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는 제 2차 세계 대전당시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최후의 대반격에 대해 연합군이 붙인 이름이다.
벌지(Bulge)는 영어로 '주머니'를 뜻한다. 독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일부가 돌출된 것을 가리켜 미군이 붙여준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벌지 대전투는 2차 대전 중 독일군과 미군과의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무려 8만 9천명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한 전투에서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힘든데 그만큼 아주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벌지 전투는 연합군에게는 아주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연합군은 공수부대를 이용한 마켓가든 전투를 했지만 큰 패배를 합니다. 이에 히틀러는 총공세를 강행을 지시합니다.
룩셈부르크의 아르덴 숲을 지나서 진격하라고 지시를 하지만 미 8군은 빠르게 이 숲을 점령하고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냅니다.
무려 3주 동안 이 숲을 지켜내는데 이 과정은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생생하게 담깁니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지옥 같은 포격이 밤새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납니다.
그러나 이 지옥같은 고통을 미군은 견뎌내고 12월 말 대대적인 반격을 해서 독일군을 괴멸시킵니다.
2차 대전의 수 많은 전투 중에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을 전투입니다.
7년 전 미 해군 장교인 마크 앤더슨과 그의 친구인 역사학자 Jean Muller는 룩셈부르크로 여행을 갑니다.
그리고 벌지 전투가 일어났던 숲에서 금속 탐지기로 미군들이 사용했던 참호를 스캔을 했습니다. 그러다 하나의 카메라를 발견 합니다.
카메라에는 필름이 들어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약간의 빛이 들어 갔을 뿐 사진으로 인화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았습니다.
사진들을 인화해보니 보병 317연대 1대대의 Louis J, Archambeau의 사진들이 담겼습니다. 위 사진은 안타깝게도 이 병사의 마지막을 기록한 유품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사망을 했습니다.
이에 미 해군의 마크 앤더슨 장교와 친구는 이 사진을
http://www.thetroubleshooters.com/80th/archambeau001.html에 공개하면서 Louis J, Archambeau의 가족을 찾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Louis J, Archambeau의 가족들을 찾게 되었고 이 사진을 전달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이 병사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70년 만에 도착한 사진편지. 아마도 주인 잃은 카메라가 미 해군장교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은 아닐까? 70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절박함까지 담아내는 생생함을 담고 있다.
1944년 시간은 흘러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5년 전 보무도 당당히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승장구하던 히틀러의 군대는 이제는 동서에서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오는 소련군과 연합군을 겨우겨우 막아내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히틀러가 애지중지하던 많은 부대는 대부분 서류상으로나 존재하고 있었고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루프트바페(독일 공군) 또한 연합군의 전략폭격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합국의 대대적인 공격을 막아 낼 방법이 독일에게는 없었다.
사방으로 포위당한 독일 국민들은 극심한 물자부족으로 말미암아 빵 한번 배불리 먹어본지 오래 되었으나 무제한 폭격에 희생만 당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정도로 상황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비록 지난 제1차대전에서 패전을 당하였지만 당시 대부분의 전투가 독일영토 밖에서 벌어졌던 관계로 이러한 끔직한 시련은 독일 국민들에게는 유사 이래 최악의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전쟁 말 독일의 피해는 유사 이래 최악의 참화였다.
계속 전쟁을 벌인다면 패배가 100퍼센트 확실한 상황인 이때쯤 독일의 지휘부는 정치적인 결단을 내려야했다.
유일한 길은 항복이었으나 히틀러도 독일 국민들도 모두 제1차대전 항복 후 승전국들의 무지막지한 보복으로 전쟁이상의 고통을 겪었던 베르사유조약을 기억하고 있었다. 만일 다시 항복을 한다면 베르사유조약을 능가하는 승전국의 보복이 뒤 따를 것으로 생각하였다.
