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돌아온 전설(傳說)
(1)
"네놈들도…… 용봉의 기운을 본 게로구나! 그렇다면 자금의 구중밀처에 서린 음모도 알고 있을 터……."
채무량은 피가 배어나오는 배를 한 손으로 움켜잡은 채 괴이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노인과 두 소년 곁으로 비척비척 다가서고 있었다.
노인은 채무량의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더니 끌끌 혀를 찼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돌아버렸다고 소문난 채무량이란 말이지?"
흑의 소년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배가 뚫리고도 계속 지껄이는 걸 보니 꽤 생명력이 질긴 놈이군요."
백의 소년이 입가에 묘한 미소 떠올리며 천천히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배가 뚫려서 그래. 목이나 머리가 뚫리면 사정이 틀리지. 자! 이제 영원히 잠들어라."
그는 선을 긋듯 손을 가볍게 내리쳤다.
섬전과 같은 빛이 슈와아악! 채무량의 목을 향해 쏘아져왔다.
채무량은 얼빠진 웃음을 흘리며 그 빛이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 쳐다보고만 있었다.
"안 돼!"
외침과 함께 채무량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 석비룡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콰콰쾅!
빛은 석비룡에 의해 차단되었고 백의소년은 휘청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는 멍하니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뭐야? 지금 내가 밀린 거야?"
흑의 소년이 얼음장 같은 얼굴로 말했다.
"분명 밀렸어. 채무량이 아닌 저 새파란 애송이에게 말야."
백의 소년의 눈가에 섬뜩한 기운이 비쳤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 요사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킬킬! 오래 살다보니 별 희한한 일을 다 당해보는군!"
석비룡은 빙긋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백의귀동(白衣鬼童) 장우사(張牛邪)가 천하에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고수이긴 하지만 더 뛰어난 상대를 만나면 패할 수도 있지"
그렇다면 검은 옷을 입은 아이는 흑의귀동(黑衣鬼童) 장우화(張牛華)!
강호의 무림인들은 그들을 흑백쌍귀(黑白雙鬼)라 불렀다.
백세가 넘었지만 동자공(童子功)을 익혀 항상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괴인(怪人).
장우사는 킥, 하고 웃었다.
"그 말은 네가 나 보다 낫다는 것이냐?"
"당연하지."
석비룡은 가슴을 쭉 폈다.
"깔깔깔깔!"
장우사는 한바탕 미친 듯 웃었다.
"너 정말 마음에 들었어! 날 이렇게 웃길 수 있다니 말이야!"
장우화가 말했다.
"저 녀석은 지금 널 웃기는 게 아니라 비웃는 거야"
장우사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비웃어? 현현교 십팔마전(十八魔殿)의 한 곳을 관장했던 나 백의귀동 장우사를 비웃었다는 거야?"
그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확확 느껴지는 것이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석비룡을 쳐다보는 그의 두 눈에서 흰 광채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길고도 긴 백이십 년 세월을 살아온 내가 머리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저런 애송이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단 말이지?"
그는 품속에서 짧은 한 자루의 단검을 뽑아 쥐었다.
그리고 눈부신 검광을 펼쳐내며 다짜고짜 석비룡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것이 바로 현현교의 십대신공 중 하나인 온조팔화공(溫燥八化功)이다!"
그의 검은 매우 민첩했고 정신을 흐트러놓을 듯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변화하더니 마지막에 가서야 석비룡의 가슴을 노리며 덮쳐갔다.
석비룡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즉시 쌍장을 모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러자 우습게도 장우사의 전력을 다한 일격은 갑자기 방향을 잃고 옆으로 빗나가 버렸다.
무영비록 가운데 수화접형(水花蝶形)의 비술이다.
상대를 먼저 공격할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피하는 데 장점을 지닌 절기.
장우사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놈이 어떻게 손을 쓴 거야?"
장우화가 말했다.
"네가 나이를 쳐먹은 걸 감안한다면 놈에게 진 거야."
장우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졌다고? 내가?"
노인이 판결을 내렸다.
"장우화의 말대로다. 분명 네가 패했어!"
장우사는 고개를 훼훼 저었다.
"인정할 수 없어. 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단 말이야!"
노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이제야 내 말의 진의(眞意)를 알겠느냐? 강(强)이란 더 강한 것을 만나면 꺾인다는 이치를……."
