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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절)
심리학에 ‘학습된 무기력증’이라는 증세가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을 동물에 적용하면 ‘길들여져서 무기력해진다.’는 것입니다. 태국이나 인도 등지에서 몸집이 아주 큰 코끼리를 길들여서 집안에서 일도 시키고 심지어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벌목하는 사람들이 큰 목재를 운반하는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이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야생 코끼리를 잡아다가 발에 쇠사슬을 묶어 말뚝을 마당에 박아놓고 고정시킵니다. 처음에는 코끼리는 도망을 가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발에서 피가 날 정도로 힘을 쓰며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체념을 하고 맙니다. 그 후에 코끼리가 잠잠해지면 쇠사슬을 풀어주는데 자유의 몸이 된 코끼리는 아직도 자기가 말뚝에 매여 있는 줄로 착각하고 말뚝 주위를 빙빙 돌면서 떠나지를 못합니다. 탈출하겠다는 생각이 무기력해진 것입니다. 드디어 길이 들여진 코끼리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온순해진 상태로 변하고 맙니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로 패배와 절망에 학습된 무기력증 환자가 많습니다. 요즈음 시대에 나타난 특별한 징조가 바로 노숙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활동력이 있지만 사회 활동에 무기력해져서 일을 할 엄두도 못 내고 구걸하여 먹고 사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승리를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승리란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과 같이 승리를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 승리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가난했기 때문에 이미 정신적으로 비굴한 사람이 되어 버려 부자가 될 생각도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정신까지 완전히 실의에 빠져 영원한 병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나중에는 실패를 나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완전히 좌절된 체질로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방탕과 타락은 절망의 부작용입니다. 이것은 더욱 무서운 파멸로 인간을 몰아갑니다. 이렇게 완전한 절망 속에 빠진 사람은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포기해버린 사람은 다른 사람이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환난과 풍파와 시련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는 사람은 마침내 놀라운 승리의 감격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세계인의 스포츠 제전인 동계 올림픽 경기가 중국의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거기 스노우보드 경기에 출전한 한 소녀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당뇨병 환자였습니다. 체내에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장 기능이 처음부터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하자마자 병원에서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했습니다. 아기 때부터 몸에 인슐린 주사약을 꽂고 젖을 먹을 때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주사약을 투약하며 살았습니다. 이 아이에게는 운동이 필수였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운동이라도 해야 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보드였습니다. 처음에는 땅에서 보드를 탔지만 눈 위에서 보드를 타는 경기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그녀는 스노우보드 경기를 선택했고 죽기로 연습한 결과 몸에 인슐린 주사를 꽂은 채로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베이징으로 날아온 것입니다. 아직은 20세 초반의 어린 나이지만 자신의 병에 대해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강력히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엄청난 모범을 보여 주시고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역경이 계속되고 환난과 고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눈앞에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고백적인 승리, 영적인 승리를 선포하십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마침내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든 승리를 구현하시고 마침내 이루신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를 거두실 뿐만 아니라 우주적 승리를 구현하십니다. 이 본문을 두고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경탄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무릎을 꿇고 기어가면서 운반할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내가 세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나는 세상을 이겼다. 왜냐하면 내가 죽으므로 제자들에게 예수 안에 있는 평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하늘의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평안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그 어떤 환난이나 시련도 두렵지 않고 당당히 맞서며 살아갑니다. 결코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언제나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세계적인 문학자가로 이름을 날리며 노벨상을 받아 많은 사람의 존경과 추앙을 받은 미국의 대 문호 헤밍웨이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감명을 주었던 사람이 자신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버립니다. 그는 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어둡고 고독하다.’ 그는 어둡고 고독하다고 말합니다. 자기 주위에 그렇게 사람이 많이 있는데도 절대 고독 속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흑암인 죽음으로 내몰립니다. 그는 인생의 승리자가 아닌 패배자인 것입니다. 인생의 승리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는 출세입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억만장자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까. 이런 것들도 인생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반드시 승리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인생의 최고의 승리는 그리스도의 평안을 받아 내 영혼이 하나님의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환난’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말론적 재난으로 인한 시련입니다. 또 하나는 복음으로 인한 박해와 시련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성도들에게 나타난 환난은 크게 이 두 가지 고통입니다. 이것은 현실로부터 오는 것도 있고 영적으로 오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든 간에 하늘나라에 속한 성도에게는 환난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세상 나라의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결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사탄의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성도들은 사탄과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거부를 당하는데 이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환대를 받고 저들과 동화되어 어울리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환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 환난이 승리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고 절망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난이 닥칠 때 절망과 슬픔과 고통의 심연에 빠지기가 일수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환난을 이길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환난에 직면했을 때 말씀에 의지하여 주를 바라보고 주를 소망하여 지혜롭게 대처하기 때문에 능히 환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다가오는 환난은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환난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감사한 것은 최후의 승리가 보장된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 앞에서 담대해야 합니다. 