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동, 『황하에서 천산까지』
대학 강단에 서 있는 학자가 자신의 전공에 대하여 전문 학술서가 아닌 대중서를 쓰면서 흥미와 학문적 깊이를 모두 갖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학계의 동료들 사이에서나 읽힐 전공 용어로 가득한 학술 논문을 쓰는 편이 오히려 수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 성공한다면 그 책은 뜻밖에 “일반인들”을 그 분야로 깊이 끌어들이는 마중물이 될 수 있는데 그 예가 바로 김호동의 1999년 저작 『황하에서 천산까지』일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황하가 표상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계와 싸우며 또 거기서 벗어나려 애썼던 여러 민족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그들의 기억과 역사가 마치 천산산맥 정상에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만년설과도 같다고 했다. 황하와 천산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제목으로 삼은 이 책은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학계 안팎의 사람들이 찾아 읽고 있는 대중 역사서다. 책은 크게 1. 라싸로 가는 길, 2. 청진(淸眞)의 세계, 3. 초원의 노래, 4. 성묘(聖墓)를 찾아서 이렇게 네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 장은 순서대로 티베트인, 회민(回民), 몽골인, 위구르인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즉 현대 중국의 이른바 “소수민족”들의 역사에 대한 책인 것이다.
『황하에서 천산까지』의 서술 방식에서 주목할 것은 먼저 기행문의 형식을 빌려 담백하고 이해하기 쉽게 써내려간 점일 것이다. 예를 들면 몽골인들의 역사를 담은 3장은, 저자가 급박한 일정으로 헬기를 타고 현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옛 몽골제국 최초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느낀 소회로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의 역사에 대한 서술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몽골제국의 마지막 대칸이라고 불리는 토곤 테무르(Toghon Temür, 1320~1370)가 명의 주원장(朱元璋) 군대에 쫓겨 수도 대도(大都)를 떠나 여름 수도 상도(上都)로 갔다가 다시 쫓겨 북상하고 결국 사망한 부분까지 이르는데,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문학적이고 주요 페이지마다 지도와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배치되어 있어 이해가 용이하다.
그런데 이 책의 특징으로 필자가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저자가 각 집단의 역사에 대한 서술에 이어 자연스럽게 그들의 언어로 된 사료를 번역하여 직접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마지막 대칸 토곤 테무르의 북주(北走)는 한문 사료 『원사(元史)』와 『명사(明史)』에 상세히 실려 있고 예상할 수 있는 대로 그는 실정(失政)을 거듭한 부패하고 무능한 황제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황하에서 천산까지』는 당시 한국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저자 미상의 17세기 몽골어 역사서 『황금사(Altan Tobči)』라는 책에서 토곤 테무르가 대도와 상도를 잃고 난 뒤 읊었다는 애가(哀歌)를 번역하여 직접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갖가지 보석으로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완성된 나의 대도여!
옛 칸들이 머물던 피서지 상도의 황금빛 초원이여!
시원하고 멋진 나의 개평 상도,
따스하고 아름다운 나의 대도여!
붉은 토끼띠의 해에 잃어버린 나의 가련한 대도.
이른 아침 높은 곳에 오르면 보이던 너의 아름다운 연무(煙霧).
나는 울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노라.
나는 초원에 버려진 두살박이 붉은 소와 같이 되었구나.
갖가지 모양으로 만들어진 나의 팔각 백탑(白塔)이여.
아홉 가지 보석으로 완성된 나의 대도성이여.
내가 겨울을 보냈던 나의 가련한 대도.
이제 중국인이 모두 차지했도다.
내가 여름을 보냈던 개평의 상도.
내 잘못으로 중국인들이 차지했구나.
이 기록 소개가 한문 사료의 서술을 뒤집는 것은 아닐지라도, 몽골인들 자신의 언어로 쓰인 사료의 기록을 제시받음으로써 독자들은 이전에 한인 역사가들에 의해 대상화되고 비 주체화되었던 몽골 군주의 이미지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사료 기록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몽골 역사 서술은 이른바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가 청에 멸망한 계기를 제공했다고 비난받는 준가르의 아무르사나(1723-1757)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청의 기록에 의하면 아무르사나는 비겁하게 청에 투항하였고 또한 청의 앞잡이가 되어 청 군대를 준가르에 끌고 온 인물이다.
