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94
3월12일[사순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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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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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_VA9rK4nakw
[수원교구 박우성 암브로시오(안성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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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부단히 어제의 나와 결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누구라도 심정이 비슷해집니다.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가운데 ‘양문’이라고 있었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양들과 양치기들이 드나들던 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바로 옆에는 벳자타라고 불리는 유명한 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유명해진 이유는 다른 연못처럼 고요하지 않고 어느 순간 물이 출렁거리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다량의 물이 갑작스레 유입되거나 빠져나가는 순간, 수면이 출렁거렸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물에 가장 먼저 뛰어들면 치유의 은총을 입게 된다는 속설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벳자타 연못 가에는 언제나 수많은 중환자들과 보호자들로 우굴거렸습니다. 다들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물이 출렁거리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연못을 둘러보시다가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예수님 눈에 띤 사람은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벳자타에서 가장 왕고참이었습니다.
38년간이나 중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평생토록 병마에 시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보호자도 없이 하릴없이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이 출렁거려도 넣어줄 보호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환자들가운데서 가장 가련하고 불행한 환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과 연민의 마음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소동이라도 일어날까봐 조용히 다가가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묻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복음 5장 6절)
“선생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당연히 건강해지고 싶습니다. 제 두 발로 한번 똑바로 서보고 죽는게 소원입니다. 그러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 복음 5장 7절)
예수님께서는 그를 번쩍 들어 벳자타 연못에 넣어주시지 않습니다. 그저 한 말씀으로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복음 5장 8절)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의 속박과 부자유의 삶을 청산하고 해방과 자유의 길을 걸어가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제한적인 삶의 방식,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보다 넓은 세계, 또 다른 넓은 지평의 삶에로 넘어가라는 초대입니다.
안식일에 발생한 환자의 치유는 유다인들에게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38년 동안이나 고생했던 환자의 치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었습니다. 그저 안식일법을 어긴 예수님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죄와 악습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바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부단히 어제의 나와 결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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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어나라고, 걸어가라고,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라고 외치시는 주님!>
저 같은 경우 10년 가량 병치레를 했었는데, 그 기간이 얼마나 길고 끔찍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연못 가에 누워있는 환자 장장 38년 세월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을 때, 스스로 일어나지조차 못해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뇌졸중이나 중풍이었겠죠. 점점 병이 깊어가면서 사지가 마비됨으로 인해 나중에는 한걸음 옮기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변변한 의료시설이나 치료약이 전무했던 당시에 그런 병에 걸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사형선고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모진 게 사람 목숨이라고, 점점 깊어가는 병을 바라보며 견디고 또 견디다보니 어언 서른여덟 해가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옆에 누워있던 다른 환자들은 다들 먼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도 이제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명이 다하는 멀지 않은 어느 순간 세상 뜨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료 효과가 좋기로 유명한 벳자타 연못가에 초점 없는 눈동자로 하루하루 세월을 죽여가며 그렇게 누워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목숨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일어나라고, 걸어가라고 외치십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무의미한 죽음의 삶에서 의미로 충만한 생명의 삶으로 건너오라고 외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어쩌면 천둥처럼, 그리고 감미로운 산들바람처럼 다가온 예수님의 말씀에 그의 경직되고 마비된 살과 뼈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렸습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그는 부드럽게 일어섰습니다. 마침내 그 오랜 세월 의지처였던 들것을 자신의 두 손으로 번쩍 들고 자기 발로 걸어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런 희망이나 기약도 없이 누워있었던 세월이 38년이었습니다. 