환난이 우리의 믿음을 꺾고 영혼을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넣도록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환난이 우리를 피곤하게 할 때 우리는 찬양하며 기도하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극심한 환난을 당했을 때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져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이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에게 큰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고난도 함께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자신을 건지실 것을 확신했고 또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환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였습니다. 우리가 자주 불렀던 복음성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리라. 나는 부족해도 나는 약해도 주님 도와주시니 의심 말고 두려워 말라. 기적이 일어난다. 말씀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할 수 있다 해보자. /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리라. 믿음 가지고 꿈을 가지고 주님 바라보아라. 성령님이 도와주신다. 좋은 일어난다. 말씀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할 수 있다. 해 보자. /
할 수 있다. 해 보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리라. 기도하면서 찬양할 때에 주님 함께 하신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기적이 일어난다. 말씀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할 수 있다 해 보자. 말씀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할 수 있다 해 보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은 선포요, 간증이요, 고백이요, 약속입니다. 주님은 마음속에서, 영혼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미 실제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다 보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겼다고 선포하십니다. 승리의 선포가 먼저 있고 승리의 실제가 그 뒤를 따라옵니다. 주님의 승리는 우연이 아닙니다. 먼저 승리를 확신하고 선포하고 승리를 쟁취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하나님의 나라 즉 타락하고 죄로 오염된 사탄의 왕국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이 인본주의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의와 진리와 생명과 자유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거짓과 위선과 교만과 분쟁과 술수가 만연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상’ 이라는 말을 열아홉 번이나 하셨습니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17: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그렇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귀한 뜻이나 선한 목적을 수용하지 못하는 그런 곳입니다. 소중한 메시야의 역사를 이루고 있지만 세상은 예수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영접해 주지 않습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땅에, 자기 백성에게 오신 하나님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영접은 하지 못해도 이해는 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거부합니다. 아무리 깨닫는 말씀을 선포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선한 일을 너무나 많이 하셨지만 여전히 비난과 오해와 음모뿐입니다. 나아가 핍박과 환난과 고통이 주님을 괴롭힙니다. 참으로 불의와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마저 주님을 떠납니다. 그 아픔 속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이 말씀이 요한복음에는 한 번 만 나오지만 요한 계시록에는 열일곱 번 나옵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승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승리는 모든 것을 버리는 망각도 아니요 해탈도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문학적 소양이나 도덕적 양심은 더욱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승리는 역사적 사건이요, 우주적인 사건이요, 분명한 현실적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승리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살아남아야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승리요, 영생이 승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승리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승리는 영광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을 얻었다고 해서 승리가 아닙니다. 남을 속이고 기만하고 무력으로나 힘으로 빼앗았다고 해서 승리가 아닙니다. 지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지방을 침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수만 명의 군인들을 그곳에 집결시키고 전쟁 무기들을 배치했습니다. 전운이 감돌고 일촉즉발의 위기로 인하여 미국과 유럽과 세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국제 증시는 떨어지고 유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합니다. 러시아의 욕심 때문에 우리들의 경제에도 큰 타격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토록 남에게 피해를 주고 쟁취한 승리가 과연 진정한 승리이겠습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지중해 연안의 출로를 얻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려는 저들의 만행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란 얻었느냐 잃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이냐 영광된 것이냐, 의로운 것이냐 불의한 것이냐,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의와 선은 항상 영광을 수반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자랑스럽지 못한 것은 패배입니다.
몇 해 전에 미국에서 백인 경찰들이 음주 운전을 한 흑인을 무차별 난타했고 이 일이 인종차별이라는 문제로 확대되면서 흑인들의 거대한 폭동이 있어났습니다. 마침 그곳은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한인촌 지역으로 성난 흑인들은 백인들 대신에 한인촌에 몰려들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습니다. 흑인들이 한인촌을 공격한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죽도록 수고하고 고생하여 만든 한인촌이 불시에 폐허가 되었고 한국인들은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다 잃고 망연자실했지만 미국 경찰들은 관심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백인들 부자촌만 경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민들은 미국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힘을 합쳐 민병대를 조직하고 300명이 넘는 남자들이 무기를 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무장한 흑인들을 상대로 도시를 지켰습니다. 한국 남자들은 모두 다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에 용감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적과 대치하여 총을 쏘면서도 살상은 하지 말자고 결의하고 사람을 피해 공포를 쏘면서 며칠을 싸웠습니다. 마침내 흑인들이 물러가고 전투는 끝이 났습니다. 흑인들의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튿날 한국인들은 거리로 나왔습니다. 흑인촌을 향하여 무기를 들고 공격한 것이 아니라 손에는 빗자루와 삽과 청소도구가 들려 있었습니다. 다 같이 쓰레기를 치우고 거리를 깨끗하고 정리했습니다. 청소도구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는데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무차별 만행을 저지른 흑인에게 보복하지도 않았고 야비한 백인 경찰이나 시민들을 욕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흑인 폭동을 ‘폭동’이라는 말도 쓰지 않고 다만 ‘평화’를 외쳤던 것입니다.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재물이나 인명에 대한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행진에 흑인들이 참가하기 시작했고 백인들도 나와서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다같이 ‘평화를 원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때 모인 행렬이 무려 10-20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되었고 한국 교민들에게 뜨거운 찬사를 보냈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구호금이 모아졌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후원 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한국인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던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승리’란 영광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자랑스러운 일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승리는 자유입니다. 