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싸움꾼 "시라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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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소니' 李聖淳(이성순).(1916~1983)
「시라소니」파란만장한 一生마친 李聖淳씨 (한국일보 83.1.28)
自由黨시절 폭력과 俠氣로 이름을 드날렸던 「시라소니」李聖淳씨가 6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닫았다.
풍운아의 말로에 어울리게도 그는 두칸짜리 전세방에서 무일푼으로 임조했지만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찬송가를 들으며 눈을 감을 수 있어
아늑한 善終이였다.
그의 사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1950년대의 정치적 폐허를 회상케 한다.
정치세력들은 民生의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이 정치문화의 빈곤속에서 직업폭력조직들이 정치세력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李丁載, 金斗漢등 아직도 국민의 기억에 생생한 폭력조직의 거두들이 정치세력에 의해 원격조종되고 있었고, 시라소니 李聖淳씨는 특히 李丁載일파에 맞서는 野黨系주먹의 최고봉이었다.
그가 벌였던 수많은 大會戰과 유혈극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단 1건의 전과도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그의 주먹의 선명性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그는 申翼凞, 張勉씨 등 야당계 지도자들에게 「그림자 경호」를 자원하기도 했다.
新義州에서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천성적인「俠氣」를 이기지 못해 정착생활을 마자하고 10대 시절부터 만주벌판과 중국대륙을 휩쓸고 다니며 발길질과 박치기로 싸움솜씨를 익힌 후 서울에 왔다.
1953년에는 당시 東大門시장 상인연합회 회장이던 李丁載의 사무실에 단신으로 나타나 『어이, 덩대. 월남 피난민들에 노점상을 마련해 줘야겠어.』라고 요구하다가 李의 부하들에게 도끼와 삽 등으로 집단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퇴원후에는 권총과 칼을 가슴에 품고 다닐만큼 生의 목표를 李丁載 제거에 두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돌연 복수와 유혈의 악순환에 대한 허무를 통감, 무기를 버리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의 권유로 폭력의 검은 손을 씻고 기독교에 귀의한 동료들도 많았다.
그의 영결식장에 온 그와 주먹으로 인연을 맺었던 옛 부하, 동료들도 初老의 모습들. 혼란스러웠던 한 時代의 잔영과 人生無常이 겹치는 순간을 「시라소니」는 주고 갔다.
시라소니 이성순(李聖淳)은 신의주에서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감격시대 주인공 시라소니 키는 180cm 거구이다.
그는 5.16혁명이후 이정재의 죽음과 함께 주먹세계와는 손을 끊었다.
지인들에 의하면 시라소니는 세간에 알려진대로 단구가 아닌 177쎈치미터 이상의 키 통뼈에 술과 여자는 가까이 하지도 않었다 한다.
시라소니 아들 이의현 목사의 말이다.
“아버지는 단순한 싸움꾼이 아니셨어요. 일제시대 때는 일본놈들을 혼내 주는 나름대로의 독립운동을,
해방 후에는 공산당 토벌을, 또 그 후에는 야당을 도와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10년 후쯤에 사정이허락되면 아버님을 주제로 다시 영화를 만들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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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李聖淳은 우리나라 주먹 1위로 공인받고 있다. 아니, 동양 제일의 주먹으로 치는 사람도 많다.
2위부터 5위까지야 사람들에 따라서 순위가 달라지겠지만 아마 주먹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주저없이 시라소니를 첫 손에 꼽을 것이다.
신의주가 고향인 이 불세출의 주먹은 한 마디로 싸움을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신화를 이뤄낸 사나이다.
그의 주먹경력은 크게 세단계로 나뉠 수 있는데
13세가 되던 해 싸움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점부터 약관 20세에 이북 최고의 주먹 박두성을 평양으로 날아 가
일거에 때려 눕힌 후 이북 최고의 주먹으로 인정받기까지가 그의 싸움경력 중 초기라 할 수 있겠다.
이 당시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13세 이후부터 20살이 되기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두세번 정도 신의주와 인근지역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싸움경력이 싸움꾼의 요소 중 가장 첫손에 꼽히는걸로 봐서 그 당시 그는 이때가 수련기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 후 중국으로 날아 가 대륙을 평정하던 시절을 중기로 볼 수 있는데,
20살부터 시작 해 30살 무렵까지 말 그대로 날고 긴다는 일급주먹들만 때려 잡아 그의 성과를 높였다.
이 당시 중국에는 이북에서 손 꼽히는 주먹들도 대거 진출했는데 시라소니 만큼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 했다.
대개 한곳에 정착 해 그 지역으로 들어오는 주먹들만 상대하며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시라소니는 대륙 전역을 떠 돌며 이름있는주먹들을 직접 찾아 가 때려 눕혔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 시기야말로 시라소니를 이야기 할 때 그의 주먹인생 중 최고 전성기라 말 할 수 있겠다.
중기를 거쳐 고꾸라 형무소에 복역 중 일본의 주먹들도 차례로 제압 한 후 그는 월남을 하는데 당시 서울에는 다들 알다시피 이정재,
이화룡, 김두한등 소문난 주먹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대륙에서의 무용담에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허풍까지 씌워 져 시라소니는 월남하자마자 신화적인 존재로 주먹들 사이에서
오르내린다.
그에 걸맞게 그는 월남하자마자 맨발대장과 마사이찌 고영묵을 때려눕히며 화끈한 신고식을 펼친다.
결국 너무나 유명한 동대문의 린치사건으로 인해 (아래 동영상 참조)불구 직전까지 가지 만
그 후 장면박사의 요짐보(경호원)로 활동하다 주먹계에서 영원히 손을 씻었다.
시라소니에 대한 평가는 주먹계에서 더욱 높이 쳐 주었는데 유지광은 그의 저서에서 역대최고의 싸움꾼으로
그를 거론했으며 만화가 방학기씨는 그의 책에서 싸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나이라고 평가했었다.
주먹꾼은 아니지만 주먹역사에서 빼 놓을수 없는 연예계의 대통령 임화수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극장 조라치 시절 지나가다 우연히 그의 신기에 가까운 싸움실력을 본 그는 이후 출근도 하지 않은 채
매일 시라소니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고 하고 동대문파의 원로격인 김사범은 그를 가리 켜
조선의 주먹을 뛰어넘어 동양 최고의 주먹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시라소니 복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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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야인시대' 에서 동대문 이정재 사단의 함정에 빠진 시라소니
위 사진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명동을 걷는 '시라소니', 그리고 그의 부음을 전하는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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