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치원 영암에서 유학길에 오르다... 국제무역항 영암 구림 상대포에서 당나라로 국제무역항인 상대포는 유학의 지름길 영암 영산강은 해외진출 관문 세계를 향한 경제. 문화교류 창구 역할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을 뽑으라면 신라시대 문인인 고운(孤雲) 최치원(857~908년)을 들을 수 있다. 유학에는 대부분 불교의 승려들이 불법(佛法)을 구하러 인도와 중국 등으로 떠났다.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유학생활은 한국의 문화를 외국으로 또는 외국의 문화를 한국으로 전파시키는데 큰 역할과 양국 간의 교류(交流)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사람이 바로 최치원(崔致遠))이다. 그가 남긴 문집 가운데 하나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는 ‘신(臣)은 나이 12세에 길을 나와 중국(당나라)으로 건너갔는데 배를 타고 떠날 즈음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훈계하기를 10년 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기울여라’ 라고 아버지가 국제무역항인 영암 상대포(上臺浦)에서 본인을 당나라로 떠나보낸 작별을 장면의 글을 써 남겼다. *계원필경은 885년(현강왕 11) 중국 회남에서 귀국하여 그 이듬해인 886년(정강왕 1) 그의 나이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당나라에 있을 때 작품을 간추려 정강왕에게 바친 문집이다. 최치원은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과 함께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권과 오언칠금체시(五言七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을 함께 바쳤다. 지금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지금으로부터 1152년 전 서기 868년 어느 날 최치원은 12살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일반인으로서는 가장 어린나이로서의 유일한 최초 조기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고운 최치원은 857년(현인왕 1년)에 신라 경주 사량부의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라 말 사람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그는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 최견일의 아들이다.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은 원성왕(?~798년)의 명복을 빌기 위한 승복사라는 절을 지을 때 관리를 지냈다. 당시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도 사회였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벼슬은 아찬(阿湌)까지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차관급에 해당된다. 신라의 신분제는 관직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차별화를 두었다. 품계에 따라 집의 크기나 심지어 마구간의 규모까지도 규제를 받을 정도로 골품제도가 엄격했다. 최견일 아들 최치원은 당나라로 조기유학을 보낸 이유도 이런 신분제 사회에 회의감을 가져 답답함과 불공정함을 타개하고자 최치원을 조기유학을 시킨 것이다. 아버지 최견일은 나의 아들만큼은 그런 서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며 아들 최치원을 당나라로 유학을 보내기 위해 경주에서 데리고 영암 구림 상대포로 왔다. 국제무역항이었던 상대포에서 상선(商船)을 타고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상대포는 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상대마을에 있는 포구(浦口)다. 국제무역항으로서 나라간의 연결 포트(port)가 됐다. 상대포가 있는 영암은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있는 수려한 월출산을 두고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이런 풍광이 보이는 상대포에서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의 당나라로 가는 상선(商船)들이 드나들던 상선들이 정박해있던 곳이었다. 상대포는 영산강 물줄기를 따라 선사시대부터 청동기, 철기문화 유입을 비롯해 고대 중국과 일본의 교역로였다. 예부터 한.중.일 문화교류의 관문(關門)이었다. 한반도에는 여러 무역항이 있다.