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반의 경주 문화재 탐방에 참여의 뜻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뜨거운 성원만큼이나 알차고 보람된 여행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먼저 탐방할 문화재에 대해 사전지식을 전해 드립니다. 원래 이 내용은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 할 내용이었으나 경주까지의 거리가 짧은 관계로 시간상 다 하지 못할 것 같아 우선 중요한 것만 몇가지 간추려 올립니다. 탐방에 참여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모두 읽어보시고 답사의 사전지식을 득하여 더욱 알차고 뜻깊은 문화재 탐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기 올리는 내용 이외에도 현장에서 설명드릴 내용이 많습니다. 그것은 현장에서 그 때 그때 따로 설명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즐겁고 유익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첫번째 탐방예정인 경주 최부잣집에 대한 사전지식입니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속담 중에 3대 가는 부자 없고 3대 가는 거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주 최부잣집의 만석꾼 전통은 이 말의 법칙을 무시하고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 부의 전통을 가져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최장수 부잣집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 1950년, 전 재산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함에 기증함으로써, 300년 부의 전통이 끝이 났다. 그렇다면 300년을 넘게 만석꾼 부자로 지켜올 수 있었던 최부잣잡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최부잣집의 가훈을 중심으로 만석꾼 부의 비밀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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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사(제일 낮은 벼슬.단순 명예직.)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당쟁에 휘말려 집안의 화를 당할 수 있다.
최부잣집 전통의 시작은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1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으로부터다. 최진립이 스물다섯 되던 해에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인해 통정대부의 벼슬까지 올랐다. 그 후 당정에 밀려 울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깨닫고 후손들에게 진사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교훈을 남겼다. 이후로 최부잣집에서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지 않는 전통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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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립이 살던 집은 지금의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있다. 이 마을은 속칭 ‘개무덤’이라고도 하는데 풍수적으로 금계포란형의 길지로 알려져 있다. 3개의 산이 마을을 향해 읍을 하듯이 서 있고 산내면 쪽에서 흘러오는 개울과 남쪽 울주 방면의 봉계리에서 내려오는 물이 양쪽에서 흘러와 합수되는 곳이다. 두 개의 물이 합수되는 곳은 큰 부자가 나는 형국으로 풍수는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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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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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인 만석꾼의 출발은 바로 최진립의 손자인 최국선 때 부터였다. 최국선은 농사기술을 밤낮으로 연구하여 생산량을 늘여 나갔으며 이재술도 탁월하여 마침내 만석꾼의 부자를 일구어 내었다.
현종 때 최국선의 나이 마흔한 살이 되던 해에 삼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 때 최국선은 곳간을 과감히 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장차 굶어 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곳간을 열어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는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 주도록 하라.”
이렇게 말하고 집 앞의 큰 바깥 마당에 솥을 걸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 연일 죽을 끓이도록 했다. 지금도 죽을 끓이던 그 자리가 활인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데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은 그 때 생겨난 것이다.
3.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사지 말라.
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 값에 내 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
최진립의 손자인 최국선 때에 하루는 빚 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돈을 빌려주고 받은 전답의 문서를 모두 돌려주었다. 어차피 갚을 사람은 문서가 없어도 갚을 것이고, 형편이 못되어 못 갚을 사람은 문서가 있어도 못 갚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빚도 갚지 못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서 전답마저 빼앗아 버린다면 무엇으로 먹고 살며 빚을 갚겠는가 하였다. 또 물건을 살 때에는 남의 궁색함을 이용하여 싸게 사서는 안 될 것이며 그렇다고 물건 값을 과도하게 많이 주어서도 안되며 여러 사람들에게 알아보아 반드시 제값을 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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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재산은 1년에 1만석(약 5천 가마니)이상을 모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최국선의 뒤를 이어 부를 이룬 이는 그의 둘째 아들 최의기 였다. 최의기는 진사벼슬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재산을 일구면서 일흔 살까지 수를 누렸다는데 그가 죽기 전에 자식에게 내린 유언이 “재산은 만석 이상 하지마라”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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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최의기의 뒤를 이은 이는 맏아들 최승렬이었고 다시 맏아들 최종률이 그 뒤를 이었다. 진사시험에 번번히 낙방한 그는 몸에 밴 근검절약의 가풍으로 또 하나의 가훈을 만들었는데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였다.
