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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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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지음 |
송성수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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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모든 부처의 경계는 고요하고 중생의 경계는 비었거늘 무슨 인연이 있기에 교(敎)의 자취를 일으키는가? |
[답] 하나의 실제(實諦) 안에는 비록 일어남과 다함[起盡]이 없다손 치더라도 방편의 [문]안에는 큰 인연이 있다. |
때문에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서는 “모든 법은 항상 성품[性]이 없으며/부처 종자[佛種]는 인연으로부터 일어난다”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온갖 법은 언제나 성이 없되 성이 공(空)하지 아니함이 없을 때에 저절로 능히 인연을 따르며 인연을 따르되 성(性)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
이는 또 교(敎)를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인연이 한량없다. 고덕(古德)이 간략하게 드러내는 것에 열 가지가 있다. |
첫째는 저절로 그러하기[法爾] 때문이요, 둘째는 서원의 힘[願力] 때문이요, 셋째는 근기로 받아들이기[機感] 때문이요, 넷째는 근본[本]이 되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덕을 드러내기[顯德] 때문이요, 여섯째는 지위를 나타내기[現位] 때문이요, 일곱째는 개발(開發)하기 때문이요, 여덟째는 보고 듣기[見聞] 때문이요, 아홉째는 행을 이루기[成行] 때문이요, 열째는 과위를 얻기[得果] 때문이다. |
이제 여러 보살들이 찬집한 『유식론(唯識論)』 등에는 대의(大意)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온갖 법의 바른 종[正宗]을 통달하여 이공(二空)의 삿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서요, 둘째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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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해탈(解脫)과 보리(菩提)의 문을 증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
이는 곧 스스로가 법의 근원을 증득하여 본래 깨달음의 참된 자리요 문자와 글귀 뜻을 펴 들날리는 데 있지 않으므로 이제 뒤의 학인으로서 도(道)를 사모하는 사람을 위하여 방편으로 책을 엮는 것이다. |
또 스스로도 두 가지의 뜻이 있으며 그로써 본래의 품은 생각임을 표시하였다. |
첫째는 간략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 가장 요긴하고 종요로운 것만을 추려서 확실한 뜻을 자세히 알게 하면서 번거로운 글을 보는 것을 면하게 하기 위해서요, 둘째는 한곳에 합하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면 따로따로의 이치에 밝지 못하므로 미세하게 열고 펴서 성상(性相)을 뚜렷이 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
두 가지 생사(生死)의 뿌리를 싣고 한맛의 보리(菩提)의 길을 밟으면서 뭇 경전의 큰 뜻을 우러르면 바로 제 마음을 깨닫고 모든 성인의 은밀한 말씀을 따르면 단번에 깨달음의 곳간[覺藏]이 열리리라. |
저 남을 의지해서 통하려는 소견을 버리고 그 삿된 집착의 정(情)을 깨뜨리며 깊이 바른 종[正宗]을 믿어 달은 손가락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하고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廻光返照] 심성을 보고 글을 따르지 않게 한다. |
증득해야만[證] 상응한다는 것이 본래의 뜻이므로 멋대로 지해(知解)를 내어 소견의 강물에 빠지거나 얻음이 없는 관[無得觀] 안에서 취향(趣向)의 뜻을 품거나 참으로 공한 이치[眞空理] 지위에 나아가서 취사(取捨)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