근심과 걱정과 어두움과 모든 것에, 불가피한 것에 전혀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무한한 자유를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비난을 해도 그것이 나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씌워도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넘어지고 자빠져도 쓰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육신이 감옥에 갇혀도 내 영혼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바울이 차디찬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에 그가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영혼에 자유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한 사람은 다 잃어도 다 빼앗겨도 그 마음에 무한한 자유를 향유하게 될 때에 비로소 승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승리는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한 번 이겼다가 그 다음에는 지고마는 그런 것은 승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권투 시합을 할 때에 한 방의 펀치로 상대를 링 바닥에 때려눕히고 심판이 열을 셀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면 ‘KO'선언을 하고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립니다. 승리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승리라기보다는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 게임에서 영원한 승리란 없기 때문입니다. 넘어졌다가 일어날 뿐입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전쟁을 치르고 나서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 깃발을 하나 꽂아놓고 승리했다고 만세를 부릅니다. 그것도 승리는 아닌 것입니다. 다 죽이고 다 부수고 다 망쳐놓고 무슨 승리입니까. 적군이 그만큼 죽었으면 아군 역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쌍방이 다 큰 피해를 입고서야 누가 승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상방이 참패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승리는 화평입니다. 주님께서 내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승리는 곧 평안입니다. 살롬입니다. 평화가 승리요 고요함이 승리요 싸움이 없는 것이 승리입니다.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고 패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승자는 거친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을 돛을 위한 에너지라 생각하고 패자는 거친 바람이 불 때 돛을 내린다.’ 미국의 실업가들이 입버릇처럼 외치는 구호가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3C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chance (찬스) 기회를 포착하라는 것입니다. choice (초이스) 선택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challenge (첼렌지)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찬스도 중요하고 선택도 중요하지만 도전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승리를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향하여 도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도전장을 내신 것입니다. 또한 그 고난의 의미를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든 도전을 하든 그 의미를 알고 행해야 합니다. 목적도 의미도 깊은 하나님의 뜻도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승리는 영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승리는 승리가 아닙니다. 육신적인 것에는 온전한 승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지금 눈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있는 부활을 보십니다. 다가올 영광을 보십니다. 장차 천하 만민이 주님 앞으로 오게 될 구속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요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복잡하고 답답한 현실 다음에 있는 세계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마음은 벌써 거기에 가 계십니다. 이것이 참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초월적 사랑과 믿음을 바로 보고 계십니다.
*요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조금 후에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갈 것입니다. 부인할 것을 다 아시고 예언도 하셨고 경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실을 보시지 않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고 있고, 나를 믿고 있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나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순교하게 될 것이다. 즉 제자들의 사랑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믿으셨고 제자들의 믿음도 믿으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이들의 장래를 믿는 것과 유사합니다. 아이들은 말썽을 피우면서 자라납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 유행했던 말이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무슨 말입니까.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속을 썩이고 공부도 잘 안하고 가출도 하고 무던히도 애를 먹입니다. 그러나 건강만은 꼭 지켜달라는 부모의 당부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부모의 뜻을 이해할 것이고 자기의 길을 바르게 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이나 환난 때문에 자신의 소신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본래적인 목적 그것만을 생각하셨습니다.
*요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 세상에 왔지만 다시 하나님께로 가신다고 합니다. 지금 복잡한 사건이 좀 있기는 하지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무슨 목적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이제 그 목적을 이루었다면 아버지께로 도로 가야 합니다. 주님은 본래적이고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명을 크게 생각하시고 그 외에 일어나는 십자가 사건이나 비난과 고통에 대해서는 초연하십니다. ‘왔다가 가노라’ 이것이 승리의 길입니다. 이 승리의 길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십니다. 결코 주님 홀로 걸어가신 길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다 흩어지고 달아나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담대히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인천 자유공원에 올라가면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이런 비문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맥아더 장군의 좌우명이었습니다. ‘There,s no substitute for victory' '데어 노 섭스티투드 포 빅토리’ ‘승리에 대신할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절대적 승리요, 은혜의 승리요, 사랑의 승리요,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약속받은 승리, 그 승리를 안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은 싸움입니다. 사망과 싸우고 거짓과 싸우고 증오와 싸우고 절망과 싸웁니다. 불신과 싸우고 교만과 싸웁니다. 싸움에 승리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승리 이외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승리하신 주님을 믿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따르고, 승리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 그 안에서 살 때에 진정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그 승리자에게 주님의 평강이 충만하게 임할 것입니다. 이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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