당시 최부잣집으로 시집을 올 정도의 규수라면 상당한 양반가문이 아니면 안되었다고 한다. 그런 세도가 집안의 딸인 며느리들에게 살림을 맡아 하려면 근검절약하는 정신부터 몸에 배어야 된다는 뜻이었다.
6.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이 가훈은 최종률의 뒤를 이은 최언경의 외아들 최기영 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가훈인데 그는 최씨 가문 중에서 가장 학식이 높고 낭만적이며 풍류를 좋아하여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누가와도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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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많을 때는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해서 1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000석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000석을 손님 접대에 썼다. 손님이 떠날 때면 과메기 한 손(두 마리)과 하루 분의 양식을 쥐어 보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가문이 지니고 있는 전통들은 많이 있는데,
교동주택이 명당임을 증명해 주는 이중안대의 풍수적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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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주택의 집 뒤에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까닭,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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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고을
산천이 아름다워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강토에는 사람이 살기 좋은 명고을이 많다. 더욱이 인물은 지령이라 하였듯이 수려한 산천정기가 서린 명고을에서는 훌륭한 인물도 많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청화산인 이중환은 그가 쓴 지리서인 택리지에서 경상도 지역은 특히 산수가 아름답고 생리가 풍부하여 사람 살기에 팔도에서 으뜸이고 인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데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하였다.
영남지방 중에서도 삼남의 사대길지를 꼽았는데, 서애 유성룡이 태어난 안동 풍산의 하회마을과 충재 권벌의 종택이 있는 봉화의 닭실마을, 의성김씨 종택이 있는 임하의 내앞마을, 그리고 회재 이언적과 우재 손중돈이 태어난 경주의 양동마을이 그곳이다. 네 곳 모두가 경상도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으며 태백산의 정기를 받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점이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고을을 살펴본다면 하회마을, 양동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6대 민속마을로 지정된 강원도 고성의 왕곡마을, 전남 순천의 낙안마을, 충남 아산의 외암마을, 제주도 서귀포의 성읍마을 등이 있는데 모두 다 하나같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으며,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돤 한국의 명고을로 알려져 있다.
영남의 길지 경주 양동마을
양동 민속마을은 삼남의 사대길지의 하나로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으며 조선시대의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반촌마을이다.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두 씨족이 이룬 집성촌마을로 보물, 민속자료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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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양동 마을에는 가옥 150여채, 정자 15개소, 학당, 영당, 사당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이 가운데에는 보물 3점, 민속자료 12점, 지방유형문화재 4점이 포함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는 무첨당(제411호), 향단(제412호), 관가정(제442호)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잠정등록이 되어 있다.
문헌에 의한 양동마을 최초의 인물은 여강 이씨(驪江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면서부터이다.
이후 풍덕 류씨(豊德 柳氏)인 류복하(柳復河)가 이광호의 손녀와 결혼하여 처가에 들어와 살았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고 무남독녀 외동딸이 하나 있었다. 이 딸은 청송 안덕에 살던 월성 손씨인 양민공(襄敏公) 손소와 결혼하였는데 손소는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모두 상속받아 정착하여 살았으며 이것이 월성손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540여년 전의 일이다.
양동마을이 명고을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면서다. 조선 유학의 성현이자 우참찬을 거쳐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429) 선생과,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된 동방 5현의 한 사람인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 -1553)선생이 모두 양동마을에서 탄생하였다.
손씨 집안의 인물인 손중돈은 손소의 아들이고, 이씨 집안의 인물인 이언적은 손소의 큰 딸과 결혼한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의 아들이다. 공교로운 것은 숙질간인 두 인물이 손소가 살았던 서백당의 같은 방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양동마을은 손씨와 이씨의 두 씨족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두 집안 모두 외손의 후예인 동시에 사돈지간이 되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양동마을은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외손이 마을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학상으로 볼 때, 양동마을은 물(勿)자형의 명당에 해당한다. 마을의 뒷 배경이자 주산(主山)인 설창산에서 산등성이가 네 줄기로 뻗어 내려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성주봉 정상에 올라가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갔는지 마을이 잘 보이게 나무를 베어 공터로 만든 곳이 한군데 있다. 이곳에 서면 양동마을과 멀리 안강평야가 한 눈에 들어 온다. 물론 마을의 골짜기와 산능선을 헤아려 보면 물(勿)자 형국도 뚜렷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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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봉 정상에서 양동마을을 내려다보면 설창산에서 내려뻗은 물자의 1획에 해당하는 산줄기에 물봉동산이 있고, 앞쪽으로 안강평야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관가정이 자리잡고 있다. 아래 골짜기가 물봉골(勿峰谷)이며. 바로 옆 언덕에는 양동마을에서 가장 잘 지어진 집인 향단이 자리한다.