전쟁 범죄 때문에 나치 스스로 패전이나 항복 시에 있을 보복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아무리 안하무인이라도 이런 사실은 직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항복이라는 치욕적인 단어를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도 없었고 자존심도 용납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제1차대전의 항복을 굴욕으로 여기고 이를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항복이라는 단어조차 그의 기억에 없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체제를 부인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그의 쓸데없는 자존심은 국민과 국가의 안위보다 위에 있었다. 아니 진정으로 국민들을 위하였다면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이라는 수단을 함부로 꺼내 들어 휘둘렀던 이들이 국민에게 행복을 안겨 주었던 사례는 거의 없었다.
히틀러도 전쟁을 통한 승리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러한 과정에서 겪어야할 보통 사람들의 고통을 모르는 인물이었다.
어떤 전쟁이든 고통을 받는 이들의 대부분은 보통 사람들이다. 제1차대전에서 항복한 독일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솔직히 전세를 반전시킬 뚜렷한 대책이 독일에게는 없었다. 물자도 없었고 전선에 투입 될 수 있는 새로운 병력은 어린이를 갓 벗어난 애송이들이나 기력이 쇠한 장년이상의 노인들이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인명과 독일의 재산을 그나마 보존하기 위해서는 항복이 제일 좋은 방법인데 항복 후의 보복이 독일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고 특히 엄청난 전쟁범죄 행위를 저지른 전과가 있어 더욱 그러하였다.
히틀러는 전성기의 영화를 잊지 못하였다. 불과 2~3년 전의 기억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히틀러는 비록 항복이나 망국이냐의 갈림길에 있었지만 사실 왕년의 영화를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아주 먼 오래전의 일도 아닌 불과 2~3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지배자인 것처럼 자천으로 타천으로 대접을 받거나 아니면 증오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는 암담한 현재보다 영광스러웠던 과거에 집착하였다. 결국 현실을 거부하고 부정하려는 이 독재자는 극적인 반전을 통하여 영광을 재현하려 하였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유럽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1940년 6월에 있던 프랑스전의 승리에서부터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 합병, 주테덴란트 진출이나 1939년 제2차대전 발발 후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에서의 승리가 있었으나 프랑스-영국과의 대결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후 비로소 진정한 유럽의 맹주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까지 소련은 독일의 동맹국이었으므로 바다 건너로 도망간 영국을 제외하고 유럽에서 독일에 상대할 자가 없었다.
1940년 서부전선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히틀러나 독일 군부도 프랑스 침공을 앞두고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갈등을 겪었었는지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전전긍긍 할 정도로 걱정하였던 것과 달리 독일은 자신들 스스로 놀랄 만큼 승리를 손쉽게 거머쥐었고 그와 함께 육군강국 프랑스의 몰락과 협력자 영국의 후퇴는 제3제국 영광의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극적인 변화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유럽의 맹주가 되었음을 웅변하는 유명한 사진이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만슈타인이 입안한 낫질작전이 프랑스 침공전의 핵심이었는데 그중에서 독일 공격군의 통로로 회심의 돌파구가 되었던 곳이 벨기에-룩셈부르크-프랑스 국경지역에 위치한 아르덴 산림 지역이었다.
알프스와 같은 높은 산들은 아니지만 3개국의 국경선이 되었을 만큼 빽빽한 산림으로 가득 찬 이 구릉지대를 독일의 주력 기갑부대가 돌파함으로써 역사는 급격히 바뀌었다.
아르덴의 산림지대는 독일 승리의 고속도로였다.
1944년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생생했던 왕년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의 핵심 부대들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과 필사의 혈투를 벌이며 후퇴하고 있는 와중에도 서부전선의 아르덴을 다시 한 번 주목하였다. 너무나 1940년의 상황과 유사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부전선은 날씨가 겨울에 접어들면서 미군을 주력으로 하는 연합군의 전투력은 급격히 줄어들고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진 형국이었다.
