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아래 Where R U God 님께서 쓰신 '하느님이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되도록 허락한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글을 읽고 이 글을 한번 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 카페에서 비슷한 취지의 글이나 댓글을 많이 봤었죠. 증인 시절, 대속 교리는 참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는 더 어려운 교리였습니다. 저도 똑같은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왜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되는 것을 막지 않았는가?” 주변의 여러 영적인 형제들과 토론을 해 보고 그 똑똑하다는 지부 위원 정*영 형제를 찾아가 같은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이런 대답뿐이었습니다. "그런 거 자꾸 생각 하다가는 정신병에 걸린다." 이게 지부 위원이 할 소리인지... 그래도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08년부터 5년 동안 계속 기도하고 묵상하고 "대속"을 검색해 나오는 모든 자료를 읽어본 끝에 2013년 7월 29일 드디어 답을 얻었죠! 그 당시는 정말 기도의 응답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간의 인지 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지만요. 어쨌든 저는 그 답을 얻고 나서 믿음이 뿜뿜하여 더 심각한 광신도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워치타워 출판물에 거의 다 나옵니다. 관련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지 않고 온 데 다 흩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이죠. 그리고 몇몇 연결 고리는 아예 나오지도 않아서 묵상으로 메워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부 위원도 모르는 것이죠. 제 생각에는 중앙장로회나 심지어 집필부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모으면 하나의 그림이 나와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경전주의라는 바둑판에서 내려온 저에게 대속 교리는 그저 성경 속의 하나의 우화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올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도 워치타워 교리나 성경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렇게 할 때는 언제나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내가 그 교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공격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지요. 그 교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나서 그 허점을 찾아내 공격할 때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요. 또 하나는 이게 사실 여부를 떠나서 꽤 재미있는 교리입니다. 우리가 허구적인 SF나 역사 영화를 볼 때에도 그 스토리와 세계관이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가, 얼마나 탄탄한가를 보지 않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 온 인류를 구원한다는 개념은 많은 영화에서 채택하고 있는 클리셰이기도 하지요. 오늘은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한 선인先人이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이후 모든 인용문은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발췌한 것이며, 인용문 내 글자색은 제가 임의로 넣은 것입니다.) 때는 1878년이었습니다. N. H. 바버Nelson Homer Barbour는 「아침의 전령」Herald of the Morning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고,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날아가게 만든 원흉 C. T. 러셀Charles Taze Russell이 그 잡지의 부편집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충돌은 「아침의 전령」 1878년 8월호를 발행하면서 발생하였습니다. 제임스라는 아이가 여동생을 괴롭혀 죄를 지었습니다. 이때 부모는 파리 한 마리를 잡아 몸을 꿰뚫어 벽에 박습니다. 파리의 숭고한 희생으로 제임스의 죄가 없어질까요? 그와 비슷하게,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때 하느님은 예수를 죽게 합니다. 예수의 숭고한 희생으로 인류의 죄가 없어질까요? 러셀은 그 문제에 관하여 성경을 사용하여 바버와 함께 추리하려고 반복적으로 노력하였지만 성과가 없자, 결국 그와 결별하고 그 잡지에 대한 지원도 중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879년 7월에 자신만의 잡지를 창간하게 되죠. 바로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Zion’s Watch Tower and Herald of Christ’s Presence입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그 망할 「파수대」의 전신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버의 논리가 너무나 맞는 말이지만, 그 말이 맞다면 그 뻔한 것을 우리는 왜 그렇게 열심히 믿었던 것일까요? 우리가 멍청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워치타워도 나름대로 성경이라는 토대 위에 복잡한 교리 체계를 구축하였고, 우리는 그 속에 있다 보니 그게 튼튼한 건물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경전주의라는 부실한 기초 위에 있었지만, 건물의 각 부분은 너무나 잘 짜여져 있었던 거죠. 그게 얼마나 잘 짜여진 세계관인지 이제부터 조금씩 풀어 보고자 합니다. 증인 시절 저의 최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대속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대속에 관한 23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이라는 50페이지짜리 글을 요약해서 탈증인의 언어로 시리즈로 올려 보겠습니다. 저의 믿음의 엔진에 폭발적 에너지를 선사했던 니트로 같은 대속의 메커니즘을 배교자(!)의 시선으로 풀려고 하니 저도 좀 설레네요. (나중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표현은 “치르는 값”이라는 표현이다. 여기에는 무언가를 희생하는 것이 관련된다.) |