두 번째 획의 꺾어진 부분 아래가 거림(居林)이며 이 산줄기의 위에 두 명의 성현을 탄생시킨 서백당이 있다. 마을의 안산(案山)인 성주봉아래 자리한 골짜기가 하촌(下村)이다, 물봉골과 하촌 사이에 있는 것이 안골(內谷)로 위쪽 언덕에는 여강이씨 종택인 무첨당이 자리 잡았다.
물봉골 너머에는 갈구덕(渴求德)이 있다. 풍수에서는 ‘물(勿)’자형 형국을 좋은 집터로 친다. 이는 물(勿)자의 글자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으나 글자의 모양이 사신사(四神砂)가 잘 감싸고 있는 장풍국(藏風局) 형태가 되기에 좋은 곳으로 치는 것이다.
양동마을 또 하나의 형국은 강을 향해 나아가는 배와 같이 생겼다 하여 선유행국(船遊行局)이라 한다. 그로 인하여 마을 대부분의 기와집들은 지붕을 뱃집(맞배지붕)으로 하고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뚫려 가라앉는다고 해서 우물을 파지 않았는데, 그리하여 마을에는 예부터 우물이 귀했다.
양동마을의 진산(鎭山)은 설창산(雪倉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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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창산에서 좌로 뻗어 외청룡을 이루며 달리던 용맥은 마을의 바로 앞에 호명산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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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하면서도 뾰족하게 솟아오른 안산은 전형적인 문필봉(文筆峰)의 형세를 띠어 양동마을에 훌륭한 문사(文士)가 날 것을 예언한다.
양동마을의 들을 보면 안락천 너머로 기름진 안강 평야가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한때는 이 넓은 안강들의 반이 양동마을 두 가문의 소유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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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과 안락천이 만나는 합수처(合水處)는 안강평야를 기름진 농토로 만들어 양동마을에 부(富)를 이루게 하여주니, 바로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밝힌 생리(生利)가 풍부한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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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산줄기와 물줄기가 지형적으로 태극문양을 띠고 있어 양택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명당자리인데다 경주방면에서 흘러드는 형산강 물줄기를 역수(逆水)로 맞는 지형인지라 이는 마을의 끊임없는 부(富)의 상징이 된다.
(역수란 두 개의 물줄기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두 개의 기운이 상충하여 강한 기운을 일으키므로 매우 길한 수세로 본다.)
양동마을의 풍수적인 특징 하나는 바로 형국에 따른 금기이다. 물(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피 혈(血)자’가 된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동해남부선 철로가 마을을 통과하도록 계획된 것을 마을 주민들의 반대로 철로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고 한다.
양동마을의 주요가옥
①서백당(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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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손씨 대종택(大宗宅)인 서백당(書百堂)은 문필봉(文筆峰)의 지기가 모인 곳으로, 큰 인물 3명이 나온다는 삼현지지(三賢之地)로 불린다. 당호(堂號)는 마음에 참을 인(忍)자를 백번 써야 종손의 자격이 생긴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며, 민가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마당 가운데 심어진 500년이 넘었다는 향나무가 가옥의 전통을 그대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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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곳 서백당에서 손소의 둘째아들 우재 손중돈 선생이 태어났고, 이어 회재 이언적이 같은 방에서 태어났다. 이로써 두 명의 현인은 이미 탄생하였는데 문제는 나머지 한 명의 현인이 출생할 차례이다. 손씨 가문에서는 회재선생의 탄생 이후 나머지 한명의 현인이 외손에서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출가한 딸이 이곳에서 출산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외부인에게도 이 방만큼은 일체 개방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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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당의 뒤로 돌아가자 용맥의 지기가 뭉친 잉(孕)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강한 지기는 두 인물이 태어난 산실(産室)을 향해 정확히 들어갔다.