당시 유아 사망을 빼고 나면 대체로 50세 정도가 평균 수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니 그는 평생토록 들것 위에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를 툴툴 털고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그 옛날 벳자타 연못가의 환자처럼 점점 기력을 상실해가는 오늘 우리 교회, 점점 사지에 힘이 빠지고 마비증세가 두드러지는 오늘 우리 수도회의 모습, 그리고 비슷한 처지인 나 자신의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어!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라고 낙담하는 우리에게 아직 거짓말처럼, 따뜻한 봄바람처럼 살며시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벳자타 연못가의 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굳센 신앙입니다. 그분께서 반드시 나를 치유시켜 주시리라고 확신하는 강렬한 믿음입니다.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치유를 받고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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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gi0CtCsA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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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연못에서 앉은뱅이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큰 사랑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것보다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긴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이리도 큰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까요? 그것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가출하여 길을 헤매는 거지 아이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씻겨주고 저희 옷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당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를 보고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거의 양자로 삼으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이 세상은 그렇게 따듯한 곳이 아닙니다. 자기 부모로부터도 분명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모도 사랑해주지 않는 자기를 생판 모르는 아주머니가 사랑해 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아이는 우리가 학교 간 동안 돼지 저금통을 다 털어 도망을 갔습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찾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아보지 못하면 자기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기 위해 다른 사랑을 거부하게 됩니다. 원망하는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해주려는 사람도 거부하고 밀쳐냅니다. 그렇게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을 알아볼 수 있게 그 사랑으로 이뤄진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에서 하느님 사랑의 조각을 맛봐야 합니다. 만약 성당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와 큰 차이가 없다면 미사에 나오는 것만으로 하느님 사랑을 절대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가 새끼 원숭이를 엄마 원숭이와 격리하여 실험하였습니다. 어미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원숭이는 자해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다른 원숭이들을 극도로 멀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자 원숭이를 넣어주기로 하였습니다.
어미와 몇 달을 살며 세상이 온통 사랑으로 여겨지는 원숭이를 같은 우리에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도망 다니다가 그 원숭이가 털을 골라주자 자신도 미안한지 치유자 원숭이의 털을
골라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다른 원숭이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유를 먹고 밥을 먹고 떡을 먹고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단단한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체해서 더 딱딱한 것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성당 다니던 한 자매가 스토커에게 쫓겨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자매에게 어떤 사람도 신경 써주지 않았습니다. 그 자매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으로 전기가 통하지 않는 이상한 옷을 만들어 입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자기를 전기로 죽이려고 한다는 피해망상증이 생긴 것입니다.
공동체로부터 하느님 사랑을 조금이라도 체험하지 못하면 성체 성혈은 너무 멉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보아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성사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이들이 줄어드는 이유는 그 성사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을 가진 공동체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장 발장도 주교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서야 다시 종교에 귀의할 수 있었습니다. 외적인 선교 이전에 사랑의 친교가 가득한 공동체를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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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은 제가 묵상했을 때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몇 가지 되지만 하나의 포인트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병자는 육신의 병이 있어서 예수님의 은총으로 치유가 된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병자라고 나오지 않습니다만 실제로 병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전혀 병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병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병자일까요? 바로 영혼이 병든 병자입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입니다. 복음에 기록된 표현으로 봐서는 영혼이 병들었다고 하는 표현도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서 제가 그런 표현을 했는지 제가 그 부분에 대해 집중해서 묵상해봤습니다.