처음으로 동절기 전투에 돌입한 연합군의 전투력이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아르덴을 기습 돌파하여 연합군의 주력을 절단시켜 분쇄할 생각을 하였다. 히틀러는 서부전선에서 전격전을 또 다시 재현하여 위대한 승리를 이끌고 이를 발판으로 동부전선의 붉은 곰과 마지막 결전을 벌이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 히틀러는 독일이 보유한 최후의 예비 전략 물자를 이 원대한 계획에 동원하고자 하였다. 이중에는 동부전선에서 고군분투하던 몇몇 핵심 부대들의 이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수차례의 동절기 전투 경험이 있었으나 반전시킬 여력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독일에게 이런 작전을 100퍼센트 확실하게 성공시킬만한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순전히 히틀러가 왕년만 생각하고 상상이상의 만용을 보여 입안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독일군 지휘부의 반발은 극심하였다.
히틀러의 충복이자 예스맨이었던 국방군 총사령관 카이텔(Wilhelm Keitel)과 히틀러의 소방수로 명성이 자자하고 신뢰도 두터웠던 서부전선 총사령관 모델(Walther Model)조차도 반대 의견을 표할 정도였다.
히틀러의 계획에 야전지휘관들은 반대하였으나 항명할 용기는 없었다.
독일에게는 전쟁 초기와 같이 든든하게 하늘에서 지상군을 보호할 공군 세력이 없었고 가용 할 수 있을만한 장비와 물자도 턱없이 모자랐다. 더해서 병력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거기에다가 지금까지 3배나 많은 적들을 간신히이긴 하지만 훌륭히 막아내고 있던 동부전선의 병력을 돌린다는 것도 말도 되지 않는 위험한 계획이었다. 독일군 최고지휘부는 차라리 서부전선은 정치적 휴전을 시도하고 동부전선방어에 전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던 일부 정예부대들이 서부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생각과 달리 히틀러는 오히려 동부전선의 전력을 빼내 서부전선에서 확전을 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 지휘부의 반발이 큰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반발을 하였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히틀러의 망상과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의 작전부장인 요들(Alfredd Yodl)이 ‘총통의 의지가 바뀔 가능성이 없으니 이왕 벌일 판이면 확실하게 벌이자’며 총대를 맺다.
노르망디 상륙 후 프랑스를 해방시키며 서서히 독일 국경에 도달한 연합군은 계절이 바뀌면 전열을 정비한 후 독일 국내로 진공 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때 독일군이 ‘라인강 경계(Wacht am Rhein)’라는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흘러 나왔고 동시에 라인강 주변에서는 연합군의 관측에 너무나 쉽게 포착 될 정도로 수많은 병력과 장비가 이동하는 것이 목격 되었다.
동절기에 접어들면서 독일군의 급격한 이동이 이뤄졌다.
연합군은 이러한 독일의 준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연합군이 판단하여도 독일이 라인강이라는 자연적인 방어선을 이용하여 철저한 준비를 갖추는 것 이외는 당시 전황으로 보아 마땅히 취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의 페인트 모션이었고 독일의 주력은 야음을 틈타 속속 아르덴외곽으로 집결하였다. 공세 계획이 기만과 더불어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 가운데 준비 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예 독일군이 비밀리에 집결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1944년 12월초 독일의 강력한 주공이 아르덴을 돌파하기위해 집결 완료 되었다. 집결 된 부대는 모델 원수가 지휘하는 총 30만 명으로 구성 된 B집단군으로 제3제국이 보유한 최후의 핵심 부대들이었다.
그 중 주력은 쾨니히스 티거를 비롯한 1,000여대의 기갑장비로 중무장 한 디트리히의 제6친위기갑군과 만토이펠의 제5기갑군이었는데 이는 독일이 동원할 수 있었던 최후의 전력들이었다.
아르덴공세를 지휘한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그런데 총통의 소방수라고 불릴 만큼 공세보다는 방어전의 귀재였다.