A: 역사와 신학과 신앙은 다르다. 예수는 왜 처형되었는가 ? ▷ “예수는 왜 처형되셨는가?”라는 질문은 “예수님은 왜 죽었는가?”라는 질문과는 좀 다른데, 제목 자체에 어떤 의도가 담겨있는 것 같군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왜 처형되셨는가?”라는 질문은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는 가?”라는 질문과 ‘분명히’ 그리고 ‘매우’ 다릅니다. 이는 영어의 “die”와 “be killed”의 차이점과 같습니다. “die”가 “죽다”라는 뜻이라면 “be killed”는 “죽임을 당하다”는 뜻 입니다. 예수님은 석가모니처럼 천수(天壽)를 누리고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30대 초 반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을 했습니다. 그것도 질병이나 사고 때문이 아니라, 십자 가에 처형되었기 때문에 요절을 했습니다. 제가 10강 제목을 “예수님은 왜 처형되셨 는가?”라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 ‘처형을 당했든’ 또는 ‘죽었든’ 예수의 죽음은 ‘대속’(代贖)과 ‘속죄’(贖罪)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예수님 생애의 목적 자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즉, 십자가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온 것입니다. 또한 십자 가는 예수 자신의 목적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한 것이었다고 믿어왔습 니다.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 다”(요 3:16). 니케아 신조 역시 십자가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으로서 구원 을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 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참 사람이 되시며, 본 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죽으시고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자신도 생의 목적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그 대답은 “Yes”입니다. 복음서들은 십자가를 그의 소명에 필수 적인 것으로,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예언의 성취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 가복음은 예수께서 생애 마지막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세 차례 에 걸쳐 수난을 예고하신 것으로 보도합니다: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 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 나야 합니다”(막 8:31; 9:31; 10:33-34). 여기서 “반드시”라는 말은 ‘필연성’을 가리킵 니다. 예수는 그것을 행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 미리 말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는 뜻입니다.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에 의하면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를 향해 함 께 걸어가던 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 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눅 24:26) 더 나아가 그것이 이미 성경 에 기록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 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 니다”(눅 24:25.27). 예수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의 서신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물려받은 전승을 요약하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도 전해 받은 중 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고전 15:3). 이런 말씀들에 비추어볼 때, 십자가를 예수의 생애의 목적이었다고 이해해왔던 것 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 자신도 십자가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였을까요? 아니면 이런 생각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부활절 이후에 생각해 낸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다른 말로는 ‘대속’(代贖)적인 죽음이라고 합니다. ‘대속’(代贖)이란 말은 원래 “남의 죄를 대신하여 당하거나 속죄 함”이란 뜻인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그 보혈 (寶血)의 공로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이라는 뜻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속죄론’(贖罪論)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론은 일종의 신학(神學) 입니다. 크로산(Crossan)은 ‘역사’(history)와 ‘신앙’(faith), 그리고 ‘신학’(theology)을 구분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경우, 역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어 돌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는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문헌에도 등장합니다. 또한 이것이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 아닌데, 예수의 첫 추종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창작해 냈으리 라고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유대의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복음서들 안에 나오는 수난 이야기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역사적으로 훨씬 신빙성이 결여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마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막 14:36)라고 기도하셨다고 보도합니다. 그런데 마가에 따 라면 당시 이것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는 약간 떨어진 곳으로 나 아갔으며 제자들은 모두 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막 14:35.37 참조). 