정신 의학 차원에서 사람의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분류를 한다면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병이 병든 사람은 그냥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 의학적인 차원에서는 겉으로는 멀쩡한데 정신 질환자라고 할 수 있는 병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봤을 때는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성도착증 환자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간혹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보면 사회 지식층이나 특히 몇 년 전에는 유명 방송사 앵커가 실제로 그와 같은 행동을 해서 충격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앵커를 겉으로 봐서는 외모도 준수하고 해서 상당히 누가 봐도 또 직업이 주는 이미지도 있고 해서 신선했는데 그와 같은 행위를 했다고 했을 때 사람의 정신 세계는 정말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정도의 사회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그런 행위를 했을 때 설령 그와 같은 욕망이 마음속에 있어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기 전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만약 자신의 행동이 세상에 어떻게 공개가 된다는 가정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에 대한 비난이 어떨지 생각해본다면 그런 행동은 전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판단해 행동으로는 실천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정도도 판단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분명 그 정도까지도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와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를 통해서 우리 영혼의 상태도 어쩌면 이와 같은 면은 없는지 생각해보고 점검해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이 사례를 언급했습니다. 유다인과 또 이 앵커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감이 오시는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몸의 겉모양은 멀쩡한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경우를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도 똑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했다면 오늘 복음과 같은 것은 어떤 뜻을 가진지는 다 알 수 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내용은 알지만 우리는 여기서 좀 더 그 내용에 깊이 접근해 들어가야 할 부분이 있고 또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내에서도 이 유다인의 모습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뇨. 제가 누워서 우리 얼굴에 침 뱉는 이야기라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만 이와 같은 일은 자세히 보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본질은 안식일에 관한 규정을 지켰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원래 안식일의 의미를 잘 알고 안식일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게 기본 메시지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이런 생각으로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고 또 이렇게 생각해야 함에도 어떤 정해진 그 규정과 규율에만 매여 자신의 단편적인 사고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특히 이런 사람이 공동체의 장을 맡고 있다면 제가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공동체는 어떤 피해를 입게 될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실 거라고 판단됩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 속에 이런 유다인의 모습이 있는지 한번 성찰하는 하루가 됐으면 합니다. 유다인이 정상적인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을 박해할 게 아니라 찬미를 드렸을 텐데 그렇지 못한 점을 봤을 때 유다인은 영혼이 병들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이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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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1-16: 건강해지고 싶으냐?
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가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시고 다가가신다.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환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누워있는 병자에게 선뜻 다가가신다. 그리고 그를 따뜻하게 대하신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 “일어나라!”라는 것은 치유를 내린다는 뜻이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말씀은 치유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들것을 들고”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죄에 억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너 자신을 잘 다스리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사랑해야 하는 주 하느님이시다. 주님께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들것을 지고 걸어갔다.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10절) 한다. 치유를 기다릴 순 없었다 해도 왜 들것을 지고 가라고 하였는가이다. 그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의 권위 뒤로 숨는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11절) 그는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치유 받은 남자를 성전에서 만나신 예수께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14절)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뜻도 내포되어있다. 어제까지 우리는 들것에 누워있던, 물이 출렁거려도 우리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셨다. 우리를 들것에서 일으키셨고, 들것을 들고 우리가 입은 은혜를 확인했다. 다시는 들것에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항상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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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생명의 물’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사막 지역인 이스라엘 풍토에서 예로부터 물은 중요한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에제키엘서 본문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로 주변 모든 것이 되살아남을 묘사합니다. 성전의 물이 “흘러들어 가면”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넘칩니다. 복음에서는 이 ‘생명의 물’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선언합니다.