비록 1940년도 6월에 있었던 아르덴 돌파 시와 비교하여 독일군의 병력과 장비의 절대 수량 또한 부족하고 반면 연합군의 전력은 강하였지만, 장난감 같았던 1호, 2호전차를 주력으로 삼아 프랑스 침공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4년 전보다 현재 독일이 장비한 기갑장비의 성능은 연합군 측에서 1:1로 맞상대 할 장비가 없을 만큼 대단한 전력이었다. 이처럼 수량으로 부족하였지만 독일은 질로 연합군을 상대하였다.
1940년 아르덴 돌파의 주역은 장난감 같았던 경전차에서 불과 4년 만에 무시무시한 중전차로 바뀌었다.
거기에다가 병력 자원이 거의 바닥난 독일로써는 어쩔 수 없이 신병들을 많이 투입하였지만 이들을 지휘하고 이끌 고참 병사나 지휘관들은 미군 주축 연합군에 비한다면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특히 독일군은 러시아의 지옥 같은 동토에서 3번의 겨울을 보냈으나 미국이나 영국이 전쟁기간 중 동계전투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일 같은 조건이라면 날씨는 경험이 풍부한 독일에게 유리한 위치였다.
연합군에게 동계전투는 처음 겪는 악천후였다.
그러나 1940년과 비교하여 독일이 도저히 극복 할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공권이었다.
1940년의 돌파 시에는 하늘에서 세계최강 루프트바페가 독일 육군을 밀착하여 쫓아다니며 보호하여 주었는데 이제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일 전투기는 보기 힘들 정도로 제공권은 연합국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최후의 공세라고 하여도 독일이 동원할 수 있는 항공 자원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1944년말 유럽 하늘은 연합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비밀리에 준비를 완료한 독일은 제공권 문제 때문에 공격 타이밍을 조절하였는데 이때 생각한 것은 12월 중 유럽서부에서 자주발생 하는 기상 현상이었다.
이 시기에 아이슬란드 지역에서 발생하는 차가운 기단이 유럽 대륙으로 확장할 때 다습한 대서양의 영향으로 거대한 농무를 발생시키고는 했다. 독일은 이를 보호막으로 삼아 작전을 펼치기로 하였던 것이다.
안개가 드리우자 숲 속의 독일 전차들이 일제히 시동을 켰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농무는 공군의 작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안개는 보통 1주일 정도 지속되고는 하였다. 독일은 연합국 공군이 활동 불가능한 이시기에 승리를 거머쥐어야 했고 사실 그 이상 지속적인 돌격을 지탱할 여력 또한 없었다. 드디어 12월 16일 일주일간 악천후를 보일 것이라는 독일 기상대의 예보가 군에 전달되었고 숲에 숨어있던 독일군의 전차들은 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1944년 12월 16일 새벽 5시30분,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안개가 자욱이 끼어있는 날씨를 틈타 아르덴을 중심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던 전선에서 독일군의 천둥 같은 공격이 개시되었다. 독일의 주공은 우익의 제6친위기갑군이었는데 이들은 빠른 시일 내 아르덴을 돌파하여 리에지를 거쳐 곧바로 북으로 내달려 연합군의 물류 요충지인 안트워프를 점령하는 중책을 담당하였다.
독일의 최종 목표는 안트워프였고 이곳을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히틀러는 1940년에 있었던 신화의 재현을 바라고 있었다. 던커크에서 적을 포위하였듯 안트워프를 점령함으로써 영국과 유럽대륙을 연결하는 연합군의 물류항을 차단함과 동시에 북부에 고립 될 미1군과 미9군을 포위하여 일거에 섬멸하려 하였던 것이었다.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문제는 속도였는데, 독일에게 주어진 시간은 안개가 자욱하게 껴있을 단 일주일이었다.
초기의 돌파는 계획대로 진행 되는 듯 하였다.
만일 날씨가 개어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중 지원이 있을 경우 독일의 승리는 장담 할 수 없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독일군의 대대적인 기습에 연합군은 혼비백산하였다.