그는 고개를 돌려 석비룡을 쳐다봤다.
"그나저나 참으로 놀랍구나. 아득한 옛날 전설 속에 묻혀버린 무영비록의 무공이 다시 나타나다니……."
석비룡은 포권을 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무리 놀랍다한들 어찌 현현교의 삼좌존(三座尊) 중 한 분이신 광마(狂魔) 좌숙야(左肅也) 노선배의 등장에 비하리까?"
"호오, 진작 날 알아보았느냐?"
좌숙야는 짐짓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살아계신 걸 보니 매우 유감이올시다."
석비룡의 자세는 공손했지만 말투는 비아냥에 다름 아니다.
좌숙야는 흥분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어린 녀석이 실로 고약한 세치 혓바닥을 지녔구나! 요즘 무림에 젊은 아이들 가운데 천리무영이라는 놈은 빠르다는 것과 교활하다는 것, 그리고 계집 밝히는 데 있어 천하제일이라더구나."
석비룡은 흰 이를 드러내며 맑게 웃었다.
"그렇게 알아주시고 칭찬해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오!"
그는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전설적인 존재이신 광마 좌숙야 선배와 애제자(愛弟子)이자 현현교의 실력자인 흑백쌍귀를 뵙게 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채무량은 꿈이라도 꾸는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현현교…… 현현교…… 그들이 오고 있어…… 세상은 곧 파멸하리라…… 용봉이 자금에서 나왔으니 이제 그들을 막을 자는 없도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좌숙야의 눈빛이 잘 갈은 한 자루 칼날처럼 빛났다.
저놈의 입을 막아라!
그의 눈빛이 명했고 흑의귀동 장우화는 그 명령을 알아들었다.
장우화는 손을 뻗으며 순식간에 채무량 앞에 이르렀다.
쉐에엑……!
이 수법은 보기엔 평범해도 불가사의하게 빨랐다.
석비룡은 말을 계속하면서도 계속 장우화를 곁눈질하며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그가 너무나 빠르게 채무량을 공격하자 미처 끼어들 사이도 없었다.
"멈춰!"
석비룡이 몸을 날리며 장우화를 향해 쌍장을 날렸으나 이미 늦었다.
퍼펑!
"아아악!"
채무량은 가슴에 일장을 얻어맞고 땅바닥을 뒹굴었다.
장우화는 재차 채무량에게 공격을 가하려다가 석비룡이 쏘아 보낸 강기가 자신의 등 뒤에 이르자 번개같이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석비룡은 일단 그를 물러서게 한 다음 채무량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 순간, 자신의 목덜미에 와닿는 싸늘한 한기(寒氣).
"크크크……!"
좌숙야의 괴이한 웃음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석비룡은 몸을 홱 돌렸다.
어지럽게 날아오는 좌숙야의 갈쿠리 같은 손과 길고 날카로운 손톱.
"허억!"
석비룡은 놀라며 보법을 밟으려 했지만 미처 피할 수 없었다.
"컥!"
좌숙야의 갈퀴 같은 손가락이 석비룡의 뒷목을 꽉 움켜쥐었다.
석비룡은 목이 잡힌 채, 좌숙야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통쾌하게 웃는 것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크크크……! 놈 어떠냐. 이 어르신이 특별히 널 어여삐 여겨 직접 가르침을 내려주마. 이제 무서움이 뭐란 걸 뼛속까지 느끼게 해주지!"
석비룡은 발버둥을 쳤지만 부질없는 짓.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꼬……꼼짝할 수가 없어.'
"천리무영 석비룡, 네놈이 아무리 빠르고 교활해도 움직이지 못하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지."
좌숙야의 긴 손가락이 점점 목살을 조이며 파고 들어왔다. 목의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길고 날카로운 손톱. 목에서는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끄윽…….“
눈 앞이 아득해지며 현기증이 일었다.
흑의귀동 장우화는 이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약간 섭섭하군. 채무량을 죽인 후 널 내 손으로 손봐주려 했는데 말야."
좌숙야의 두 눈에서 섬뜩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백 년 전에도 구파일방과 육문오가를 통틀어 나의 적수는 없었다. 한데 어찌 네가 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겠느냐?"
석비룡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저히…… 맞설 수가 없어…… 이토록 가공할 내공이라는 건 도대체가……?'
입술을 타고 턱 아래로 한 줄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장우화는 빙글거리며 말했다.
