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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30]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루카 13,22-30
그때에 22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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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주제] : 수요 묵상 <독서 : 로마 8,26-30 / 복음 :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십자가 없는 부활, 값싼 신앙(본회퍼)을 구하는 요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다.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해도, 주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문을 닫아걸고,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그러니 신자라고 해서, 사제라고 해서 구원이 보장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야고 2,26)
성인 • 성녀들은 고통과 어려움, 가시관과 십자가를 즐겨 찾고 기꺼이 지려 하였다. 그분들은 믿음을 능동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동적인 실천도 있다. 고통과 어려움, 가시관과 십자가를 먼저 찾아 나서지는 못하지만, 삶 속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회피하지 않고 참아 받는다면 그것도 훌륭한 믿음의 실천이 된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배우자에 대해, 가족과 공동체, 본당, 수도회에 대해 느끼는 실망에 넘어지지 않고, 자신의 무능함과 실패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고 마음을 드높여서 주님께 향한다면 그것도 훌륭한 믿음의 실천이다.
오늘도 나에게 다가오는 한계상황들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로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이고 싶다..............◆
[말씀자료 : 정제천 신부] |
[다해] 연중 제30주간 수요일(2013-10-30) I 묵상기도방 |
시작기도 : ▷
주님,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참으로 사랑은 절제하고 참아주며 믿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제게 그러하셨듯이 저도 저 자신을 그리고 다른 이들을 믿고 참아주며 기도로 함께하게 하소서. 진실한 사랑을 서로 전하게 하소서. |
오늘의 기도지향 : 소년소녀 가장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상한 인도자이신 하느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부모님을 대신하여 가정을 꾸려 가는 어린 자녀들을 돌보시어 인생을 희망하며 낙관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당신의 섭리로 많은 도움의 손길을 펴시어 세상에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 [다해]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루카 13,22-30
그때에 22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영적독서 :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 것
가장 보잘것없는 일을 충실하게 하십시오.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뜻인 위대한 일을 위해서 말입니다. 나는 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빛나는 행위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 뒤 나머지는 하느님 손에 맡겨드리고 노력의 대가에 대한 모든 욕심을 말끔히 내던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라는 선물, 곧 당신이 하는 행위마다 쏟아 넣은 사랑의 정도입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실패에 대해서도 상심하지 마십시오. 성공했다고 자랑하지 말고 모든 영광을 마음 깊이 감사하며 하느님께 돌리십시오. 당신이 실망한다면 그것은 자만의 표시입니다.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에 애태우지 마십시오. 겸손하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마더 데레사,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영,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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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30주간 수요일(2013-10-30) I 복음묵상방 |
성령께서 영광에 이르기까지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시고 기도 안에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 청을 거절하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좋은 것을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대로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어 마지막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제1독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길에서 구원받을 이들의 수가 얼마 안 되리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구원될 사람이 많을지 적을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며,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내침을 받고 이방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복음묵상-1> : † 단죄와 구원의 기준은?
루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발걸음은 이미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9,51) 예루살렘을 향한 이 여정은 여행이긴 하지만 소풍도 아니고 관광여행도 아니다. 대부분 갈릴래아 지방 출신의 제자들을 서울구경 시키려는 수학여행은 더욱 아니다. 멀지 않아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고도 두 번씩이나 있었고(9,22-27; 9,44-45),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로 말미암아 우회로를 택해야 했던(9,56) 고충을 감안한다면 이 여행이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걸음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굳세기만 하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그 도중에 마치 어느 곳도 빼놓지 않으려는 의도로 여러 동네와 마을에 직접 들러 가르치셨다고 전한다.(22절) 세상의 심판과 구원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루가가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종착역이 될 예루살렘으로의 상경을 재차 강조하고,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을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23절) 하고 묻는다. 이 질문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관한 것이다. 동시에 질문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적을 것이라는 걱정을 은근히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숫자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에 ‘좁은 구원의 문’을 언급하셨다. 이 말씀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실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묻기보다, 묻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숫자보다는 좁은 구원의 문을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다.(24절)
여기서 노력한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회개는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 회개를 마지막 시간으로 미룬다는 것은 위험천만의 발상(發想)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은 좁을뿐더러 문이 닫히고 나면 다시는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의 문이 한번 닫히면,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뇌물이나 억지는 물론, 끈덕진 요구도, 면식(面識)도, 친분(親分)도 통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심판에서 단죄와 구원을 판가름하시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구원의 문에 들지 못한 사람은 모두가 ‘악을 일삼는 자들’로 치부된다.(27절)
여기서 심판의 기준이 악행(惡行)과 선행(善行)임을 알 수 있다.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과 평소에 식사를 함께 한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것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선(善)을 따라 행동했느냐 않았느냐는 것이다. 줄을 잘 선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선(善)과 정의(正義)를 따라 실천하는 것이 구원받음의 조건이다. 구원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예수께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23절) 하고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힐 수가 있다. 그들은 자기들 소수만이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래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꼴찌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30절)
성조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잔치에 이미 들어 있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허락 받았으나, 그들 자신은 정작 문 밖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문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당장 회개하는 사람이며, 회개의 표로 선(善)을 행하고 정의(正義)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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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2> : † 좁은 문, 험한 길
지금 우리 교회는 마치 묵시록에 나오는 라오디케이아 교회처럼,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가련한 처지입니다.(묵시 3,17)
신앙의 본질을 망각한 천박한 상업주의, 승리주의, 물량주의, 근본주의, 기복주의가 득세를 하고 있고, 일부는 정치권에 기생하며 세상적 권세를 누리고 있건만, 이에 대한 뼈아픈 회개와 자성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선교 200주년,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에 유례없는 성장을 항상 자랑해왔습니다. 종교적으로 풍년이라면 대풍년이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뿌리 얕은 나무란 바람만 조금 거세게 불어도 대번 뽑혀 넘어가고 마는 법입니다. 뿌리를 튼튼히 착근하지 못한 상태에서 몸집 부풀리는 것에만 정신없던 한국교회가 지금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본래 강둑이 넓으면 넓을수록 거기 흐르는 물은 온갖 오폐수가 합류하기 때문에 더럽고 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샘이라 하여도 너무 얕으면 깨끗한 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 반드시 깊은 샘이라야 맑고 깨끗한 생수를 얻습니다. 무분별한 성장보다 질적인 성숙이 더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숫자나 힘으로 밀어부처서 될 것이 있고 안 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산업혁명시기가 아니기에 기업들도 주로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와 입맛에 부응하기 위하여 한꺼번에 많이 생산하지 않고 적게 여러 종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정부도 작은 정부를 자처하고 대기업도 살아남기 위하여 되도록 적절히 나누고 쪼개어 효율을 높이려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큰 교회, 큰 회사, 큰 나라, super power(초강대국)라고 하는 외부의 현상적 조건들이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영혼의 공백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느냐는 문제가 매우 중요해진 상황입니다.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지적하는 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분별한 성장지상주의는 비능률, 환경오염, 비인간성을 불러와 본래 추구하던 행복을 결코 주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지요.