다시 말해서, 마 가의 이야기 자체에 따르면, 예수께서 무슨 기도를 하셨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습 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체포되기 직전에 기도하셨을 것이고, 그 기도의 내용은 위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기도 내용을 직접 듣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의 내용은 ‘상상’을 통해 창작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수난 이야기는 소위 “fac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fact와 fiction의 합성어인 faction은 “사실에 기초했으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된 이야기”를 뜻합니다. 수난 이야기의 경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나머지는 상상력과 역사화된 예언(prophecy historicized)에 의해서 재구성되었다는 것이 주류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입니다. 주류 신학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는 해 석을 모든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지만 이런 관점은 십중팔구 부활절 이후의 회고적인 해석(retrospective interpretation)이라고 봅니다. 이렇듯 주류 신학자들이 마가복음의 수난 예고들을 부활절 이후의 창작이라고 보는 이유는 수난 예고와 실제 수난 이야기 가 매우 세부적인 면에서까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죽 음이 그 추종자들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으며 저들의 희망을 산산조각 낸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만일 예수께서 자신의 임박한 처형에 관해서 그토록 분명하게 말 했다고 한다면 이런 충격은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따라서 수난 이야기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보았다 는 보는 것은 비약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 이 예수께서 갑자기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십중팔구 예수께 서는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한다면 처형당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자신의 스승격이었던 침례자 요한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결국에는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몰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상했다는 것과 예수께서 십 자가를 자기 삶의 목적 자체로 이해했다고 것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 그렇다면 ‘대속(代贖) 신앙’과 ‘속죄론(贖罪論)’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앞서 밝혔듯이 예수께서 유대의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 형되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그 역사에서 ‘의미’(meaning)를 발견해 냈습니다. “예수 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대속 신앙’(redemption faith)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편 신학은 이를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이라는 ‘속죄 론’(atonement theology)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즉, ‘십자가 처형’은 역사(history)이고, ‘대속 신앙’과 ‘속죄 신학’은 그 역사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바탕에는 죄를 처리하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치던 유대교의 제사의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속 신앙’과 ‘속죄 신학’ 은 유대교라는 상황(context) 속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상황을 제거하고 나면 죽은 문자만 남습니다. 사도 바울은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 후 3:6)고 말한 바 있는데, 만약 ‘대속 신앙’과 ‘속죄 신학’을 문자적(literal)으로만 믿 는다면 우리 신앙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대속 신앙’과 ‘속죄 신학’은 반 드시 재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즉, 1세기 유대교 상황에서 무엇을 뜻했는지를 먼저 묻 고, 그것을 지금의 변화된 상황 속에 어떻게 새롭게 적용할 것인가를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속 신앙’과 ‘속죄 신학’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찾아낸 ‘하나의’ 해석이었다는 것입니다. ▷ 어떻게 ‘대속(代贖) 신앙’과 ‘속죄론(贖罪論)’이라는 해석의 탄생이 가능했지요? 앞에서 ‘대속 신앙’과 ‘속죄 신학’은 유대교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 고 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 리낌’(stumbling block)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foolishness)”(고전 1:23)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그 ‘수치스런’ 죽음을 ‘의미 있는’ 죽음으 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신앙은 역사 안에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또는 위해서) 죽었다”는 ‘대속 신앙’(redemption faith)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스 럽게 이러한 신앙을 그들 자신의 종교적 전승(tradition)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습니 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구약 성경)을 뒤쳐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 가운데 하나는 레위기 16장에 있는 유대교의 속죄일(Day of Atonement, Yom Kippur) 제의에 관한 것입니다. 7또한 그(아론)는 숫염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회막 어귀에, 주 앞에 세워 놓고, 8그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서 제비를 뽑아서, 주에게 바칠 염소와 아사셀에게 바칠 염소를 결정하여야 한다. 9아론은 주의 몫으로 뽑힌 숫염소를 끌어다가 속죄 제물로 바치고, 10아사셀의 몫으로 뽑힌 숫염소는 산 채로 주 앞에 세워 두었다가, 속죄 제물을 삼아, 빈들에 있는 아사셀에게 보내야 한다.