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언어로 말하라”
(시편 150편 1-6절)
1. 찬양이란 무엇인가?
다윗은 찬양과 예배에 대해 좋은 본을 보여줍니다. 그의 삶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잘 가르쳐줍니다. 특히 다윗은 시들을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러한 면을 따서 <시인과 전사>라고 제목을 붙인 책도 있습니다.
시편들을 읽어보면, 마치 교향악처럼 짜여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윗의 시편들은 처음에는 두세 대의 바이올린만이 연주를 시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부드럽게 시작하다가 나중에 가면 모든 악기가 총동원되어 나오는 것과 같이 아주 웅장한 음악이 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50편은 시편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울리는 웅장한 피날레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합니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1-2절)
특별히 시편의 뒷부분에 보면 각 시편이 “할렐루야”로 시작을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찬양하라’라는 뜻입니다. 150편은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온갖 악기들을 동원하여 찬양하라고 선포합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3-6절)
특별히 호흡이 있는 자마다 주님을 찬양하라는 것은, 찬양하지 않는 자는 호흡이 없는 자, 즉 죽은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온갖 악기들을 동원해서 요란을 떨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까? “그의 능하신 행동”(2) 때문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 나의 하나님, 주님은 더없이 위대하십니다. 권위와 위엄을 갖추셨습니다.” (시 104:1, 새)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라면서 찬양을 많이 했습니다. 학생 때는 모일 때마다 찬양을 불렀고, 요즘은 워십댄스(worship dance)라고 부르지만 우리 때는 ‘율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고등부 때 ‘찬양’이라기보다는 싱얼롱(sing along)이라고 해서, 기타를 딩가딩가 치며 “내게 강 같은 평화”라고 불렀는데, 주로 재미로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찬양으로 보냈으면서도, 정작 찬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냥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서 했던 것뿐입니다. 그러다 나중에 목회자가 되어서야 진정한 찬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찬양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훌륭함을 기리어 드러내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쉽게 말하면 누군가의 훌륭함을 보고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해드리고 칭찬해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그러나 찬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곧 찬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성악가의 음악회에 갔는데, 연주가 다 끝난 뒤 너무 큰 감동을 받아서 그에게로 찾아가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칭찬합니다, 칭찬합니다, 칭찬합니다!” 이게 칭찬입니까? 칭찬은 칭찬한다는 말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어떤 점을 가리키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해야 칭찬입니다.
“아,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성악가이십니다.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순간, 그 노래 소리가 제 마음을 파고들며 저는 큰 감동을 받았고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보았더니, 그들도 전부 선생님의 노래에 완전히 빠져 들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이 좋았는지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하는 것이 칭찬입니다. 보통 찬양한다고 할 때 영어로는 praise라고 하는데, adore(흠모하다)라는 단어도 씁니다. Praise and adoration이라고 해서 찬양하고 흠모한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마음으로 흠모하며 드리는 칭찬과 인정입니다. 말로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인정과 칭찬입니다.
또 다른 예로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샤핑몰에서 앉아 쉬고 있는데, 한 여성이 샤핑몰에서 어린 딸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을 봅니다. 제가 달려가 갑자기 그녀를 멈추고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 부인, 저는 당신을 흠모합니다. 찬양합니다. 저는 당신을 칭찬합니다.” 그러면 그 여성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 이런 미친 사람이 여기 다 있나? 가드가 이 사람 안 잡아가고 뭐 하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부드럽게 다가가 “저 실례합니다만, 이 아이가 부인의 딸인가요?” “예, 그런데요. 왜 그러시죠?” “아, 이 아이가 생긴 것도 참 예쁜데 하는 짓도 정말 예쁘더군요. 제가 저기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어린 나이에 다른 아이들을 배려해주고 양보까지 해가며 노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어른인 제가 그걸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딸을 두셔서 얼마나 좋으세요?”