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가거나 영암 등을 통해 중국으로 갔다. 물건을 실어 나르는 상선(商船), 사신을 태워가는 기선(騎船) 등이 이런 루트를 이용했었다. 그중 영암 구림 상대포는 왕인 박사가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갔다. 그는 당연히 이 지역 사람이어서 이용했다. 하지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이용했던 최치원은 신라 경주사람이다. 주변에도 여러 항구가 있었지만 안전성, 신속성, 편리성 등 여러 여건을 고려해서 선택했다. 만약 남해 쪽의 항구를 이용했더라면 높은 파도로 난파나 침몰을 당할 위험성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위험성이 가장 적은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영암에서 신안을 거쳐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은 조류와 바람의 영향을 받아 중국으로 쉽게 갈 수 있는 항로(航路)였다. 그리 힘들지 않게 갈 수 있는 좋은 이점이 있어 최치원은 이곳 영암 구림에 있는 상대포를 선택해 당나라의 유학길에 올랐다. 생각대로 아무사고 없이 무난하게 중국 당나라에 도착해 고대하던 대로 수학(受學)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유학생활을 하며 많은 시문집을 썼고 중국에서 실시하는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등 월등한 실력으로 급제(及第)해 이곳에서 관직생활을 하며 명성을 떨쳤다. 그런 그는 향수병에 그만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 관직생활을 이어가면서 나라에 큰 이바지를 했다. 최치원은 학교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훌륭한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그를 기릴 정도로 받들고 있다. 당대 최고 문장가인 최치원, 요즘으로 보면 한류문화를 일으킨 사람이다. 신라인이 당나라에 가서 탁월한 문장실력으로 문필의 필력을 마음껏 발휘한 한국의 문화와 사상을 보여주고 전파시키는 사람으로 여길만한 인물로 중국에서는 그를 추앙(推仰)하고 있고 중국역사서에 기록해 놓았다. 신라와 당나라가 끈끈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최치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최치원은 학자이자 문장가이지만 외교관이었다. 그를 통한 나당(羅唐)이 교류가 더욱 활발해졌고 그런 속에서 두 나라는 부강하고 융성하는 등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었다. 나당간의 가교역할을 한 최치원, 그가 없었다면 신라나 당나라는 융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치원의 탁월한 문장실력으로 중국은 그만큼 문학에 발전을 기해왔고 최치원으로 인한 해외에 눈을 떴고 교류가 활발해졌다. 또한 신라도 최치원이라는 하나의 인물로 인하여 신라인으로서의 당나라에서 당당하게 꿈을 펼치고 위대한 일을 해 당나라는 최치원으로 보고 “신라는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명석한 사람이 태어나는 나라구나” 하며 신라를 달리 봤다. 최치원이 없었다면 신라도 당나라도 없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그만큼 최치원의 천재성에 두 나라는 세상에 훌륭한 인재를 두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알려지게 됐다. 당나라에 유학해 탁월한 문장실력으로 중국 문학을 발전시킨 최치원은 고국 신라에서도 그의 문장실력은 나라를 꽃피게 했다. 그가 떠났던 유학길 영암 구림 상대포는 가교(架橋) 역할의 장소였다. 교두보(橋頭堡)가 된 브릿지(bridge) 상대포, 최치원은 항구(港口)를 다리삼아 건너가고 건너오면서 상대포를 보기를 세상 사람들은 나당(羅唐)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곳으로 보고 있다. 상대포는 최치원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도교(道敎)가 및 문장가인 김가기(?`859년. 헌인왕 3), 견훤의 책사(策士)였던 최승우, 통일신라의 선위부사(宣慰副使)를 역임한 문인인 김운경도 이곳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들은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당나라에서 수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인물들이며 유학하기 위해 상대포에서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구림 출신인 도선국사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왕인 박사 등 여러 사람들이 영산강 물결이 출렁이는 영암 구림 상대포에서 일본과 중국으로 가는 배들이 돛을 올렸다. 