당연하겠지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공개강연과 두 세 명의 학생들과 함께하는 대학원 수업은 그 내용상 질적 수준에서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규모의 논리를 말할 때 어느 정도가 가장 적정한 수준이냐는 어려운 문제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몸집이 너무 클수록 본래의 추구하던 가치와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대중들을 상대로 하느님 나라운동을 펼치셨지만 그렇다고 자기에게 몰려든 군중들에게 몸을 의탁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표징을 보고서 그분을 믿고 따랐지(요한 2,23-4) 예수님의 가르침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군중들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금방 싹이 나더라도 흙이 깊지 않기 때문에 해가 뜨기가 무섭게 뿌리가 말라 죽을 운명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자기에게 몰려든 수많은 군중들의 인기에는 조금도 연연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에 실망하고는 썰물 빠지듯 자신을 떠나갔어도 여기에 굴하여 타협하거나 좌절하는 법이 없으셨지요. 오로지 성부 하느님께 자신의 뿌리를 두고서 그분 앞에서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셨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소수자’가 되기를 두려워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좁은 문과 험한 길을 통과한 사람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지, 넓고 편안한 길, 남들 다 가는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말씀이지요. 어찌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식으로 너무 극단에 치우친 흑백논리 같이 보일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라고 하면 듣기도 좋고 속도 편할 텐데 “생명과 죽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다그치시는 것 같아 평소 온유하고 사랑 많으신 예수님답지 않은 말씀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자처럼 중용의 도를 강조해 가르치신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의 말씀 중에 과격하고 극단적인 경우가 이 구절만이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으시고 분명한 선택을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과격한 성향이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도록 만드는 데 상당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설교 끝부분에 이르러서야 이 말씀을 던지고 계심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명기서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가 하였던 발언과 유사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이것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에 들어가는 생활은 산상설교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고, 죽음에 이르는 것은 산상설교를 지키지 않고 거스르는 생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에 이르는 문은 찾고자 힘쓰는 사람이 적다고 했는데, ‘힘쓴다(찾는다)’는 표현은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다 이 좁은 문을 통한 험난한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좁은문’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하느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들이 무작정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마태 16,24)고 하셨지 “십자가를 타고 오너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자신들의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고 믿음을 지키라고 권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14,22)라는 말씀을 들려줍니다.
루카복음서에 나온 병행 구절(루카13,23절 이하)에서 우리는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라고 합니다. “힘써라”는 말이 첨가되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들어가고 싶어도 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지요.
그런데 밖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조르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간곡히 요구하지만 집 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라며 그들을 내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문을 열어달라고 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던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한때 예수님을 가까이 모신 적도 있고 그 분의 가르침을 듣기도할 정도로 제자단에 속한 생활도 하였던 사람들로 보입니다.
다시 마태오복음서 기술에 따르면, 그들은 한때 하느님의 예언자로 일하면서사도직(예언, 신유, 축사, 기적)까지 행했던 자들입니다. 종교적 업적이 상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눈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야박하게도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하고 단호히 물리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이 다가올수록 종교 사기꾼들이 판을 칠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 하신 바 있습니다. 양의 탈을 쓴 굶주린 이리떼나 다름없는 거짓 예언자들을 잘 살펴서 그들의 지도를 받지 말고, 그들과 같은 삶을 살지도 말라는 당부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 때문에 위기를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을 가지고 혹세무민하는 종교 장사꾼들이 하도 설쳐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외면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겨울을 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깊은 뿌리를 내리도록 부단히 힘써야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참 신앙인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처럼 참 사람이 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예수를 따라 섬기며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맙시다.
줄서기를 하여 남들이 앞 다투어 가는 넓고 편한 길이 아니라, 험난하고 좁은 길, 남들이 잘 발견하지 못하는 길을 택해서 힘들더라도 함께 걸어갑시다. 얄팍한 유행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 됨이 무엇인지를 더욱 진지하게 묻고,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도록 부름 받았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신앙의 오솔길을 걸읍시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머무는 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맡겨진 무거운 멍에를 기쁨으로 알고 가볍게 어깨에 메고 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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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