이 대화에서 저는 ‘찬양’이나 ‘흠모’나 ‘칭찬’과 같은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 부인을 칭찬한 것입니다.
만약 어느 예술가에게 다가가서 “오,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인정합니다. 찬양합니다. 할렐루야!”라고 하면 그는 도망가 버리든지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합니까?
“제가 여기서 선생님이 전시해놓으신 그림들을 보고 있었는데요, 미술을 잘 알지도 못하는 제가 봐도 정말 너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 그림에 있는 사람의 손이 액자 밖으로 나와서 저에게 컵을 받으라고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렇게 그리실 수가 있는 건지 정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것이 칭찬 아니겠습니까?
2. 찬양의 이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많은 경우 아무 뜻도 없이 ‘찬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들은 마치 빈 상자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주를 찬양합니다! 예배합니다!”라고 외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왜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가?’ 또 “할렐루야!”라고 할 때마다 ‘왜 나는 지금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는가?’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그리고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바로 그러한 이유들이 있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입으로만 하는 찬양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교우들마다 예배에 올 때 화려한 색의 종이로 포장하고 예쁜 리본도 달아놓은 선물 상자를 들고 옵니다. 상자마다 큰 카드도 붙였는데, “주님을 찬양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할렐루야”, “아멘”,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다”와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는 “아, 이 아름다운 백성들, 이 참된 예배자들을 보라! 이들은 이렇게 많은 찬양을 가지고 나왔구나!”라고 하며 감격합니다. 이제 모든 상자는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다 옮겨집니다. 하나님께서 그 상자들을 하나씩 열어보시는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 상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주님을 찬양하는지를 반드시 마음에 새기면서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말만 의미 없이 되풀이하면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스스로 속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물건 보고 온 것을 ‘샤핑 다녀왔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사기 위해 상점으로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까 아내가 묻습니다. “어디 갔다 왔어요?” “어, 샤핑 좀 하고 왔어요.” “그래요? 뭘 샀어요?” “아무것도 안 사고 구경만 했지.” 이런 상황에서 분명히 샤핑을 다녀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샤핑을 한 것이 아니라 구경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찬양’이라는 단어를 마치 그런 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은 하는데, 실제로는 찬양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은 하는데, 실제로는 예배를 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하고 있는데 머리 속으로는 다른 것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을 원하시지,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져온 화려한 포장의 상자에는 별 관심이 없으시고,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궁금해 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 않아도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보십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의미하지는 않으면서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와 같은 말을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 찬양을 하는지를 생각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쓰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의미를 알고 쓰자는 것입니다. “내 유일한 사랑되신 주님께”라고 찬양하고 있다면, 마음속으로 “주님, 제가 다른 것 없이 오직 주님만 사랑합니다!”라고 말씀드리며 찬양을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과 하늘의 큰 무리도 “아멘 할렐루야” 하고 외쳤습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계 19:4-6)
하늘의 천군 천사는 아무 의미 없이 할렐루야 하고 찬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들 때문에 그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찬양할 때 마음속에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들을 그리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찬양은 공허해집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우리의 찬양과 예배가 마치 비포장도로의 패인 구멍에 빠져서 못 나오는 트럭과 같습니다. 진흙탕에 깊이 빠진 트럭이 빠져 나오기 위해 어떻게 합니까? 윙 하고 요란하게 소리를 내고 부르릉 소리를 내며 연료도 많이 소모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소리가 크다고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걸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 때도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기감정에 신이 나서 크게 부른 찬양을 얼마나 크게 불렀느냐,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러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은 기도인데도 그렇게 얼마나 뜨겁게 했느냐에 따라, 은혜로운 예배와 그렇지 못한 예배를 판단해왔습니다. 겉모습만 보고서 예배가 잘되었다 안 되었다는 판단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찬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인정해드리고 칭찬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찬양하게 되면, 이전에 하나님이 이런 데 계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그런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3. 천국의 언어
한국 사람은 한국어를 쓰고, 미국 사람은 영어를 쓰고, 중남미 대부분 국가 사람들과 스페인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쓰고, 중국 사람은 중국어를 쓰고, 일본 사람은 일본어를 쓰고, 프랑스 사람은 프랑스어를 쓰고, 독일 사람은 독일어를 씁니다.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천국 사람은 무슨 말을 씁니까? 예, 천국어를 씁니다. 그리고 그 천국어는 바로 찬양입니다.