"거부하지 마라. 넌 이미 죽은 목숨이야."
그는 고개를 돌렸다. 쓰러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채무량이 동공 속에 가득 들어찼다.
"크크! 이놈도 마찬가지고……."
장우화의 손이 채무량의 천돌혈(天突穴)을 향했다.
천돌혈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죽음의 혈(穴)로 보통 사람의 주먹에 적중 되도 목숨이 위태로운 곳이다. 더구나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인 장우화의 손이 닿게 되면 일격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은 뻔 한 일이다.
"영원히 잠들어라, 채무량!"
(2)
촤아아악……!
장우화의 손이 채무량의 천돌혈에 닿는 순간, 저항은커녕 손가락 하나 꿈쩍하기도 힘들어 보이던 채무량의 가슴이 뒤로 완전히 젖혀졌다.
장우화가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뭐, 뭐야?"
채무량은 허리를 뒤로 꺾어 몸을 완전히 반으로 접었고, 물구나무를 서듯 두 발을 위로 퉁겨 올렸다.
퍼벅!
그의 두 발이 교차하며 장우화의 가슴을 걷어찼다.
장우화는 엉겁결에 일격을 받고, 입으로 피를 뿌리며 뒤로 날아갔다.
좌숙야와 백의귀동 장우사는 깜짝 놀랐다.
"이런 한심한! 미친놈에게 암격을 당하다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천하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흑의귀동 장우화가 다 죽어가는 놈에게 당하다니……
"놈!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
백의귀동 장우화가 형제의 복수를 하기 위해 가공할 속도로 채무량을 향해 짓쳐들었다.
채무량은 몸을 바로 세우며 두 손바닥을 앞으로 쭉 뻗어냈다.
콰콰콰쾅!
두 줄기 강렬한 강기가 충돌했다.
놀랍게도 장우화가 서너 걸음 물러섰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훼훼 저었다.
"채무량은…… 이런 무공이 없어…… 넌 누구냐?"
채무량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맞아……채무량은 이미 보름 전에 죽었어. 말해주지. 내가 채무량으로 변신한 건 그의 존재를 미끼삼아 너희 현현교의 놈들을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어!"
'그렇다면 자신들을 속였다는…….'
백의귀동 장우화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채무량이 아닌 것은 이미 알았다. 넌 대체 어떤 놈이냐?"
"그렇게 알고 싶다면……."
채무량은 가만히 있는데 그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코와 눈과 귀는 물론 얼굴 전체의 윤곽이……
마치 스스로 생명을 갖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팔과 다리는 물론 몸의 골격까지 변하는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장우화는 입을 쩍 벌렸다.
백의귀동 장우화 앞에는 또다른 백의귀동 장우화가 웃고 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날 보고 얼굴 없는 귀신이라 부르지."
"배……백면귀라(白面鬼羅)!"
새로운 장우화, 아니 백면귀라의 얼굴에 잔인하고 섬뜩한 미소가 그려졌다.
한편 좌숙야의 손에 잡힌 석비룡의 몸은 몇 차례 푸드득거리다가 조용해져 있었다.
이때 좌숙야는 백면귀라가 일으키는 변화에 정신을 쏟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주의가 허술해졌다.
석비룡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틈이다! 이 상태에서의 방법은 오직 무영탄기뿐!'
입을 오무렸다가 퉤! 뱉아내자 침과 같이 흰 물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퓨윳!
그것은 섬전과 같이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날아갔다.
쉐에엑……!
좌숙야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코앞까지 날아오는 흰색의 강기를 보고 눈이 찢어져라 부릅떴다.
"흥! 감히……!"
왼손을 들어 꽈악 움켜잡았다.
그러나 무영탄기는 강철 같은 그의 손바닥을 팍! 뚫어버렸다. 손바닥에 이어 가슴까지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좌숙야는 뒤로 비칠비칠 물러서며 불신에 찬 표정으로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무영탄기가 통과한 가슴에는 손가락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붉은 피가 불룩불룩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석비룡은 목을 만지면서 씨익 웃었다.
"노선배! 제자들을 그렇게 훈계하시더니 정작 본인이 방심하셨구려. 그리고 그 방심의 대가가 너무 큰 듯하오."
"사부님!"
쓰러졌던 흑백쌍귀가 황급히 일어나 좌숙야 앞으로 달려왔다.