독일군 지휘부 모두가 히틀러의 최초 계획에 반대하였으니 연합군 측이 독일의 이러한 대대적인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만큼 독일의 기습 첫날 모습은 성공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연합군은 혼비백산하였다.
전선의 정면을 담당하던 리지웨이의 미 18군단과 미들턴이 지휘하던 미 8군단의 선도부대가 순식간 붕괴되며 전선이 돌파당하기 시작하였다.
혹한기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뛰어난 기갑 장비를 갖춘 독일군은 공세 당일 아르덴을 돌파하여 정신이 빠져 우왕좌왕하는 미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하였다.
예상치 못한 독일의 불벼락에 연합군은 속절없이 붕괴되어 전선은 노르망디 상륙 후 처음으로 서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미군 선도부대가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돌파당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돌파의 선봉을 담당하고 있던 독일군의 최신 전차들은 미군들에게 엄청난 공포심을 유발하였다. 아무리 포격을 가해도 독일 전차들은 끄떡 없이 전진을 계속하였던 반면 미군 전차들은 독일의 공격에 차례대로 격파되어 나갔다.
그런데 안개 때문에 미군이 독일군의 선제공격을 눈치 채지는 못하였지만, 사실 독일도 도망가는 미군을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자욱한 안개는 독일의 돌격을 방해하는 양날의 칼이었다.
돌파의 선봉인 독일 중전차들은 연합군을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전투 종결 후 미군에게 노획된 쾨니히스 티거)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지만 이것은 전사에 기록된 독일의 마지막 전격전이었다. 12월 16일~17일의 양 일간 눈이 쌓인 전나무 숲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30만의 독일군 정예 부대는 순식간 돌파구 확대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미군은 1940년의 프랑스군과 전혀 달랐다. 불의의 습격을 당하여 밀리고는 있었지만 도망가지 않고 독일의 전진을 필사적으로 막기 시작한 것이었다.
돌파구가 확대됨과 동시에 이를 막기 위한 연합군의 움직임도 부산해졌다.
특히 미 18군단 북부의 미 5군단이 돌파구 확대를 틀어막는데 성공하면서 디트리히의 제6친위기갑군의 진격이 서서히 둔화되고 있었고 이런 추세라면 리에지 조기점령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전선의 좌익을 담당하던 만토이펠의 제5기갑군이 앞으로 치닫고 있었고 정면에 있던 미 8군단은 속수무책으로 붕괴되면서 서서히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다. 12월 20일 만토이펠의 돌격모습은 1940년 독일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 같았다.
디트리히가 주춤거리자 만토이펠의 제5기갑군이 진격속도를 더하였다.
B집단군 사령관 모델은 주공을 제5기갑군으로 변경하고 예비대를 집중시켰다. 미군의 정예 101공수사단이 바스토뉴에 고립되고 독일의 선도 기갑부대는 디낭을 향하여 쾌속으로 돌격하였다.
미군은 순식간 99사단, 106사단, 28사단, 7기갑사단이 전멸되는 치욕을 맞보아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쾌속 진군을 보였음에도 독일은 1940년과 같은 무서운 뒷심은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1944년 12월, 독일군은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첫째, 공세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예비대가 절대 부족하였다. 제1선의 돌파를 담당한 디트리히와 만토이펠의 부대 외에 사실상 후속하여 전선을 인계받을 부대들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즉, 공격 도중 최전선의 돌격부대가 소모되면 이를 대체하거나 충원 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인데, 사실 이런 점은 작전이전부터 독일군 지휘부가 가장 염려하던 것이었다.
최전선의 정예들도 예비대의 지원이 없으면 공격력이 둔화 될 수밖에 없다.
둘째, 심각한 연료부족 때문에 독일군의 특기인 저돌적인 기동이 제한을 받고 있었다. 독일의 중전차는 돌파의 핵이었지만, 기름 먹는 하마들었는데 독일에게는 이들을 먹여 살릴 충분한 연료가 없었다.