한 나라의 국민들은 자기 나라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한국 사람으로 왔다가 미국 시민권을 얻을 때 이 나라의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원래 천국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되면 그 언어를 배워가는 겁니다. 처음에는 서툴지만, 살아갈수록 점점 나아지며 언어를 잘하게 됩니다.
같은 나라 사람들은 말로 서로를 알아봅니다. 어디를 여행 갔는데 한국말이 들리면 ‘아, 한국 사람이 와 있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갔는데 천국 언어가 들리면 천국 백성이 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34편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주님을 늘 찬양할 것이니, 주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 내 입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시 34:1, 새)
다윗은 주님을 늘 찬양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어쩌다가 하는 게 아니라 늘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주님을 낮이나 밤이나 항상 찬양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을 언제나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이 된 다음에 레위인들로 찬양대를 구성하고 찬양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성가대는 다윗 때 있었던 구약의 개념이고, 요즘 이렇게 같이 부르는 공중 찬양이 신약의 개념입니다. 신약 교회 때는 공동체 안에서 같이 불렀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딱 두 가지 언어만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언어가 있고, 어둠의 나라의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찬양이고, 어둠의 나라의 언어는 대표적으로 불평과 원망입니다. 찬양은 아름다운 일을 선포하지만, 불평은 그것을 깎아내립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천국의 언어이든지 흑암국의 언어이든지, 둘 중 어느 하나를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 흑암국(어둠의 나라) 백성들의 언어입니다.
아침에 알람시계가 울리면 “아, 누가 저런 못된 기계를 발명한 거야?”
아침식사를 하러 식탁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앗 뜨거! 왜 이렇게 뜨거워?”
출근을 하러 밖으로 나오며 “날씨가 왜 이래? 기분 잡치네.”
또 운전하고 가면서 “차가 왜 이렇게 많아? 시에서 교통정책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어둠의 나라의 백성들은 날씨든 교통이든 정부 관리든 그 무엇이든, 전부 다 불평합니다. 불평이 그들의 모국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도 나쁜 언어를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할렐루야! 아멘!” 하고 선포합니다. 또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하며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래하는 예배가 끝난 다음 밖으로 나와서는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뭐야, 또 눈이 오는 거야? 날씨 한 번 더럽네.” 그리고 영어도 잘합니다. AC, EC, IC, UC라고 유창하게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날씨를 누가 주관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조금 전에 불렀던 노래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원망하고 분노하며 불평해 보세, 불평해 보세.” 주님을 찬양하자고 해놓고 불과 몇 분 뒤에 어떻게 찬양했던 그분을 그렇게 금방 원망할 수 있습니까?
그뿐입니까? 예배 때 말씀도 읽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심지어 “네 원수도 사랑하라.” 그런데 예배 후 당회나 제직회나 공동의회를 하면서 서로를 비방하고 싸웁니다.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지적한 야고보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약 3:9-10)
지난 2010년에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 선교사님에게서 간단한 인사말들을 배우고 또 종이에 적어가지고 나갔습니다. 선교사님이 준 얇은 언어책자도 들고 나갔습니다. 한 번은 몇 시간 떨어진 지방으로 가서 어느 호텔에 묵게 되었는데, 호텔 직원에게 가서 나름대로 열심히 배운 언어로 말했습니다. 꽤 긴 문장으로 말을 했더니 “와” 하고 놀라면서 뭐라고 자기 언어로 말을 막 빨리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으니까 그 사람이 딱하게 쳐다보며 영어로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떠듬떠듬 배운 언어는 나 자신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렇게 약간 배운 언어는 조금은 하겠지만 금방 밑천이 드러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바로 그렇게 될 위험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언어가 진짜 하나님 나라의 언어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학교에서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서로 사랑하라”와 같은 몇 마디 말들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 몇 마디 하는 때 외에는, 평소에 불평과 원망이라는 어둠의 나라의 언어로 하루 종일 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모국어입니까? 불평입니다.
