
"시험이라니, 무슨?"
금악비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백화미의 아름답기
짝이 없는 얼굴에는 살인적(殺人的)일 만큼 유혹이 충만한 웃음기
가 떠올랐다.
"호호호호호호......!"
사요(邪妖)한 교소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녀는 교구를 미묘하게 흔들며 웃음을 흘려내고 있었다. 그 웃음
소리에 가장 먼저 정신이 아찔해진 것은 공손패였다.
그는 심혼을 자극하는 웃음이 들리는 순간 단전에서 불같은 욕망
이 일어남과 동시에 묘한 색정(色情)이 발동되는 것을 느꼈다.
천안통수 마운로도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에 난 긴 수염이 내심의
충동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호호호......!"
백화미의 뇌쇄적인 웃음은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그녀의 동문(同
門)인 금악비조차도 굳어진 채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있었
다.
"호호호......!"
백화미의 웃음이 점차 더 열기를 띄워가자 정혜는 침중하게 불호
를 외우며 외쳤다.
"아미타불...! 여시주, 마소(魔笑)를 거두시오!"
그러나 백화미가 그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마기(魔氣)가 깃든
교소를 울려내는 가운데 점차 그녀의 몸에서는 가공할 색기(色氣)
가 넘쳐흘렀다.
청수자(靑水子), 즉 무당오행자의 막내인 그도 점차 안색이 창백
해졌다. 그는 급히 두 눈을 감고 무당 정종심법(正宗心法)인 태청
신공(太淸神功)을 운공해 심력을 보존했다.
반면 이제 공손패와 마운로는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채 극심한
갈등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내공으로 치자면 결코 청수자보다 하수(下手)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도가(道家)의 정종심법을 익혀온 청수자보다는
아무래도 심력에서 한 수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정혜(丁慧).
그도 점차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으음."
옆에서 신음이 들려 돌아보니 정운과 정료가 바닥에 정좌한 채 안
색이 핏빛이 되어 유혹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호호호호호호......!"
백화미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 마침내 정혜조차도 뜨거
운 본능의 욕망이 단전 밑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소
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안 된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소림의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된다!'
정혜는 이를 악물며 달마선공(達磨禪功)을 일으켰다. 곧 그의 얼
굴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백화미는 여전히 웃음을 흘리면서도 만면에 득의한 기색을 지었
다. 그러나 저으기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빈청 안을 둘러 보던 그
녀는 단지 한 사람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저럴 수가?'
호불범이었다.
유일하게 그 만은 그녀의 마소에 추호도 동요되지 않은 채 냉담하
고 예리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백화미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나의 섭혼마소공(攝魂魔笑功)에도 넘어가지 않다니, 대체 저 자
의 심력(心力)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백화미의 뇌리에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소림사의 태실봉(太
室峯) 승불폭(僧佛瀑)에서 만난 젊은 중.
'현수(玄修)라고 했지. 그 중도 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런데 저 자는 그보다 더하니... 천하에 저렇게 정력(定力)이 센
자가 있을 줄이야!'
백화미는 오기를 느꼈다.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그녀는 당장 섭혼마소공을 중지하고 더욱더 무서운 미공(迷功)을
전개했다.
곧 그녀의 육감적인 고은 입술에서 웃음 대신 짜릿짜릿한 음가(淫
歌)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방중술(房中術) 중 정사(情事) 도중
에 여인이 부르는 희열과 쾌락에 가득찬 노래였다.
그리고 희대의 요녀 백화미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몸을 빙그르르 돌린 순간 한 줌밖에 안 되는 세류요의 허리에서
백색 띠가 풀어졌다. 눈같이 흰 비단옷이 서서히 아래로 흘러내리
고 있었다.
"으으... 음."
장내 곳곳에서 온통 흥분에 찬 신음이 터졌다.
마침내 백화미는 백의를 벗어버렸다. 그 안에는 속이 환히 내비치
는 거의 투명한 망사의(網絲衣)를 입고 있어 그녀의 폭발적인 색
정을 유발하는 육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백옥같은 피부, 터질 듯 솟아오른 젖가슴과 은은히 돌기된 분홍빛
유두(乳頭), 동그란 아랫배의 선(線).......
그리고 아랫배의 기름진 경사 밑에 대리석같은 두 다리, 그 출발
하는 지점의 삼림(森林)이 우거진 비역(秘域)까지 중인들의 눈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백화미의 육체는 중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망사의가
날릴 때마다 현란한 허벅지가 드러나 중인들의 피를 끓게 했다.
백화미는 계속 탕기어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빈청을 맴돌았
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