좌숙야는 즉시 혈(穴)을 짚어 임시방편으로 지혈을 한 다음 우뚝 섰다. 언제 기습을 받았냐는 듯 태산과 같은 기도가 발해졌다.
"현현교는 백 년 만에 부활을 선언했음이니…… 과거 우리에게 대항했던 모든 자들은 소멸될 것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한다.…… 천리무영과 백면귀라, 너희 두 놈…… 오늘은 나 좌숙야가 이대로 물러나지만 차후 이런 천운은 절대 없으리라!"
"어림없는 수작! 목을 내놓기 전엔 절대 갈 수 없어!"
백면귀라가 급히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렸다.
그의 두 손에서 각기 다른 푸른색과 흰색의 기류가 뻗어 나왔다.
"동방청력(東方靑力)! 서방백력(西方白力)!"
슈아악!
두 개의 기류가 회오리바람처럼 엉키며 좌숙야를 향해 휘몰아쳐 갔다.
"크하하핫! 이제보니 네놈은 사방무제(四方武帝)의 진전을 이어 받았구나!"
좌숙야는 큰 소리로 웃으며 손바닥을 가슴 앞으로 끌어올려 수평으로 뉘였다.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 둘이 모두 덤빈다 해도……."
동작엔 퍽이나 여유가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좌우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좌숙야는 보폭을 좁혀 발을 빠르게 내디디며 앞으로 짓쳐 들어갔다가 갑자기 앞으로 날아가던 몸을 비틀어 가슴을 뒤로 젖혔다.
발로 번갈아 허공을 때리며 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쥐새끼 같은 놈!"
백면귀라의 공격은 허공을 쳤다.
그는 재차 손을 쓰려 했지만 이미 좌숙야의 신형은 사정권 밖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그의 목소리만이 멀리서 들려왔다.
"나 좌숙야의 경고를 반드시 기억하라……이제 혼돈의 시대는 시작되었으니……
오직……오직……
피의 보복만이 남았을 뿐이노라!“
* * *
창 밖에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황혼이 온 누리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느다란 비가 부슬부슬 내려, 바라다 보이는 것들은 모두 짙은 비안개에 가려져 뿌옇게 보였다.
그들 앞에 술잔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내려다볼 뿐 누구도 먼저 술잔을 들지 않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창밖으로 지나는 행인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채무량을 만났을 때 그 자는 거의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네. 섭종투(攝宗透)에 당했더군."
오랜 침묵 끝에 평범한 노인의 모습을 한 백면귀라가 입을 열었다.
석비룡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섭종투는 서장밀교(西臟密敎)의 마공으로 그것에 당하게 되면 광치증에 걸려 극도의 정신분열 상태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미친 듯이 웃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야 만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당했을까?
채무량이나 그의 유일한 피붙이 채소소가 세상에 없는 지금 그 물음에 답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면귀라가 계속 말했다.
"난 채무량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연민을 느낀 나머지 그의 사혈(死穴)을 찌르고 말았네. 딴에는 편안한 죽음을 안겨주려는 의도였는데 뜻밖에도 그는 짧은 순간이나마 이성을 되찾고 몇 가지 말을 들려주더군."
석비룡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눈을 치켜 뜨고 그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들었다는 거요?"
백면귀라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가 남긴 말은 불과 몇 마디뿐이었네. 허나 그 속에는 실로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지."
석비룡은 조용히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십 년 전 현현교의 삼대신물을 훔쳐낸 건 알려진 것처럼 연일문 혼자가 아니었네. 채무량과 단홍회의 회주 주청곤이 일 년 간에 걸쳐 함께 행동했던 것일세. 그들은 애초의 약속대로 채무량은 용봉배, 주청곤은 초마금 그리고 연일문은 신조경을 각각 나눠 가졌네."
상상도 못한, 전혀 새로운 사실이었다. 이 일을 믿어야 할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백면귀라는 계속 말을 이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온 천하를 손아귀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을 테지. 그러나 기쁨도 잠시 뿐, 그들은 또 하나의 무서운 비밀을 알아내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를 맛보야만 했네. 백 년 전 현현교가 무너지면서 교주 좌엽선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수들은 모두 죽었지만 현현교의 노른자위나 다름없는 삼좌존(三座尊)과 일부 핵심세력이 고스란히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일세."
"……."