상대포가 국제무역항으로 역할을 띠웠던 것은 3세기 말에 신미국(新彌國. 마한에 속하였던 초기국가)이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관문사회로 여겼을 가능성이 컸다. 3~4기 단계에 영암 시종면 일대의 고고학적 유적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시종면 일대가 당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인근 상대포가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고 그 의미가 컸으며 진출과 진입의 관문으로 여겼다. 서남해 지역에서 한.중.일을 오갔던 국제포구로 나주의 ‘회진포’ 와 영암의 ‘상대포’ 그리고 흑산도 ‘읍동포구’ 가 있었다. 영암 상대포는 동아시아 최고의 국제입출항이었다. 이중환은 18세기 중반에 저술한 ‘택리지’ 에 상대포의 모습을 기술하기를『나주의 서남쪽이 영암군이고 월출산 밑에 위치한다. 월출산은 한껏 깨끗하고 수려하여 화성(火星)이 하늘에 오르는 산세이다. 산 남쪽에는 월남촌(강진 성정면 월남리)이 있고 서쪽에 구림촌(영암 군서면 구림리)이 있는데 모두 신라 때 명촌(名村)이었다.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곳에 위치하여 신라에서 당나라에 조공 갈 때 모두 이 군(郡)의 바닷가에서 배로 떠났다. 바닷길을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흑산도에서 또 하루 가면 홍의도(紅衣島)에 이르며 다시 하를 가면 가가도(可佳島)에 이른다.』 『간풍(艮風. 북동풍)을 만나면 3일이면 태주(台州)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게 되는데 순풍을 만나기만 하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다. 남송이 고려와 통행할 때 정해변 바닷가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 만에 고려의 경계에 이르고 물에 올랐다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당나라 때 신라 사람이 바다를 건너서 당나라에 들어간 것이 통진(通津) 건널목에 배가 잇닿아 있는 것 같았다.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는 상선에 편승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과거에 합격하였다』라고 기록해났다. 영암 구림 상대포에서 중간 기착지인 흑산도 읍동포구는 한중해로의 분기점이었다. 흑산도 상대포에서 중국 영파에 이르는 한중해로의 핵심 중간 기착지로 가능했다. 그래서 중국으로 가는 길이 단 한 번에 갈 수 없어 흑산도 기착지가 있는 곳이 바로 영암이어서 상대포를 주로 이용했다. 최치원이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도록 그를 유학길에 오르게 했던 곳, 영암 구림 상대포는 희망의 항구였다. 영암에서 먼 경주에서 다른 루트(route)를 선택하지 않고 이곳 상대포를 통한 것은 그만큼 상대포가 국제무역항으로 이름이 났기 때문이다. 최치원 아버지 최견일은 상대포가 중국 등으로 오고가는 상선들이 드나들던 국제무역항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상대포를 아들 최치원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유학(遊學)을 떠나보낼 수 있는 길로 여겼다. 유학을 위해서라면 고충을 감수해서라도 경주에서 영암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상대포에서 아들 최치원을 배에 태워 떠나보냈다. |
최치원이 타고 갔던 상선(상선을 타고 왔다는 중국 기록에 남음)은 영산강하구를 거쳐 신안군의 비금도에 도착해 머물며 비금도 선착장이 있는 마을 이름이 ‘수대리’ 인데 여기에 ‘고운정(孤雲井)’ 이 있어 물을 마시며 목을 추 긴 뒤 잠깐 쉰 후 다시 당나라를 향해 배에 탔다. 최치원은 비금도를 거쳐서 나주군도 바깥에 위치한 ‘우이도’ 에 도착했다. 최치원과 옥황상제와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바위에 대한 설화가 서린 우이도에서 다시 흑산도로 배는 향했다. 흑산도 항구에서 정박해 식량과 물을 채워서 다시 홍도로 갔다. 홍도 대풍리(大風里)는 예나 지금이나 큰 바람으로 인한 중국 배들이 태풍을 피해 임시 배들을 정박했던 곳이었다. 최치원이 그 당시 중국으로 갔을 때는 바로 초봄에서부터 초가을까지 동남풍이었다. 배는 동남풍을 뒤에서 받고 북상하는 구로시오 해류를 타고 발해만 쪽으로 돌아서 중국으로 갔을 것이라는 바람과 해류에 밝은 신안군 어부(漁夫)들의 판단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도착해 상대포에서 작별하면서 했던 훈계적인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학문에 전념했다. 