자기의 소견을 따르면 뒤의 학인을 깨치게 하는 데에 의심스러우니, 모름지기 친히 견성(見性)하여야 비로소 이 종지[宗]를 환히 안다. |
[문] 이미 손가락에 고집하고 글을 따르는 것을 염려하면서 또 무엇 때문에 번거롭게 교(敎)를 모으는가? |
[답] 자기를 저버리고 티끌에 합하며 글과 함께 이해[解]를 짓는 이가 가르침에 막히고 뜻에 걸릴까 해서 짐짓 이런 설명을 한다. 만약 언어를 따라 뜻을 알고 곧 교(敎)로 마음을 밝히는 이라면 무슨 취사(取捨)가 있겠는가? |
그 까닭에 장 법사(藏法師)가 이르기를 “만약 어떤 중생이 교(敎)를 찾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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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참으로 깨닫게 되면 도리[理]와 교법[敎]에 걸림이 없다”고 했다. 언제나 도리를 관찰하면서 교법을 지니는 데에 걸리지 아니하고 항상 외우고 익히면서 공(空)을 살피는 데에 걸리지 아니하면 도리와 교법이 함께 융합하여 하나의 관(觀)을 이루게 되며 그제야 구경이므로 전하여 유통시킬 뿐이다. |
이야말로 교법과 관이 일여(一如)한 것이며 설명하는 뜻의 근원이 같은 것이다. |
[문] 여러 큰 경론에 스스로 조각조각 이루어져서 과목의 마디와 차례며 글귀의 뜻이 분명하거늘 어째서 간추린 기록과 넓은 글을 빌려서 그 요략(要略)을 이루는가? |
[답] 교법의 바다는 크고 깊은지라 그를 궁구해도 그의 끝을 모르며 이치의 하늘은 높고 넓은지라 그를 우러러도 그의 끝[邊] 얻지 못하므로 이제 대통[管]으로써 하늘을 엿보고 소라로써 바닷물을 풀 뿐이다. 마치 큰 바다[滄溟]에서 물방울을 움키는 것과 같고 태화(太華:華山)에서 하나의 티끌을 잡는 것과 같다. |
본래는 뜻이 넓어서 두루하기 어려운지라 뜻에 싫증내고 게으름 피우는 이를 위해서요, 또한 일승교(一乘敎)의 바른 도리에 의하지 않는 이를 위해서이다. |
다만 불요의(不了義)의 인연을 따르고 횡수(橫豎)의 문을 궁구함이 거의 없으며 일어남과 다하는 곳을 모르므로 그 까닭에 번거로운 것은 삭제하고 기이한 것은 선방하며 묘한 것은 채취하고 깊은 것은 찾았다. 비록 글은 부족하다 해도 큰 뜻은 온전하며 인연은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바른 도리는 밝다. |
일승(一乘)의 뜻을 다 더듬고 온갖 법의 근원을 긁어서 열며 반야(般若)의 현묘한 핵심[玄樞]을 위하고 보리(菩提)의 요점이 되는 길[要路]을 지으면 양식이 쉬이 마련되어 빨리 대승에 이를 것이요 의심 없는 데에 증득하여 들어서 멀고 좁은 길을 면하게 되리라. |
그 까닭에 마명(馬鳴) 보살이 『기신론(起信論)』을 지으면서 이르기를 “혹 어떤 이는 자신이 지혜 힘이 없는지라 남의 자세한 이론으로 인하여 뜻을 알게 되는 이가 있기도 하고, 또한 자신이 지혜 힘이 없는지라 자세한 설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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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고 간략한 이론을 듣기 좋아하면서 광대한 뜻을 껴잡아 바르게 수행하는 이가 있기도 하다. 나는 지금 그 최후 사람을 위하여 간략하게 여래의 가장 훌륭하고 심히 깊은 그지없는 뜻을 거두어서 이 논(論)을 짓는다”라고 한 것이다. |
『유가론(瑜伽論)』에서 이르기를 “두 가지 인연이 있어서 짐짓 이 논을 설명한다. 첫째는 여래의 위없는 법이 오랫동안 세상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요, 둘째는 평등하게 모든 유정들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
또 여래의 감로법인 거룩한 가르침[聖敎]이 이미 숨어 없어진 이에게는 기억하고 잡아 모아서 거듭 열어 드러내기 위해서며, 아직 숨어 없어지지 않은 이에게는 문답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면 배나 더 흥성하기 때문이다. 또 간략한 언론을 원하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이를 거두어 뭇 경전의 넓고 요긴한 법의 뜻을 잡아 모아서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
이제 이 기록은 비록 광대하게 만들어진 공은 없다손 치더라도 작으나마 한 시기에 이루어진 저술로의 공은 있으며, 또한 베껴 기록한 앞뒤의 문세(文勢)가 온전하지 아니함을 알거니와, 바라는 바는 바로 요긴한 설명을 취하여 종지(宗旨)를 밝게 하는 것이니, 마치 돌에서 옥(玉)을 가리는 것과 같고 모래를 헤쳐 금을 가리는 것과 같다. |