… 20b다음에 아론은 살려 둔 숫염소를 끌고 와서, 21살아 있는 그 숫염소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온갖 반역 행위와 온갖 죄를 다 자백 하고 나서, 그 모든 죄를 그 숫염소의 머리에 씌운다. 그런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 에 맡겨, 그 숫염소를 빈들로 내보내야 한다. 22그 숫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갖 죄를 짊어지고 황무지로 나간다. 이렇게 아론은 그 숫염소를 빈들로 내보낸다. 여기를 보면,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자기 손을 숫염소 위에 얹고 백성의 죄를 그 앞 에서 고백함으로써 백성의 죄를 전가시킵니다. 그런 다음 백성의 죄를 짊어진 이 숫염 소를 광야로 내몰아 죽게 함으로써 상징적으로 백성의 죄를 씻어냅니다. 사람들은 이 속죄 염소(scapegoat), 즉 백성들의 죄에 대한 죄 값으로 도시 밖으로 쫓겨나 살육된 염소의 모습에서 예수의 죽음을 떠올렸습니다. 즉, 저들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를 용서하는데 필요로 했던 ‘희생 제물’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예 루살렘 성전에서 정기적으로 피의 희생 제사(blood sacrifice)를 드려왔던 저들에게 십 자가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상징이었습니다. 즉,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당시 유대교의 예전적 이미지의 틀 안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발견했고, 그 결과가 ‘대 속 신앙’과 ‘속죄 신학’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첨가하고 싶은 질문은 “과연 이러한 희생의 신학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Q 복음서는 예수의 죽 음에 대해 전혀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피의 희생 제사와 너무나도 동떨어 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피의 희생은 어떻게 비쳐질까요? 만약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사람 이 소나 양이나 염소에게 자신들의 죄를 전가하여 피의 희생 제물로 바치려 한다면, 그것은 동물학대라고 비난받을 뿐만 아니라 금방 불법화 될 것입니다. 더구나 죄 때문 에 죽어 마땅한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켰다고 것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은혜가 될지 모르나 비(非)그리스도인들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가 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적 폭력, “신적인 아동 학대라는 잔인한 행위”(a cruel act of divine child abuse)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크로산(Crossan)은 “하나님이 우 리와 화해하기 위해서 피의 희생을 요구하신다는 식의 신학으로 내 신앙을 표현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 그렇다면 예수는 왜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까? 먼저 예수께서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험하고 위협 적인 존재로 보여졌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처형 방법으로 십자가형이 선택됐다는 사 실은 로마 제국의 개입을 입증합니다. 십자가형은 유대인의 처형 방식이 아니라 로마 인의 처형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흔히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정치적 반란자들과 계속해서 반항적인 노예들을 처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는 공 통점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기존 체제에 조직적으로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십자가에 처형되었을까요? 수세기 동안 가장 일반적인 답변 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로마식 처형 방식이었 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는 보도는 복음서 자체에 근거해 있습니다. 마가복음, 곧 최초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 인의 법정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신성모독”이라는 종교적 죄 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막 14:53-64). 이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졌고,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시키고 싶어했습니다(막 15:6-15). 마태는 마가를 베껴 쓰면서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의 피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손 씻는 장면 을 첨가했고, 나아가 유대인의 책임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서 마가의 설명에 유대인 군중들의 외침을 첨가시켰습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엄청난 유대인 수난의 근거가 됐 던 그 무서운 외침은 이런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예수)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마 27:25). [백성들 ‘전체’가 예수의 처형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 이 말은 마태의 다듬질(elaboration)입니다. 