"두려움에 질린 채무량과 주청곤은 자칫 멸문지화(滅門之禍)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모든 죄를 연일문에게 뒤집어씌우고 무림맹으로 하여금 그를 추적, 살해하도록 사주했네."
무서운 얘기였다.
강호에선 모든 것이 연일문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채무량과 주청곤이 함께 모사를 꾸몄다는 것도 놀라운 데, 하물며 멸망한 줄로만 알았던 현현교의 실체가 고스란히 남아있다니……
백면귀라가 계속 말했다.
"그 후에도 채무량은 자신이 용봉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못내 꺼림칙했네. 무림맹의 일부 장로들이 자신과 연일문의 연관성을 의심하는 눈치도 마음에 걸렸고…… 사실 그들의 의심은 별게 아니었지만 채무량으로선 현현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네."
"음…… 그럴 수도 있겠지."
석비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들의 의심을 발판삼아 현현교가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엄청난 재앙이 닥쳐올 것을 우려했던 것이지. 그래서 그는 삼 년 전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환관을 통해 용봉배를 황실로 상납하고 말았다네."
석비룡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용봉배를 황실로……?"
그야말로 놀람의 연속이었다.
"그들 딴에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서 황실을 비빌 언덕으로 삼을 속셈이었지. 결과적으론 그로 인해 죽음을 재촉한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석비룡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면귀랑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채무량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현현교와 황실간에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말을 언급했네. 허나 황실을 찾아갈 때까지만 해도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현현교와 황실이……!"
석비룡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온몸의 맥이 쫙 풀렸다. 이유도 모른 채 누구로부터 흠씬 몰매라도 맞은 듯한 느낌……
'내 부모와 등룡왕부를 멸망시킨 흉수는 혈음신장을 속성으로 수련한 자로서 현현교의 용봉배 없인 절대로 혈음신장을 완성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말 황실이 현현교와 끈이 닿아있다는 건가?'
석비룡은 양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채무량으로 가장하여 일부러 미친 척한 것이 현현교의 무리들을 끌어들이기 위함이라고 했소?"
백면귀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렇게 하면서까지 그들을 만나야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요?"
석비룡이 잠시 숨을 돌렸다가 이렇게 물었다.
'이 모든 것이 날 속이기 위해 잘 꾸며진 한 편의 연극일지도 모른다.'
석비룡의 몸에서는 백면귀라가 약간의 허점만 보이면 금방 달려들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백면귀라의 입술 끝이 약간 위로 올라가며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있지. 그것도 아주 특별한……."
백면귀라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깃들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과는 영원히 한 하늘을 지고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이해가 가겠나?"
"……."
"내가 이런 얘기를 자네에게 해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걸세. 내가 잘못보지 않았다면 자네 역시 현현교의 맞은편에 서 있는 운명이 틀림없을 테니까."
"……."
석비룡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앞에 앉아있는 백면귀라의 얼굴을 쏘아봤다.
백면귀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곧 혈운이 몰려와 미증유의 공포가 이 땅을 뒤덮게 될 것이네. 전염병처럼 대륙전체로 확산되는 죽음과 파괴…… 그 속에서 우린 운명처럼 자주 만나게 될 테지."
갑자기 백면귀라는 잔을 내밀었고, 석비룡은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마시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에게 건네는 술잔일세."
석비룡은 무표정하게 그에게서 받은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잔을 비우고 나면 십만대산(十萬大山)으로 가서 만박신승(萬博神僧)을 만나보도록 하게."
그 말을 마치고 나서 백면귀라는 자신의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 탁자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주루 문쪽으로 다가갔다.
벌컥!
문이 열렸다.
"그건 왜지?"
그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석비룡이 물었다.
백면귀라는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내가 아는 이 땅의 마지막 현자(賢者)…… 천하겁난의 모든 미래가 그의 머릿속에 있으니 어쩌면 자네의 행로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줄지도……."
쿵!
문이 닫혔다.
쏴아아……!
창 밖에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어느새 굵은 장대비로 변해 쏟아지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게 퍼붇는 그 빗속에서 백면귀라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져갔다.
석비룡은 백면귀라에게 받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탁!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다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만박신승을 찾아가라고…… 만박신승……."
그의 눈 속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3)
"염병, 엄청 무겁군."
"자자, 힘 좀 더 써보라구."
하나같이 기운 꽤나 쓸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지만 커다란 솥 하나를 드는 데 낑낑 거릴 만큼 솥은 거대했다. 마치 백여 명이 한꺼번에 먹고도 남을 만한 크기였다.