저 많은 약(藥) 가운데서 아타(阿陀)의 묘한 것만을 취하고 뭇 보물 안에서 여의주(如意珠)를 더듬으며, 하나를 들어 모든 것을 감싸 근본으로써 끝을 껴잡으면 한마디 말도 거의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설명은 다르나 다시는 다른 길이 없다. |
또한 뒤의 어진 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비웃거나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요, 바라는 바는 의심을 끊고 믿음을 내게 하는 것이니, 오직 견도(見道)를 품을 뿐 헛된 이름을 따르면서 세상의 명예를 맞이하지 말 것이다. |
소원은 미래의 세상이 다하도록 두루 법계(法界)의 안을 궁구하고 겁(劫)을 지나며 더욱 더 살면서 언제나 이 도를 넓히는 것이요, 마음이 있는 이면 모두 이 종(宗)에 들게 하여 집착을 버리고 의심을 없애면서 보고 듣는 것에 이익을 얻게 하며 3보(寶)의 힘으로 가피(加被)와 호지(護持)를 입어 맹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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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고 널리 함식(含識:중생)을 제도하려는 것이다. |
허공이 다할지언정 이 소원은 변하지 않을 것이요, 법계가 끝날지언정 이 글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
[문] 요의 대승(了義大乘)은 자세함과 간략함이 두루 갖추어져서 하나의 뜻을 알면 원통(圓通)의 소견이 갖추어지고 한 게송을 들으면 성불(成佛)의 공이 있거늘 어째서 저술을 빌어 오히려 번거롭게 해석하는가? |
[답] 상상근(上上根)의 사람은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치며 성상(性相)이 한꺼번에 바르게 되고 이사(理事)가 함께 뚜렷하거니와, 만약 중간과 아래의 무리라면 모름지기 열어 펴는 것을 빌려야 한다. |
장엄(莊嚴)의 도와 찬식(讚飾)의 문은 그 공을 헤아림에 미쳐서는 비유로도 할 수 없다. 그 까닭에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서는 “마치 우담발라 꽃[優曇華]은 모두가 다 사랑하고 좋아하지만/천상과 인간에 있기 드[문]바라/간간이 이에 한 번 피는 것 같네./법 들으면 기뻐하고 찬탄하거나/그리고 한 마디의 말을 하기에 이르면/이는 곧 온갖 3세(世)의 부처님께/이미 공양을 한 것이 되는지라/이 사람이야말로 심히 희유(希有)하여/우담발라 꽃보다 훌륭한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
『반야경』의 게송에서는 “반야는 무너짐이 없는 모양이라/온갖 언어를 벗어난 것이요/나아가되 의지할 바 없는 것이라/누가 능히 그의 덕을 찬탄하리오./반야는 비록 찬탄할 수 없으나/나는 이제 능히 찬탄할 수 있으며/비록 아직 죽는 자리 벗어나지 못했으나/이미 벗어날 수 있게 되었네”라고 하였다. |
또 고성(古聖)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보살로서 논(論)을 짓는다면 경을 장엄하는 것이라 하겠으나, 마치 연꽃이 아직 피지 않았는데 그것을 보고 비록 기쁨을 낸다 하더라도 이지 펴서 향기가 자욱한 것보다는 못한 것과 같고, 마치 금을 아직 쓰지 않았는데 그것을 보고 비록 더 기쁨을 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장엄구(莊嚴具)를 만든 것보다는 못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
그러므로 교(敎)를 넓히려는 한 생각의 착함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은혜를 능히 갚겠다는 것인 줄 알 것이다. 희유한 것을 논함은 마치 꽃에 우담발라라는 이름을 멋대로 붙이는 것과 같고, 빛나고 드러나는 것을 말함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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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금으로 장신구를 만드는 것과 같다. |
그러므로 보살은 대승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여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들어 깊은 의심을 끊고 뚜렷한 믿음을 이루게 하는 것이니, 법의 이익이 어찌 다 하겠는가? 그 공덕도 그지없다. |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말하였다. |