벳자타 못 근처에 서른여덟 해 동안 병들어 있던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생명의 물이신 분께서 그에게로 흘러들어 가시어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는데 그는 대답 대신 원망 섞인 한탄을 늘어놓습니다. 물이 출렁거릴 때 아무도 자신을 데려가지 않아 이 지경으로 오래 있었다는 푸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불평을 타박하지 않으시고, 그가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나을 수 있는 드넓은 전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생명의 물’은 ‘벳자타의 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너도 낫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과 함께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으로 흘러들어 오십니다. 의미 없는 신세 한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물이 내 안에 흘러들어 오도록, 지나가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상징하는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 주변에서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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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요한 5,5-9)
여기서 “그날은 안식일이었다.”라는 말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보다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일은,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좋은 일’(선한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일만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안식일 문제로 갈등과 충돌이 생겼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춰야, 그 병자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안식일 규정 때문에 생긴 갈등과 충돌은 16절부터 박해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또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안식일을 비롯해서 율법들을 잘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확신하는 유대인들의 신념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말입니다.>
그런데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고, 모르니까 예수님을 안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이 있어서 치유의 은총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시기 전에나 후에나 당신을 믿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은총을 받았고, 은총을 받은 뒤에도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배신한 사람인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은총을 주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을 병자 쪽에서 바라보면, 그는 예수님을 믿었다면 받게 되었을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그저 ‘몸의 건강’을 얻은 것으로 그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지상에서 몸의 건강을 누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4-16)
그 병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던 병이 치유된 기쁨보다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지켰던 유대인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든 그 병자는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지는 않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배신이고 배은망덕입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의 치유가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더 나쁜 일’은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몸의 치유’는 예수님께서 해 주셨지만,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는 말씀은, 받은 은총을 헛되이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이미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씨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씨를 잘 가꾸고 돌보아서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면서, 구원의 은총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씨를 헛되이 버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구원’이라는 것은 보지 않고,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유대인들도, 또 몸만 치유되고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버린 그 병자도, 모두 영혼이 병들어 있는 자들입니다. <벳자타 못 가에 누워 있는 병자들과 장애자들보다 영혼이 병들어 있는 그자들이 더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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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전광진 엘마노 신부님]
<율법과 사랑>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38년 동안 고생한 한 맺힌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하필이면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은 계명과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를 강요했습니다. 사람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율법만을 지키도록 했으니 형식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쉬어야 한다는 율법 의무에 매달려 있던 유다인들은 병을 치유한 것보다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사실에 비위가 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으로 법을 지키는 것보다 법을 어기더라도 꼭 필요하다면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사랑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도 법에 얽매여 살기보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미사는 매일매일 참례하면서 남에게 잘해주지 못하면 미사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를 매일 꼬박꼬박 바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미사와 기도만 잘하고 이웃 사랑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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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영수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이 악해지는 이유는?>
벳자타 연못에는 1년에 몇 번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오는데, 그때 연못의 물이 움직인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연못 물이 움직일 때 그 물에 몸을 담그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습니다. 연못가에는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는 수많은 병자가 있었고, 서른여덟 해 동안 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몸이 아프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만 병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도 그만큼 외롭고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서른여덟 해 동안 병자로 누워 있는 그 사람 곁에는 돌봐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었습니다. 육체적인 병으로 괴롭지만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한테서 떨어져 나와 외톨이가 되고, 그들의 관심과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이 더욱 아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가셔서 병든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셨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비슷한 말이 지금 우리 주위에도 소리 없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사랑받고 싶지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없습니다”, “저와 함께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홀로 버려진 채 자신의 손을 잡아줄 이를 기다리는 사람이 과연 우리 주위에, 내 가족 가운데 없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세상이 악해지는 것은 선한 이들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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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미사 독서들은 입당송부터 영성체송까지 온통 물 이야기로 채우고 있어, 그 안에서 맑고 밝은 생명력이 뿜어나오는 듯합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병자들이 모여있는 벳자타 못으로 가십니다.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요한 5,3)고 합니다.
흡사 응급실이나 야전병원 같은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물론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고 피폐한 형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거기에 모인 병자들은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출렁거리게 하는데, 물이 출렁거릴 때 맨 먼저 못에 내려가는 이는 무슨 질병에 걸렸더라도 건강하게 되었기 때문"(요한 5,4 각주)에 모여든 이들입니다.