졸음을 쫒기 위해 상투를 천장에 매달고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며 공부했다는 ‘현자무가(顯刺無暇)’ 와 남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는 ‘인백기천(人百己千)’ 의 고사를 만들어낼 정도로 게을리 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했던 최치원은 드디어 6년 만에 외국인을 위한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 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발해인과 신라인이 많이 응시했던 빈공과에 합격한 후 최치원은 강소성 남부에 있는 선주의 작은 고을인 을수현에서 현위(縣尉)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최치원은 3년간의 관직을 지내고 21새 되던 해 더욱 높은 뜻을 이루기 위해 한 단계 높은 공직 시험인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산속에 응거했다. 그러다가 문인 출신 고변이 회남 절도사로 부임해 와 동부지방 군총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자였던 고변의 휘하에 있었던 과거시험 빈공과 동기생인 고운(顧雲)의 추천으로 절도사 직속으로 감찰업무를 담당하는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큰 명성을 쌓고 뛰어난 글재주로 지내는 등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그런 삶이었지만 최치원은 그이 시문집인 계원필경에서 보듯이 ‘아득한 바다가 막혀 부미(負米)의 뜻을 어렵고 하물며 오래도록 고향 사신이 없어 편지도 부치가 어렵던 차 마침 본국의 사신 배가 바다를 지나간하니 이편에 차와 약을 사 집에 부쳤으면 합니다’ 라는 장계를 고변에게 올렸다고 나와 있다.
최치원은 과거에 합격하고 중국 낙앙에서 유량하면서 시(詩) 창작에 몰두해 금체시 5수 1권과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등을 남긴 시문집의 대가였다. 그는 876년 당나라 선주 표수현위의 벼슬에 올랐으며 이때 글들을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 5권이다.
최치원은 회남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되었다가 879년 황소의 난이 일었을 때 제도행영병마도통의 벼슬로 ‘토황소격문’ 을 지어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게 됐다. 그는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1만 여수의 글을 짓기도 했다.
최치원이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간 당나라에 머물면서 유명한 당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글재주는 더욱 돋보였고 빛났다.
이를 보면 최치원이 고국 신라와 고향의 부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글을 적을 정도로 향수병에 시달리던 최치원은 견디다 못해 그만 16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 신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최치원이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심정을 들은 당나라 18대 황제 희종(862~888년)은 당나라를 떠나겠다는 최치원을 만류했지만 워낙 강고해 그의 뜻이 변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최치원의 공훈(功勳)에 걸맞은 예우를 베풀어 당나라 사신(使臣)의 자격으로 신라에 귀국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이때가 884년 가을경으로 그의 나이 28세였다.
금의환향(錦衣還鄕)하며 고국에 돌아온 최치원은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만큼 큰 영광을 얻었지만 고국에 돌아와 보니 이미 아버지는 세상에 뜨고 없었다. 당나라에 유학을 보내기 위해 상대포에서 한 말을 최치원은 떠오르면서 애통함에 “나는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했지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의 우구자(憂懼者)의 긴 통곡만 해야 했다” . “이제 부모도 가신 뒤의 부질없는 영광만 누릴 뿐이다” 라고 성공하고 돌아온 자신을 보여주지 못해 슬피 울어야만 했다.
신라 49대 현강왕(875~886년)은 귀국한 최치원에게 경서(經書)를 작성하는 직책인 ‘시독(侍讀)’ 과 당나라에 올리는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인 ‘학림학사(學林學士)’ 에 임명했다.