그들은 솥을 마당 한 가운데 놓고 좌우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솥 뚜껑을 열자 뜻밖에도 그것은 모두 밥이었다. 방금 지어 내온 듯 뜨거운 김과 함께 잘 익은 밥 냄새가 확 풍겨나왔다.
"이 정도면 됐겠지."
가운데 무사가 손을 탁탁 털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런 미끼에 놈이 걸려들까?"
왼쪽의 턱이 뾰족한 무사가 고개를 갸웃거린 반면, 오른쪽의 여우처럼 꾀가 많게 생긴 무사는 히죽 웃었다.
"흐흐흐! 틀림없어. 먹는 거라면 가리지 않는 놈이니까."
가운데 무사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놈이 나타났어."
동시에 그들의 모습이 마치 바람에 연기 흩어지듯 싹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모습을 감춘 뒤, 열 호흡을 세기도 전에 어둠 저쪽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구척이 더 되어 보이는 키에 어른이 양팔로 벌려도 닿지 않을 것 같이 넓은 가슴,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엄청나게 큰 머리였다. 바위 하나가 그대로 목 위에 달려 움직이는 것 같은……
세상에 이런 엄청난 거구에 대두(大頭)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바로 무극탑신 설고웅.
영봉, 아니 선녀를 찾다가 괴인의 공격을 받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던 설고웅이었다.
그는 솥 앞에 앉았다.
지금 그의 모습을 정확히 얘기하자면 왼팔로 거대한 솥을 가볍게 안아들고 오른손은 밥주걱처럼 뜨거운 밥을 퍼 입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설고웅의 등 뒤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왔다.
"사흘 전 백씨장원(白氏莊園)에서 키우던 닭 백이십 마리가 깃털과 뼈만 남기고 모조리 사라졌다더군."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네놈이 그걸 모두 먹어치웠다는 거야."
"그것뿐이면 말도 않지. 이틀 전 송광목장에서 키우던 황소 두 마리가 증발했는데 근처에서 누군가 그것들을 송두리째 잡아먹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어."
세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들끼리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점점 설고웅 가까이 다가왔다.
"간밤에 완산도장에선 더욱 괴이한 일이 벌어졌지! 완산도장의 장주가 회갑연에 쓰기 위해 준비해둔 술 이백 항아리가 깡그리 비어버린 거야."
"제기럴! 무려 오백 명이 배터지게 마실 수 있는 술을 놀랍게도 한 명이 바닥 내버린 이 사건의 범인 또한 송광목장의 그놈이었다는 거야!"
이렇게 말했을 때 그들은 벌써 설고웅의 등 뒤에 이르렀다.
"목격자가 본 표현대로라면 범인은 틀림없이 네놈이야."
그러나 설고웅은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와구 와구 밥을 퍼먹는 데 정신이 없었다. 솥은 벌써 반남짓 비워져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걸 그만 두고 직접 설고웅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우린 어떤 정신 나간 놈이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막상 청탁을 받아 범인을 찾아낸 뒤론 그 말들이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되더군."
"무엇보다 지금 네놈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 압권이야."
"아무리 넓디 넓은 대륙이지만 백마사의 일백 승려가 먹을 밥을 혼자서 모조리 해치울 수 있는 괴물이 이 땅에 존재하리라곤 감히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거든."
세 무사는 이제 할 얘기가 모두 끝났다는 듯 등에서 일제히 날이 시퍼렇게 선 귀두도(鬼頭刀)를 뽑아들었다.
"일어서라, 아귀(餓鬼)!"
"얌전히 일어나서 우리를 따라가는 거다."
"잔혼삼귀(殘魂三鬼)의 명성을 땅에서 주운 거로 생각한다면 그냥 죽치고 있어도 무방하지만 말야."
그들의 요구에 대한 설고웅의 대답은 너무 간단했다.
"나 배고파……."
그리고는 밑바닥에 남은 누릉지까지 박박 긁어대는 것이다.
"정말 배가 고파…… 배가 고파 죽겠어…… 아무리 먹어도 배가 안 불러……."
배가 고파 미친 걸까?
설고웅은 솥까지 우걱우걱 씹어대고 있었다.
세 무사는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좋겠지?"
"우린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얼굴은 손대지마. 괜히 딴소리 나오면 현상금은 고사하고 우리만 피곤해져."