장애가 덜해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 부축해 줄 가족이나 종을 거느린 이에게는 제법 유리한 조건일 터이고, 그들은 진작에 치유되어 그 못을 떠났을 겁니다. 그중 서른여덟 해나 앓아온 이에게 예수님의 눈길이 머무릅니다. 그 역시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낫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했을텐데 그 긴 시간을 그저 부러움과 자책으로 보내다 이제는 무기력만 남은 듯 보입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수님께서 그의 원의를 물으십니다. 강렬하고 순수하고 절실했던 첫 바람을 일깨우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좌절과 실망을 쌓아온 그는 순수하고 단순한 응답 대신 여태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합니다. 도와줄 이가 없어서 그렇다는 원망이 살짝 섞여 있기도 하지요.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그를 고쳐 주십니다. 원망 섞인 동문서답 이면에 자리한 바람을 읽으셨기 때문입니다. 출렁이는 연못의 물이 물리적으로 몸에 직접 닿아야 낫는다고 믿는 이에게, 생명의 물이신 분이 다가오셔서 말씀으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진정 치유는 매개물을 통하건 통하지 않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업적임이 드러납니다. 이제는 낫기 위해 요행을 바라며 다른 병자들과 경쟁하기보다 몸소 생명의 물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으면 살아난다는 진리가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훗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세상으로 피와 물을 흘려보내셨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 중 하나인 오늘의 독서 말씀이 이를 미리 보여줍니다.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물이 솟아"(에제 47,1)나는데,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11)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마시고 쓰는 물이 그렇듯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세상을 정화하고 치유하고 풍요롭게 되살립니다. 복음의 병자가 연못의 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치유되어 새 삶을 살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치유는 예수님 박해의 전주곡이 되어 버립니다. "너는 치유를 받아 네 힘으로 짐을 챙겨 걸어갈 만큼 건강해졌으니, 이제 그만 여기를 떠나도 된다." 는 뜻으로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셨는데, 여기서 곡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서른여덟 해나 앓던 이가 멀쩡히 걸어가는데도 축하와 격려를 건네기는 커녕 안식일에 들것을 들었다고 지적하자, 병이 나은 이는 당장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이 시키신 것이라고, 그분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전합니다. 들것을 들고 가라는 말씀의 의미보다 그렇게 문자의 외피만을 전하다보니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신원을 유다인들에게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5,14) 하셨고, 그분에 대한 유다인들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생명의 은인을 고자질하는 모습이 사실 적잖게 당혹스럽습니다.
육신의 병은 나았을지 몰라도 여전히 영혼은 비틀려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책임을 면하는데 급급했던 걸까요?
예수님 삶이 그랬고 우리 인생사가 그렇듯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과 사건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 역시 유다나 가야파나 빌라도처럼 구원사에서 부정적이나마 제 역할을 한 것이라면 연민이 들기도 하고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주신 당신의 생명으로 치유받고 회복되어 날아갑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책임 있게 그 생명을 누리며 사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를 되살리고 고치시려고 부어주신 은총을 과연 하느님께 감사로 되돌려 드리는지, 아니면 그분 앞에 걸림돌을 놓는지 깊이 깊이 바라보는 사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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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건강해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요5,5.8)
벳자타 못가의 38년 동안 앓고 있던 사람의 치유를 기점으로 예수님과 유다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게 되며, 성서는 이 일로 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5,1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부와 박해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앓고 있는 이를 치유하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앓는 이들에 대한 자비심으로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교부들은 벳자타 못가에 누워 있는 병자들이 세 부류의 다른 질병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요5,3참조) 먼저 ‘눈먼 이’는 세상의 즐거움에 매여 빛보다 어두움을 택한 이들이며, ‘다리 저는 이’는 하느님과 세상 가운데 머물면서 두 주인을 섬기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는 은총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아 연약해진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사람은 바로 오늘 치유 이야기의 대상인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입니다. 서른여덟 해 동안 앓고 있던 병은, 그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 그가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불행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치유 받기 위해 많은 환자가 벳자타 못가로 모여 와 있었기에 그에게는 치유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 줄 날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운명적인 순간이, 운명적인 은총의 만남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그것은 유대인들의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 이곳, 은총의 자리에 구원의 장소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수많은 환자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누워 있는 그를 보시고 그가 참으로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그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5,6)(=공동 번역은 ‘낫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는 자신의 지난 세월을 한 마디로 “저는 낫기를 원하지만,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5,7)라고 대답합니다. 