신라인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여러 영향이 있었다. 내 아들만큼은 신분제 사회에서 서러움을 받지 않게 하겠다는 자식을 향한 훌륭한 아들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꿈과 바람이 있었고 아들을 당나라로 유학을 보내기 위해 영암 상대포로 데리고 와 그 어린 자식을 중국으로 가는 상선(商船)에 태워 보냈던 게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서의 최치원을 낳게 했다. 자식 교육을 위해 국내도 아닌 그 먼 타국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부모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쓰라렸다. 아무리 교육도 중요하다지만 자식의 가슴을 멍들게 한 것 같아 눈물을 적실 수밖에 없었다. 어린 자식 최치원을 중국으로 떠나보내는 심정은 무척 괴로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린 아들을 더 강하게 키우기 위해 더 훌륭한 인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내해야만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막무가내 고향과 나라를 떠나 이국으로 가야만했던 최치원은 고향 신라 경주에서 영암으로 떠나는 이별과 영암 상대포에서 중국으로 떠나는 두 번의 이별을 해야 했다. 어린 최치원에게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한 이별의 슬픔을 참아야하는 생이별의 해야 했다. 아버지 최견일은 아들 최치원에게 “치원아 너는 이 나라의 꼭 필요한 인물이 되어야한다” . “네가 큰 인물이 되려면 오늘 이 고통은 견뎌내야만 하느니라 알았느냐” . “힘들고 아프지만 이겨 내거라 치원아” . “너를 떠나보내는 이 부모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프고 슬프구나, 너 또한 고 부모 곁을 떠나게 되니 그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괴로울 것이다” . “치원아 이일이 다 너를 위한 것이니 어쩌겠느냐 부자간의 안타까운 일이지만 너의 교육과 출세라면 이 방법밖에 없구나, 너의 장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 참고 잘 극복하여 필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하거라” 하며 아들을 설득하고 진정시키며 용기를 북돋은 채 경주(慶州)에서 영암(靈岩)으로 영암에서 중국(中國)으로 순탄치 않는 길을 걷고 걷게 했다. 오로지 훌륭한 인물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길을 떠나게 했다.
중국 당나라로 가려할 떄 상대포구에서 “10년 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기울여라” 이런 말을 하며 아버지와의 작별한 최치원은 “소자는 아버님의 뜻을 꼭 이루는 훌륭한 아들로 태어나도록 열심히 학문에 전념하고 정진하겠습니다” . “아버님! 소자 최치원은 아버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반드시 입신양명하여 금의환향하겠습니다” . “잘 다녀오겠습니다” . “소자 걱정 마시고 부디 아버님의 건강과 안녕하시길 빕니다” . “오냐 아들아 잘 다녀오려무나 부모 걱정 말고 어서 가거라” 라고 작별 인사를 나눈 채 상선에 올라타 배웅한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화랑도 정신에 입각한 자세로 당당한 마음을 먹고 중국 당나라로 떠났다.
신라에서 영암을 거쳐 당나라를 갔던 최치원은 낯선 영암에 왔을 때 수려한 월나산(월출산의 옛 이름)을 보고 의지의 찬 각오를 그 꿈을 더 키웠다. 월출산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있어 기(氣)가 많이 나온 영험(靈驗)한 산으로 알려진 명산이다. 영암이라는 고을 이름도 월출산에서 비롯됐다. 신령 영(靈)자와 바위 암(岩)자를 써서 영암(靈岩)이라고 했다. 백제시대 때는 월라군(月奈郡), 신라시대 때는 영암군(靈岩郡), 고려시대에는 낭주군(朗州郡)으로 부르다가 현종 9년(1018)에 다시 영암으로 하여 현재까지 고을 명(名)을 쓰고 있다. 월출산은 달이 난다하여 신라시대 때는 ‘월나산(月奈山)’ 으로 불렀다. 