독일은 1주일 정도 공격을 유지 할 만큼의 비축 분밖에 없었고 결국 작전시간의 경과는 독일에게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에는 미군 유류를 탈취하기로 예정되었지만 미군은 미리 이를 파괴하여 노획을 차단하였다.
많은 수가 연료부족으로 유기되었다.
셋째, 미군의 대응전략이다. 미군은 1940년 허무하게 종말을 고한 프랑스와 영국 원정대의 전철을 되밟지 않았다. 미군은 충분한 예비가 있었고 상황에 맞게 즉응태세를 갖추어 부대의 이동전개에 들어갔다.
콜린스가 지휘한 북부의 미 7군단이 뮤즈강 동쪽으로 신속히 전개하여 위기에 처한 미 18군단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무려 700킬로미터를 달려온 패튼이 지휘한 미 제3군의 이동 전개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돌파구를 틀어막기 위한 미군의 응전과 기동은 눈부셨다.
특히 전략요충지 바스토뉴를 사수하며 보여준 미 101공수사단의 분투는 포위만 당하면 쉽게 항복하던 이전의 프랑스, 영국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군대였다.
결국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독일의 진격은 둔화되고 시간은 흘러갔다. 이제 히틀러는 초조해졌고 돌파의 주역이었던 독일군 기갑부대도 미군이 후퇴 할 때 미처 유기하지 못한 기름에 겨우 의지할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미군의 결사적인 응전에 독일은 놀랐다.
12월 23일이 되자 저기압이 물러가고 안개가 걷히며 하늘은 쾌청해졌다. 또한 좋아진 시계와 더불어 찬바람과 함께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땅바닥은 단단하게 굳어져 버렸다.
연합군은 이날부터 27일까지 하루에 무려 5,000소티 이상의 항공기를 동원해 독일군에게 폭탄의 비를 퍼부었다. 26일에 패튼이 101공수사단을 구출해내었고 오히려 앞으로 깊숙이 진격한 만토이펠의 부대가 절단 될 위기에 빠져버렸다.
독일은 하늘에서 불벼락을 맞았다.
1945년 1월 5일, 선두에 서있어서 이제는 역으로 고립 될 위기에 처한 만토이펠의 제5기갑군은 전략적 후퇴를 단행하였고 이로써 독일군의 돌출부는 붕괴되었으며 히틀러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독일은 전차 600대, 항공기 1,600기를 잃거나 유기 할 수밖에 없었고 7만 명의 사상자와 5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은 그 당시 독일이 가졌던 마지막 전력이었다.
독일은 한 달 동안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결국 패망을 앞당겼다.
독일이 이러한 무모한 마지막 도박으로 얻은 것은 연합군이 원래 계획한 독일 본토로의 진격을 6주 정도 연기시켰다는 점이라고는 하나, 가용자원을 단 한 번의 도박에 몽땅 날려버려 오히려 패망을 6개월 앞당기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즉 히틀러가 마지막 도박으로 도박을 벌였든 아니면 쓸데없는 만용을 부렸든 결과는 사실 처음부터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전쟁터에서 서로를 구호하는 이런 낭만적인 모습을 보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오히려 이 기간 중 포로학살과 같은 범죄행위도 스스럼없이 벌어졌다.
분명히 패전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정치적으로 전쟁을 종결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아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길을 외면하고 히틀러 자신의 자존심만을 위하여 쓸데없는 확전을 전개함으로써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결국 역사에는 고집불통 독재자의 무모한 도박으로 기록되어졌다.
사실 유사 이래 국민들이 나서서 전쟁을 반겼던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전쟁은 소수의 위정자의 의지에 의해 개시되고 판을 벌려왔지만 고통은 항상 보통 국민들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키고 판을 키울 줄만 알았지, 자신을 희생하면서 전쟁을 종결하지는 못한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역사에는 영원히 악인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첫댓글 그시절에 날고 기는 사람들인데
아무튼 나쁜놈은
항상많어