날씨가 춥거나 더워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날씨가 왜 이 따위야?”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비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냅니다. 눈과 얼음과 무더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야, 화창한 날씨네!”
비가 오면, “비가 오니까 은은하고 좋은데!”
눈이 오면, “야, 저 흰 눈 좀 봐. 눈이 참 멋지게 내리는군.”
굉장히 더우면, “아주 화끈하게 덥군. 더우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저도 지난주 눈을 좀 치우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어휴 추워”라고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에 휙 들었습니다. ‘역시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지!’ 우리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날씨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어떤 날씨이든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날씨이든지 그 날씨 때문에 우리로부터 여전히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4)
물론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음식에 대한 말을 하면서 쓴 내용이지만, 그 원리는 다 적용이 됩니다. 우리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좋게 느껴지고,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언제나 나쁘게 느껴집니다. 결국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가 그것을 결정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나의 모국어는 무엇입니까? 내가 주로 쓰는 언어는 무엇입니까? 찬양입니까, 불평입니까? 반드시 점검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겨울에 추우면 대개 뭐라고 합니까? “추워 죽겠네.” 여름에 더우면 뭐라고 합니까? “더워 죽겠네.” 자신의 언어를 잘 살펴보십시오. ‘죽겠네’, ‘미치겠네’, ‘돌아버리겠네’, ‘지긋지긋 해’, 이런 말들을 얼마나 평소에 많이 씁니까.
날씨가 추우면 대개 춥다고 불평하지만, 그럴 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아,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온도조절장치를 조금 낮추셨다.” 정말 추우면(화씨로 마이너스로 내려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 합니까. 그러나 그럴 때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가지셨는지를 보십시오. 얼음을 만드는 기계를 쓰지 않고서도 아주 광활한 시베리아나 캐나다를 온통 다 꽁꽁 얼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더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온도조절장치를 조금 올리신 것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도 히트가 돌아가고 있는데, 건물 하나를 난방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직원 한 명 두지 않으시고도, 한 건물이 아니라 온 나라를 화씨 100도가 넘게 덥힐 수 있으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능력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하면서도 자꾸 다른 나라의 언어인 불평을 사용하는 것을 들으시는 것에 대해 안타까우실 것입니다. 자기 나라 언어를 잘 말하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의 그것도 최악의 나라의 언어만 사용한다면, 우리 아버지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대부분 요즘엔 셀폰을 사용하는데, 몇 분이라도 전화가 잘 안 되면 무섭게 불평을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껏 전화가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컴퓨터로 드라마를 재미있게 잘 보았는데 갑자기 안 되면 온갖 저주를 퍼부어댑니다. ‘고물이 다 됐다’, ‘쓰레기다’, ‘갖다 버려야 한다’, ‘깡통이다’ 등등. 지금까지 그 물건 때문에 재미있게 본 것은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한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왜 우리는 잘 되고 있을 때 감사하지 못하고 잘 안 될 때만 온갖 불평을 쏟아 놓습니까. 기도제목이 있는데 응답이 안 될 때, 왜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다고 서운해 합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럴 때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자상하게 놀라운 사랑으로 인도해주시고 보호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시간으로 삼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지금 자신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어둠의 나라의 언어인 불평과 원망과 미움과 비난은 우리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또 무엇을 찬양하는지, 왜 찬양하는지 확실히 알고 주님을 찬양하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