그런 던 것을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 이라고 부르다가 다시 ‘월출산(月出山)’ 으로 바꿔 오늘날까지 영암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달이 나는 월출산, 영험한 기운이 솟아나는 고장 영암 땅을 밟았으니 “나는 기필코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노라” . “기대하는 그 이상으로 훌륭한 인물이 되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겠노라” 하며 그는 화랑의 충절과 기백이 숨 쉬는 신라 경주의 정신과 영암 월출산 정기의 기세를 입고 큰 꿈을 갖고 사나이로서의 아버지와의 눈물을 보이지 않고 아픈 작별의 생이별을 하며 당나라로 떠났던 최치원은 영암의 기운(氣運)을 받아 우리의 역사에 남는 훌륭한 인물로 추앙을 받고 있지 않는가한다. 최치원도 그랬듯이 이곳 영암에서 태어난 왕인 박사도 일본으로 가 선진 일본을 만들어낼 정도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모두가 영암이 없었더라면 당나라도 일본도 그들도 위대한 나라와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최치원이 유학길에 올랐던 상대포는 백제시대 때 이 고을 태생인 왕인 박사도 일본으로 갈 때 이용했던 항구다. 왕인 박사는 32세 때 일본 오진텐노의 초청을 받아 백제 14대 근수구왕의 명으로 손자인 진손왕과 함께 영암 구림 상대포에서 천자문.논어와, 도공, 야공, 와공, 직공, 의사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문화를 꽃피운 인물이다. 특히 문자가 없는 왜 나라에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千字文) 1권을 전해주고 높은 학덕과 깊은 경륜을 바탕으로 오진텐노의 신임을 얻어 우치노와 카이로츠코의 스승이 되었다. 왕인은 일본인에게 글을 가르치고 학문, 기술, 공예 등을 전수하여 아스카(飛鳥) 문화의 원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렇듯 영암 구림 상대포는 한국에서의 만들어낸 도자기 등 제품과 생산한 각종 특산물 등을 실고 국내 또는 해외로 수출하는 등 교류의 항구로 역할을 띠어왔다. 최치원, 왕인 박사 및 승려 등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해외로 나갔다.
당나라에서 명성을 떨친 최치원, 그가 유학길에 오른 곳은 영암 구림의 상대포였다. 국제무역항이었던 상대포는 지금은 옛 풍경(風景)과 영화(榮華)는 사라지고 없다. 포구는 영산강의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그 옛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고 조선후기 때부터 그 구실은 약해졌다. 지금은 정자(상대포)와 호수(뱃길) 등으로 상대포공원을 조성해 놓은 등 일부를 재현해 이곳이 국제무역항임을 보여주고 있다.
영암의 유일한 천혜의 자연 자산(資産)인 영산강(靈山江)이 하구언으로 인하여 드나들던 바닷물은 볼 수 없게 됐다. 갯벌은 농토로 변해버렸고 바닷물이 드나들던 거대한 강(江)은 민물이 흐르는 작은 천(川)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고을 사람들은 옛 영산강을 그리워하고 있다. 영산강을 막아버린 게 잘못이라는 이야기들을 못내 아쉬워하며 쏟아내고 있다. 식량 확보와 안보를 위해 막았다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벼농사를 짓는 들녘보다 천혜의 자연 경관이 우리 영암에서는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고장으로 그 이미지를 더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바다의 환경을 통한 관광지로서의 수입원이 더 컸을 것이라는데 진단하며 쇠락해진 영산강에 대한 아쉬움을 크게 갖고 있다. 관광산업에서 발생한 수입창출 면에서는 벼농사보다 해산물을 채취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확신하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고을 분들은 느꼈던 입맛도, 느꼈던 추억도, 보았던 풍경도, 자연의 혜택도 다 잃어버렸다며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영산강은 바닷물이 드나들어 해산물이 풍족했다. 숭어.망둥어(운저리).장어.대갱이.짱둥어.맛조개.모시조개.석화(굴).칠게 등등이 많았다. 갯벌이 무릎정도 빠질 정도로 좋았다. 철새들이 많이 날아들었다. 바닷물은 은빛으로 출렁거렸다. 갈대숲은 음악인양 냈고 바닷물과 함께 은빛장관을 이루었다. 그러던 곳이 영산강을 막은 바람에 그 풍족한 해산물과 아름다운 풍경 등 그 영화로움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못내 아쉬움과 그리움을 낳게 하고 있다.