“‘교시가(憍尸迦)야, 섬부주(贍部州)의 모든 유정들은 차치하고라도 4대주(大洲)의 모든 유정들이거나 소천(小千) 세계의 모든 유정들이거나 중천(中千) 세계의 모든 유정들이거나 대천(大千) 세계의 모든 유정들이거나, 다시 시방(十方)의 각각 항하 모래알만큼 많은 세계의 모든 유정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無上正等菩提]에서 불퇴전(不退轉)을 얻고 같이 말하기를 는 이제 즐거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빨리 증득하여 유정(有情)들의 나고 죽는 뭇 고통을 구제하여 훌륭하고 마지막인 안락을 얻게 하겠다>고 한다고 하자. 어떤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 등이 그 일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심오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써서 온갖 보배로 장엄하고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널리 그들에게 보시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이치대로[如理] 생각을 잘하고 환히 통하게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선남자와 선여인 등이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얻는 복이 많겠느냐?’ |
하늘 제석(帝釋)이 말하였다. |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심히 많습니다. 선서(善逝)이시여.” |
그때 부처님께서는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써서 온갖 보배로 장엄하고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그 대중 안의 어느 한 사람에게 보시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이치대로 생각을 잘해서 환히 통하게 하되, 무량문(無量門)의 교묘한 글 뜻으로써 널리 그를 위해 해석하며 뜻을 분별하여 그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고 가르쳐 주며 가르쳐 경계하여 부지런히 닦고 배우게 하면 이 선남자와 선여인 등이 얻게 되는 복 무더기는 앞의 것보다 아주 많아서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헤아릴 수조차 없느니라.’” |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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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자야, 일천제(一闡提)를 제외한 그 밖의 중생들이 이 경을 듣고 나서 모두 다 보리의 인연을 능히 지어서 법의 음성과 광명의 털구멍에 들어가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여야 비로소 『���대열반경』을 들을 수 있게 되며 박복한 사람이면 들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니라.” |
그러므로 종경(宗鏡)에 기록된 바 한 마음의 실상(實相)인 상주 법문(常住法門)을 듣게 된다면, 모두가 전생에 깊은 인연을 맺었고 일찍이 부처님의 모임을 가까이 한 것인 줄 알 것이니, 아주 큰 일이요 작은 인연에 속한 것이 아니며, 만약 아직 들었거나 훈습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만날 까닭이 있겠는가? |
또 『대열반경』에서 말하였다. |
“부처님께서 가섭(迦葉) 보살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항상 마음을 잡아맨다[繫心]고 하는 이 두 가지 글자를 닦아야 하나니, 부처는 여기에 항상 머무느니라. 가섭아,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두 글자를 닦으면 이 사람은 나의 행한 바를 따르고 내가 이르는 곳에 이르게 되는 줄 알아야 되느니라’라고 하셨다.” |
그러므로 이 법을 믿는 사람은 범부이면서 그대로 성인인지라, 닦아 지님이 합치되어 부처님께서 머무르던 그 안에서 머무르고 나아가고 그쳐 그 거동이 부처님께서 가시던 자취를 간다. |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서 말하였다. |