이 표현은 결국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도,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자신의 병을 돌보아 주는 사람 없이 철저히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마치 그는 분명 그곳에 오랫동안 있었음에도 그곳에 없는 사람처럼, 즉 장식물처럼 철저하게 무시당해 왔고 외면당해 왔었겠죠. 그는 단지 육신적인 질병을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아온 것만이 아니라 존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철저하게 홀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우리 모두 현재 느꼈거나 느끼고 있는 군중 속의 고독처럼 모든 사람이 피부로 느껴지고 공감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 어려움에 놓여 있지만, 도움이 필요한 우리를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아왔던 그 사람은 지금껏 한 번도 사람다운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그런 그가 참사람이며 하느님이신 분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신 앞에 서 계신 그분께서 자신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고 묻자, 처음에는 낯설고 너무도 이상하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낫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건강해지고 싶으냐? 혹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주님께서 그에게 물으신 질문의 의도는 바로 환자의 치유 받고자 하는 의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구원이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지듯, 스스로 눈멂을 인정하고 눈뜨기를 원할 때, 환자가 스스로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고 낫기를 간절히 원할 때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인의 낫기를 원하는 의지에서 나오는 동의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때론 어리석게도 이미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체념과 낙담으로 살아왔기에,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 낫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인간이란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7,15.19) 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서른여덟 해는 전혀 짧지 않은 세월이고 그 긴 세월 동안 몸도 마음도 익숙해진 이 생활 스타일을 역설적으로 낫기를 바라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물었고 변화하기를 원한다는 그의 의지를 확인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확인하고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5,8)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5,9)라고 이 순간을 간략하게 표현합니다. 이로써 그는 그가 만난 참사람이신 예수님과의 은총의 만남으로 한 사람으로 당당하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던 것입니다. 이는 단지 그 한 사람의 치유만이 아니라 세상 살아오면서 어떤 누구에게서도 관심과 인정을 받아 보지 못하고, 있지만 마치 없는 존재로 살아온 우리에게도 어제와 전혀 다른 새로운 날을 열어 주시고 우리 역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들것은 육신의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지금껏 환자에게 들것은 자기 삶의 터전이요 전 재산입니다. 벳자타는 그가 그동안 자신의 모든 삶을 맡기고 지내 온 안식을 취하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그곳에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주님은 그에게 독려하십니다. 이젠 더 이상 들것에 의존하면서 육신적 만족감을 취하지 말고, 그것에 저항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들것은 더 이상 누워 쉬는 곳이 아니기에 짊어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치유된 이에게 새로운 과제가 부여됩니다. 그 과제는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신앙과 삶의 과제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제 누군가 어려움에 놓여 우리의 도움이 필요로 할 때 그 사람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갈 수 있도록 이해해 주고 사랑을 베푸는 참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영적으로 깨어 힘차게 걸어 나갑시다.
끝으로 ‘베르트 브래크트’의 「목발」이란 시를 함께 음미해 봅시다. 『일곱 해 동안 스스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내가 저명한 의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왜 목발에 의지합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마비된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놀라지 말라고 당부하며 말했다. 기쁜 마음으로 그냥 걸어보라! 너를 마비시키는 것은 그 잡동사니이다. 넘어지더라도 네 발로 기어가라! 호탕하게 웃으며 그는 아름다운 목발을 집어들어 내 등 뒤에서 부러뜨렸고 그것을 불 속에 던졌다. 나는 치유를 받았다. 걸어간다. 그 호탕한 웃음이 나를 치유했다. 나는 의지할 수 있는 목발을 볼 때마다 잘 걷지 못한다.』“주님, 저희 또한 들것에 의존하지 않고 부족하며 부족한 대로 거침없이 일어나서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게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도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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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강의를 시작하면서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말합니다.
“이 시간에는 여러분에게 만 원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만 원을 주도록 저를 설득해 보실 분이 있나요?”