즉, 마태복음이 씌어질 당 시 곧 주후 90년경, 유대인들과 유대계 기독교도들 사이에 있었던 고조된 긴장을 반영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요한에서도 마찬가 지로, 예수의 원수들은 가장 흔하게 단지 “유대인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오랫동안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을 포함하여 유대인들의 재판 전체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산헤드린(최고의회)에서의 야간 재판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입증할 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실 제로 재판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의 제자들이 그 재판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확 인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인의 재판과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은 학자들이 보기에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변증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대 기독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로마 제국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변호하려고 애썼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살았던 그 리스도인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운동의 핵심 인물인 예수가 로마의 원수(怨讐)로 십자가에 처형되었기에 여러분도 정치적으로 위험한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고 비난받 는다면 스스로를 어떻게 변호하겠습니까? 또한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의 세 계에 예수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있어서 십자가 처형이 큰 걸림돌이었을 텐데, 선교를 위해 이를 어떻게 변호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 처형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지만, “로마 총독은 그 처형을 원치 않았으며, 실제로 그는 예수가 무죄라 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자기 백성들과 그 지도자들의 주장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의 처형에 대한 책 임 소재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산헤드린”으로 알려진 유대인 공식 기 구 앞에서 형식을 갖춘 재판이 열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대인 대제사장과 그의 “어용 의회”에서 일어난 사사로운 청문회였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어용 의회는 로마가 지배하는 유대 지방 내의 문제를 다루는 유대인들의 종 교적, 정치적, 경제적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집단 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인들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은 소수의 막강한 엘리트 집 단으로서, 유대 민족을 대표한다기보다 유대 민족의 압제에 대한 협력자들이라고 보 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따라서 “유대인” 민중들은 예수를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엘리트 집단은 예수를 위협적이라고 생각했을까? 이유가 무엇이 었든, 적어도 “신성모독”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대 답은 예수가 사회적 예언자로서 당시의 지배 체제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단순히 영의 사람, 치병자, 지혜의 교사이기만 했다면 처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사로잡힌 종 교적인 사회적 예언자로서 추종자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예 수 당시의 세계에서는 이것만으로도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기에 충분하였는데, 전에 그의 스승 침례자 요한을 처형했던 것처럼, 당시의 당국자들은 체제 비판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았지만 대중적 반란에 대해서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7- 53절을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는 대중적인 반란이 일어날 기회를 주느니 예수를 죽 이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볼 때 예수는 무해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청문회 직전에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도발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5-18절은 성전에서의 이 도발적 행동이 예수 체포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종 교적인 중심지였음은 물론이요,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였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저들 은 예수께서 자기들이 주도하고 있는 체제 안정을 위협하는 체제 전복적인 인물이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들은 옳았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무장 반란을 선동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회적·종교적 비전이 엘리트 집단도, 지배 계급 도 없는 새로운 세계와 나라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희생자’로서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자’로서 죽은 것입니다. 순교자는 무엇을 편들었기 때문에 처형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국에 반대하였 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입각한 대안적인 사회적 비전을 편들었기 때문에 처형되었습 니다. 당시의 지배체제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예언자였기에 살해한 것입니다. 이 것이 십자가의 역사적 의미입니다. 출처: 대속의 역사적 의미 |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매일 이렇게 다양한 주제에 대해 광범위하면서도 자세한 그것도 논리정연하게 글을 쓰고 계심에 대해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워치타워의 시작점에 대해 가지고 계신 평가 역시 저와 비슷하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워치타워의 브레인은 과연 누구일까? 누가 계속 진화(?)하는 그들의 교리를 맠들어 내고 있는가? 또, 그들 스스로 "유레카!" 라고 외쳤을, 누군가가 발견하여 그들이 교리를 바꿀 때마다 끊임없이 사용하고 있는 잠언 4:18의 기록을 언제까지, 어디까지 써 먹을 것인지 참 궁금하기도 하답니다.
현재 통치체 이사진들이 바지 사장이라는 느낌은 있지만 그 윗선이 누구인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진짜 주주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설에 불과합니다) 일단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