그런데 저자는 아무르사나에 대해 몽골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즉 몽골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동료 두 사람과 함께 힘을 합해 청을 무너뜨리고 통일된 몽골인들의 나라를 세우자고 뜻을 모아 싸웠는데 동료의 배신으로 북쪽으로 도주해야 했고 러시아인들의 땅으로 건너가 군대를 모아 청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몽골인들을 해방시키려고 하였으나 결국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민담에 가깝고 가공의 인물이 섞여 있지만 독자들은 청조의 기록에서 본 것과는 다른, 몽골인 자신들의 입장을 보게 되고 준가르의 멸망을 보는 양측의 시각 자체가 다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책은 우리가 동아시아와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를 고찰할 때, 기록을 남긴 자들 즉 중국 측의 기록에 의존하게 되고 그러므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중국의 관점에서 “소수 민족”의 역사를 판단하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서문에 쓴 저술 목적에도 드러나 있다. "이 책은 그들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도 아니요, 그들의 풍습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이 민족들이 걸어온 역사의 페이지에 배어들어 있는 고통과 소망을 독자들이 알고 또 공감토록 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취한 방식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들 스스로 말하는 쪽이 더 낫겠다고 생각을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역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싶었다.
그들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즉 해당 민족 집단의 언어를 배워 그들의 역사서를 직접 읽고 연구하여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은 이 책에서뿐 아니라 저자가 논문이나 학술 저서에서도 반복적으로 취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고전 한문과 더불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몽골어, 티베트어, 러시아어 등에 대단히 능통하지 않으면 그들이 남긴 소수의 사료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는 기록을 뽑아내어 분석하여 이론적 틀까지 만들어 내는 것은 너무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재직 기간 내내 그것을 따르려 노력했고 황무지 상태였던 한국의 중앙아시아사 연구에 많은 씨앗을 뿌렸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중앙아시아사를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고
결국 저자의 제자가 되었다.
쓰다 보니 서평 같은 글이 되었지만, 이것이 바로 이 지면을 빌려 내가 『황하에서 천산까지』를 소개하는 이유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대학원 동료들도 이 책을 읽은 것이 중앙아시아사를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중요한 계기 중 하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의 간결하면서도 문학적인 문체에 홀려 이 공부에 뛰어든 우리는 몽골인과 티베트인과 위구르인과 페르시아인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기 위해 각종 언어를 배우고 또 그 사료들을 붙잡고 오랜 시간 분투해야 했다.
그러나 아직도 국내에는 티베트나 몽골, 회족의 역사에 대해 읽을 만한 개설서는 나오지 않고 있고, 내가 이 책의 한 챕터 정도의 분량으로라도 학문적 깊이와 대중적 흥미를 겸비한 저작을 낼 날은 요원하다 하겠다.
최소영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HK연구교수
* 필자인 최소영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중앙아시아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HK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보시, 티베트와 몽골을 잇다: 티베트 승려에 대한 몽골 황실의 보시 연구』 (경인문화사, 2022)가 있고 대표 논문은 「티베트 사료의 한국 관련 기록 고찰」 (『동양사학연구』. 2019), 「대칸의 스승: 팍빠(‘Phags pa, 八思巴, 1235-1280)와 그의 시대」 (『동양사학연구』. 2021) 등이 있다.
출처 : 교육신문(http://kuen.korea.ac.kr)
[스승이 되어준 책] (7) 김호동, 『황하에서 천산까지』(최소영) < 교육과 학문 < 기사본문 - 교육신문 (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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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에서 천산까지
김호동 저자(글)
사계절 · 2020년 06월 15일 (1쇄 1999년 02월 01일)
이 책은 중국 전 영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4대 소수민족인 티베트족, 회족, 몽골족, 위구르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김호동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내륙아시아 및 알타이학)를 취득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1999: 미국 스탠포드대학 출판부에서 'Holy War in China'라는 제목으로 2004년에 개정 영문판이 출간됨), '황하에서 천산까지'(1999),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2002), '몽골제국과 고려'(2007)가 있으며, 주요 역서로는 '유목사회의 구조'(1990), '유라시아 유목제국사'(공역, 1998),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2000), '라시드 앗 딘의 집사 1: 부족지'(2002), '라시드 앗 딘의 집사 2: 칭기스 칸기'(2003), '라시드 앗 딘의 집사 3: 칸의 후예들'(2005) 등이 있다.
목차
황하에서 천산까지 | 김호동 - 교보문고 (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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