다음 순간,
"잘 가거라, 아귀!"
고함과 함께 잔혼삼귀는 귀두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사정없이 내리쳤다.
콰콰콱!
거의 동시에 세 자루 귀두도가 설고웅의 양 어깨와 등에 틀어박혔다.
"간단해서 좋군."
"고맙군. 이런 장사 십오 년에 손도 안대고 코풀어 보긴 자네가 처음이라네."
설고웅은 쇳조각을 입에 문 채 스윽, 뒤를 돌아봤다. 마치 벼룩 몇 마리가 깨물었냐는 듯한 표정이다.
우두욱! 우둑!
그의 입 속에서 쇳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쇳덩어리를 씹어 먹어?"
"이,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냐?"
잔혼삼귀는 그야말로 혼비백산, 어쩔 줄을 몰랐다.
황급히 설고웅의 몸에 박힌 귀두도를 뽑아내려고 힘을 썼지만, 귀두도는 그의 살 속에 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헉!"
"뭐, 뭐야, 이거!"
잔혼삼귀의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귀두도가 뽑히기는커녕 오히려 설고웅의 몸속으로 점점 끌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위험해! 빨리 손을 떼고 물러서시오!"
세 사람은 일제히 귀두도를 뿌리치고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츠츠츠츠……!
귀두도는 이미 손잡이도 남지 않은 채 설고웅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카...칼이 몸속으로 사라져?"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었다. 인간의 몸이 마치 깊은 늪처럼 빨아들일 수 있다니……
그러나 이 순간 잔혼삼검이 아니라 불문의 고승이 있었다면 즉시 무릎을 꿇고 설고웅에게 경하(敬賀)의 배례를 올렸으리라.
오십 년 전 불문삼성(佛門三聖)의 한 사람인 가엽존자(伽葉尊者)는 불문육대신공(佛門六大神功)을 하나로 합일하여 새로운 신공을 창안하였으니 그 이름을 사라신공(沙羅神功)이라 일컬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을 흡수하여 일원무극(一元無極)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능히 생사의 한계조차 초월할 정도……
허나 이를 완성하기 위해선 십성의 경지까지 수련한 후 스스로 죽음을 택하여야 하고 그 죽음에서 부활하여 다시 재수련을 해야만 십이성 최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설고웅이 잔혹삼마에게 펼친 신공은 사라신공의 마지막 단계를 위한 천공대흡력(天空大吸力)의 경지에 다름 아니었다.
무쇠 솥 하나를 온전히 아득바득 입 속에 집어넣고나서야 설고웅이 몸을 일으켰다.
"난…… 선녀를…… 찾아가야 해…… 선녀가…… 선녀가…… 나를…… 부르고 있어……."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잔혼삼귀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넋 빠진 얼굴로 그의 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항산(恒山)의 밤은 조용히 찾아왔다.
소쩍, 소쩍……!
소쩍새가 울며 지나갔고, 심산(深山)을 헤매는 바람이 깃발처럼 나뭇가지들을 어지럽게 나부끼게 하고 있는 밤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항산의 깊은 곳에서 소름이 돋을 만큼 칼날처럼 싸늘한 예기(銳氣)가 흘러나온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처럼 예리한 기운을 풍겨내는 사람은 귀검수 왕소우밖에 없음을……
아니나 다를까,
그는 등에 긴 장검 한 자루를 멘 왕소우였다.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일곱 개의 검은 그림자들이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림자 중의 하나가 말했다.
"실수한 거야, 자네는…… 왜냐하면 삼십 년 가까이 칼밥을 먹는 동안 우리 일곱 명이 한꺼번에 움직인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그 옆의 그림자가 말을 이었다.
"서로 활동영역도 달랐지만 구태여 뭉치지 않아도 될 만큼 각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 자신감에 회의를 준 게 바로 무림맹주 서문화였어."
"그놈이 느닷없이 척살령인지 뭔지를 내리는 판에 잘 나가던 우리가 졸지에 약자의 입장으로 전락해버렸지 뭔가."
마치 돌림노래라도 하듯 그들은 한 사람이 한 마디씩 내뱉았고, 귀검수 왕소우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듯 관심없다는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꼭 단점만 있는 건 아니야.그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힘을 합치게 됐으니까."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일종의 단합이라고나 할까?"