“첫째는 의심을 여읜 믿음을 드러내어 공덕에 드는 문[顯離疑信入功德門]이니, 어떤 중생이 이 마하연(摩訶衍)의 심히 깊고 극히 묘하고 광대한 법문을 들은 뒤에 곧 그 마음 안에서 의심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고 업신여기지도 않고 비방하지도 않으면서 결정하는 마음을 내고 견고한 마음을 내고 존중하는 마음을 내고 좋아하며 믿는 마음을 낸다면, 이 사람은 진실한 부처의 제자로서 법(法)의 종자를 끊지도 않고 승(僧)의 종자를 끊지 않고 불(佛)의 종자를 끊지 않으면서 언제나 계속하여 차츰차츰 더욱 자라고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부처님에게서 친히 수기(授記)를 받게 되고 또한 온갖 한량없는 보살들에게서도 보호하고 생각함을 받는 줄 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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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논(論)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들은 뒤에 겁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결정코 부처 종자를 이을 것이요, 반드시 모든 부처님에게서 수기를 받게 될 줄 알아야 한다. |
또 “둘째는 비교하여 다스리면서 훌륭함을 보이는 문[比類對治示勝門]이니,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 찬 중생들을 잘 거두어 교화하여 모두 남음 없이 열 가지 선행[十行]을 하게 한다 하자. 혹은 어떤 중생들이 한 끼의 밥을 먹을 만한 시간에 이 매우 깊은 법을 관찰하고 헤아린다고 하자. 만약 이 두 사람의 공덕을 비교하여 헤아리면, 그 첫 번째 사람이 얻게 되는 공덕은 아주 적어서 마치 겨자씨를 부순 2백 분의 1과 같고, 이 두 번째 사람이 얻게 되는 공덕은 아주 넓고 커서 마치 시방세계의 작은 티끌을 부순 수의 분량과 같다”라고 했다. |
그러므로 논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찬 중생들을 교화하여 열 가지 선행을 하게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한 끼의 밥을 먹을 만한 시간에 이 법을 바로 생각하는 것보다 못하며 앞의 공덕보다 뛰어나서 비유할 수조차 없다. |
또 “셋째는 받아 지니는 공덕을 들어서 찬양하는 문[擧受持功讚揚門]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논(論)을 받아 지니어 이치를 관찰하되 하루 낮이거나 하룻밤 동안이거나 하면 얻게 되는 공덕은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말할 수조차 없고 헤아릴 수조차 없으므로, 가령 시방 3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시방 3세의 온갖 보살들이 시방 3세의 작은 티끌 수 같은 혀로써 각각 모두 다 시방세계의 작은 티끌 수만큼 많아 말로 다할 수 없는 겁(劫) 동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바 공덕을 찬양하여도 다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법신진여(法身眞如)의 공덕은 허공의 경계와 같아서 갓[邊]과 끝이 없기 때문이거늘 하물며 범부와 이승(二乘)의 사람으로서야 그를 찬탄할 수 있겠는가? 하루 낮ㆍ하룻밤보다 많지 않은 동안을 받아 지녀도 오히려 얻는 바 공덕이 불가사의하거늘, 하물며 2일이거나 3일이거나 4일이거나, 내지 백 일 동안을 받아 지니어 읽고 외우며 생각하고 관찰한다면 그 불가사의는 불가설(不可說) 안의 불가설이다”라고 했다. |
그러므로 논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다시 어떤 사람이 이 논을 받아 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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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루 낮ㆍ하룻밤을 관찰하고 수행하면 모든 공덕은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말할 수조차 없다. 가령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각각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겁(阿僧祇劫) 동안 그 공덕을 찬탄한다 하여도 다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법성(法性)의 공덕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이 사람의 공덕 또한 그러하여 갓과 끝이 없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알라. 이 마음의 종[心宗]을 믿으면 마하연(摩訶衍)이 이루어져서 3세의 모든 부처님이 증득한 바와 같으므로 그 의리(義理)를 어찌 다하랴? 시방 보살이 탄[乘] 바와 같아서 공덕이 그지없다. |