몇몇 지원자가 있었고, 그중에 한 명을 지목하니 왜 자신이 만 원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휴대전화 충전기가 필요하고, 유니세프에 기부할 예정이고, 내게 꽃을 사줄 생각이랍니다. 저는 “그러시리라 믿어요.”라고 말했지만, 만 원짜리 지폐를 주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원자는 또 다른 말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지 않습니다. 이제 다른 지원자가 저를 설득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지원자들이 제게 하지 않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만 원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 원이 필요한 이유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만 원을 제게 주세요.”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내용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알아서 해 주기만을 바랄 뿐인지 이유만 늘어놓습니다. 단순히 부탁하면 되는데, 복잡하게 꼬아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이런 모습이 바로 과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은 사람을 구속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병자를 일으키시어 자신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이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유다인들은 그 기적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고 여기기는커녕 예수님을 단죄하는 절대적 증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중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저것을 따지면서 정작 주님께서 듣고 싶은 말을 피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또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 모두를 위해 주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어떤 대화도 없이 즉, 기도나 어떤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던 분이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기가 쉽던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전혀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사람은 부탁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부탁도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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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
요한 5,1-16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살림>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5,7)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매 순간
딱 한 사람
오롯이 곁에 있으면
더할 나위 없으니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누군가에게
그 한 사람이
되어 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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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핑계 없는 무덤 없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 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누구에게나 자신의 병이 가장 절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이현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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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수의 샘, 생명수의 강>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ㄴ)
이 말씀 꼭 마음에 지니고 사시기 바랍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구제하자는 이상도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
3월12일자 다산 어른 말씀도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명진스님은 평화의 길 이사회에서 이사장직을 사임했다. “내 나이 75세면(1950년생), 죽음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노후 대책’이 아니라 ‘사후 대책’을 준비해야 할 때”라면서 “이후에는 선원 생활을 하면서 수행에 정진하겠다”고 밝혔다-
노후 대책이 아닌, 사후 대책을 준비해야 할 때라는 말마디에 공감이 갑니다.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친” 예수님 일화는 요한복음에 일곱 표징 중 세 번째에 속합니다. 어제는 두 번째 표징인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일화였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 벳자타라 불리는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 모습이 흡사 세상의 축소판처럼 생각됩니다.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로 가득했다 합니다. 벳자타 못 주변의 이 사람들은 그대로 꿈과 희망을, 빛과 길을 찾는 인간군상들을 상징합니다.
서른 여덟 해나 앓던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병자의 치유 받고 싶은 간절한 열망의 눈빛이 주님께 포착된 듯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 것을 들고 걸어갔다. 주님을 만나 치유 받음으로 운명의 질곡에서 탈출이자 해방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주님을 만남으로 육신의 치유와 동시에 죄를 용서받음으로 영혼의 치유 은총까지 받았으니 이제부터 절대 죄를 짓지 말라하십니다. 그러나 그자는 예수님의 당부를 까맣게 잊고 예수님을 밀고함으로 배은망적덕의 죄를 짓습니다. 노년에 병마와 힘겨운 전쟁을 치루는, 이제 약을 먹으며 은총으로 사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은총으로 사는 처지에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 사랑할 시간, 회개할 시간을 생각하면 죄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진짜 생명의 못, 치유의 못은 벳자타 못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수의 샘, 생명수의 강은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생명의 샘, 치유의 샘, 생명의 강, 치유의 강이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구상 시인의 <오늘>이란 시가 은혜롭게도 이런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관통하는 생명의 강, 치유의 강, 구원의 강, 진리의 강이신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성전의 샘에서 솟아나 세상으로 흘러가는 생명의 강이 상징하는 바 우리 구원자 예수님이자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생명의 강인 주님 미사의 강가에 심어져 깊이 뿌리 내린 우리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 있는지 깨닫습니다. 주님과 하나되는 미사은총으로 우리가 내놓는 주님의 신망애의 열매들은 이웃에게는 양식이 되고 약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에덴 낙원에서도 신기하게 물이 흐르고 무성한 나무들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제 생명수의 강은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살아있는 꿈이, 희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성전인(요한 2,21) 예수 그리스도의 몸, 곧 그분의 옆구리에서는(요한 19,34)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이 흘러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희생된 어린양의 천상어좌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니 바로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희망입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요한묵시 22,1-2).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모시는 주님이 끊임없이 흐르는 생명수의 강입니다. 생명수의 강이신 주님과 함께 생명수의 강이 되어 세상을 살리며 흐르는 강같은 삶이 되기를 바라며 바치는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은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주님과 함께
계속 한결같이 흐르는
사랑의 강, 생명수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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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전다운 성전>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돌아가신 백안젤로 수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이 사람, 사람 하는데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사람이지!’