오랜만에 왕소우의 입이 떨어졌다.
"어렵게 모였으니 모쪼록 최선을 다하도록! 그래야 후회가 적을 것이니……."
너무 무미건조해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귀검수 왕소우가 강한 건 우리도 알아. 일대 일이라면 우리 중 누구도 네놈의 적수가 못되지."
맨 오른쪽의 그림자에 이어 다시 처음 말했던 그림자가 쏘아붙였다.
"허나 일곱이면 얘기가 완전히 틀려지지. 어쨌거나 귀문칠살(鬼門七煞)의 명성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니까!"
귀문칠살!
강남북 일대에서 이름을 떨치는 칠 인을 일컫는 별호.
제각기 개성이 특이해 융합하지 못하는 이들을 한데 묶어 귀문칠살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한 사부를 모셨기 때문이며 하나같이 사람을 죽이는 수법이 잔인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척!
귀문칠살의 손이 칼 손잡이를 잡자마자 사방의 공기는 얼어붙는 듯했고, 호흡소리까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스르릉!
끝이 뾰족하고 폭이 좁은 일곱 자루의 칼이 동시에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잘 닦인 칼날이 어스름한 달빛을 받아 쨍! 하고 빛을 발했다.
왕소우는 그제야 손을 움직였다.
"지루했어."
착!
나면서 왕소우의 긴 검이 검집을 떠났다.
귀문칠살은 흠칫했으나 왕소우는 먼저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듯 비스듬히 땅바닥으로 검 끝을 늘어뜨리고만 있었다.
"일곱 수까지는 봐주겠다."
왕소우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귀문칠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왕소우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놈! 건방지다."
귀문칠살의 첫째의 외침을 신호로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살진(鬼殺陣)!
사부에게서 배운 이래, 저마다 떨어져 있느라 단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사도(邪道) 최고의 진법이 운영되는 것이다.
귀살진은 일곱 개의 칼이 하나처럼 연결되어 상대를 공격하는 연환진(連環陣)이다.
그들은 좌우로 몸을 흔들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귀문칠살의 첫째의 검은 바로 왕소우의 등 쪽의 명문혈을 찔러 들어갔다.
그 일검은 그를 해치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발을 움직이게 하고자 함이었다. 일단 몸을 흐트려 허점을 찾자는 노림수.
왕소우는 허리를 굽히며 몸을 틀었다.
그러자 일검은 그의 허리를 스치며 지나가게 되었다.
순간 둘째가 오른쪽에서 번개같이 검을 휘둘러 왕소우의 배를 내리쳤다.
셋째가 가슴을 찔러왔다.
이 두 수법은 촌각의 머뭇거림도 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계산으로는 절대 왕소우가 검을 피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 왕소우의 허리가 마치 활처럼 뒤로 휘었고 두 개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는 것이 아닌가.
넷째와 다섯째의 검이 양 무릎으로 날아왔고 여섯째와 일곱째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내려오며 왕소우의 어깨 한쪽씩을 맡았다.
이 합격술은 삽시간에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실로 절묘하고 완벽한 합격술이어서 아무리 왕소우라 하더라도 피할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왕소우는 반쯤 누운 자세에서 마치 고무줄처럼 뒤로 젖혀졌던 몸을 튕겼다.
그의 몸이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랐고, 그 단순한 한 번의 동작에 네 사람의 검은 모두 허공을 갈랐다.
"약속했던 일곱 수가 모두 끝났다!"
왕소우의 외침이 그 뒤를 이었다.
"어림없는 소리!"
기다리고 있었던 듯 돌연 귀살진의 진세가 변했다. 일곱 개의 칼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를 삼켰다.
그것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다.
왕소우는 공중에서 신형을 바로 세우며 검을 아래로 촤아악……! 내리 그으며 귀살진을 빠져나갔다.
귀문칠살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마, 말도 안 돼!"
왕소우는 단 한번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향해 검이 날아온다고 생각했다.
귀검수의 검은 그 짧은 순간에 일곱 번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모두 허초(虛招)가 아니라 실초(實招)라는 것.
"무,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쩌억!
귀문칠살 가운데 첫째와 둘째의 몸이 가슴을 기준으로 아래 위로 분리되었다.
셋째는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고, 나머지는 목이 잘려졌다.
투두둑!
귀검수 왕소우의 등 뒤로 조각 난 살덩어리들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2권 끝>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