이 오묘한 교화를 만나서 경사스러운 일이 한층 더 깊으리니, 부처님의 뜻을 따르면서 부처님 은혜를 갚는 것은 법을 넓히는 것보다 우선이 없으며 불일(佛日)을 밝히면서 불안(佛眼)을 뜨는 것은 다만 마음을 밝힘에 있을 뿐이다. |
이 종경(宗鏡) 안에서 한 글귀라도 영묘한 지경에 들어가면 겁(劫)을 지나면서 종자가 되겠거늘, 하물며 바로 오묘함을 말하고 뭇 경전을 하나로 모음이겠는가? 이 하나야말로 무량(無量) 중의 하나이다. |
만약 이 법에 물이 들면 이는 곧 원돈(圓頓)의 종자이니, 단 이슬이 정수리에 들어가고 제호(醍醐)가 마음에 부어지는 것이어서 불이(不二)의 지혜 등불이 빛나서 정근(情根)의 어두운 미혹이 깨뜨려지고 한 맛의 지혜 물을 쏟아서 의지(意地)의 망령된 티끌을 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는 마치 폭풍이 나무 잎을 말아 위태롭게 하듯이 두꺼운 막이와 깊은 가림을 말아 올리고 그와 같이 무성한 의심과 쌓인 걸림이 빛나는 해에 살얼음을 녹이듯 하게 한다. |
마치 모든 왕 가운데서 금륜(金輪)의 왕이 되고 모든 비춤 안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햇빛이 되며 모든 보배 가운데서 마니보(摩尼寶)가 되고 모든 꽃 안에서 푸른 연꽃이 되며, 모든 진리 가운데서 진공(眞空)의 문이 되고 모든 법 안에서 열반의 집이 되는 것과 같다. |
때문에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한 맛의 법인(法印)이요/일승(一乘)이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일체 중생 안에서 우두머리가 되고 스승이 되고 광명이 되고 길잡이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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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 중에서 마음이 우두머리가 된다”라고 한 것과,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기를 “3세의 모든 부처님은 모두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으로써 스승을 삼는다”라고 한 것과 조사(祖師)가 이르기를 “온갖 광명중에서 마음 광명이 으뜸이 된다”라고 한 것과, 『법화경』의 게송에서 “첫째가는 길잡이는/이 위없는 법을 얻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
또 만약 아직 종경(宗鏡)에 들지 못하면 도를 보지[見道] 못할 뿐만 아니라 실로 진리에 대한 수행을 끊는 것이다. 근본이 서면 도(道)가 생기고 뿌리에 돌아가면 구경(究竟)이다. 이는 마치 본 바탕[本質]을 보면 그림의 형상은 진짜가 아님을 아는 것과 같고 감추어진 성품을 깨달으면 외부 경계[塵境]가 망령임을 보는 것과 같다. |
때문에 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진여(眞如)를 증득하지 않으면/모든 행을 능히 알지 못하나니/마치 요술로 된 일 따위가/있는 것 같으면서 진짜 아님 같네”라고 하셨다. |
그러므로 만약 근본을 얻으면 곧 구경을 얻는 것이다. 때문에 『화엄경』에서 해회보살(海會菩薩)이 법계의 작은 티끌로써 삼매(三昧)를 삼았던 것이다. |
또 「출현품(出現品)」에서 이르기를 “이 법문을 여래의 비밀한 곳이라 하며, 내지 여래의 근본 실성(根本實性)을 연설하는 부사의한 구경의 법이라 한다”고 하셨다. |
때문에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작은 티끌의 경권(經卷)을 쪼개면 생각생각마다 과(果)가 이루어지고, 중생의 원문(願門)을 다하면 티끌티끌마다 행(行)이 원만하여진다”라고 했다. |
아직 종경을 깨치지 못했다면 어찌 이 글을 믿겠는가? 만약 잠시라도 믿으면 공력이 모두 평등하여져서 익혀야 할 것이 쉽지 않으나 법문을 모두 갖출 것이니 막힌 것이 곧 통한 것이요, 삿된 것이 곧 바른 것이다. |
그 까닭에 옛 사람이 이르기를 “이 가르침을 만난 이는 모름지기 스스로가 경하하여야 하리니, 그것은 마치 큰 바다에 빠졌다가 꽃다운 배를 만난 것과 같고 긴 허공에서 떨어지다가 신령한 학을 탄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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