이 말씀이 생각난 것은 ‘성전이면 다 성전인가, 성전이 성전다워야지 성전이지!’ 이런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은 ‘성전다운 성전’으로 잡아봤습니다.
성전다운 성전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신 성전이지요. 하느님께서 아니 계시면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도 성전이 아니고, 신자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성전이 아니지요.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춰 볼 때 성전이란 생명의 물이 넘쳐흐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또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생명의 물이 없고 그래서 죽어가는 공동체란 말입니다. 왜냐면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아무런 관심이 서로 간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환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았는데도 주님처럼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고 성전 물에 데려가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병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는 곳, 이런 곳이 사랑이 없는 곳의 대표적인 곳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이 없는 곳이란 관심은 없고 욕심만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상대는 내 욕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당연히 서로는 욕심의 희생자들이 될 것이고, 심지어 욕심 때문에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생명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설치겠지요?
세 번째는 관심도 많고 욕심도 많은 곳입니다. 이런 곳에는 사랑도 있겠지만 사랑만큼 미움도 많을 것입니다.
오늘은 너무 늦게까지 잠을 자 제목대로 강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이대로 올려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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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5,8)
<생명수!>
오늘 복음(요한5,1-16)은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유다인들의 축제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벳자타라는 못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으면서도 걸을 수가 없어서 치유의 샘인 벳자타 못으로 내려갈 수 없었던, 그래서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었던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참으로 우리 주변에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치유의 샘인 벳자타 연못에 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는 많은 병자들처럼, 지금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독서(에제47,1-9.12)와 복음은 '생명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는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주변에 있는 피조물들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물과 피를 쏟으신 십자가 생명수로 우리와 온 세상을 살리십니다.
죄인들의 속죄 제물이 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낮아지심과 내어주심의 사랑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면, 지옥 같이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너만을 바라보는 것을 잠시 멈추고,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보면서, 그리고 내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면,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형식이나 위선에 머물러 있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되지 말고, 모든 것의 본질이며, 모든 것을 살리는 생명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내가 먼저 다시 살아나고, 나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생명수가 되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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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02yn3geh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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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요한 5, 14)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건강한 삶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통해
배웁니다.
건강한 삶의
열망은 주님을
만나는 은총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오는
그 누구도
막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진심을
읽어주시며
건강한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건강한 삶이란
주님과 우리
우리와 주님의
합창처럼
또는
십자가처럼
고통과 실패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보는 것입니다.
건강한 삶
자체가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잔소리를 하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뜻이
서로 소통되길
바라십니다.
참된 소통은
희망과 치유의
불씨를 서로
끄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번 쓰고
버려야하는
일회용 물건이
결코 아닙니다.
선악의 갈등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오히려 내면적인
체험입니다.
하느님
체험이 없는 곳에는
지켜야 할
안식일의 규정만
무성할 뿐입니다.
건강한 삶은
정신을 차리는
삶입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아 누웠다
치유된 사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내적으로 병든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없는
우리가
병든
사람입니다.
따스한 마음으로
축하하고
기쁘게 함께
지낼 수 있는
건강한 우리들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건강한 삶이란
주님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죄가 아니라
건강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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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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