②무첨당(無添堂, 보물 제411호)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이번(李番)공이 살던 집으로 1460경에 지은 여강(驪江) 이씨(李氏)의 종가집인데, 정면 5칸, 측면 5칸의 'ㄱ'자형 집으로, 네모기둥과 둥근기둥을 번갈아가며 방과 마루를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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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흥선대원군이 방문하여 썼다는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대원군이 파락호 시절 이곳 양동마을에 와서 여강이씨 문중으로부터 왕손 대접을 톡톡히 받았기에 그 후 집권을 한 대원군은 여강이씨라면 검토해 보지도 않고 등용을 시켰다고 전한다. 양동마을이 아직도 보존이 잘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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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입향조 양민공 손소의 장남이 다른 집안에 장가를 가면서 그 집안의 대를 잇게 되자 둘째 아들인 우재 손중돈은 장형의 귀향에 대비해 종택인 서백당을 비워두고 아래쪽에 관가정을 지었다. 서백당과 달리 마을 입구의 높은 언덕에 지어진 이 집은 너른 안강평야를 굽어볼 수 있도록 만든 정자의 경치가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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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평면이 ‘ㅁ'자형을 이루어 아담한 정원이 있으며, 안채 뒤편 동측에는 맞배지붕의 사당이 있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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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향단(香壇, 보물 제412호)
향단은 두개의 중정을 두고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붙여 전체를 날 ‘일(日)’자형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이 조화를 이루어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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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을 탐방하기 위한 사전 지식은 이정도로 끝내고 마을에 얽힌 전설이나 기타 상세한 설명은 현장에서 직접보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경주시 홈페이지 문화관광에 들어가시면 최부잣집과 양동마을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있으니 참고 하시고 서점에 관련서적도 많이 있으므로 필요하시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문화재 탐방은 아는만큼 보이고, 나아가 보이는만큼 알게됩니다. 그에따라 탐방의 재미 또한 배가 될 것입니다. 즐거운 봄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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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캬 경주 월성 손씨,,,^^*
캬 경주 월성 손씨 부럽삼,,,^^*
뭐가 부러버요? @.@
삼남의 사대길지에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월성손씨 가문이 부럽고...그 후손이신 피부짱님이 부럽고...피부짱님의 인맥관리 능력이 부럽고...그래서 제가 피부짱님 팬이예요...이쁘게 봐 주세요...^^*
ㅋㅋㅋ 네이쳐님, 별걸 다~~~ 인맥관리 능력요? 제가 '무토'라서 ㅋㅋ
음~~가보지 않았지만 벌써 갔다온듯한 기분이...
좋은 글과 자료 감사드립니다. 이 방면으로 문외한인 저도 선생님글과 설명을 듣고 있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답사날이 무진장 기대됩니다.
특히 2번 맘에 드네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
노블리스 오블리제 ----- 우린 언제쯤 함 해볼까나,,,, 현재는 ' 가난해도 부자의 줄에 서라,,'로 실천 중~~~~~~~
부자누님에게 줄을 서는자...복이있으리...
형수씨가 말하는 위에 부자누님은 내가~~~~~~~~~~~? 나는 선무당이당~~~ㅋㅋㅋ
(선)무당이라도 좋다.. 일단 줄을 서는기야,,,^^*
재테크고 뭐고 다필요없음 줄만 서면됨..부자누님 만세...
음...한마디로 부자로 가는 지름길은 과한 욕심 부리지 말것과 남에게 베풀것....이것인거 같네요..ㅎ
이번 최부잣집 탐방목적의 핵심입니더. 참 잘 하셨어요.
으~ 땡기는데.. 친구결혼식이냐 여기가느랴.. 갈등하느라 머리 빠질 지경입니다.. ㅠㅠ
결혼식은 계좌이체로...
계좌이체 긴급동의함.
부자가 되는 자세 배울려고?? 답사날이 딸내미 kme시험일인데 남편한테 슬쩍~미라놓고 따라 갑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그려. 이러다 편한웃음님 남편에게 찍히면 수업못나가게 하는건 아닌지...
ㅎㅎ 감사합니다, 총무님 친찬에 얼굴 발그레해졌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