바닷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황포돛단배, 어선(목선), 여객선 등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냈다. 개매기로 고기를 잡았던 영산강, 물이 빠지면 긴 나무를 꽂아서 그물을 갯벌에 묻고(하단) 물이 들어오면 그물을 위로(상단) 올려 고기를 가두는 방식으로 각종 고기를 잡았다. 개매기가 있을 때면 마을 사람들은 다래끼를 메고 고기를 잡으려고 갔다. 운저리, 모치 등을 잡았다. 또한 갯벌 속에 있는 장어를 긁갱이 질을 해 잡았다. 또한 아낙네들은 고무통과 벌배를 갖고 갯벌에 나가 갯벌 속 깊이 들어있는 맛조개와 모시조개, 칠게를 잡아 팔거나 요리를 해먹었다.
바다풍경이 아름다운 만큼 영산강 어귀에는 포구도 많았다. 특히 시종 남해포와 구림 상대포는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포구다. 목포 앞바다를 통해 중국이나 일본으로 갈 수 있게 한 영산강은 중요한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항로의 관문으로서 역할을 띠었다. 특히 구림 상대포는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런 역할을 띨 때는 그만큼 해외진출 관문으로서 또는 국내외로 들어오고 나가게 한 수출입 무역항구로서 중요한 곳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라가 낳은 인물 최치원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에 대한 인물 평가는 높다. 우리 국민들은 신라를 대표한 역사적인 큰 인물로 여기고 있다. 그런 인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영암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가 유학길에 떠난 곳 상대포, 상대포의 옛 모습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최치원의 혼(魂)은 사라있다. 또한 일본 아스카문화를 꽃피운 왕인 박사의 혼도 이곳 상대포에 남아있다.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준 상대포,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다. 우리 기억 속에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국제무역항인 상대포’ 다. 인천국제공항이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關門)이듯 상대포가 그랬다.
상대포
상승의 기운이 물결처럼 넘실되도다
대성의 기세가 폭풍처럼 몰아치도다
포성의 소리가 우레마냥 진동하도다
상대포(上臺浦)는 윗대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상대포는 월출산의 기운이 도갑사계곡을 따라 영산강으로 흐르고 있는 월출산 끝자락과 영산강 사이 어귀의 길목에 있다. 월출산과 영산강과 이어지는 상대포 앞바다에서 월출산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영산강(서호강)에서 솟구치다가 다시 서해바다로 흘러 중국과 대양으로 뻗어가는 형국이다.
땅의 기운 월출산과 물의 기운 영산강이 만나는 길목에 있는 상대포, 그 길목에서 배들이 입출항(入出港) 하니 삼행시처럼 상승(上昇) 기운(희망) 넘쳐나고 대성(大成) 기세(성공) 몰아치고 포성(砲聲) 소리(축포) 진동할만하다.
영암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입신양명했다. "출세하려면 영암을 통해라" 이런 말이 나올 법도하다. 최치원이 영암을 통해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크게 출세를 했듯이 조선시대 한석봉도 영암에 와 인생이 달라졌다. 최치원뿐만 아니라 여러 유학자들이 이곳 영암을 통했다. 이롭게 하는 기가 많은 영암은 인물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영암에서 생산한 특산물이나 타 지역에서 생산한 모든 제품은 이곳 영암을 통해 해외 또는 타 지역으로 수출을 했다. 영암 상대포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아스카문화를 꽃피운 왕인 박사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다.
영암은 백제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중요시 했다. 해상교통이 좋아 영산강을 주 항로로 여길 만큼 군사적인 방어 및 공략의 전략기지에 용이한 구역으로 여겼다. 또한 물자조달 및 수출 등의 해상무역이 활발하게 한 진출무대였다.
'출세하려면 영암을 통해라' . '번창하려면 영암을 이용해라' . '기운을 받고 싶으면 영암을 찾아라' . '기세를 떨치고 싶으면 영암에 살아라' . '참된 인간이 되려면 영암을 보아라' 라는 술로건을 낼만한 영암이다.
영암은 육지문화와 해상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서의 국제관문 역할과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 발판을 깔아준 고장이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